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자유당

 


'''대한민국 여당'''
민주정의당
(1981.1~1990.2)

'''민주자유당
(1990.2~1992.9)
(1993.2~1995.12)
'''

신한국당
(1995.12~1997.11)
[image]
창당 당시의 로고.
[image]
1회 지방선거 당시의 로고.[1]
'''민주자유당'''
'''공식명칭'''
민주자유당
(民主自由黨, Democratic Liberal Party)
'''약칭'''
민자당
'''창당일'''
1990년 1월 22일
'''당명 변경'''
1995년 12월 6일 (신한국당)
'''해산일'''
1997년 11월 21일
(통합민주당과 합당, 한나라당 창당)
'''통합 정당'''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1990년 1월 22일 신설합당)
'''이념'''
보수주의

'''내부계파:'''
중도우파~우파: 민주계
자유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보수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
우파~극우: 민정계, 공화계
권위주의, 반공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0길 15-1
(여의도동, 극동VIP빌딩)
'''대통령'''
노태우 / 13대 (1990.2~1992.9)
김영삼 / 14대 (1993.2~1995.12)
'''의석 수'''
'''166석 / 291석''' (당명 변경 직전)
'''당 색'''
남색 (#003990)
파란색 (#0070BB)
'''정책 연구소'''
여의도연구소 (1995년 2월 3일 설립)
'''국제 조직'''
(1992년 10월 2일 가입)
1. 개요
2. 성향
2.1. 분파
3. 강령과 정책
4. 당가
5. 역사
5.1.1. 당명을 둘러싼 잡음
5.2. 집권에서 개명에 이르기까지
5.3. 개명 이후
6. 보수의 중시조
7. 역대 지도부
7.1. 총재
7.2. 대표최고위원
7.3. 원내총무
7.4. 사무총장
8. 역대 선거 결과
9. 민주자유당 출신 정치인
10. 일본의 가상정당명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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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1990년 이른바 '''3당 합당'''으로 출범하여 1995년 12월 신한국당으로 개명하기 전까지 존속한 한국의 집권 보수정당. 창당부터 개명 당시까지 계속 여당이었으며 약칭은 민자당. 현재 원내 정당인 국민의힘의 실질적인 뿌리이다.[2]

2. 성향


1990년, 현재 보수정당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민주자유당'''은 보수정당들의 합당으로 장기집권을 한 일본처럼 한국의 자유민주당을 꿈꾸면서 이질적인 정치세력이 뭉쳐서 창당되었다. 이로 인해서 1980년대 집권여당이자 강경보수 성향의 1981년 창당된 민주정의당[3]과 1960~1970년대 집권여당이자 마찬가지로 강경보수 성향의 1987년 창당된 신민주공화당[4], 그리고 1960~1980년대 앞의 군사정권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신민당-신한민주당을 계승한 온건보수 성향의 통일민주당[5]이 ‘보수대연합’을 기치로 3당 합당을 통해서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민자당 시절 권위주의적이고 냉전적 반공주의 성향이며 국민보수주의적이었던 강경보수세력과 자유민주주의적이며 상대적으로 대북정책에 유연하며 자유보수주의적이었던 온건보수세력간의 다툼이 벌어졌다. 1990년대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온건보수세력이 민중당 출신 등 개혁적 인사를 영입하는 등 강경보수세력을 몰아냈다. 강경보수세력의 상당수가 분당을 하거나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을 통해서 탈당하고 사라졌다.

