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동
1. 소개
前 LG 트윈스, 현대 유니콘스 소속 야구 선수, 現 부천 진영고등학교 감독. 한국프로야구계에서 풍운아로 일컬어지는 선수들 중 한 명이자 짧고 굵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선수다.
2014년부터 연세대학교 야구부 투수코치로 활동하게 되었다.[4]
2. 아마추어 시절
휘문고(84회)[5] 시절 신일고 조성민, 경기고 손경수와 함께 서울 팜의 초고교급 투수였고 대학 시절에는 3인방의 선두주자였다. 박찬호, ,[6] 박재홍, 송지만, 김종국, 홍원기, 손혁 등과 함께 소위 '''황금의 92학번'''이라 일컬어지는 세대 중 한 명.
당대 최고의 유망주였던만큼 잠실 라이벌 OB 베어스와 LG 트윈스 양 팀 모두가 임선동을 노리고 있었는데, 1991년말 신인 지명 때 OB와 LG 중 주사위 던지기에서 이긴 LG가 결국 임선동을 1차 지명으로 뽑았다. 여담으로 이 때 조성민은 "나는 고려대학교를 갈 거니까 LG나 OB는 괜히 나를 지명해서 1차 지명권 날리지 마라"고 공식 선언한 상태였고, 결국 당장 투수가 급했던 OB는 손경수를 지명한다. 허나 당시 2억 원의 계약금을 제시했던 OB의 기대와 달리 손경수는 장학금을 제시한 홍익대학교에 입학해 버리고, 거기서도 가정사와 사생활 문제로 1993년 말 자퇴한 후 1995년 OB에 입단했다. 하지만 손경수는 간염 악화로 1군에 오르지 못한 채 입단 첫 해 시즌이 끝나고 임의탈퇴된 후 잊혀지고 만다.[7]
한편 임선동은 휘문고를 졸업하고 LG에 입단하는 대신 연세대학교에 진학했는데 연세대학교 4학년 시절 일본프로야구 다이에 호크스와 한국실업야구 팀 현대 피닉스, 지명권을 주장한 LG 트윈스 사이에 3중 계약 파문을 일으키며 마찰을 빚었다.[8]
결국 임선동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내세우며 LG 트윈스에 소송을 걸었고 2년간의 법정 공방을 통해 승소했으나 이 사이 다이에는 KBO 리그의 지명권을 존중한다면서 영입에 손을 뗀 상태였고[9] 현대 피닉스를 프로화하려던 현대그룹의 계획은 무산됐기에 현대그룹은 대신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서 1996년 현대 유니콘스를 창단한 상태였다. 임선동은 울며 겨자먹기로 법원의 조정안에 따라 LG 트윈스에 입단했는데 당시의 조정안이 우선 지명권을 지닌 LG 트윈스에 입단 후 2년 뒤에 자신이 원하는 팀으로 트레이드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런 임선동의 행위는 KBO 리그의 질서를 심각나게 어지럽히는 일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우선 프로의 기본이라고 볼 수 있는 계약관계를 무시했으며 전체적으로 전력이 평준화돼야 보는 즐거움도 있고 판 자체가 커지게 돼있는 프로스포츠에서 현대 유니콘스와 같은 방식으로 특정 팀에 대한 비정상적인 전력 집중이 일어나면 전체적인 흥미 자체가 떨어질 수 있다. 실제로 비정상적인 선수 수급으로 강해진 현대 유니콘스와 삼성 라이온즈가 프로야구판을 지배하던 2000년대 초중반은 KBO 리그 역사에서도 관중 동원력이 가장 떨어졌던 시기였다. 700만 관중을 돌파한 2012년의 반도 안 되는 300만도 못한 수준이었고 1995년에 500만관중을 돌파하면서 엄청난 붐을 일으켰던 상황에 비해서도 엄청난 관중 감소가 일어났다.[10][11]
다만 애초에 드래프트라는 제도 자체가 명백한 담합 행위에 해당하며,[12] 바로 그런 이유로 임선동은 어쨌건 법원에서 승소했다.[13] 위 항목에서는 프로의 기본인 계약을 무시하였다는데, '''애초에 LG는 임선동과 계약을 한 것이 아닌, 일방적으로 지명을 했을 뿐이다.''' 따라서 드래프트는 원활한 리그 운영을 위해 선수노조가 자신들의 자유로운 계약 권리를 일부 포기하였기에 성립할 수 있는 제도이고, 선수노조가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의 KBO 리그에서 드래프트를 이유로 계약을 막은 것은 '''원칙상으론 엄연한 불법행위가 맞다.'''
