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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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94년 동학 농민 혁명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이 연합해 동학 농민군의 주력과 교전, 섬멸한 전투.
2. 배경
동학농민운동 1차 봉기는 동학 농민군이 선전해 전주성을 차지하기까지 했으나, 청군과 일본군이 개입하려고 하자 조정과 합의 하에 자진 해산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한양을 점령하고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게 했다. 또한 자주국 선언을 강요하고 고종의 이름을 빌어 조선의 모든 청군이 떠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했는데, 이는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조선을 장악하여 입맛대로 개혁시키기 위하여 경복궁에 침입하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며 남산에 대포를 설치하는 등, 갑오개혁이라고 '개혁'을 빙자한 내정간섭을 일삼자, 동학 농민군은 이에 분노해 일본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이때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의 중심이라고 할 만한 북접은 전봉준을 부정하였지만[1]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협력을 선언하고 손병희를 지휘관으로 삼아 합류하였다. 이렇게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지방의 남접군[2] 과 손병희 등이 이끄는 경기 남부, 충청 지방의 북접군이 논산에서 만나 2만에 이르는 대군[3] 이 결집했고 이들은 한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고 있었다. 이에 정부군과 일본군 육군이 연합하여 농민군을 진압할 준비를 했다.
우금치에 포진한 관군 병력 주력은 공주 방면을 담당한 순무영과 경리청 병력 3500명 가운데 2개 대대 1천여 명이었고, 여기에 일본 육군 후비[4] 보병 19대대 2중대 병력 200명과 일본 육군의 훈련을 받고 이들이 지휘하는 관군 최정예 교도중대 350명을 증강했다. 이때 일본 육군은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과 자체 개발한 무라타 소총을 썼고 관군 역시 레밍턴 롤링블럭과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 등을 썼다.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일본 연합군은 관군 경군 병력이 주력이었으며 일본군은 후비대대라는 특성상 중화기 보유량이 전무했다. 전투에 동원된 개틀링 기관포와 야포는 모두 관군이 가져온 것이었다. 다만 전투 지휘를 주도한 사람은 일본 육군 후비 보병 중대와 동행한 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육군 보병소좌였다.
3. 전개
공주로 진격한 동학 농민군은 공주 주변에서 관군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동학 농민군은 맹렬하게 관군을 공격하여 관군이 살짝 후퇴한 사이 기습적으로 이인을 공격, 점령하여 공주 점령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한다.
한편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 육군은 우금치의 우측에 이두황의 부대를 배치했고, 좌측에는 이규태의 부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우금치 최고봉인 견준봉에는 일본 육군 200명을 배치했다. 그리고 전날 이인 전투에서 패한 군사를 이두황의 부대와 견준봉의 일본 육군 부대 사이에 배치했고, 이범호의 정예 교도 중대 350명을 이규태의 부대에 배치하여 전력을 증강했다.
우금치를 공격하기 시작한 동학 농민군은 우선 우금치 고개의 양쪽 능선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는 관군이 배치되지 않았기에, 농민군은 손쉽게 능선을 점령한다. 그리고 관군-일본군 방어선에 교란 공격을 시도했지만, 관군과 일본 육군은 최대한 사격을 자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양 능선을 점령한 농민군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방어선에 밀집 대형으로 돌격했다. 정오쯤 되어 동학 농민군의 주력은 방어선 공격에 거의 투입되었고 이에 맞서 관군의 개틀링 기관총과 크루프제 야포가 불을 뿜었다. 막강한 화력에 농민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동학 농민군은 50회에 가까운 공세를 퍼부었지만 관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농민군은 쓸려나갈 뿐이었다. 결국 동학 농민군은 공세종말점에 다다라 더 이상 공세를 취할 수 없게 되었다.
하술하듯 일본군과 관군은 먼 거리에서 사격을 하는데도 동학 농민군에게 연달아 타격을 주는 데 성공했다. 이는 무기부터가 동학 농민군의 화승총보다 장거리 사격과 연속 사격이 가능한 최신식 소총들인 데다, 기존 밀집 대형과 달리 산개 대형과 엎드리는 자세/앉은 자세를 이용해 상대의 사격으로 받는 피해를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돌격이 실패하자 전봉준은 우금치 계곡을 크게 우회하여 관군을 측면 공격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농민군은 우금치 계곡을 우회하여 관군과 싸워 두리봉을 점령하고 공주로 진격하지만, 매복한 관군에 패하고 퇴로가 막혀 관군에게 공격당하다가 흩어져서 농민군 본대와 합류하지 못했다.