2.1. 분파


  • 중도우파 ~ 우파
    • 민주계
보수성향의 민주당계 정당의 파벌이다. 민주당-신민당-신한민주당이라는 정통계보를 이어온 통일민주당이 창당할 때 양대 파벌 중 하나인 상도동계가 해당된다. 평민당이 분당되어 나간 이후로 통일민주당과 상도동계는 동의어가 되었다. 한나라당 창당 시절의 통합민주당에서 온 민주계도 있지만 큰 의미가 없어서 사실상 상도동계와 민주계는 동의어다.
대체적으로 기존 민주당계 정당의 이념을 그대로 계승했다. 과거 1950년대에는 자유당에 맞서 싸웠으며 1960~1980년대에는 군사정권에 맞서 싸웠기 때문에 이들의 정치이념은 자유민주주의였으며 민주화 운동의 주역 중 하나이다. 또 자유민주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반공주의를 주장하며, 각종 사회폐단과 구습을 점진적으로 개혁할 것을 주장하는 자유보수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자유주의을 가지고 있는데 주로 우파적인 자유주의, 즉 경제적 자유주의보수자유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다만 문화검열이 김영삼 정권 때도 일정 부분 이뤄진 것을 보면 사회보수주의 성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어보인다.
이들 민주계는 민주화 운동과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극우들을 중심으로 보수가 아니라고 지금도 비난받는다. 또 진보진영에서는 민주계를 변절자 취급하면서 민주계의 민주화 운동을 부정한다. 다만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으며 개혁보수의 뿌리로 여겨진다. 세대가 교체된다면 정병국 의원의 인식대로 현재 보수의 뿌리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들 민주계를 부정하는 극우들은 개혁 자체를 반대하는 반면에 민주계는 상대적으로 보수 내 분파 중에서 이념적으로 유연하기 때문이다.
꽤나 스펙트럼이 넓은 분파다. 민주계는 통일민주당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인재를 수혈했는데 해체된 진보정당인 민중당 출신들도 대거 영입했으며 운동권 출신 인사들도 꽤나 많이 영입했다. 그래서 다른 두 계파는 거의 사멸했지만 아직까지도 이 계파는 많이 남아있다. 중도우파 ~ 우파적 위치에 있다.
  • 우파 ~ 극우
    • 민정계
원래 창당 당시에는 최대규모를 자랑했던 거대 파벌이었다. 내부적으로 다시 보스에 따라서 강경한 전두환 파벌과 온건한 노태우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자유민주주의민주화 운동에 적대적인 권위주의 이념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또한 반공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전두환 파벌이 냉전적 반공주의라면 노태우 파벌은 소련과 중국 공산당과 수교한 북방정책으로 볼 때는 냉전적 반공주의는 아니고 지금의 반공주의에 더욱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내셔널리즘적 특성이 있는 국민보수주의 이념 또한 포함되어 있다. 박근혜 정권을 끝으로 거의 사멸한 상황이다. 우파~극우파적 위치에 있다.
  • 공화계
김종필을 따르던 파벌이다. 기본적으로 국민보수주의, 반공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특기할 점은 김종필은 의원내각제를 지지하는 의회주의자였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권위주의적 민주주의를 선호하는 민정계보다는 온건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이후 충청권 보수의 뿌리가 되었다. 우파적 위치에 있다.

3. 강령과 정책


강령

1. 우리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국민의 폭넓은 정치참여를 통하여 진취적이며 화합하는 정치문화를 정착시키고 의회와 내각이 함께 국민에 책임지는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한다.

2. 우리 국민의 창의와 활력을 북돋아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형평과 균형을 통하여 모두가 잘 사는 복지경제를 실현한다.

3. 우리는 도의를 바탕으로 서로 돕는 미덕을 함양하고 정의와 양심이 지배하며 법과 질서가 존중되어 모두가 믿고 살 수 있는 공동체사회를 이룩한다.

4. 우리는 교육의 자율성과 기회균등을 보장하고 국민 모두가 스스로의 개성과 능력을 발휘케 하여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민족문화를 창달한다.

5. 우리는 국력을 배양하고 민주역량을 발휘하여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앞당기며 자주적인 외교 노력과 적극적인 교류와 협동을 통하여 국제사회의 주역이 된다.

기본정책

1. 책임정치를 구현한다.

2. 성숙한 정치문화를 정착시킨다.

3. 고도 과학기술의 선진산업국가를 건설한다.

4. 경제정의를 실천한다.

5. 건전한 사회를 이룩한다.

6. 교육개혁을 꾸준히 실천한다.

7. 민족문화를 창달하고 국민의 문화생활을 향상시킨다.

8. 지역간의 균형 발전을 도모한다.

9. 국토의 이용을 극대화한다.

10. 해양개발을 촉진한다.

11. 국민복지를 증진시킨다.

12. 공존공영의 노사관계를 정착시킨다.

13. 중소기업을 육성지원한다.

14. 농어민의 소득을 획기적으로 늘린다.

15. 노동자의 중산층화를 도모한다.

16. 청소년이 꿈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

17. 여성의 권익을 보장한다.

18. 노인복지의 사회적 기반을 확충한다.

19. 장해자의 복지를 증진시킨다.

20. 쾌적한 생활환경을 조성한다.

21. 교통난을 해소한다.

22. 주택문제를 해결한다.

23.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외교를 펼친다.

24. 국가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한다.

25. 한민족 공동체를 이루어 조국통일을 앞당긴다.


