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식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명식은 1880년 1월 15일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장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4년 개신교에 입교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 체결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안악에서 최광옥과 더불어 면학회(勉學會)를 조직해 청년들의 계몽사업과 함께 산업의 증진, 교육의 장려를 목적으로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면학회 주관으로 여름마다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에 하기사범강습소를 개설해 교원 양성에 힘썼다. 그리고 해서교육총회·연합운동회 등을 열어 신교육과 애국정신·단결정신을 함양하는 데 힘썼다.
1907년 9월 안창호, 양기탁, 전덕기, 김구 등이 조직한 신민회에 가입해 황해도 지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와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를 조직하고, 김구, 노백린 등과 함께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조직하여 황해도 일대의 교육구국운동에 진력하였다. 1908년에는 최광옥이 발행한 한국 최초의 문법서인 <대한문전(大韓文典)>을 각지에 배포했다.
1909년 신민회의 방계 사업으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고, 각 지방에 분회를 설치해 청년들의 수양·훈련에 노력하였다. 또한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계획에 참여해 1909년 10월 최광옥과의 협의 끝에 현지답사 차 압록강을 건너 본계현, 환인현, 집안현 등지를 둘러본 뒤 귀국했다.
그러나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뒤 징역 7년을 언도받고 4년 6개월간 복역했다. 출소 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김구와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이후 연통제 조직을 위해 다시 국내로 잠입해 독립군자금 모집과 <독립신문> 등의 문서 배포, 독립사상 고취, 독립군의 국내진격시 호응 등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 조직에 일을 하였다.
1922년에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했으며, 1923년 만주 길림으로 이주해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조직, 재무를 담당하였다. 1927년에는 길림에 온 안창호를 맞아 자신이 경영하는 정미공장 대동공사(大東公司)에서 연설회를 개최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몇달간 고초를 겪었다. 1931년 만주사변 때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귀국 당해 거주제한조처를 당하였다.
1943년 다시 만주로 건너간 그는 8.15 광복을 맞이한 뒤 임시정부 동북대표부(東北代表部) 주석에 임명되어 교포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활동하였다. 다음해 동북한국교민회연합회(東北韓國僑民會聯合會)를 조직해 부회장이 되었으며,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동북특별당부의 특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8년 만주가 중국 공산당의 수중에 들어가자 교포 수천 명을 인솔하여 톈진을 경유해 귀국했다. 그는 반공 성향의 정치인으로서 활동했으며, 1949년 한국독립당 중앙당부 당원을 역임하면서 김구, 김규식 등이 추진하는 남북협상에 대해 "김일성에게 이용당할 것이다."며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1950년에는 신익희의 민주국민당에 입당해 중앙위원에 피선되었으며, 1950년 이후에는 민주당 진해시 당부 고문을 맡아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판했다. 1961년 9월 26일 진해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최명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