우금치 전투에서 살아남은 농민군은 3천 명에 불과했다. 이에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퇴각함으로써 우금치 전투는 동학농민군의 패배로 끝났다. '전투'라고 불러주긴 하지만 실제론 농민군 측에서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 해도 될 정도로 압도적인 패배였다.
4. 결말
동학 농민군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전투 종결 단계에서 전봉준 휘하에 남은 병력은 3천여 명에 불과했다. 일본군 - 관군은 우금치에 남아 있는 동학 농민군을 모두 패주시키면서 공주의 농민군을 제거하고 후비 보병 2중대장 모리오 마사이치(森尾雅一) 육군 보병대위가 인솔하는 관군 추격대 50명으로 하여금 전봉준을 추격하게 했다. 전봉준과 농민군은 논산으로 후퇴한 결과 밤 사이 다수의 낙오 및 탈영병이 발생, 동학농민군은 50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 전투에서 전봉준 장군의 주력 부대가 패하면서 우금치 전역의 농민군은 각개격파되어,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은 와해되고 만다. 이후 전봉준은 자신 휘하에 남아있던 농민군을 해산하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하여 순창 피노리에 피신해 있던 도중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인해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가 피노리 주민이 투척한 몽둥이에 다리를 얻어맞고 관군에게 붙잡혔고, 이듬해 4월에 교수형으로 처형당했다.[5]
남접의 또 다른 지도자였던 김개남은 임병찬의 밀고로 체포되어 그해 12월에 전라감사 이도재의 독단으로 인해 참수당했다. 그리고 또 다른 지도자인 손화중 역시 관군에게 붙잡혀 전봉준, 최경선, 성두환, 김덕명과 같은 날에 교수형을 당했다. 이들 이외에도 살아남은 잔여 농민군들은 1895년까지 관군과 일본군에 저항하다가 하나둘 전사하거나 체포된 이후에 사형 등 중형을 받았다. 동학농민운동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5. 동학농민군의 패전 원인
5.1. 전략 목표
농민군의 전략적 목표는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한성을 탈환하고 외세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또한 시기적으로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고, 급히 모은 병력에 대해 식량을 충분히 지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속전속결로 한성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공주는 충청감사가 위치한 도시로 공창을 비롯한 기관이 있던 곳이라 점령에 성공할 시 공주에 있는 식량 확보 및 동학 농민군의 영향력을 충청권에 미치게 할 수 있었고, 호남권과 한양을 잇는 교통의 교두보였던 관계로 전략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할 곳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관군과 일본군이 모를 리 없기에 당연히 공주 우금치에 병력을 배치시켜 농민군을 대비했다. 금강을 넘어 한양에 진군해야 하는 농민군 또한 이를 알면서도 공주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공주를 우회해서 한성을 공격하는 방안은 보병이 주력인 농민군 특성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5.2. 화력
관군·일본군에 비해 농민군은 화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관군 본대에 배치된 크루프제 야포, 개틀링 기관총에 더해 개인화기로 스나이퍼 소총 등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일본군과 달리 농민군은 조총과 소수의 관군 노획 화기로 무장했고, 그것조차 없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동학 농민군이 보유한 무기들의 사정거리는 당연히 짧았다. 당시 농민군이 보유한 조총의 사정거리는 겨우 100-400 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농민군 입장에선 신식 무기가 없었기에 죽창이나 조총, 창, 농기구들 등 재래식 무기가 결국 주력무기가 되었는데, 이런 무기들의 짧은 사거리를 보완하려면 밀집대형으로 가서 적을 밀어버리는 방법밖엔 없었다. 특히 조총은 무기 특성상 밀집대형과 전열보병 전술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전열보병 문서에 나오듯 조총, 즉 전장식 화승총을 제대로 써먹기 위해선 이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관군은 이러한 밀집대형을 제대로 카운터 칠 수 있는 개틀링 기관총을 다량 보유했으므로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관군·일본군의 총기류들은 조총이나 화승총보다 명백하게 긴 사정거리를 보유했으므로 귀찮게 접근전을 고려할 필요도 없이, 원거리에서 상대적으로 더 널널하게 동학 농민군을 쏴버릴 수 있었다. 볼트액션식 소총이었던 무라타 소총과 스나이더 소총의 사정거리가 최대 1.8 km. 이 수준까진 아니어도 0.8-1.4 km 정도가 평균적인 소총의 사정거리였으니, 관군과 일본군 가운데 사격 실력이 괜찮은 이라면 그 거리에서도 농민군을 명중시킬 수 있었다.
