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의
1. 개요
고려의 무신. 무신정권의 권력자로 60년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최의는 매우 잘 생겼고 잘 먹어서 매우 뚱뚱했다고 한다.[1] 이렇듯 아버지를 잘 타고나 호사로운 생활을 즐겼고 아버지 사후 권력을 독차지했으나 고려 조정과 민심은 더이상 최씨 정권을 지탱해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했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 최의는 실각하고 고려는 큰 변동을 겪게 된다.
2. 정권 계승
아버지인 진평공 최항이 승려로 있을 때 매형인 송서의 여종과 정분을 통하여 낳은 아들로 용모가 아름다우며 두 손에 은은하게 금색이 있었고 성격이 조용하고 부끄러움이 많았다고 한다.[2] 최항이 경림에게 예기로 시와 필법, 권위 임익에게 정사, 정세신에게 예를 가르치게 하였다.
1255년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었고 붉은 색의 가죽 띠를 하사받았다. 1257년 4월 아버지가 사망하자 야별초, 신의군, 서방삼번, 도방 삼십육번 등에게 옹위받아 차장군이 되었다가 교정별감이 되면서 최씨 정권의 4대 집권자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최의는 아버지가 죽은 날에 아버지의 폐첩과 간통을 하는 등[3] 아버지 최항[4] 보다 더한 패륜을 저질렀으며 아버지인 최항이 폐출된 기생의 천출이면서 최의의 어머니 또한 천하였기 때문에 원한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출신에 대해 험담한다고 참소하면서 모두 죽였다고 한다.
집권 초기에 민심을 얻기 위해 창고의 곡식을 내서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면서 여러 영부에 각각 30곡씩 주었으며 고종이 추밀원부사 판이병부 어사대사에 임명했으나 사양하면서 받지 않았다. 연안택과 정평궁을 왕부에 돌려주고 집의 쌀 2,570석을 내장택에 바치고 베, 비단, 철, 꿀을 대부시에 바쳤다.
또한 농사 형편이 좋지 않아 흉년이 들자 사름이 된 모를 내어 권무대정, 근장좌우위, 신호위, 교위 이하 및 마을 사람들을 구제하였으며 고종이 추밀원부사에 임명하였지만 받지 않고 사양하자 우부승선에 임명되었다. 민칭이라는 사람이 몽골에게서 도망오며 금패를 바치면서 몽골의 대신들이 의논하여 이후에는 동쪽을 정벌하지 않는다고 하자 이를 듣고 기뻐하여 민칭을 산원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데다가 집권 초기의 선정도 오래가지 못하였으며 집권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기에 총사령관 자랄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8차 침입을 하는 상황에서도 전횡을 부렸다. 1257년 10월에 몽골군은 선 철군 후 입조의 설득에 따라 철수하게 되었다.
1258년 1월에 장군 변식, 낭장 반홍민, 산원 정한규 등을 강화수획사(江華收獲使)로 삼아 약탈을 자행하게 하자 백성들이 이를 수근거렸다. 최항의 측근이었던 대장군 송길유가 경상도 수로방호별감으로 있을 때 백성들을 섬으로 옮기고 집을 불태우면서 토지와 재물 등을 빼앗자 안찰사 송언상이 그를 탄핵했다. 이에 김준이 송길유를 구하려고 했지만 외삼촌 거성원발의 말에 따라 송길유를 유배보내면서 김준, 류경, 류능을 꾸짖자 김준과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2월에 노비에게 벼슬을 주는 특례를 만든 아버지 최항처럼 자신도 노비인 이공주, 최양백, 김준 등을 별장으로 삼았으며 섭장수를 교위, 김충을 대정으로 삼았다. 이후에 이공주를 낭장(郎將)의 벼슬로 높였다.[5]
3. 처참한 말로
하지만 최의 역시 증조부 최충헌, 조부 최우, 아버지 최항과 마찬가지로 간신배라 현명한 선비를 잘 대우하지 않고 류능, 선인렬, 최양백만을 신임하면서 그들의 참소를 듣고 살육을 함부로 하였으며, 3월에 기근이 들었을 때 곡식을 대여하지 않아 인심을 크게 잃었다. 또한 송길유를 귀양보낸 일로 류경, 류능, 김인준, 김충 등 최항의 측근이던 자들이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3월 28일에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중랑장 이주가 이를 듣고 견룡행수 최문본, 산원 유태, 교위 박선, 대정 유보 등에게 비밀리 글로써 통하거나, 김대재가 장인인 최양백에게 이 계획을 누설해서 최양백이 거짓으로 응하는 척 했다가 이를 최의에게 전해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최의는 유능을 불러 함께 계책을 논의하여 편지를 통해 야별초 지유 한종궤에게 새벽에 이일휴 등을 불러서 군사를 정돈하고, 김준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지만 김대재의 처가 누설된 사실을 김준에게 얘기해서 김준이 알아챈다. 이 때문에 군사를 정돈하기 전에 유경, 김준 등 최씨 정권에게 불만을 가진 자들이 이끄는 신의군과 야별초의 공격을 받자 가병들을 이끌고 저항했으나 패하고 결국 체포되어 목숨을 잃었다.
