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중(1937)
1. 개요
이명박 정부 때 신설된 방송통신위원회의 초대, 2대 위원장이다.
1937년 경상북도 영일군 창주면 구룡포동 장안리마을(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 장안리마을)에서 태어났다. 구룡포동부국민학교, 대구 대륜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1965년부터 1993년까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하였고,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때 민주자유당 비례대표 전국구 후보로 신청하였다가 공천에서 탈락했다. 그 후 1994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갤럽의 회장으로 근무했다.
최시중 전 위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이자 언론정책을 총괄한 실세중의 실세였다. 고향도 경북 포항으로 이명박과 같은데다, 이상득 전 의원과 대학동기다. 이에 이명박 전 대통령은 최시중을 정치적 멘토로 모셨고 MB정부 탄생 주역 ‘6인회’의 한 멤버이기도 한 최 전 위원장은 이상득 전 의원과 함께 ‘양대실세 대군’으로 꼽혔다. '''방통대군'''이라는 별칭도 뒤따랐다.
특히 미국에서도 이 두 사람을 ‘MB정부 양대 브레인’으로 평가했는데,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 외교 비밀문서를 보면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친형 이상득과 최시중 방통위원장이 이 대통령의 정치적 두뇌로 생각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 두 사람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을 것’라고 상부에 보고했다는 문건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최시중은 최측근이자 ‘양아들’로 불린 정용욱 전 방통위 정책보좌역이 방송통신 관련업체에서 수억원의 뇌물을 받은 뒤 해외로 도피해 타격을 받았다. 한편 잇다른 측근들의 금품비리 의혹이 계속 제기되던 중 서울 양재동 복합물류센터 ‘파이시티’의 인허가 관련 비리혐의로 결국 구속된다. 이후 1심과 2심에서 징역 2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2심 선고 후 상고를 포기해 형이 확정됐다. 하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인해 2013년 1월 31일 풀려난다.
2. 기타
방통위원장 청문회에서 군복무 중 탈영 의혹을 받았으며, 이로 인한 귀휴로 알려졌다.
최 전 위원장은 방통위원장 시절, 기자들에게 생명선이 굵고 길게 이어진 자신의 손금을 곧잘 자랑하면서 자신은 해야 할 일이 더 있다고 말하곤 했다.
정두언 전 의원은 이명박 정부의 당선축하금 의혹을 제기하며, 이러한 역할을 한 멘토가 최시중 전 방통위 위원장이었음을, 그리고 2천만원 정도의 축하금을 제안한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여자는 집에서 살림하는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는 발언을 하였으나 정작 차녀 최호정이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의회 의원에 출마하여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