4. 당가


작사는 김병걸, 작곡은 김강섭이 맡았다.
(1절) 새시대 새역사의 아침을 열고
우리는 달린다 세계로 미래로
개혁의 큰 물결로 꿈과 희망을
민주 복지 통일의 선봉에 서서
세계속의 한국을 이끌어 나가자
(후렴) 아 세계로 미래로 힘차게 가는 그 길
그 길에 우뚝 선 민주자유당
(2절) 새시대 새역사의 아침을 열고
우리는 뭉쳤다 하나로 뭉쳤다
희망의 새 정치로 더 크고 넓게
자유 평화 통일의 역군이 되어
세계속의 한국을 드높여 보자

5. 역사



5.1. 창당 배경



'''민주자유당 창당에 참여한 정당'''
'''여당'''
민주정의당(1981년)
(128석)

'''민주자유당'''(1990년)
'''(217석)'''[6]
'''야당'''
통일민주당(1987년)
(60석)
신민주공화당(1987년)
(35석)
기존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 야권 분열로 정권 유지에는 성공했지만, 1988년 치러진 제13대 총선에서는 전체 299석 가운데 125석만을 확보할 수 있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이루어진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5공특위)와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 등에서 탈탈 털리면서 민주정의당야당과의 합당을 통해 정국을 돌파하려고 했다.[7]
처음에 민정당은 4당 합당을 추진했다. 민주정의당이나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은 지역 연고 및 인물만 다를 뿐 모두 이념이나 정책에 있어서 거의 차이가 없는 보수적인 정당들이니 이들을 모두 합당하여 거대한 보수정당을 만들고, 이에 반발하는 평민당, 통민당 계열의 인사와 기타 재야 인사들이 뭉쳐 진보정당을 만들면 진보정당이 아무리 선전해봐야 다수당이 될 수 없는 거대 보수 정당 중심의 1.5당 구도가 생성되어 안정적으로 집권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노태우가 당시 제1야당[8]평화민주당과 합당을 제의했을 때 김대중은 거부했다. 하지만 김영삼김종필은 찬성하여 결과적으로 평민당을 제외한 세 당끼리의 합당이 되었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와 야당의 두 대표는 전격적으로 합당을 선포했다. 통일민주당에서 거센 반발이 일어났지만, 김영삼의 일대일 설득 끝에 대부분 합류했고, 이탈자는 5명(이기택, 김광일, 김정길, 노무현, 장석화)에 그쳤다. 신민주공화당에선 김현#s-1.1 한 명만이 합류를 거부하였다.[9] 여기에 무소속이었던 정몽준, 문희갑, 유한열 3명이 참여하면서 민주자유당은 299석 가운데 218석(민정 127 + 민주 54석 + 공화 34 + 무소속 3)을 차지하는 초거대 여당으로 출범하였다.

5.1.1. 당명을 둘러싼 잡음


민주자유당이란 이름은 우연찮게도 일본 자유민주당과 어순이 반대인데다 유력 정당간의 합당[10]이라는 형성과정의 유사성[11], 의석의 과반을 넘는 집권 거대 보수 정당이라는 점 등이 비슷했다. 이 때문에 이름을 자유민주당에서 따왔다는 속설이 야권에서 돌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김영삼 총재의 경우 신당 창당 과정에서 일본자유민주당을 여러 번 강조했다고 하나,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외국 나가서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고 부정하기도 했다. [12] 한편 김종필은 이미 민주공화당 시절부터 자민당과 교섭이 잦았던데다 자민당의 정국 안정 수완을 높이 샀기에 일본 자민당의 예를 여러차례 강조했다. 민자당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대중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의 말실수[13]를 두고 같은 해 2월 연설에서 10월 유신메이지 유신을 따라하더니 신당도 그렇다면서 일본 자유민주당 한국 지부라고 하지 그러냐고 비꼬았다. 결국 실증성보다는 이런저런 정황상의 심증이 속설을 부풀린 셈이다. 사실 민주자유당에도 민정계 출신이 대다수 존재했는데, 이 때만 해도 김영삼 후보를 지지한 민정계 인사들과 공화계 인사들이 있었다.
사실 자유민주는 별로 특이하다고 할 것도 없이 전통적으로 한국 정당명에 흔히 붙었던 단어였다. 실제로 이미 1960년대에 야권 계열에서 창당된 같은 이름의 자유민주당도 존재했던 데다 민주자유당 이후에 창당한 자유민주연합 쪽도 어감이 비슷하긴 마찬가지. 또 초창기 창당 과정에서는 민주통일당 등의 다른 당명이 거론되기도 했다. 더구나 그렇게 의미심장한 이름이라면 불과 창당 5년, 대선 3년만에 바꿀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14], 반면 그런 민자당을 "김영삼당"[15]인 신한국당으로 바꾼 김영삼이 더 압박이란 해석도 있다.
노태우 회고록 등에서 보듯, 민정계 인사들은 민자당 창당을 정치 안정의 초석으로 보았다. 그래서 훗날 민정계, 공화계를 축출하고 민자당이라는 '좋은 이름'을 바꿔서 총선과 대선에서 졌다(...)라고 까지 해석했다. 미련이 꽤 있었던 모양. 한편 김영삼 대통령으로서는 정당명 개명은 민정계를 축출하고 당을 민주화시키며 자신의 슬로건인 "신한국 창조"를 상징하는 당연한 마무리 작업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정당 자체가 한국판 자민당을 꿈꾼 노태우, 김종필 등과 그런 거 없다였던 김영삼의 동상이몽, 오월동주였을지도 모른다.