사실 미국식 프랜차이즈 제도에 익숙한 대한민국 스포츠 팬들에게는 드래프트 제도가 익숙해서 별 말이 안 나오는 것이지, 드래프트는 '''근본적으로 헌법에 명시된 직업 선택의 자유를 무시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종목을 가리지 않고 이와 관련된 잡음은 꾸준히 터져나온다. 독일로 떠난 문성민, 1:8 트레이드로 이적한 황선홍, 상무로 도피한 양준혁이 대표적이며, 여자축구계에서는 팔자에도 없는 군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반대로 상무를 거부한 최유리같은 사례도 있다. 리그 전체의 이득을 위해 개별 선수의 권익을 제한하는 제도이니만큼 한번쯤은 생각을 해 볼 문제. 이는 트레이드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임선동의 소송은 KBO 리그 선수 전체의 권익 신장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본인의 사리사욕을 목적으로 행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훗날 선수협 창립 당시 동료들을 외면하고 프런트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의혹도 있는 것을 보면 더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런지 임선동이 법적으로 승소는 했지만 이 시기를 전후해서 LG 팬들로부터 도덕성 문제로 무수한 욕을 들어먹어야 했다.[14]
3. 프로 시절
1996년에는 소송 등을 겪으며 프로 입단이 미뤄졌다. 그래도 아마시절에 화려한 명성을 얻었고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국가대표팀에 선출될 정도로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났기에 1997년 입단 첫 해에는 11승 7패 평균자책점 3.52를 기록하며 신인 투수로서도 나름 잘해줬다. 그러나 코시에서 탈탈 털렸고 다음 해에 태업을 하면서 추락한다.[15]
1999년 1월 LG 측에서 안병원을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에 현금 트레이드된 후[16]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첫 해에는 별로 신통치 못한 성적 '''0승 1패''', '''ERA 8.05'''을 찍으면서 팬들의 빈축을 샀다. 하지만 2000년에 갑자기 잠재력이 폭발하면서[17] 18승 4패 평균자책점 3.36 174개의 삼진을 기록하면서 다승왕, 탈삼진왕을 동시에 거둔다. 이 활약으로 KBO 골든글러브도 수상하고 2000 시드니 올림픽에도 출전해 동메달도 수상했다.[18]
2000년 시즌 후에 에이스 정민태가 일본에 진출함으로써 임선동은 팀내 실질적인 에이스로 급부상하게 된다. 2001년에는 14승 8패 방어율 4.40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임선동은 갑자기 허리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해 이듬해 2002년에는 8승 6패[19] 4.51을 기록, 8월 말 시즌 중에 허리 통증이 심해지면서 '''시즌아웃'''되었다. 그래도 2002년까지는 나름대로 활약은 해줬지만 이후 부상이 심화됐고 훈련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2003년 이후로는 팀의 전력에 보탬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승수를 쌓지 못한 채 2007년 소속팀 현대에서 방출당하고 곧바로 은퇴했다.
결과적으로는 잠시 잘 나가기도 했지만 재능에 비해 롱런하지는 못했고 아마에서나 프로에서나 '''게으른 천재'''로만 남은 선수. 그래도 한 시즌이나마 골든글러브와 다승왕, 탈삼진왕을 거머쥐며 정상에 올랐던 점이 그의 넘치는 재능을 증명해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임선동을 탈쥐효과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가 애초에 역대급 재능을 지닌 선수였고 LG에서 1년차에 좋은 성적을 거뒀고 2년차는 태업이었음을 생각하면 틀린 말이다.
