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자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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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0년 이른바 '''3당 합당'''으로 출범하여 1995년 12월 신한국당으로 개명하기 전까지 존속한 한국의 집권 보수정당. 창당부터 개명 당시까지 계속 여당이었으며 약칭은 민자당. 현재 원내 정당인 국민의힘의 실질적인 뿌리이다.[2]
2. 성향
1990년, 현재 보수정당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민주자유당'''은 보수정당들의 합당으로 장기집권을 한 일본처럼 한국의 자유민주당을 꿈꾸면서 이질적인 정치세력이 뭉쳐서 창당되었다. 이로 인해서 1980년대 집권여당이자 강경보수 성향의 1981년 창당된 민주정의당[3] 과 1960~1970년대 집권여당이자 마찬가지로 강경보수 성향의 1987년 창당된 신민주공화당[4] , 그리고 1960~1980년대 앞의 군사정권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신민당-신한민주당을 계승한 온건보수 성향의 통일민주당[5] 이 ‘보수대연합’을 기치로 3당 합당을 통해서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민자당 시절 권위주의적이고 냉전적 반공주의 성향이며 국민보수주의적이었던 강경보수세력과 자유민주주의적이며 상대적으로 대북정책에 유연하며 자유보수주의적이었던 온건보수세력간의 다툼이 벌어졌다. 1990년대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온건보수세력이 민중당 출신 등 개혁적 인사를 영입하는 등 강경보수세력을 몰아냈다. 강경보수세력의 상당수가 분당을 하거나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을 통해서 탈당하고 사라졌다.
2.1. 분파
- 중도우파 ~ 우파
- 민주계
대체적으로 기존 민주당계 정당의 이념을 그대로 계승했다. 과거 1950년대에는 자유당에 맞서 싸웠으며 1960~1980년대에는 군사정권에 맞서 싸웠기 때문에 이들의 정치이념은 자유민주주의였으며 민주화 운동의 주역 중 하나이다. 또 자유민주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반공주의를 주장하며, 각종 사회폐단과 구습을 점진적으로 개혁할 것을 주장하는 자유보수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자유주의을 가지고 있는데 주로 우파적인 자유주의, 즉 경제적 자유주의와 보수자유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다만 문화검열이 김영삼 정권 때도 일정 부분 이뤄진 것을 보면 사회보수주의 성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어보인다.
이들 민주계는 민주화 운동과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극우들을 중심으로 보수가 아니라고 지금도 비난받는다. 또 진보진영에서는 민주계를 변절자 취급하면서 민주계의 민주화 운동을 부정한다. 다만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으며 개혁보수의 뿌리로 여겨진다. 세대가 교체된다면 정병국 의원의 인식대로 현재 보수의 뿌리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들 민주계를 부정하는 극우들은 개혁 자체를 반대하는 반면에 민주계는 상대적으로 보수 내 분파 중에서 이념적으로 유연하기 때문이다.
꽤나 스펙트럼이 넓은 분파다. 민주계는 통일민주당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인재를 수혈했는데 해체된 진보정당인 민중당 출신들도 대거 영입했으며 운동권 출신 인사들도 꽤나 많이 영입했다. 그래서 다른 두 계파는 거의 사멸했지만 아직까지도 이 계파는 많이 남아있다. 중도우파 ~ 우파적 위치에 있다.
- 우파 ~ 극우
- 민정계
- 공화계
3. 강령과 정책
강령
1. 우리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국민의 폭넓은 정치참여를 통하여 진취적이며 화합하는 정치문화를 정착시키고 의회와 내각이 함께 국민에 책임지는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한다.
2. 우리 국민의 창의와 활력을 북돋아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형평과 균형을 통하여 모두가 잘 사는 복지경제를 실현한다.
3. 우리는 도의를 바탕으로 서로 돕는 미덕을 함양하고 정의와 양심이 지배하며 법과 질서가 존중되어 모두가 믿고 살 수 있는 공동체사회를 이룩한다.
4. 우리는 교육의 자율성과 기회균등을 보장하고 국민 모두가 스스로의 개성과 능력을 발휘케 하여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민족문화를 창달한다.
5. 우리는 국력을 배양하고 민주역량을 발휘하여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앞당기며 자주적인 외교 노력과 적극적인 교류와 협동을 통하여 국제사회의 주역이 된다.
기본정책
1. 책임정치를 구현한다.
2. 성숙한 정치문화를 정착시킨다.
3. 고도 과학기술의 선진산업국가를 건설한다.