5.2. 집권에서 개명에 이르기까지


민자당은 일본의 자민당도 역사 내내 이루지도 못했던 전체 의석의 '''2/3'''를 확보했다. 그랬기 때문에 1990년 당시에는 내각제 개헌을 통해 자민당의 55년 체제처럼 "90년 체제"가 이루어질 것이란 분석이 상당히 우세했다.
마땅한 차기 대선 후보가 없는 민정당과, DJ나 YS와의 정면승부에서 승산이 없는 JP는 내각제에 적극적이었지만, 내각제 개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YS가 3당 합당에 찬성한 이유가 DJ와 후보 단일화 문제로 싸우기 싫었던 것임을 감안하면 처음부터 가능성이 없었던 것.[16]
합당하고 나서도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의 계파 갈등이 상당했다. 이를 두고 당시 문화방송에서 방영하던 일요 아침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라고 풍자하기도 하였다. 또한 자민당처럼 하하호호하기에는 기존 지지층의 차이도 너무 컸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민주화, 자유화를 요구하며 김영삼을 지지하던 민주당 지지층과 반공, 경제발전을 이유로 민정당을 지지하던 민정당 지지층간의 간격이 너무도 컸고, 공화당 지지층들도 민정당과 그냥 합당하기에는 뭔가 꺼림직한것은 매한가지였던지라 지지층의 화학접 결합이 이루워진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날치기가 심심하면 벌어진데다 각종 부정부패 사건이 드러나고 더군다나 물가상승률마저 높아졌기에 1990년 양대 재보궐 선거에서 모두 패배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 1991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기초의회 선거에서 투표율 저조로 생각보다 선전을 거두었고,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막판 계란 투척 사건과 야권 단일화 실패, 투표율 저조로 광역의원 선거에서 564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웠다.
그러나 공천 잡음으로 인한 무소속 후보자 난립 + 군 부재자 투표 부정사건 + 안기부 흑색 선전물 배포사건이 겹쳐지면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49석만을 확보하며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다.[17] [18] 한편 1992년 10월 2일, 김종필 대표위원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민주연합(IDU) 당수회의에 참석, 가입의결을 받고 수락연설을 하면서 정회원이 되었고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을 거쳐서 2020년 현재 국민의힘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민정계와 공화계 중 일부가 이종찬을 중심으로 해서 새한국당을 창당해서 독립했다. 이종찬과 같이 당을 나간 사람들은 특히 YS에게 원한이 컸던 '''박철언''', 이 외에도 '''김용환''', 장경우, 이영일이 있었다. 다만 일부는 다시 통일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19]
이후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고, 정주영이 조직한 통일국민당에 압력을 넣어 붕괴시키면서 이들 중 일부를 끌어들여 안정 과반 확보에도 성공한다. 1994년 12월 19일 여의도연구소 재단의 설립을 발표하고 21일 당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이 시기에 김영삼은 민주계의 부족한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재야세력 및 운동권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대표적인 정당이 바로 1992년에 해산된 진보정당인 민중당이다. 1994년 민중당의 지도부였던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가 입당하였다. 이외에도 대표적으로 김성식, 정태근, 신지호, 김용태, 차명진, 박형준, 임해규 등이 존재한다. 이름만 들어보면 알겠지만 2020년 현재 보수정당 내부에서 중량감이 있는 인물들로 일부는 지나치게 우경화되어서 강경우익이 되었지만 상당수가 중도~중도우파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개혁보수의 원천이자 뿌리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은 스펙트럼이 너무 커져서 계파로서 의미가 없지만 민중당계로 불러도 될 정도다.
한편 재집권 후 YS계와 JP계의 갈등이 본격화되었고 각종 당직에서 JP계가 축출되자 1995년 2월 김종필을 위시한 공화계와 일부 민정계가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그리고 1995년 2월 3일에는 여의도연구소 재단법인의 설립을 허가받으며 대한민국 정당 최초로 정당연구소를 세웠고 4월 15일에 개소했다. 이 연구소가 2013년에는 여의도연구원으로 명칭을 바꾼 이후 2020년 현재 국민의힘의 정책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지방자치제도가 생겨나며 처음으로 치른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15개 광역단체장 중 5곳만을 건지고, 서울에서는 서울특별시장은 물론 강남구서초구를 제외한 모든 구청장을 내주면서 패배한다.
1995년 11월 하순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노태우가 구속되고, 김영삼의 대선 자금과의 연관성을 밝히라는 요구가 커지자, 당 쇄신 및 다음 총선을 대비하고자 당명을 바꿀 것을 검토한다.[20] # 이후 12월 들어 '''5.18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12.12 군사반란 가담자들을 전격 구속한 후[21]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당시 민자당 국회의원 중에 민정계와 공화계는 민주계보다 숫자가 훨씬 많았다. 반면 민주계는 김영삼을 따라 들어오거나 영입된 몇몇 인사들에 불과했다.
이후 1995년 연초에 김종필과 김영삼 양자 간의 갈등이 지속되자, 일부 민정계와 공화계가 이에 가담해서 당을 나갔다. '''김종필''' 민자당 대표를 중심으로 해서, 8선의 박준규 등의 대구경북권의 민정계와 충청권의 공화계 상당수가 짐을 싸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이후 통일국민당으로 이탈했던 세력들이 신민당으로 간판을 갈았다가, 다시 자민련으로 들어왔다. 대표적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 처남인 김복동 의원. 하지만 여전히 민정계의 다수는 신한국당에 남아있었는데 수많은 민정계가 아직 신한국당에 남아있었다.
흥미로운 건 민자당이 간판을 내리자 자민련은 쾌재를 부르며 "정통 보수" "원조 보수" "민자당 적통"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사실 자민련은 창당 전에도 민자당이 통일한국당으로 당명 개정을 추진하자 그럼 우리가 민자당으로 창당하겠다고 하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민자당은 당명 유지 선언...
이 시기 당명 변경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한 이미지 변신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동시에 개혁공천[22]과 함께 '''민정계 중심+민주계, 공화계의 1강 2약''' 구도는 '''민정계 대거 탈락+민주 중심'''의 구도로 바뀐다. 당시 신한국당은 과반 확보에 실패했으나 수도권에서 분열 상태에 있었던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을 누르고 승리했다.[23] 15대 총선 이후를 기점으로 전통적인 민정계는 점점 쇠퇴하였다.