어떤 의미로는 1990년대에 매년 대박을 거두던 LG의 1차지명 역사에 이정길 이상으로 찬물을 끼얹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고 덕분에 1997년이 되면 조성민을 1차지명으로 얻고 임선동과 함께 '''원투펀치'''로 써서 도합 30승은 거둘 수 있을 거라고 꿈꾸던 LG 팬들은 쓰라린 좌절을 맛봐야 했다.
4. 은퇴 이후
풍운아라는 별명답게 은퇴 후에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스튜어디스 출신 아내를 만나 잘 살고 있다고 하니 나름대로 승리자.[20] 결혼하기 전에는 방송인 박소현과 사귀었다.[21][22]
야구계에서 떠나 잠시의 휴식을 가진 뒤 덕수중학교 투수코치로 잠깐 있다가, 2014년 자신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투수코치로 부임하였다. 살이 정말 많이 쪘다.
2018년에는 휘문고-연세대 동기인 석주일이 진행하는 아프리카TV 방송에 간간이 출연하고 있다.
2020년부터는 진영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청룡기 대회에 참가한 이후 두 번째 출전 만에 팀을 16강에 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2021년 1월 18일 근황을 다룬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무난하게 인터뷰 한 편. 1편, 2편 참고로 키움이 현대의 후신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임선동 뿐만 아니라 야구인들이 대체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야구선수들 입장에서 후원처만 바뀌었을 뿐 같이 운동하고 시합하는 구성원이 바뀌진 않았기 때문에..
5. 기타
응답하라 1994에서 잠시 언급되었다. 칠봉이의 설정과 같은 연세대학교 야구부 출신 거물 유망주였기 때문. 그리고 대학 시절에는 자신이 칠봉이와 외모가 비슷했다는 망언(?)을 했다(...).
운동선수들은 은퇴하면 먹는 것은 현역 시절 그대로인데 운동을 안 하니 칼로리 소모를 못해서 살이 찌는 경우가 많은데, 임선동은 특히나 대학시절 병역면제를 위해 무리하게 체중을 불린 적까지 있어서 위장이 커지다 보니 은퇴 후 리바운드가 더 심하게 온 것. 루키 시즌인 1997년의 LG트윈스 팬북에서도 선수들의 Q&A 페이지가 있었는데, 그 중 임선동은 '효과적으로 체중 감량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요?'에 답하는 것으로 나왔다. (물론 선수가 답변을 했을 리도 없지만) 결과적으로 체중 조절에 대해서는 현역때나 은퇴 후나 반면교사와도 같은 인물이다.
얼마나 위장이 컸냐면, 방송에서 푼 썰 중에 현역시절 전지훈련을 가서 짜파게티를 5봉을 한 냄비에 먹었는데, 먹고 나서 후배가 "선배님 치울까요?" 하고 묻자 "냅둬 2세트 시작해야지" 하고 말하고는 잠시 휴식 후 5봉을 또 먹어 총 앉은 자리에서 10봉을 해치웠다는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썰이 있을 정도. 저 몸을 보면 신빙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임선동열이라는 이름 말장난이 있다(...). 실제로 잘 나가던 휘문고 시절에는 이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재미있게도 투수 트레이닝 교본 "김건우의 투수훈련법"에서는 임선동의 투구동작이 좋지 못한 투구동작의 표본으로 실려있는데, 대조되는 좋은 투구동작의 표본으로는 선동열이 실려 있다.
박명환야구TV에서 조용훈은 임선동의 화려한 입담을 칭찬했다. 박명환야구TV에 꼭 나와줬으면 한다고.