4. 경제정의를 실천한다.
5. 건전한 사회를 이룩한다.
6. 교육개혁을 꾸준히 실천한다.
7. 민족문화를 창달하고 국민의 문화생활을 향상시킨다.
8. 지역간의 균형 발전을 도모한다.
9. 국토의 이용을 극대화한다.
10. 해양개발을 촉진한다.
11. 국민복지를 증진시킨다.
12. 공존공영의 노사관계를 정착시킨다.
13. 중소기업을 육성지원한다.
14. 농어민의 소득을 획기적으로 늘린다.
15. 노동자의 중산층화를 도모한다.
16. 청소년이 꿈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
17. 여성의 권익을 보장한다.
18. 노인복지의 사회적 기반을 확충한다.
19. 장해자의 복지를 증진시킨다.
20. 쾌적한 생활환경을 조성한다.
21. 교통난을 해소한다.
22. 주택문제를 해결한다.
23.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외교를 펼친다.
24. 국가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한다.
25. 한민족 공동체를 이루어 조국통일을 앞당긴다.
4. 당가
작사는 김병걸, 작곡은 김강섭이 맡았다.
5. 역사
5.1. 창당 배경
기존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은 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 야권 분열로 정권 유지에는 성공했지만, 1988년 치러진 제13대 총선에서는 전체 299석 가운데 125석만을 확보할 수 있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이루어진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5공특위)와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 등에서 탈탈 털리면서 민주정의당은 야당과의 합당을 통해 정국을 돌파하려고 했다.[7]
처음에 민정당은 4당 합당을 추진했다. 민주정의당이나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은 지역 연고 및 인물만 다를 뿐 모두 이념이나 정책에 있어서 거의 차이가 없는 보수적인 정당들이니 이들을 모두 합당하여 거대한 보수정당을 만들고, 이에 반발하는 평민당, 통민당 계열의 인사와 기타 재야 인사들이 뭉쳐 진보정당을 만들면 진보정당이 아무리 선전해봐야 다수당이 될 수 없는 거대 보수 정당 중심의 1.5당 구도가 생성되어 안정적으로 집권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노태우가 당시 제1야당[8] 인 평화민주당과 합당을 제의했을 때 김대중은 거부했다. 하지만 김영삼과 김종필은 찬성하여 결과적으로 평민당을 제외한 세 당끼리의 합당이 되었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와 야당의 두 대표는 전격적으로 합당을 선포했다. 통일민주당에서 거센 반발이 일어났지만, 김영삼의 일대일 설득 끝에 대부분 합류했고, 이탈자는 5명(이기택, 김광일, 김정길, 노무현, 장석화)에 그쳤다. 신민주공화당에선 김현#s-1.1 한 명만이 합류를 거부하였다.[9] 여기에 무소속이었던 정몽준, 문희갑, 유한열 3명이 참여하면서 민주자유당은 299석 가운데 218석(민정 127 + 민주 54석 + 공화 34 + 무소속 3)을 차지하는 초거대 여당으로 출범하였다.
5.1.1. 당명을 둘러싼 잡음
민주자유당이란 이름은 우연찮게도 일본 자유민주당과 어순이 반대인데다 유력 정당간의 합당[10] 이라는 형성과정의 유사성[11] , 의석의 과반을 넘는 집권 거대 보수 정당이라는 점 등이 비슷했다. 이 때문에 이름을 자유민주당에서 따왔다는 속설이 야권에서 돌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김영삼 총재의 경우 신당 창당 과정에서 일본의 자유민주당을 여러 번 강조했다고 하나,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외국 나가서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고 부정하기도 했다. [12] 한편 김종필은 이미 민주공화당 시절부터 자민당과 교섭이 잦았던데다 자민당의 정국 안정 수완을 높이 샀기에 일본 자민당의 예를 여러차례 강조했다. 민자당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대중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의 말실수[13] 를 두고 같은 해 2월 연설에서 10월 유신도 메이지 유신을 따라하더니 신당도 그렇다면서 일본 자유민주당 한국 지부라고 하지 그러냐고 비꼬았다. 결국 실증성보다는 이런저런 정황상의 심증이 속설을 부풀린 셈이다. 사실 민주자유당에도 민정계 출신이 대다수 존재했는데, 이 때만 해도 김영삼 후보를 지지한 민정계 인사들과 공화계 인사들이 있었다.