또한 후장식/볼트액션 소총류는 무기 특성상 전열 내의 군인들 간격을 어느 정도 벌린 채로 '''엎드려서''' 사격할 수 있었는데, 조총은 밀집대형으로 서서 쏴야 하는 구조라서 농민군은 자신들은 맞기 쉬우면서 상대를 맞히기는 어려운 난처한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전장식인 조총은 아무리 빨리 쏴도 1분당 겨우 2회를 쏠 수 있어서, 1분당 압도적 물량공세를 시전 가능한 개틀링이나 그보단 못해도 짧은 시간 안에 상대적으로 연사가 수월한 후장식/볼트액션 소총 저격을 당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이 보유했던 개틀링은 동학 농민군과 관군의 최초 접전이었던 1차 봉기 때와 달리 '''아주 잘 쓰였기에''' 밀집대형으로 몰려오는 동학 농민군들을 쉽게 표적으로 삼아 가히 양학을 할 수 있었다. 동학군 1차 봉기 때는 관군이 전술적 오판으로 패배하고 신식 무기인 개틀링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지만, 신식 무기에 대한 지식이 없고 추가적인 보급이 불가능한 농민군이 개틀링을 정확히 알고 이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동학군은 기껏 탈취한 개틀링의 이용처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대비하는데 실패했고, 그 결과 우금치 전투에서 개틀링을 향해 알아서 다가오는 살아있는 거대 과녁판이 되어줄 밀집대형으로 돌진했다가 결국 움직이는 과녁 신세가 되고 만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아프리카에서 '''개틀링 건에 의해 수많은 원시 부족들이 학살당했음을 생각하면''' 그보다 조금 더 나은 무기밖에 없던 농민군이 어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물론 농민군이 보유한 무기 상황을 생각해보면 개틀링 대처법을 알았다 한들 실천할 수가 없었다. 수십 년 뒤에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기관총 때문에 발생한 참호전 양상을 파훼하지 못해서 미군의 물량 대공세가 이어지기 전까지 교착상태에 빠졌다. 당시에 기관총으로 구축한 방어선은 가히 무적에 가까웠다. 20세기 유럽의 식민제국들도 하지 못한 것을 19세기 농민봉기군들이 무슨 수로 해낸단 말인가?
무기들의 화력과 사정거리도 문제였지만 관군·일본군의 무기보다 동학 농민군의 무기들, 특히 조총이나 화승총 등이 날씨를 제법 타는 것도 문제였다. 불을 붙인 다음에 쏘는 구식 총들의 구조상 날씨가 습하거나 하면 불이 잘 안 붙는다. 문제는 우금치 전투가 일어났던 시기가 진눈깨비도 내리는 시기였기에 습기와 진눈깨비를 막을 수 없었던 농민군 입장에선 그나마 있던 구식 화기마저 쓰기 불리해서 화력이 약해졌다. 반면, 단발식 소총류는 그냥 탄환만 갈아끼우면 되므로 날씨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런 사정들 덕분에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일본군 : 구식 무기로 무장한 동학 농민군 = 250 : 1, 혹은 500 : 1''' 이라는 말도 안 되는 화력 격차로 동학 농민군이 패배하고 말았다.
5.3. 전술
농민군 지도부는 좁은 우금치 계곡에 농민군 주력을 밀집대형으로 몰아 넣었다. 당연히 이런 밀집대형은 개틀링 기관포의 좋은 사냥감이 되었고, 농민군은 개틀링 기관총의 화력에 피하지도 못하고 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술을 마흔 - 쉰 번이나 되풀이하여 무의미한 소모를 늘려 종국에는 공세를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차라리 이런 상황이라면 당장 우금치를 포기하고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의 베트민이나 베트콩,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모잠비크와 앙골라, 기니비사우[6] 처럼 장기적 게릴라 전술을 이용해 맞섰다면 최소 밀렸을지는 언정 생존자라도 더 늘릴 수 있었겠지만, 농민군 지도부가 이를 택하지 않고 저런 밀집대형 전술을 고집한 이유가 있었다.[7]
- 지형의 불리함: 당시 고지에 해당하는 고갯마루는 이미 관군과 일본군이 점거한 상태였다. 동학농민군은 1 km에 달하는 오르막길을 아무런 엄페물 없이 내달려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즉 지리적 고지를 못 얻은 시점부터 이미 전술상으로 불리했다. 이후 관군과 일본군이 아직 점령하지 않았던 능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마저도 40~50차례에 걸친 축차투입 축차소모로 큰 전술적 패착을 둔 뒤라 별 의미가 없었다.
