전봉준
[clearfix]
1. 소개
全琫準 [3]
1855년 1월 10일~1895년 4월 24일[4]
조선 후기 동학 농민 혁명의 지도자. 일명 '녹두 장군.'[5]
전봉준은 천안 전씨 시조 전섭(全聶)[6] 의 53세손이다. 서당이나 한약방 등을 운영한 것을 보면 조선 말기에 흔했던 몰락한 중인 또는 양반 집안으로 보인다.[7] 전봉준의 부친은 1827년생으로 창혁(彰赫), 형호(亨鎬), 승록(承祿) 등의 이름과 함께 족보명은 기창(基昶)으로 나오고(세간에 알려진 이름은 창혁), 모친은 1821년생으로 언양(彦陽) 김씨(金氏)라고 되어 있다.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은 고창 당촌 마을에서 서당 훈장, 고부 마을에서 향교의 장의를 했다고 한다. 촌로들에 따르면 전창혁은 장의가 아니라 동리의 일을 보는 사람(지금의 이장)이었다고도 하였다. 전봉준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다른 아이들처럼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유난히 키가 작아 5척(약 152cm)에 불과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녹두(綠豆)[8] 라는 별명을 들었는데 가장 유명한 별명인 '녹두 장군'도 여기서 유래한 것.
2. 생애
젊었을 때의 가정 생활은 상당히 곤궁했다.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에 보면 땅은 논밭을 다 합쳐 세 마지기(약 6백 평(0.19ha)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당시 빈농층이 소유했던 평균적인 수준이기는 하나 한 가족이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면적이다.
고창 당촌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전봉준은 가세가 기울어짐에 따라 순창, 임실 등을 떠돌다가 30살 즈음 고부 마을(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소재)로 들어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약방을 차려 한의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풍수지리를 보거나 사람들의 길흉사에 날을 잡아주기도 했으며 편지를 대필해 주기도 했다.
동학에는 30대에 들어가 접주가 되었고 1890년대 초반에는 운현궁에 있으면서 2년 남짓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던 적도 있다. 이에 연이 닿아 동학농민운동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이 밀사를 보내어 전봉준과 밀통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9]
이 무렵 유명한 탐관오리였던 고부군수 조병갑[10] 의 횡포가 극심했다.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하고 부조금으로 2천냥을 거둬오라는 요구에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마을 대표로 나서 항의하다가 화가 치민 조병갑한테 곤장을 맞아 죽는 일이 벌어진다. 이후에도 조병갑의 횡포는 계속되어 자기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우는 비용을 백성들에게 전가했으며 '만석보'라는 이름의 저수지를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건설하고 사용료도 백성들에게 강제로 징수하여 착취하고 지방 토호들에게도 돈을 뺴앗는 등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결국 분노한 그는 이때부터 나라를 개혁하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고 1894년 농민 1천여 명을 이끌어 민란을 일으켰으며 만석보를 헐어 버리고 관아를 습격해 빼앗긴 곡식을 되찾아 농민들에게 나눠 주었다[11] .
조선 정부에서는 부랴부랴 조병갑 등의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이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한 후 안핵사 이용태를 보내 잘못을 시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태를 추스르기 위하여 파견된 이용태 또한 극심한 횡포를 부렸는데 전에 왔던 새로운 군수 박원명은 할 수 있었던 일이 없어 별 도움은 안 되었어도 농민들을 달래주기라도 했지만 이용태는 전혀 아니었으며 농민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행패를 부렸다.
이에 분노한 전봉준은 1894년 3월 각 지역의 동학 접주에게 글을 보내고 손화중, 김개남 등과 함께 동학 교도와 농민 1만여 명을 모아서 동학 농민군을 조직하여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켜 안핵사 이용태를 도주하게 만들었다. 이때 동학 교도 중심의 북접은 폭력에 반대하여[12] 동학 농민군에 호응하지 않았다.