사실 자유와 민주는 별로 특이하다고 할 것도 없이 전통적으로 한국 정당명에 흔히 붙었던 단어였다. 실제로 이미 1960년대에 야권 계열에서 창당된 같은 이름의 자유민주당도 존재했던 데다 민주자유당 이후에 창당한 자유민주연합 쪽도 어감이 비슷하긴 마찬가지. 또 초창기 창당 과정에서는 민주통일당 등의 다른 당명이 거론되기도 했다. 더구나 그렇게 의미심장한 이름이라면 불과 창당 5년, 대선 3년만에 바꿀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14] , 반면 그런 민자당을 "김영삼당"[15] 인 신한국당으로 바꾼 김영삼이 더 압박이란 해석도 있다.
노태우 회고록 등에서 보듯, 민정계 인사들은 민자당 창당을 정치 안정의 초석으로 보았다. 그래서 훗날 민정계, 공화계를 축출하고 민자당이라는 '좋은 이름'을 바꿔서 총선과 대선에서 졌다(...)라고 까지 해석했다. 미련이 꽤 있었던 모양. 한편 김영삼 대통령으로서는 정당명 개명은 민정계를 축출하고 당을 민주화시키며 자신의 슬로건인 "신한국 창조"를 상징하는 당연한 마무리 작업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정당 자체가 한국판 자민당을 꿈꾼 노태우, 김종필 등과 그런 거 없다였던 김영삼의 동상이몽, 오월동주였을지도 모른다.
5.2. 집권에서 개명에 이르기까지
민자당은 일본의 자민당도 역사 내내 이루지도 못했던 전체 의석의 '''2/3'''를 확보했다. 그랬기 때문에 1990년 당시에는 내각제 개헌을 통해 자민당의 55년 체제처럼 "90년 체제"가 이루어질 것이란 분석이 상당히 우세했다.
마땅한 차기 대선 후보가 없는 민정당과, DJ나 YS와의 정면승부에서 승산이 없는 JP는 내각제에 적극적이었지만, 내각제 개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YS가 3당 합당에 찬성한 이유가 DJ와 후보 단일화 문제로 싸우기 싫었던 것임을 감안하면 처음부터 가능성이 없었던 것.[16]
합당하고 나서도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의 계파 갈등이 상당했다. 이를 두고 당시 문화방송에서 방영하던 일요 아침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라고 풍자하기도 하였다. 또한 자민당처럼 하하호호하기에는 기존 지지층의 차이도 너무 컸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민주화, 자유화를 요구하며 김영삼을 지지하던 민주당 지지층과 반공, 경제발전을 이유로 민정당을 지지하던 민정당 지지층간의 간격이 너무도 컸고, 공화당 지지층들도 민정당과 그냥 합당하기에는 뭔가 꺼림직한것은 매한가지였던지라 지지층의 화학접 결합이 이루워진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날치기가 심심하면 벌어진데다 각종 부정부패 사건이 드러나고 더군다나 물가상승률마저 높아졌기에 1990년 양대 재보궐 선거에서 모두 패배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 1991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기초의회 선거에서 투표율 저조로 생각보다 선전을 거두었고,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막판 계란 투척 사건과 야권 단일화 실패, 투표율 저조로 광역의원 선거에서 564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웠다.
그러나 공천 잡음으로 인한 무소속 후보자 난립 + 군 부재자 투표 부정사건 + 안기부 흑색 선전물 배포사건이 겹쳐지면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49석만을 확보하며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다.[17] [18] 한편 1992년 10월 2일, 김종필 대표위원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민주연합(IDU) 당수회의에 참석, 가입의결을 받고 수락연설을 하면서 정회원이 되었고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을 거쳐서 2020년 현재 국민의힘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민정계와 공화계 중 일부가 이종찬을 중심으로 해서 새한국당을 창당해서 독립했다. 이종찬과 같이 당을 나간 사람들은 특히 YS에게 원한이 컸던 '''박철언''', 이 외에도 '''김용환''', 장경우, 이영일이 있었다. 다만 일부는 다시 통일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19]
이후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고, 정주영이 조직한 통일국민당에 압력을 넣어 붕괴시키면서 이들 중 일부를 끌어들여 안정 과반 확보에도 성공한다. 1994년 12월 19일 여의도연구소 재단의 설립을 발표하고 21일 당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이 시기에 김영삼은 민주계의 부족한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재야세력 및 운동권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대표적인 정당이 바로 1992년에 해산된 진보정당인 민중당이다. 1994년 민중당의 지도부였던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가 입당하였다. 이외에도 대표적으로 김성식, 정태근, 신지호, 김용태, 차명진, 박형준, 임해규 등이 존재한다. 이름만 들어보면 알겠지만 2020년 현재 보수정당 내부에서 중량감이 있는 인물들로 일부는 지나치게 우경화되어서 강경우익이 되었지만 상당수가 중도~중도우파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개혁보수의 원천이자 뿌리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은 스펙트럼이 너무 커져서 계파로서 의미가 없지만 민중당계로 불러도 될 정도다.