우금치는 소쿠리나 통발 모양에 가까운 지형이다. 동남쪽만 열리고 양쪽이 다 막힌 형태에 동서 폭이 800 m, 남북 폭이 1200 m이다. 이렇게 양 측면은 막치고 앞뒤만 트였는데, 그 상황에서 앞뒤 기준으로 가장 먼 거리가 1200m 정도 되는 지형 안에서라면 입출구 언저리에만 있어도 충분히 소총의 사정거리에 들어간다. 당시 농민군은 그 1200 m보다 더 안쪽에 들어와 그 계곡 안에 밀집대형을 이뤄 돌격했는데 오판이었다. 그렇게 4-50번씩이나 밀집대형을 유지한 채 제파공격을 반복하면서 인력은 인력대로 낭비하고, 안 그래도 숫자 외엔 믿을 게 별로 없는 전력을 효과적으로 쓰지 못했다. 이러다보니 안 그래도 밀집대형을 상대하기에 유리한 개틀링을 보유한 관군·일본군 입장에서 농민군을 상대하기에 더욱 유리해졌다.
- 전술 지식 부재: 농민군은 지도부를 포함한 절대다수가 전문 군인 출신이 아니었다. 특히 신식 무기가 이미 보급된 시점에서 이를 배운 뒤 나온 전문 군인이 아니라 당연히 개틀링이나 신식 소총류의 자세한 정보나 대처법을 몰랐다. 그러다보니 밀집대형으로 화력을 집중해서 정면돌파하는 구식전술만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군 입장에선 분산될수록 화력이 떨어지는 무기로 무장했으니 구식 전술로 치자면 밀어붙이는게 더 유리했지만, 언덕에 설치한 관군과 일본군의 기관총 앞에서는 과녁에 불과했다. 또한 개틀링의 고화력에 대비해 우금치 전투 고갯길 좌우의 경사로 등의 개틀링 화력의 사각지대를 찾고 이를 택해 몰래 이동한다는 전술도 쓰지 않았다.[8][9][10] 다만 신무기에 발맞추지 못한 전술로 망하거나 대량의 희생자를 내는 경우는 근대식 총포가 개발된 서양권에서조차 남북전쟁 때 부터 겪은 일이며 기관총 진지를 제대로 극복하기 시작한건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쯤 가서야 전술, 무기, 과학의 발전으로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을 바꿔 말하면 당시 최강이었던 서양 여러 국가들의 정규군도 당대에 못 해내고 동학 농민 운동이 진압된 지 20년이 넘어서야 해낸 일을 고작 동아시아 국가의 일개 농민군의 원시적인 무장으로는 애초에 어림도 없던 소리라는 것이다.