이후 동학 농민군은 승승장구하여 전주성을 점령하는 등 세력이 확대되었고 깜짝 놀란 조선 조정과 전주 화약을 맺으면서 잠시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이 파병을 요청한 청나라군과 톈진 조약을 핑계로 다시 파병한 일본군이 이미 조선 땅에 들어온 뒤였고 이들이 청일전쟁을 벌이면서 잠시 동안 이어진 평화는 깨지고 만다.[13]
청일전쟁 도중 일본이 군대를 보내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위협하면서 갑오개혁을 시행하자 전봉준은 '척왜근왕'을 외치며 동학 농민군을 모았다. 북접도 이에 합류하면서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북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에서 기관총을 비롯한 근대 무기와 월등한 조직력을 갖춘 조선 관군과 일본군에게 대패했고(우금치 전투) 몇 번 더 패전을 당한 끝에 순창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은 군대를 모아 재기하려고 하였으나 순창군 피로리에서 만난 옛 부하 김경천(金敬天)[14][15] 의 밀고로 체포되어 도성으로 압송되었고 재판[16] 후 동학동민운동을 지도했던 같은 지도자급의 동지인 손화중[17] , 최경선[18] , 성두환[19] , 김덕명[20] 과 함께 1895년 3월 29일(음력) 사형을 선고받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30일 새벽 2시 한양 무악재 아래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쳤다.[21]
오랫동안 동학 농민군 강경파 지도자였던 김개남의 효수된 사진이 전봉준의 시신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22] 전봉준의 유일한 사진은 이 문서에 첨부된 사진으로 체포되어 압송되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은 것이다. 이후 교수형에 처해진 후 참수되어 효수형에 처해졌다.[23]
3. 말말말
노래에 대해 색다른 해석도 존재하는데 흔히 전봉준을 찬양하기 위해 백성들이 지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전봉준을 위협에 빠뜨리려는 세력들이 지어서 조선의 기득권층한테 바쳤다는 주장도 있다. 노래에서 언급된 파랑새를 한자로 풀면 팔왕(전봉준의 성씨인 전을 파자한 것)이 되며 전봉준이 사실은 고려 왕족의 후손인 왕씨였는데 조선 왕조의 탄압을 피해서 살아남고자 성을 전씨로 바꾼 사람의 후손이며 전봉준이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고려 왕조를 다시 세우겠다는 음모가 담겨 있다는 뜻이어서 숨은 의미를 알아차리고 조선 왕조가 전봉준과 동학을 혹독하게 탄압했다는 해석이다.녹두꽃 드라마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우리는 제대로 알고나 있을까?'''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파랑새>
전봉준의 봉기와 실패는 조선 백성들의 기억에 남았고 노래를 불렀는데 이 민요가 파랑새이다. 호남 지방에서는 광복 후에도 자주 불려졌다고 한다.들어보기[24]
4. 여담
[image]
- 교과서 등에 자주 나오는 대표적인 전봉준의 사진.[25] 1895년 2월 28일 즈음 일본 영사관에서 취조를 받고 조선의 법무아문으로 이감될 때에 찍힌 사진이다. 사진에서 가마에 타고 있는데 이유가 체포될 때 다리를 몽둥이에 세게 맞아 걷기가 힘들 정도로 다쳤기 때문이다. 후대에서는 사진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상투머리의 대명사가 되었다. 아기들의 윗올림머리나 여성들의 소위 똥머리를 전봉준 스타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로 유명한 안도현 시인은 사진을 보고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안도현 시인의 등단 작품이다.
"사람은 어딜 가나 다 같은 사람이지만, 초목과도 같이 땅에 그 뿌리를 두는 까닭에 자기 땅을 떠나면 사람이 바뀌거나 시들고 마는 법. 나는 죽는 날까지 조선의 농민으로 살고 싶네. 그런데 젊은이, 아까 그 이야기 말이네만 '''나라의 이득이나 겨레의 형편을 넘어서는 도리가 있음을 자네는 믿는가?'''[26]
"(카노:"믿습니다")
"'''나도 믿네. 물론'''"