5.3. 개명 이후


당명 변경으로 이미지 쇄신을 노렸던 신한국당은 1996년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과반에 실패하고[24][25],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통합민주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꾼다.[26] 이는 정통 여당 신한국당(민주자유당)과 정통 야당 민주당(통합민주당)의 결합이라고 선전되었다.[27] 이로서 탈당한 JP의 자민련과, DJ의 동교동계를 제외한 상당수의 舊 야당파(비 호남파) 정치인들이 한나라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야권의 영남 출신들이 대거 사라지면서 지역감정이 가장 강렬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미지 쇄신 차원에서 당명을 다시 바꾼 보람도 없이 대선에서 불과 1.6%차로 석패하면서, 결국 이들의 여당으로서의 입지는 막을 내렸다. 한국판 자민당이 되려던 계획은 망했어요.. 1+1+1이 반드시 3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28][29]
신한국당으로 바뀐 직후에는 민주계가 주도권을 잡고 민중당 출신의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를 공천하는 등 개혁성을 강조하기도 했었다. 그 후 이회창의 대선 패배, 노무현 탄핵 후폭풍에 이어 박근혜가 당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점차 영남 중심 보수세력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정당으로 바뀌어 현재의 국민의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국민의힘도 '''1+1+1'''이다.[30]

6. 보수의 중시조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계 정당중시조로 평가받듯이 점차 보수의 중시조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커져가고 있다. 왜냐하면 1987년 6.29 선언으로 민주화된 이후에 1988년 2월 25일에 출범한 제6공화국이 탄생하고 만들어진 첫번째 보수정당으로 독재세력으로 평가받는 자유당,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과 다르게 보수적이지만 민주적인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정당계보상으로 산업화 세력을 자임하는 반공독재, 군부독재를 추구한 정치세력들과 보수적 민주화세력이었던 통일민주당이 합당해서 탄생한 정당이었는데 옹호자는 보수대연합, 비판자들은 야합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서 민주독재의 대결로 점철되었던 시대는 타협적으로 민주화가 이뤄져서 1990년대 이후 보수진보의 대결로 프레임이 전환되었다.
또 2020년 현재 제6공화국이 1948년 제1공화국이 탄생한 이후로 72년 헌정사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며 33년째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깊다.[31]