한편 재집권 후 YS계와 JP계의 갈등이 본격화되었고 각종 당직에서 JP계가 축출되자 1995년 2월 김종필을 위시한 공화계와 일부 민정계가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그리고 1995년 2월 3일에는 여의도연구소 재단법인의 설립을 허가받으며 대한민국 정당 최초로 정당연구소를 세웠고 4월 15일에 개소했다. 이 연구소가 2013년에는 여의도연구원으로 명칭을 바꾼 이후 2020년 현재 국민의힘의 정책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지방자치제도가 생겨나며 처음으로 치른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15개 광역단체장 중 5곳만을 건지고, 서울에서는 서울특별시장은 물론 강남구와 서초구를 제외한 모든 구청장을 내주면서 패배한다.
1995년 11월 하순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노태우가 구속되고, 김영삼의 대선 자금과의 연관성을 밝히라는 요구가 커지자, 당 쇄신 및 다음 총선을 대비하고자 당명을 바꿀 것을 검토한다.[20] # 이후 12월 들어 '''5.18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12.12 군사반란 가담자들을 전격 구속한 후[21]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당시 민자당 국회의원 중에 민정계와 공화계는 민주계보다 숫자가 훨씬 많았다. 반면 민주계는 김영삼을 따라 들어오거나 영입된 몇몇 인사들에 불과했다.
이후 1995년 연초에 김종필과 김영삼 양자 간의 갈등이 지속되자, 일부 민정계와 공화계가 이에 가담해서 당을 나갔다. '''김종필''' 민자당 대표를 중심으로 해서, 8선의 박준규 등의 대구경북권의 민정계와 충청권의 공화계 상당수가 짐을 싸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이후 통일국민당으로 이탈했던 세력들이 신민당으로 간판을 갈았다가, 다시 자민련으로 들어왔다. 대표적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 처남인 김복동 의원. 하지만 여전히 민정계의 다수는 신한국당에 남아있었는데 수많은 민정계가 아직 신한국당에 남아있었다.
흥미로운 건 민자당이 간판을 내리자 자민련은 쾌재를 부르며 "정통 보수" "원조 보수" "민자당 적통"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사실 자민련은 창당 전에도 민자당이 통일한국당으로 당명 개정을 추진하자 그럼 우리가 민자당으로 창당하겠다고 하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민자당은 당명 유지 선언...
이 시기 당명 변경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한 이미지 변신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동시에 개혁공천[22] 과 함께 '''민정계 중심+민주계, 공화계의 1강 2약''' 구도는 '''민정계 대거 탈락+민주 중심'''의 구도로 바뀐다. 당시 신한국당은 과반 확보에 실패했으나 수도권에서 분열 상태에 있었던 새정치국민회의와 민주당을 누르고 승리했다.[23] 15대 총선 이후를 기점으로 전통적인 민정계는 점점 쇠퇴하였다.
5.3. 개명 이후
당명 변경으로 이미지 쇄신을 노렸던 신한국당은 1996년의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과반에 실패하고[24][25] ,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통합민주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꾼다.[26] 이는 정통 여당 신한국당(민주자유당)과 정통 야당 민주당(통합민주당)의 결합이라고 선전되었다.[27] 이로서 탈당한 JP의 자민련과, DJ의 동교동계를 제외한 상당수의 舊 야당파(비 호남파) 정치인들이 한나라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야권의 영남 출신들이 대거 사라지면서 지역감정이 가장 강렬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미지 쇄신 차원에서 당명을 다시 바꾼 보람도 없이 대선에서 불과 1.6%차로 석패하면서, 결국 이들의 여당으로서의 입지는 막을 내렸다. 한국판 자민당이 되려던 계획은 망했어요.. 1+1+1이 반드시 3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28][29]
신한국당으로 바뀐 직후에는 민주계가 주도권을 잡고 민중당 출신의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를 공천하는 등 개혁성을 강조하기도 했었다. 그 후 이회창의 대선 패배, 노무현 탄핵 후폭풍에 이어 박근혜가 당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점차 영남 중심 보수세력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정당으로 바뀌어 현재의 국민의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국민의힘도 '''1+1+1'''이다.[30]
6. 보수의 중시조
새정치국민회의가 민주당계 정당의 중시조로 평가받듯이 점차 보수의 중시조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커져가고 있다. 왜냐하면 1987년 6.29 선언으로 민주화된 이후에 1988년 2월 25일에 출범한 제6공화국이 탄생하고 만들어진 첫번째 보수정당으로 독재세력으로 평가받는 자유당,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과 다르게 보수적이지만 민주적인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정당계보상으로 산업화 세력을 자임하는 반공독재, 군부독재를 추구한 정치세력들과 보수적 민주화세력이었던 통일민주당이 합당해서 탄생한 정당이었는데 옹호자는 보수대연합, 비판자들은 야합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서 민주와 독재의 대결로 점철되었던 시대는 타협적으로 민주화가 이뤄져서 1990년대 이후 보수와 진보의 대결로 프레임이 전환되었다.