- 일본 만화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왕도의 개>에서 등장한 전봉준. 위 장면은 왕도의 개 4권에 나오는 장면으로 동학농민운동도 작중에서 묘사된다. 전반적으로 동학농민운동 자체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고 전봉준 역시 구시대적 충효 윤리에 얽매인 감이 있지만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세상 물정을 모르지도 않는 대인배로 그려진다. 주인공인 카노에게 '반제국주의'를 눈뜨게 했다는 점에서 사상적으로 김옥균 다음으로 영향을 끼쳤다고도 볼 수 있다.[27]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바뀐 역사의 혜택을 보았고 원래 역사보다 훨씬 일찍 일어난[28] 1차 세계대전이 터질 즈음에 학생으로 공부하던 도중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기류에 휘말려 학업을 중단하고 자원 입대했다가 고종의 눈에 들어 고종의 호위 무사로 출세한다. 다만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자연사 박물관에서 인디언 가죽으로 만든 동상을 보고 기겁하게 되고 아버지로부터 들은 '강국의 강군은 도적이나 다름없다. 이 나라가 지을 죄는 상이 명할 것이고, 군이 따를 것이며, 관이 뒤를 봐줄 것인데 너는 거기에 들어갈 필요가 없지 않았느냐'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이후 근위대장 겸 고종의 최측근이 되고 하나의 법도가 세상을 아울러서 국가를 단죄할 수 있는 관아가 만들어진다면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지만 본인도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 애초에 이 세계관에서는 벨 에포크조차 없고 주인공인 고종만 해도 즉위 10년도 안 됐는데 1번의 세계대전을 포함해 전쟁을 4번이나 치러야 했고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러시아-오스만 튀르크 전쟁, 페르시아 전쟁, 시베리아 국지전, 러시아 내전, 영불 전쟁, 미국의 캐나다 침공으로 촉발된 2차 미영 전쟁 등 전쟁이 끊이지를 않는 세상이다. 1~2년에 1번씩 전쟁이 터지는데다 최초의 참호전인 조러전쟁과 이게 본격적으로 발전한 파리 방어전 이후에는 전쟁만 나면 참호전 내지는 유격전이 벌어지는 판이라 국가 연합을 통한 평화의 유지가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천주교 신자로 베르뇌 추기경[29] 에게 큰 감명을 받아 자주 찾아가다가 세례를 받았다.
-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전봉준 장군 유적 정화 사업을 지시해 관련 사적지에 거창한 기념비들이 들어선걸 두고 혹자는 같은 전씨 가문의 장군이라는 부분에서 연결점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전봉준의 본관인 천안 전씨와 전두환의 본관인 완산 전씨는 뿌리는 같을지언정 갈라진지 천 년이 넘는 남남이나 마찬가지 씨족이다.
- 전봉준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의외로 없다. 본인의 자료가 남아있는게 없고 가계에 관한 1차 사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1차 재판 기록에서는 부인과 2남 2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아들들은 전부 후처 남평 이씨 이문기(李文琦)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고 딸들은 전부 1851년 8월 16일에 태어나서 1877년 4월 24일에 죽은 전처 여산 송씨 송두옥(宋斗玉)의 딸[30] 사이에서 태어났다. 장남 전용규는 후손 없이 사망, 차남 전용현은 행방불명이 되어 남계 후손이 모두 단절된 줄 알았으나 전용현이 자신의 이름을 바꾼채 족보와 호적도 은폐하여 숨어 지내면서 대를 이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계 후손으로는 장녀 전옥례는 아들 둘, 차녀 전성녀는 딸 하나를 뒀다고 알려져 있다. 전옥례는 1963년 갑오 동학 혁명제가 열리자 세상에 전봉준의 딸이라고 나타났으며 1970년 사망했다. 2004년 특별법 제정에 따라 유족이라는 사람들 4~5명이 유족 신청을 했으나 전봉준의 시신이 수습되지 않아 유전자 감식이 불가능하고 관련 증빙 자료가 없어 인정받지 못했다. 확실한 후손들이 남아 있어 유족으로 지정되고 제사도 받고 있는 다른 동학 간부들과 달리 전봉준은 후손이 불명확하여 천안 전씨 종친회에서 1954년 제사를 대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전봉준의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별도로 제사를 지내고 있기는 하다.