7. 역대 지도부




7.1. 총재


  • 1대 : 노태우 (1990.5.9 ~ 1992.5.18)
  • 2대 : 노태우 (1992.5.19 ~ 1992.8.27)
  • 3대 : 김영삼 (1992.8.28 ~ 1995.2.6)
  • 4대 : 김영삼 (1995.2.7 ~ 1995.12.6)

7.2. 대표최고위원



7.3. 원내총무



7.4. 사무총장



8. 역대 선거 결과


  •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 - 149/299 득표율 38.5% [32]
  •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 광역단체장 5/15
    • 기초단체장 70/230
    • 광역의원 286/875
    • 득표율 36.4%[33]

9. 민주자유당 출신 정치인


민주자유당 소속이었던 정치인
소속기간
이름
직위
비고
1990년 3월 ~ 1992년 9월 18일
노태우
초대 총재
※ '''13대 대통령'''
※ 민주자유당 창당
1990년 3월 ~ 1995년 12월 6일
김영삼
2대 총재[34]
※ '''14대 대통령'''
자유당 3대 국회의원
민주당(1955년) 4. 5대 국회의원
민정당 6대 국회의원
신민당(1967년) 7.8.9.10대 국회의원
통일민주당 13대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초대 대표최고위원
※ 14대 국회의원직 사퇴
신한국당 명예총재
1990년 3월 ~ 1995년 2월 9일
김종필
대표최고위원
※ '''11, 31대 국무총리'''
민주공화당 6.7.8.10대 국회의원
유신정우회 9대 국회의원
신민주공화당 13대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2대 대표최고위원
자유민주연합 총재
1990년 3월
박태준
최고위원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32대 국무총리'''
1963년 대한민국 육군소장 예편.
1981년 민주정의당 제11대 국회의원
1988년 민주정의당 대표
※ 구 포항제철(포스코) 회장
1990년 3월
김재광
상임고문[35]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1988년 국회부의장
충청북도 청주시[36] 출신
1993년 사망
1992년 ~ 1995년 12월 6일
이명박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신한국당 15대 국회의원
※ 15대 선거법 위반 의원직 상실.[37]
한나라당 소속 → 새누리당 소속 → 무소속
2009년 6월 7일 청계재단 설립
※ '''17대 대통령'''
※ '''32대 서울시장'''
1990년 3월 ~ 1995년 12월 6일
김무성
의사국장
의원국장
※ 삼동산업(주) 대표이사
통일민주당 총무국장, 국회행정실장, 기조실차장
1994년 제48대 내무부 차관
김영삼 대통령후보 추대위 총괄국장
※ 제14대 김영삼 대통령후보 정책보좌역
※ 대통령 민정비서관, 대통령 사정비서관
신한국당 15대 국회의원(부산 남구을)
한나라당 16대 국회의원(부산 남구)
한나라당 17대 국회의원(부산 남구을)
※ 2007년 박근혜 경선후보 조직총괄본부장
※ 2008년 7월 한나라당 복당 [38]
※ 2008년 5월 18대 총선에서 친박무소속연대 출마 당선
한나라당 18대 국회의원(부산 남구을)
2014년 7월 ~ 2016년 4월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당대표)
새누리당 19대 국회의원(부산 영도구)
새누리당 20대 국회의원(부산 중구·영도구)
2017년 1월 ~ 11월 바른정당 고문
.
박희태[39]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13대 국회의원
신한국당 15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16대~18대 국회의원
2008년 7월 3일 한나라당 당대표
2010년~2011년 18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
새누리당 상임고문
.
구상찬
.
1990년~1992년 민주자유당 정책위원장 보좌역[40]
2006년~2008년 '''한나라당 강서(갑)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
2006년 '''한나라당''' 서울시당 뉴타운 정책개발위원장
2008년 이명박 대통령당선인 중국 특사
2008년~2011년 제18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서울 강서갑)
.
박대해
.
통일민주당 창당 발기인
통일민주당 국회 총무실 행정부실장
※ '''민주자유당''' 동래구 을(연제) 지구당 사무국장
※ '''한나라당''' 연제구지구당 부위원장, 중앙위원
※ '''한나라당 대선경선후보 박근혜 선대위''' 연제구 본부장
※ '''2008년 한나라당 제18대 국회의원'''(부산 연제구)
.
노재봉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국회의원직 사퇴
.
이만섭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최병렬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국회의원직 사퇴
.
김종인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김광수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국회의원직 상실
※ 국회의원직 사퇴
.
최영한[41]
.
통일국민당에서 민자당으로 당적을 옮김.
통일국민당 14대 국회의원
.
박재홍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국회의원직 사퇴
.
강용식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김영수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김영진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이현수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이재명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김영순
.
※ 민주자유당 14대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탈당