상술했듯이 전봉준으로 대표되는 농민군 지도부가 군대 지휘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부족했던 와중에, 1차 봉기 때 상대적으로 허술하기 그지 없었던 관군과의 접전에서 밀집대형 공격으로 이겨서 신식 무기들과 개틀링 등을 노획한 경험이 있다보니 지도부는 이를 쉽게 승리의 전략으로 믿어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즉 이 시점에서 동학군 지도부는 한 번 승리했던 전법을 다시금 시도하는, 초보적인 지휘관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게다가 상대는 이전의 관군이 아니었다. 압도적으로 농민군에겐 불리한 신식 무기를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도 제대로 숙지한 관군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런 전술이 초기 접전에서부터 손해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지도부가 전략 철회 시도조차 하지 않고 우금치에서 전투를 벌인 이유가 있었다.- 먼저 농민군의 상황도 악화되어서 이대로 물러났다간 사기도 잃고 죽도 밥도 안 되니 성급하고 무모하게나마 우금치 돌파를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농민군 측의 수적 우세 때문에 피해가 매우 미미한 관군과 일본군 내에서도 봄~여름이었다면 저 농민군을 상대하는게 어느 정도 힘들었다고 언급한 것이 기록으로 남을 정도였지만, 문제는 우금치 전투가 벌어진 시기는 겨울이었다. 그러다보니 추수 문제를 농민들이 신경쓸 이유는 없었으나 부실한 화력 + 정규군인 적측에 비해 부실하고 미비한 보급 체계와 지원 속에서 추위와 습기(눈)이라는 문제를 함께 끌어안은 채로 농민들이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는 농민군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 두 번째는 우금치만 돌파하는 데 성공하면 전략적 요충지인 공주에 닿을 수 있었기에 지도부는 다음을 기약하는 대신 무모하게나마 정면돌파를 감행해서라도 공주를 손에 넣으려고 욕심을 부렸다.[11]
결국 당시 동학 농민군 지도부의 신식 화기 관련 지식&전술 지식과 이를 잘 이용할 수 있는 숙련된 군대와의 교전 경험 부족 + 당시 지도부가 1차 봉기 때의 승리의 기억을 섣불리 자기화 기제로 작용시켜서 전술에 반영한 것 + 우금치 전투 당시 반드시 돌파를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직 내의 압박감과 조직 내 상황 악화로 인해 성급해진 지도부 + 우금치의 지리적 특성상 정면돌파를 해선 안 되는 상황인데도 지도부가 정면돌파를 욕심내게 만든 점이 모두 합쳐진 결과, 농민군은 우금치 정면돌파를 시도했고 패배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의화단의 도창불입 신화와 같이 부적만 있으면 총알을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이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제국주의 군대와 싸우던 여러 식민지에서 흔하게 보이던 모습이기도 하다. 당장 동학 농민군만 해도 각종 미신 행위를 동원하면서 전투를 치렀고, 여러 식민지에서도 미신을 반영한 주술적 행위를 시전하거나 주술적 물건을 두른 채로 사기를 올려 전투에 참여한 전적이 많다. 물론 상대(제국주의 군대)와의 압도적인 화력차 때문에 보통 실패한 케이스가 더 많지만,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서라도 아예 쓸모없는 행위는 아니다.[12]
동학농민운동 이후 구한말 시기에 일어난 의병들의 경우 우금치 전투처럼 화력에 밀려 속절없이 패한 경우도 있지만, 지형을 잘 살려 게릴라전, 유격전 등의 전략을 택한 경우에는 뛰어난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전해산, 심남일, 신돌석 등이 이런 전술을 잘 구사하여 명성을 떨쳤지만 결국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리적 불리함과 일제의 적극적인 토벌 공세에 밀려 몰락하기에 이른다.
5.4. 참고자료
전투 분석 1
전투 분석 2
전투 분석 3[13]
전투 분석 4[14]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려 ‘주술의 힘’까지도 빌렸던, 시사저널
6. 참고 문헌
네이버 지식 백과
7. 여담
우금티 전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투 당시의 근대 국어는 현대 국어와 많은 부분에서 차이점이 있어 구개음화가 널리 사용되지 못하였는데[15] 이때문에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는 우금티로 불렸다가 현대 들어 구개음화가 정착되면서 구개음화를 적용해 우금치라고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드라마 녹두꽃에서는 당시 발음을 반영하여 '우금티'로 표기하였다.
1994년에 KBS1에서 방송된 동학동민운동 100주념 기념 다큐멘터리 극장에서 이 전투가 처음으로 영상화되었다. 나중에 이 장면은 후일 KBS2에서 2002년에 방영한 명성황후 102회에서 동학농민운동 장면이 나올때 이때 나온 전투씬과 함께 재편집되어 방영됐다.
2년뒤인 1996년에는 KBS1 TV에서 방송된 신봉승 원작의 대하드라마 찬란한 여명 97회에서 방송되었는데 고증오류가 많은것으로 추정되는 장면이 많이 보여졌다. 또한 이 장면의 일부를 자사의 프로그램인 역사스페셜에서 쓰기도 하였다.
2019년 7월 5일 방영된 녹두꽃 21회 (2회연속 편성으로는 41회~42회에 해당)에서 오래간만에 재연되었다. 극적 허용인지 고증 오류인지 관군의 역할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키는 역사왜곡이라 할 만한 모습으로 나왔다.