- 관군은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농민군 간부들을 사형시킨 뒤 시신들을 유족들에게 넘기지 않고 그냥 매장했기에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한양에서 사형당한 전봉준의 시신은 훗날 (구, 한남) 단국대학교 가 세워진 야산에 버려졌다고 한다. 김개남의 시신은 갈기갈기 찢어져 전라북도 임실군 학암리 야산에 버려졌다고 전해지며 손화중과 최경선 등의 경우는 유해의 행방이 묘연한데 관군이 처형 후 그대로 암매장한 걸로 추정된다. 이런 까닭에 정읍시에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등의 무덤이 있지만 모두 시신이 없는 가묘다. 김개남의 경우 매장되었다고 알려진 전라북도 임실군 학암리 야산 일대에서 2010년과 2011년 시신을 찾기 위해 발굴 작업을 벌였지만 찾을 수 없었다. 들짐승에게 먹히거나 해서 뼈도 남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 2016년 9월부터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특수법인인 동학농민혁명 기념 재단이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비봉리에 있는 전봉준의 추정 묘역을 발굴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곳은 주민들 사이에 전봉준 장군의 묘라고 전해져 왔고 30여년 전 '將軍天安全公之墓'(장군천안전공지묘)라고 쓰여진 1미터 높이의 비석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한다.[31] 그러나 조사 결과 17세기의 회곽묘 구조임이 밝혀져서 전봉준의 묘는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 2018년 4월 2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영풍문고 앞(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26-1번지)에 전봉준의 청동 좌상이 세워졌는데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돼 수감되었던 장소인 전옥서가 있던 자리라 한다. 동상은 충북대학교 명예 교수인 김수현이 제작했다.[32]
- 2021년2월28일 전라북도 정읍 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동상이 철거됐다. 조각가가 머리는 상투를 튼 끌려가는 모습이지만 몸 부분은 창조해서 만들어서 어색한대다가 제작자가 친일파인 김경승[33] 이기 때문에 후손과 민족과 역사 앞에 가하는 2차 가해라고 생각되어 철거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 조형물을 만들지 문화재청과 대안을 논의하기로 했다고 한다.
5. 관련 문서
[1] 5척. 키가 작아서 녹두장군이였다는 말도 있다..여담이지만 조선시대 남자 평균 키는 161cm로 동아시아에서도 제법 큰키였다 현대로 치면 남자키 164-165cm 정도의 키다. [2] 출처: 《천안전씨족보》 전병호편.[3] 전병호(全炳鎬), 전철로(全鐵爐)라는 기록도 있다.[4] 1980년대 교과서나 위인전에서는 1854년생으로 표기되어 있기도 한데 음력 기준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5] 키가 작아서 녹두장군으로 불렸다고 한다.[6] 일본에 문물을 전해주며 깊은 관계를 맺었던 백제의 초창기 개국공신이며 천안 전씨 집안은 백제 최후의 국보급 불상을 남긴 흔치 않은 백제인의 후손이다.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하지 않고 남아 있다가 당한 일을 생각하면 이런 아이러니도 없다.[7] 평범한 농민 출신이면 학식이 부족해서 서당 훈장 노릇을 하기가 힘들었다.[8] 콩과의 작물. 요즘에도 한국에서 키가 작은 사람을 '쥐콩만하다'고 놀리기도 하는데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9] 전봉준은 재판 과정에서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를 완강히 부인했는데 흥선대원군을 보호하려고 한 건지는 알 수 없다.[10] 양주 조씨 가문으로 영의정을 지낸 백부 조두순의 빽을 믿고 날뛰었다.[11] 정작 모든 일의 원흉인 조병갑은 달아난 상태라 잡지 못했다. 그는 1898년 최시형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도 하였다.[12] 여기에는 교주 최제우의 명예 회복에 누가 될 것을 우려한 까닭도 있다.[13] 얼마 전 발굴된 '일청 전쟁 선전 조칙 초안'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이때 청나라뿐 아니라 조선도 선전 포고 대상에 포함하고 있었다는게 밝혀졌다.[14] 연해주 빨치산 부대에서 독립 운동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김경천(金擎天) 장군과 헷갈리지 말자. 시대도 다르고 한자도 다르다.[15] '녹두 전봉준 평전'에 따르면 전봉준의 젊은 시절에 어느 스님이 '장차 백만 대군을 통솔할 상이다. 다만 경천을 조심하라'라고 했는데 결국 스님의 예언이 맞았다는 야사가 있다.[16] 재판장이 갑신정변의 주역 서광범이었다.[17] (1861~1895) 전라북도 정읍 출생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이름은 손정식(孫正植), 자는 화중(華仲·和中·化中), 호는 초산(楚山). 언제부터 접주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892년 벌어진 전라북도 삼례의 교조 신원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인해서 접주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1894년 동학군의 전주 화약 후에는 전라남도 나주 지방에서 폐정 개혁을 주도하였고 우금치 전투가 끝나고 전라북도 흥덕(현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에서 붙잡혔다.