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립

 


崔震立
1568년 ~ 1636년
1. 개요
2. 생애
3. 후손들: 경주 최부잣집
4. 미디어 믹스


1. 개요


조선 중기 임진왜란, 병자호란에 참전한 의병장이자 무신.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潜窩). 경주 최씨 정무공파의 파조이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그의 7대손이다.[1]

2. 생애


1568년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2]에서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25세 나이에 동생 최계종(崔繼宗)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참전했고, 1594년 무과에 급제, 부장(部長)을 제수받았으나 신병 문제로 인해 사퇴했다.
이후 정유재란 때 결사대 100명과 함께 서생포에 침입한 일본군을 무찌르고 도산 싸움에서 권율 밑에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도만호 겸 선전관, 훈련부정, 오위도총부도사, 가덕진절제첨사, 공조참판, 경기‧공청(충청)‧황해 수군 통어사, 전라도수군절도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 다만 1615년에 능창군 추대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갑산에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 후 사면되기도 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공주영장(公州營將)에 제수되어 69세의 노구를 끌고 청군과 싸우다 용인 험천 전투에서 순절했다. 전사 1년 후 시신이 수습될 당시를 기록한 글에 따르면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고 한다.
전투 시 자신을 따라온 종 옥동, 기별에게 집으로 가라 일렀으나, 장군 전사 후 그들은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충노(忠奴)가 되지 못하리오''' 라며 기어이 남아서 싸우고, 주인을 일평생 지키느라 이미 환갑을 넘긴 늙은이였던 그들도 결국 함께 전사한다. 그 충성심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도 최진립의 후손들은 두 종의 제사를 함께 모신다.[3] 당대엔 어떻게 양반이 노비에게 절을 할 수 있냐고 다른 양반들에게 욕을 먹었으나 그럼에도 꿋꿋이 모시고 종들을 기리는 비각까지 세웠다고.
순절 후 청백리로서 자헌대부(資憲大夫) 정무공(貞武公)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인조가 직접 사액제문을 내리고 정려각을 세우게 하였으며 경주 용산서원(龍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또한 사후에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신도비 건립에 노론과 남인 인사들이 함께 동참할정도로 범정파적인 추모의 대상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사당인 충렬사는 현재 북한 땅인 두만강 부근 경원군에 있어 참배할 순 없다.
저서로는《정무공실기(貞武公實記)》 2권이 있다.

3. 후손들: 경주 최부잣집



최진립의 아들 최동량때부터 본격적으로 가문의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최동량은 양란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황무지 개간과 수로시설 건설 장려의 흐름에 발맟춰서 경주 내남면 이조리 일대의 토지들을 개간하고 형산강의 물줄기를 끌어들여 수로시설을 건설해 이양법을 도입한 결과 큰 부를 쌓게 되었다. 집안의 종들에게 일종의 성과급제를 도입해 생산력을 증대시켰으며 일반적인 대지주들이 두던 중간관리직인 마름을 두지 않아 소작료를 비교적 낮게 받기도 했다.
최진립의 손자 최국선은 소위 '''명화적(明火賊)'''이라 불리는 도적때의 침입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때의 경험을 교훈삼은 최국선은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이가 없도록 하라는 마음가짐으로 곳간을 열어 사람들을 먹여살렸고, 이는 '경주 최부잣집'의 명성으로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흉년때 지주들이 다급한 처지의 농민들의 땅을 싸게 사들여서 재산을 불렸지만, 오히려 최부잣집은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라는 가훈을 세웠다. 그리고 집안의 재산은 1만석 이상을 넘지않도록 한다고 규정했는데 이렇다보니 집안의 소유토지가 늘어나더라도 1만석을 넘을수 없으니 그 남은 이익이 자연스럽게 소작인들에게 돌아가는 구조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일대의 주민들은 오히려 최부잣집의 재산이 늘어나는걸 원했고 누군가가 땅을 매각하려 한다면 앞다퉈서 최부잣집에 소개할 정도였다고 한다. 경영학적으로 본다면 이윤을 극대화하기 보다는 일정수준의 이윤을 유지하면서 지역주민들의 신망을 얻는 경영방식을 채택했다고 볼수있는데 이런 신망이 최부잣집이 무려 12대 400여년을 이어오며 부를 지키는 근간이 되었다.
12대손 최준(1884-1970)의 대에 이르러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최준은 가문의 전 재산을 털었다.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에 경주군 대표로 참여해서 자금을 기부했고, 이로인해 1년여간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1921년에는 미국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조선독립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이곳에 명단을 올리기도 했다. 이무렵에 백산 안희제를 만났고, 안희제의 제안으로 백산상회에 투자라는 형식을 빌려 독립운동 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기부했다. 또한 최준의 동생들도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데 임정에서 활동하던 최준의 동생 최완은 일제의 모략에 말려들어서 국내로 잠입했다가 체포되어 결국 옥사하는 아픔도 있었다.[4] 해방이후 백범 김구가 최준을 만나서 최준이 보내준 자금을 독립운동에 소중히 사용했다고 감사를 표했고, 최준은 백산 안희제를 떠올리며 그자리에서 안희제의 고향인 경남 의령방향으로 절을 했다고 한다.
최준은 해방이후에는 나라를 위해 교육사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남은 전재산을 털어 현재의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세우는 등 그 업적은 현대까지 내려오고 있다.SBS 뉴스[5]

4. 미디어 믹스


이러한 최진립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는 2010년 KBS 특별기획드라마 명가로 제작되어 방송된 바 있다. 배우는 김영철. 중심 인물이 본인이 아니라 손자 최국선이다보니 초반에만 등장했다 퇴장하나 실존인물처럼 어질고 강직한 성품으로 그려지며 손자 최국선의 정신적 지주로서 큰 영향을 미친다.
[1] 족보상으로는 형 최진흥(崔震興)의 7대손인데, 이는 최진립의 넷째 아들 최동길(崔東吉)이 후사가 없는 형 최진흥의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이다.#[2] 인근의 부지리와 함께 경주 최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9호로 지정된 충의당(忠義堂)이 있는데, 이 고택이 바로 최진립의 생가이다.[3] 집안에서 조상들께 먼저 제를 올린 다음 제사가 끝나면 상을 그대로 마당으로 가지고 나와 종들의 제사를 지낸다.[4] 일본 경찰이 최준에게 서예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와서 최준의 글씨를 받아간뒤에 최준이 쓴것처럼 편지를 조작해서 아버지가 와병중이니 집에 오라는 가짜편지를 보냈다고 한다.[5] 다만 대구대학은 경영난으로 인해 최준이 이병철에게 양도했는데, 이병철은 사카린 밀수사건때문에 박정희에게 학교를 넘겨버렸다. 박정희는 이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을 합쳐서 영남대학교를 설립하고 그 운영은 이후 딸인 박근혜에게 넘어가게된다. 그리고 박근혜와 함께 운영에 관여한 최태민으로 인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참으로 뒷맛이 씁쓸해지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