최의의 죽음으로 최씨 정권은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되는데 뛰어난 무인이었던 외삼촌 거성원발[6] 이 그를 구출했으나 '''너무 뚱뚱해서''' 담을 넘지 못하고 다락방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다락방에서 숨어들었다가 끌려나왔고 끝내 목숨을 잃고 만다.
4. 사후
진양부에서 그와 측근들을 죽이고 김준이 고종에게 갔는데 류경과 김준이 들어가 편전에서 뵙고 왕에게 복정(復政) 하니, 왕이 경과 인준에게 이르기를, “경 등이 과인을 위하여 비상한 공을 세웠도다." 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때 그의 일족들은 거의 참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최씨 정권의 무모한 대몽 항쟁과 사치, 부패, 무능, 폭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증오했던터라 우봉 최씨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현재 우봉 최씨 인구는 300여명이 채 되지 않는다.[7]
5. 평가: 잘못된 부하 관리
사실 최항의 집권 과정 속에서 안 그래도 분열되고, 약화되던 최씨 정권이 최의가 집권하자 더 심하게 분열을 거듭하였는데 최의 자신을 옹립한 류능, 선인렬, 최양백의 권한이 엄청 커졌던 게 악수로 작용한 것. 특히 이들 중에서 당시 동7품 별당 직에 도방 친위군 대장이었던 최양백을 총애하면서 최항의 측근이었던 자들을 의도적으로 정치에 소외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자신을 천거한 송길유를 부정부패 혐의로 유배보내자 김준은 이를 구명하는데 실패하면서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게다가 최의는 이 일이 쐐기가 되어 류경, 김준, 김충 뿐만 아니라 측근이었던 류능과도 서로 미워하여 만나보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자신의 세력 기반을 스스로 깎아먹은 셈이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최의에게 반대하는 문신, 무장들은 불만이 폭발했고 그들은 모여서 무오정변을 일으켜 최의를 살해하고 도방을 혁파(무너뜨림) 함으로써 최씨 정권을 종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에 나타난 무신 정권은 소수의 공신들이 참여하여 성립된 정권이기 때문에 그 지지 기반은 매우 취약했다. 비록 최씨 정권 붕괴 이후에 10여 년이라는 시간을 버텼다고는 하지만 무신 정권 자체가 워낙 최씨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최의의 죽음으로 인한 최씨 정권의 최후는 무신 정권의 붕괴를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6.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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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무신(드라마)에서 이도영이 연기했다.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임에도 불구하고 엑스트라에 가깝게 나왔지만, 연기 자체는 호평을 받았다.
최항의 뒤를 이은 집권자가 되었지만 주변 인물들로부터 아버지보다도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얼마 뒤 김준, 이공주, 박송비, 류경, 임연, 차송우 등이 같이 계획하고 모의하여 무오정변을 일으켰고 그들이 친위군 대장 최양백을 죽였고 당사자 최의는 도방(都房)에서 측근 선인렬, 류능과 함께 도망치려다 붙잡혀서 무릎을 끓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다가 참수당하고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다.
[1] 정변이 터졌을 때도 뛰지 못해 삼촌의 도움으로 본인 다락방에 겨우 숨었다고 한다.[2] 고려사 최의 열전 기록.[3] 이 당시에는 오래 전에 쫓겨났든 어쨌든 부모가 한 번이라도 성관계를 한 사람과 성관계를 하는 것은 패륜으로 여겨졌으며 고려에서는 아버지가 죽은 뒤 그의 첩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는 수계혼이라는 관습이 없었다. 현대에도 아버지와 구멍 동서가 되는 것은 몸서리쳐지는 일인데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다.[4] 최항 역시 아버지 최우가 사망한지 이틀만에 그의 첩과 간통했다. 여러모로 막장 집안.[5] 이공주는 면천되지도 않은 노비 신분에서 관직을 제수받은 것으로 고려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6] 이 사람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노비 출신으로 추측되는데 최의의 최측근이었다. 특히 삼별초가 공격할때 무장하고 최의의 집 가병들을 지휘하며 말 그대로 무쌍 난무를 연출했다. 좁은 문을 가로막고 단신으로 '''수십명의 삼별초 무사들을 죽였다'''. 하지만 끝내 그가 지휘하는 가병들이 패하고 거성원발도 이마에 칼을 맞고 부상당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거성원발은 그런 중상을 입은 상태로 담을 뛰어넘어 도망쳤으며 결국 해안가 갯벌까지 도망친 끝에 거기서 쓰러져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다 조카 잘못 둔 죄다.[7] 애초에 우봉 최씨의 시조가 최충헌의 아버지 최원호 인데다 최씨정권의 경우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골육상쟁을 일삼아 방계 혈통조차 남지 않았기 때문에 숫자가 극히 적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