10. 일본의 가상정당명


일본 만화소설에서 사실상 자유민주당을 등장시킬 때, 껄끄러움을 피하려고 '민주'와 '자유'를 뒤집어서 역순으로 써서 '민주자유당'이라는 가공의 당명을 만들어내서 쓰기도 한다. 다만 1940년대 말부터 50년대 초반까지 진짜로 민주자유당이라는 정당이 존재했다. 사회당과의 연정에 반대한 의원들을 중심으로 창당된 민주클럽과 자유당이 합당해 창당한 정당이었지만 1950년에 자유당이라는 명칭으로 개칭되었고, 이후에 1955년에 민주당과 합당되면서 현재의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었다.

11. 둘러보기






민주정의당
(민정계)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민주계,
신민주계)[42]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자유민주연합
(청구동계,
민정계 일부)
민중당
(개별 합류)


새한국당
(민정계 일부)

[1]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대통령이 당의 체질을 대대적으로 혁신하기로 하면서 로고가 변경됐다. 기존에는 당명까지 "통일한국당"으로 개칭할 예정이었으나, 당 안팎의 반발로 당 로고와 당 대표만 교체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당 대표 자리에서 사실상 쫓겨난 김종필은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2] 현재 국민의힘 국회 내 회의실에는 산업화의 상징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민주화의 상징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이 같이 걸려 있을 수 있게 된 시초가 된 정당이다. 민주화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보수적인 군부세력과 보수적인 민주화세력이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놓고 대립하는 구도였으나 민주화 이후 제6공화국 사회가 민간인 정치인들의 문민정권 시대에 들어서게 되면서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라는 가치와 이념 위주의 정치로 바뀌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을 했지만 김영삼의 자유보수주의적인 정치성향과 이 당의 탄생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봤을 때 국민의힘김영삼을 기린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는 않다. 민주화가 된지 한세대인 30년도 훌쩍 넘은 지금은 정치적인 이슈나 경제관에 따라서 좌우익을 바라보기 때문에 군부세력과 민주화세력이라는 이분법은 구시대적이다.[3] 하나회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서 창당되었던 정당으로 전두환의 파벌과 노태우의 파벌로 나눠졌는데 상대적으로 온건한 노태우 파벌의 주도로 합당에 참여하였다. 민정계로 불린다.[4] 민주공화당 시절부터 박정희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김종필이 창당한 정당이다. 공화계로 불린다.[5] 창당 당시의 양대 파벌 중 하나였던 동교동계가 탈당한 이후 상도동계만 남았던 정당이다.[6] 128+60+35=223석이지만 통일민주당의 노무현, 이기택, 김광일, 김정길, 장석화 의원과 신민주공화당 김현#s-1.1 의원이 참여하지 않으면서 최종 217석이 되었다.[7] 실제로 84년도부터 민정당에서 자민당을 모델로 한 '2000년대 장기 집권 계획'을 계획하기도 했다고. (#)[8] 당시 70석.[9] 김현은 이듬해인 1991년 꼬마민주당에 합류한다.[10] 더구나 자유(보수) + 민주의 구도라는 점이 그렇다.[11] 한국의 경우는 평민당, 일본의 경우는 일본사회당이 부상할 때 이루어졌다.[12] 90년 2월 9일자 동아일보[13] 당시 초대 총재 겸임. 첫 전당대회 날부터 실수로 '''민주자유당을 자유민주당이라고 불렀다'''... (90년 5월 12일자, 5월 7일자 동아일보, 1990년 5월 7일자 매일경제 참조) [14] 사실 공화당, 민정당이야 그렇다 치고, 민자당의 정당사 5년은 최근의 정당사 가운데서는 '그나마' 나름 오래간 것이긴 사실이다. 또 그 반면으로 한나라당이나 자유민주연합이 10년을 넘는 역사를 가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심오한 뜻을 품은 당 의미도 아니었다.[15] 1992년 당시 김영삼 후보의 선거 슬로건이 '신한국 창조'였다.[16] JP는 훗날 YS와 결별하고 DJ측과 연합하면서 다시 내각제 개헌을 공동 공약으로 내걸고 승리하나, 약속은 또 지켜지지 않았다. 