또 2020년 현재 제6공화국이 1948년 제1공화국이 탄생한 이후로 72년 헌정사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며 33년째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깊다.[31]
7. 역대 지도부
7.1. 총재
- 1대 : 노태우 (1990.5.9 ~ 1992.5.18)
- 2대 : 노태우 (1992.5.19 ~ 1992.8.27)
- 3대 : 김영삼 (1992.8.28 ~ 1995.2.6)
- 4대 : 김영삼 (1995.2.7 ~ 1995.12.6)
7.2. 대표최고위원
- 1대 : 김영삼 (1990.5.9 ~ 1992.8.27)
- 2대 : 김종필 (1992.8.28 ~ 1995.1.20)
- 3대 : 이춘구 (1995.2.7 ~ 1995.8.20)
- 4대 : 김윤환 (1995.8.21 ~ 1995.12.6)
7.3. 원내총무
- 1대 : 김동영 (1990.2.16 ~ 1990.10.11)
- 2대 : 김윤환 (1990.10.12 ~ 1991.2.18)
- 3대 : 김종호 (1991.2.19 ~ 1991.12.3)
- 4대 : 이자헌 (1991.12.4 ~ 1992.5.22)
- 5대 : 김용태 (1992.5.23 ~ 1993.3.2)
- 6대 : 김영구 (1993.3.3 ~ 1993.12.22)
- 7대 : 이한동 (1993.12.23 ~ 1995.2.8)
- 8대 : 현경대 (1995.2.9 ~ 1995.8.21)
- 9대 : 서정화 (1995.8.22 ~ 1995.12.6)
7.4. 사무총장
- 1대 : 박준병 (1990.2.16 ~ 1990.11.6)
- 2대 : 정순덕 (1990.11.7 ~ 1991.2.18)
- 3대 : 김윤환 (1991.2.19 ~ 1992.3.27)
- 4대 : 이춘구 (1992.3.28 ~ 1992.5.22)
- 5대 : 김영구 (1992.5.23 ~ 1993.3.2)
- 5대 : 최형우 (1993.3.3 ~ 1993.4.13)
- 6대 : 황명수 (1993.4.14 ~ 1993.12.22)
- 7대 : 문정수 (1993.12.23 ~ 1995.2.7)
- 8대 : 김덕룡 (1995.2.8 ~ 1995.7.3)
- 9대 : 김윤환 (1995.7.4 ~ 1995.8.21)
- 10대 : 강삼재 (1995.8.22 ~ 1995.12.6)
8. 역대 선거 결과
- 1991년 광역의원 선거 - 564/868 득표율 40.6%
-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 - 149/299 득표율 38.5% [32]
-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 김영삼 득표율 42.3% 당선
-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 광역단체장 5/15
- 기초단체장 70/230
- 광역의원 286/875
- 득표율 36.4%[33]
9. 민주자유당 출신 정치인
10. 일본의 가상정당명
일본 만화나 소설에서 사실상 자유민주당을 등장시킬 때, 껄끄러움을 피하려고 '민주'와 '자유'를 뒤집어서 역순으로 써서 '민주자유당'이라는 가공의 당명을 만들어내서 쓰기도 한다. 다만 1940년대 말부터 50년대 초반까지 진짜로 민주자유당이라는 정당이 존재했다. 사회당과의 연정에 반대한 의원들을 중심으로 창당된 민주클럽과 자유당이 합당해 창당한 정당이었지만 1950년에 자유당이라는 명칭으로 개칭되었고, 이후에 1955년에 민주당과 합당되면서 현재의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