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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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삼성 라이온즈 소속의 전 야구선수.
구속은 빠르나 제구가 안되는 유형의 투수였으며, 이런 유형의 선수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 여러 사례 중 하나이다. 삼성의 편법 입단으로 큰 파동을 일으켜 데뷔하기도 전에 유명해졌지만 결국은 제구를 잡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구속만 보고 뽑았던 삼성 스카우트와 또 그런 선수에게 역대 최고액을 안겨준 삼성 프런트의 무능함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례다.
돈만 믿고 편법적으로 타 구단의 지명권을 가로채 선수를 영입하던 90년대 삼성 구단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2. 현역 커리어
2.1. 입단 파동
마산고등학교 야구부 시절 팀내 에이스로 활약했으며 2학년이던 1990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팀을 준우승시키고 자신은 감투상을 수상하면서 처음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고교 졸업 이후 중앙대학교에 입학해 에이스로 활약했다. 최창양은 특히 빠른 구속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최고구속이 152km에 달했다. 당시만 해도 150km을 넘는 투수는 손에 꼽을 만큼 많지 않았다.
중앙대학교 3학년 때인 1994년 12월 중앙대학교를 중퇴하고 MLB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입단한다. 최창양은 당시 대학 선수 중 가장 유망주로 꼽히긴 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뛸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다. 최창양이 필라델피아에 입단하면서 받은 돈은 계약금 4만 달러, 연봉 1만 달러[2] 였는데, 최창양보다 1년 앞서 미국에 진출한 한양대학교 출신의 박찬호가 계약금 120만달러에 연봉 10만9000달러를 받고 LA 다저스에 진출한 것과는 엄청나게 대비되는 액수였다.[3]
최창양의 미국 진출은 삼성이 롯데 연고지 출신의 최대 유망주였던 최창양을 편법적으로 입단시키기 위해서 배후에서 해외진출을 기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주간야구 등 당시 매스컴에 이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삼성 구단은 끝까지 이를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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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입단식 (1995년 12월 7일)
미국으로 간 최창양은 1995년 마이너리그 싱글 A에서 방어율 4.96에 1승 3패의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 1995시즌이 끝나고 삼성은 현금 트레이드 방식으로 20만 달러(당시 약 1억 6천만원)에 필라델피아 필리스로부터 최창양을 영입했다. 이와 별개로 최창양 본인과는 계약금 5억에 연봉 4천만원, 도합 5억 4천만원에 계약, 1995년 12월 7일 입단식을 가졌다. 당시 계약금 5억 원은 역대 신인 최고액이었으며, 5년 후인 2001년 삼성 신인 투수 이정호가 이를 5억 3천만원으로 갱신하게 된다. 삼성은 최창양 영입과 계약에 최소 7억 원을 쓴 것이다.[4]
삼성이 제도상의 헛점을 이용하여 이렇게 편법적인 방식으로 최창양을 영입하자 큰 파문이 일었다. 이같은 방식으로 드래프트를 회피하여 타 연고지 선수를 가로채 영입하더라도 KBO에서 아무런 제재를 가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최창양의 우선 지명권을 갖고 있던 연고구단인 롯데 자이언츠 측에서 법정 소송을 벌었으나 당시에는 이런 생각지도 못한 경우에 대한 규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패소하고 말았다. 최창양 사건으로 롯데-삼성 양측 팬덤의 사이가 안 좋아지기도 했다. 양준혁 입단 파문에 이어 최창양 입단 파문이 일자 야구팬들의 여론도 안좋았다.
최창양 파문 이후 타 리그에 진출한 타 지역 연고 선수를 지명 외 방식으로 입단시키는 것을 제한하는 규정이 새로 마련되었다. 1996년부터는 해외진출 선수의 경우 연고구단에 트레이드/지명 우선권을 주기로 하였으나, 1년 후 얼마 안 가 트레이드 신인지명을 거쳐야 뛸 수 있도록 규칙이 개정되었다.[5]
2.2. 프로 선수 시절
어쨌든 최창양은 단연 1996년 최고의 신인으로 꼽혔고, 최소한 10승 이상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는 150km/h의 매력적인 속구를 가졌기도 하지만, 어쨌든 미국 진출로 인해 네임밸류가 높아져서였기도 했다. 당시에는 마이너리그든 뭐든 미국 야구를 경험해본 선수가 희소했기 때문에 최창양의 주가는 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창양의 삼성 입단 즈음(95년 12월)에 마이너리그 경력을 가졌던 한국인 선수는 그를 포함해 5명에 불과했다.[6]
최창양은 4월 14일 중간투수로 첫 출장 이래 4월 21일 대구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자신의 KBO 첫 선발 출장에서 완투승, 그 다음 26일에는 완봉승을 기록하며 기대치를 높여나갔다. 5월 초까지 선발로 3연승을 기록했지만 이후 6월까지 귀신같이 4연패를 기록, 이후 7월 말에 1승을 거두고 다음 1승은 그로부터 한 달 후에야 거둘 수 있었다. 10승 투수라는 기대감으로 시즌을 시작했으나 결국 10패 선수로 끝을 맺었다. 96년 최종 성적은 24경기 6승 10패 ERA 3.86.
최고의 신인으로 기대되던 만큼 첫 시즌 당연히 10승을 해줄 것이라 믿었던 최창양이 10패를 했지만, 팀 순위가 당시 역대 최악인 6위였고, 표면상 성적이 '3점대 ERA 투수'였던지라 삼성 팬들은 최창양이 첫 해의 불운(?)을 딛고 차세대 에이스로 활약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1997년, 최창양은 그보다 더 못한 성적을 썼고 5승 3패 ERA 4.75를 기록했다.
구속은 좋았으나 그뿐이었다. 영점을 잡지 못했고, 폭투도 많이 나왔다. 1997년 8월 8일 13구 연속 볼이라는 기록을 세울 정도로 제구력은 나아지지 않았다. 경기 외적으로도 좋지 않아 자기관리에 소홀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결국 1998년 어깨 부상을 당해 전력 이탈, 재활 후 1999년 말미에서야 선을 보였지만 영 좋지 못했다. 2000년까지 최창양은 계속해서 선발 투수로 뛰었지만 계속해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게 되고 결국 시즌 중간 2군으로 모습을 감춘 뒤 다시는 콜업되지 못했다. 2000년 최창양의 성적은 23경기 5승 2패 ERA 6.27. 결국 2001년 한 해를 2군에서 그대로 보내다 방출, 그대로 은퇴하였다.
은퇴 후에는 서울에서 야구 레슨을 하고 있다.
입단 초 최창양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던 백인천 감독은 잘해야 5~6승이라고 장담했는데, 그 말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만큼 최창양이 성실하지 못했다는 뜻.
3. 여담
임창용이 최연소 150세이브포인트를 기록했던 경기[7] 의 선발투수였다. 이날 최창양은 승리투수가 되었다.
73년생에 92학번으로 의외로 황금세대의 일원이다. 그의 동기생들은 임선동, 박재홍, 조성민, 박찬호, 송지만 등등이 있다. 하지만 최창양은 대학 시절 크게 주목받은 편은 아니었다. 임선동-조성민-손경수 트로이카가 한창 관심을 독차지하던 때인 데다, 강점이던 구속 쪽에서는 한 해 먼저 미국 땅을 밟은 '''박찬호'''가 있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