이건 사실 DJ측도 내심 바라지 않은 것도 있지만, 야당인 한나라당이 개헌 저지선을 넘는 의석을 움켜쥐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17] 총선 직후 무소속 의원 영입으로 14대 국회가 개원할 때는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였다.[18] 사실 자민당도 처음 선거인 1956년 참의원 선거에서 125석 가운데 고작 61석을 얻는 참패를 당했기는 했다. 다만 참의원에서 별개의 교섭단체인 추풍회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면서 지지세를 굳히는데 성공, 장기 집권의 길을 열게 되었다.(...)[19] 새한국당 잔류파는 이종찬을 따라서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20] 이때는 아직 5.18 특별법 제정을 하겠다는 발표를 하기 전이었다.[21] 현역 민자당 국회의원이었던 허삼수, 허화평, 유학성도 구속되었다!![22] 혹은 민정계 몰아내기[23] 00년, 04년 총선에서도 계속 진행된 이런 '탈민정계' 흐름은 16대 국회에 당선된 소위 민정계 의원이 세명(이상득, 박희태, 강재섭)뿐이었다는 것으로 잘 드러난다. 한편 공화계 역시 지역들의 표심 변화와 탄핵 역풍으로 쇠퇴하게 되어, 17대 국회에서 자민련은 4석의 소수당으로 전락한다. [24] 이는 수도권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대구 경북에서 자민련과 민정계 축출에 의한 무소속에게 대거 의석을 내준 영향이 크다. 관련 해프닝으로 방송 3사의 공동 조사에서 신한국당이 무려 175석을 얻는 걸로 나타났지만, 예측이 완전히 빗나면서(실제 결과는 139석)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참고로 1995년 지방선거 때 MBC에서 예측 보도를 했는데, 이 때는 15개 광역단체장 당선자를 전부 맞혔다.) [25] 그 다음 총선인 2000년 총선에선 새천년민주당이 원내 1당이 된다는 예측이 등장했으나 이 역시 빗나가면서 출구조사 무용론이 나온다. 이후로도 총선 출구조사 결과는 번번히 망신을 당했고, 반면 대선이나 지방선거의 광역 결과는 매우 잘 맞추는 경향을 보면 표본의 크기 차이 문제라고 봐야한다.[26] 김영삼이 민정계 색을 지우기 위해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꿨듯이 역시 이회창 대선 후보가 김영삼 색을 지우기 위해 바꾼 것으로 풀이된다.[27] 형식은 신설 합당이지만, 실질은 흡수 합당으로 인식된다. 통합민주당의 양대 거두 이기택과 조순이 2000년 총선 공천에서 바로 짤리기도 했고.[28] 애초에 득표율부터가 30% 중반에서-40% 초반대로 생각외로 시너지 효과를 못냈고, 20대와 30대층으로부터 지지율이 별로 높지 않았다.[29] DJP 연합을 통해 여당 지위를 얻은 새천년민주당 역시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이후 분당과 하향세 등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다만 새천년민주당이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것에 비해 한나라당은 여전히 대형 정당으로 남았다는 차이점이 있다.[30] 다만, 민주자유당처럼, 여야를 합당한 것이 아니라, 원래 새누리당이였던 사람+안철수계 일부라 도로 새누리당에서 철새 몇명 들어간 정당이란 소리도 나오고 있다.[31] 72년 헌정에서 두번째로 오랫동안 존속한 헌정체제는 12년간 존속한 제1공화국이며 나머지는 9년간 존속한 제3공화국, 8년간 존속한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이라는 점을 살펴보면 대한민국 역사에서 거의 절반에 가까운 세월동안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그나마 제일 민주적이면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2] 과반수 확보(194석->149석)에 실패하여 패배로서 여겨졌다. 하지만 민주당도 크게 의석 수(75석->97석)를 늘린 건 아니고 오히려 제3당인 통일국민당이 선전했다.[33] JP계가 자유민주연합으로 빠져나갔다는 걸 감안하면 비교적 선전한 편이었지만 민주화 + 지방자치제 직후였기에 패배로서 여겨졌다. 특히 서울특별시장 선거 패배와 서울특별시 지역 구청장 선거에서 22곳을 내준 것이 패배의 결정적인 증거.[34] 대표최고위원이었다가 총재로 변경[35] 김재광 국회부의장[36] 청주-청원 통합 이전의 청원군.[37] 링크[38] 프로필[39]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D%9D%AC%ED%83%9C[40] 구상찬-위키백과[41] 최불암과 동일인물이다. 정치 활동은 본명으로 했다.[42] 신민주계는 민정계공화계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