[1] 사실 처음에는 부정 수준이 아니라 남접군을 몰아내겠다고 출병까지 고려했다. 북접은 난이 정치색을 띄는 것을 경계하고, 특히 대원군과 결탁함을 탐탁치 않아 하였다. 이것을 막은 것은 남접이 생각보다 잘 싸웠기 때문이지, 일본과 문제가 벌어졌기 때문이 아니다.[2] 사실 본래 남접의 중심은 전봉준이 아니라 충청도의 서장옥이라는 사람이었다. 허나 이 시점에서 서장옥은 그저 전봉준의 부관 수준이 되어버렸다.[3] 혹자에 따라 7만에서 9만까지도 추산하기도 한다.[4] 현역이 아니라 재소집된 예비역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뜻한다.[5] 참고로 전봉준의 교수형은 한국 최초의 교수형 집행 사례가 되었다. 갑오개혁으로 참수 같은 전통적인 처형법이 금지되었기 때문.[6] 그래도 여기는 남아공의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군의 공세에 밀려 패전 직전까지 갔던 모잠비크, 앙골라와는 달리 포르투갈을 상대로 일으킨 독립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어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했다.[7] 이런 게릴라 전술은 민심에 기반하여 펼쳐야 하지만 전주화약 이후 얼치기 동학도들이 늘어나 동학의 이름으로 약탈이나 행패를 많이 부려서 3남 민심도 마냥 동학에게 호의적이진 않았다.[8] 장성 황룡촌 전투 전투에서 장태를 이동 엄폐물로 활용하여 관군의 개틀링을 무력화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관군은 겨우 300명이 고지 위에 있는 농민군 5천 명을 밑에서 화력으로 몰아붙이다 농민군이 고지에서 장태를 굴려 내려오면서 역습하자 화력이 상쇄되어 근접전을 강요받고 수적 열세로 패한 것으로, 관군·일본군이 고지 위에서 니가와를 시전한 우금치와는 상황이 정반대다.[9] 그리고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승리한 것은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전투 전의 배경이 좋았던 것 때문이다. 그,당시 관군은 기습을 했다지만 병력 수가 적다는 한계가 명확했는데다가 장병 개개인의 화기 숙련도조차 미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선 지휘관들은 이를 보완해줄 전술 행위, 하다못해 임기응변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따라서 동학 농민군이 반격을 시도하기 시작하자 관군의 전열이 와해되어 전투가 끝나는 경우가 장성 황룡촌 전투를 포함한 1차 봉기 내내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농민군에게 분명히 이득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승리들이 알고 보면 요행에 가까울 정도로 운빨이 심했다는 것을 동학 농민군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 했다.[10] 게다가 동학 농민군이 자신들의 승리가 요행이었음을 눈치 챌 기회가 없는 건 아니었다. 바로 전주성을 점령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관군이 그곳을 다시 탈환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공세를 가하자 성을 내주고 패주한 이후가 그 적기였다. 아무리 병법에 무식한 피지배층 출신들이 구성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동학 농민군이긴 하나 자신들은 숫자도 많은데다 관군보다가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한 곳에서 싸우기 때문에 꽤나 유리한 입장이란 것을 자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는데도 패배했다는 사실은 동학 농민군 수뇌부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할 사항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이 얻은 승리에만 만족한 것도 모자라서 그것들을 제대로 분석조차 하지 않은채 관군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만 불태우기만 했다. 물론 동학 농민군이 그 사실을 깨달아도 그들이 노획한 신무기조차 제대로 못 쓰고 있는 마당에 이 문제를 극복할 역량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사치인데다 전주성을 내준 이후 청일 양국의 개입이라는 초대형 사건에 대처하기 바쁜지라 자체적으로 깨달을 시간조차 없긴 했지만...[11] 겸사겸사 그 당시 동학 농민군의 입장상 우금치를 건너뛰고 다른 루트를 확보해 우회전술을 선택하며 장기전을 노리기도 힘들었다.[12] 현대 군대도 미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장병의 종교활동을 장려함으로써 전투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13] 주로 전술보다는 무기에 초점이 맞춰진 분석글이다.[14] 동학 농민군이 실패한 배경 중 외부적 배경 뿐만이 아니라 동학 조직 내부적 배경도 모두 설명하고 있는 분석글이다.[15] 문경새재의 '산불'''됴'''심' 표지판도 같은 맥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