6. 연도별 주요 성적
7. 관련 문서
[1] 자세한 건 아래 프로 시절 이야기에서 후술.[2] 사회체육학과 (1992학번)[3] 애초에 뛴 적도 없고 그냥 실업 야구팀인 현대가 지명권을 주장했었다.[4] 조성현 연세대 감독의 제의로 모교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조성현 감독은 임선동에게 대학 선배이며, 덕수중 감독 시 임선동이 투수 인스트럭터로 근무했다.[5] 같은 학교의 농구부 1년 후배가 서장훈, 2년 후배가 현주엽이다.[6] 대학을 거치지 않고 고교 졸업 후 프로에 입단했다. 동기생으로 구분될 뿐, 92학번으로 불릴수는 없다. 또한, 정민철은 1년 유급한 72년생으로, 92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보다 1살 연상이다. 편의상 92학번으로 보는 듯.[7] 당시 홍익대학교 야구부 감독이었던 박종회의 말에 따르면, 손경수는 야구부 숙소에서 있는 일수가 1년 중 100일이 안 될 정도로 자기관리가 굉장히 나빴다고 한다. 잦은 음주로 인해 홍익대학교 시절부터 간염이 발병했고, 음주폭행도 잦았다고 한다. 이미 군 면제를 받았는지라 임탈 이후 3년 간 방황하고 나서 1998년 OB 복귀를 위해 입단 테스트를 받았는데, 결국 불합격하여 완전히 은퇴한 듯.[8] 일본 다이에 호크스가 임선동에게 입단제의를 한 배경은 한국에서의 국가대표 경력도 경력이지만 결정적으로 1995년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 결승전에서 구원투수(선발투수 문동환이 조기강판)로 나와 묵직한 속구와 타자의 바깥쪽과 안쪽을 정확히 찔러넣는 역투(경기 자체는 9회에 역전패당한다)를 펼쳐 일본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9]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이 소식을 들은 임선동은 격분하여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다가 상처를 입기까지 했다. 여기에 학점 미달로 연세대학교 졸업이 늦어졌고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에 뽑혔을 때 이 문제로 논란을 빚었다.[10] 물론 현대와 삼성이 무자비하게 돈지랄을 한 것도 원인이긴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으로 야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도 영향을 끼쳤다.[11] 현대는 창단 초기에 무지막지한 재력을 이용해 박경완, 조규제, 전준호, 마일영 등의 선수들을 편법으로 긁어 모아 강해진 전력이 있다. 삼성도 이에 영향을 받고 쌍방울로부터 김기태, 김현욱 등을 털어먹었다.[12] 구단 마음대로 지명할 선수를 선택하고, 거절하면 모든 구단이 계약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다.[13] 이런 이유 때문에 유럽 스포츠계는 대부분 드래프트 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14] 특히 LG에서의 2년차에 사실상 태업성 플레이를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15] 2년차 징크스라기보단 다이에 호크스행을 무산시킨 소속팀 LG를 위해 열심히 뛸 의욕이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16] 전년도에 해태로부터 조계현을 데려왔으나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삼성이 7억을 지르자 현대가 1억 더 얹은 8억을 불러 성사시킨 것. [17] 이 시기 때 투수코치였던 김시진이 임선동을 상당히 신경써서 관리한 영향이 크다. 러닝훈련을 직접 감독하고 야식 먹는 것까지 일일이 감시했을 정도였으니. 사실 임선동은 연세대 시절 병역면제 판정을 받기 위해 엄청나게 체중을 불린 일이 있고 그 뒤로 구위가 상당히 저하된 상태였다. 그걸 되돌려서 포텐셜을 터뜨리게 만들었으니 정말 ㅎㄷㄷ하다.[18] 한편, LG로 간 안병원은 4년간 추격조로 뛰다 은퇴했다.[19] 팀내 다승 3위, 1위는 12승 10패 ERA 4.88을 기록한 김수경[20] 은퇴 전 용인에 투자한 부동산이 대박이 나서 수백억원대의 수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 때 돈을 왕창 번 탓에 더 이상 야구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은퇴했을 거라는 설이 제기도 했다.[21]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방송인''' 맞다.[22] 박소현이 임선동보다 2살연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