[18] (1859~1895) 본명은 영창(永昌), 자는 경선(卿宣). 동학 농민군 영솔장으로 1893년 11월 고부 인근의 동학 접주들이 중심이 되어 농민 봉기를 준비했던 사발통문(沙鉢通文) 거사 계획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고부 민란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우금치 전투 패배 이후 마지막 전투인 태인 전투에서 7천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2차 봉기에 참여하였고 12월 전라남도 동복현 벽성에서 농민군의 모집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된다.[19] (1845~1895)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약한 지도자로 충청도 청풍(현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송계리 출신. 1893년 청풍 대접주로 동학에 가담하여 1894년 7월 충청도 단양과 제천 지역을 대표하는 동학 집강에 임명되어 수많은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1894년 8월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등 폐정 개혁 활동을 벌였고 우금치 전투 이후 강원도 지역에서 영월과 평창의 농민군과 연합해 10월 15일 정선을 점령하고 평창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20] (1845.10.29~1895.4.23)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본관은 언양(彦陽), 초명은 김준상(金峻相), 자는 덕명(德明), 호는 용계(龍溪). 손화중에 버금가는 동학 농민군의 2인자로써 42세 때인 1886년 동학에 입문하여 최시형의 제자가 되었으며 삼례 집회에서 교주 신원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우금치 전투 이후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장흥리 안정사동으로 피신했다가 체포되었다.[21] 갑오개혁 이후였고 민간 범죄에 대해서는 교수형만 가능하도록 했기 때문에 각본 재판이라고 해도 사형은 서양식 교수형으로만 집행해야 했다. 이후 정식 재판에 넘겨진 동학 지도자들은 전원 교수형에 처해진다.[22] 한 때 위인전에도 버젓이 사진이 실려 있었다. 출판사(특히 금성출판사)에 따라 김개남의 생전 모습도 같이 실려 있는 것도 함정.[23] 전봉준이 사형 집행이 되기 전에 죽력고를 마시게 해달라고 요구했었는데 죽력고를 마시고 기력을 회복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당당하게 요구해서 일본군들이 쫄았다고 한다. 전봉준의 사형은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는데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교수형이 집행된 사례였다.[24] 1970년대에 녹음해서 컴퓨터로 옮긴 것. 녹음 또는 파일 변환 때 문제가 있었는지 소리를 크게 해놔야 겨우 들린다.[25] 한동안 전봉준이 찍힌 유일한 사진으로 알려졌으나 2015년에 새로운 사진이 발견되었다. 기존에 알려진 사진과 불과 몇 초 간격으로 찍힌 사진이라 큰 차이는 없지만 전봉준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진 것을 볼 수 있다 [26] 왕도의 개 4권에서 볼 수 있는 장면. 피신을 권유하는 주인공 카노의 말을 거절하며 한 대사다.[27] 일본 극우들은 당시 일본군의 침략을 '동학 폭동을 막고자 정당하게 개입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데 동학농민운동을 인용하는 수준이나 이 만화는 극우 내지 혐한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애초에 작가부터 좌파 운동권 출신으로 일본의 급격한 팽창 정책과 제국주의에 비판적이다. 동학농민운동 중에 일본 낭인들 중 급진적 이상주의자들의 단체인 '천우협'이 동학 농민군에게 근대적 전술 훈련과 무기를 지원하겠다고 접촉한 적이 있고 훗날 인연을 바탕으로 동학 지도자들 중 일부가 친일파로 변해 일진회에 참가하게 되는 뒷사정이 있다.[28] 벨 에포크가 보불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의 전사로 인한 나비 효과로 요단강 너머로 날아갔고 민족주의 기류에 휘말린 전쟁의 확전으로 오스트리아, 러시아, 오스만 튀르크, 덴마크, 에스파냐, 포르투갈, 영국, 대한제국 등이 줄줄이 참전해 극동, 유럽, 아프리카, 중동 전체를 휩쓰는 1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었다.[29] 원래 역사에서 순교했던 베르뇌 주교로 조선이 개항한 뒤 천주교 신자를 크게 늘렸을 뿐 아니라 대한제국 황실과 좋은 관계를 맺고 2황자 의친왕 이강이 유아 세례까지 받는 등 승승장구해 교세가 명동 대성당을 황실 후원으로 지을 정도로 천주교 교세를 급성장시킨 공로로 조선 교구 추기경이 되었다. 영국 왕실의 빅토리아 멜리타 공주와 의친왕 이강의 결혼식 때 주례를 서주기까지 할 정도.[30] 묘는 전라북도 정읍시 산내면에 있다.[31] 동학혁명재단 전봉준 추정 묘역 발굴 조사.[32] 서울 영풍문고 앞에 전봉준 동상 건립.[33] 후에 백범김구선생의 동상과 부산의 이순신장군 동상등을 만들기는 했지만 평가는 여러가지 부분에서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