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푸

 

曲阜
영어 Qufu / Chufu
1. 개요
2. 공자묘


1. 개요


중국 동부 산둥성의 도시. 지닝시에 속하는데 공자의 고향이자 그 사당과 묘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춘추전국시대 노나라의 수도로 그 유적이 남아있고 시가지 역시 명나라 때 건축된 성벽으로 둘러쌓여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다. 시내의 인구는 6만, 행정구역 (현)의 인구는 65만 명에 이른다. 문화대혁명 당시에 상당수 문화재와 유적이 홍위병에게 파괴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중국이 개혁개방 노선을 표방하면서 공자도 재평가되어 문혁 당시 파괴되었던 유적는 다시 복원되었다. 현재 중국과 세계 전역에서 수백만명 이상이 몰려드는 관광도시로 이름을 날린다.
다만 취푸의 유적과 유물이 복원되고 공자가 재조명받 는것은 좋은데 돈벌이에 너무 치중하다보니 유적지 중 일부가 호텔이나 가게 등 상업시설로 이용된다거나 심지어 공자 이름을 내걸고 복권을 발행하는 등 상업화에 너무 찌든다는 비판이 많다. 즉, 공자가 브랜드 광고판이 되어버렸다는 것(...) 그러나 취푸시 정부나 공자가문의 후예도 이러한 돈벌이로 이익을 보기 때문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런 돈벌이는 이어질 것이다. [1]
공부가주라는 고량주가 특산물로 유명하며, 공자가문의 요리라는 공부채도 유명하다.
교통편으로 철도버스와 있는데 취푸둥역에서 내리면 된다.

2. 공자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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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푸(曲阜)의 공부(孔府) 대성전(大成殿)
공부 전경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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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글
취푸의 공자 유적
영어
Temple and Cemetery of Confucius and
the Kong Family Mansion in Qufu
중국어
曲阜孔庙、孔林和孔府
프랑스어
Temple et cimetière de Confucius et
résidence de la famille Kong à Qufu
국가·위치
중국 산둥성 취푸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4년
등재기준
(i)[2], (iv)[3], (vi)[4]
지정번호
704
한무제가 유학을 본격적으로 진흥하기 시작한 이래 공자는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만세의 스승으로 하늘같이 떠받든 존재였다.
사마천사기를 집필할 때 공자를 제후와 동급인 세가 문서에 서술했고, 그 후 역대 왕조는 공자에게 대성지성문선왕이라는 작위를 내렸으며 이러한 융숭한 대접은 공자의 후손들 중에서도 공자의 직계 가문에게 계속 이어졌는데, 후(侯)나 공(公)의 작위를 내리고 대대로 공자의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왕조가 바뀌더라도 공자 직계 혈통에 대한 대우는 날이 갈수록 후해졌기 때문에 오랜 세월 축적된 부와 명예가 대단했는지라 곡부의 공부(孔府)를 가리켜 '''성부(聖府)'''라는 존칭을 쓸 정도였다. 심지어 명나라 때는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을 본따 공부의 대성전을 짓고 자금성에만 허용되던 황금빛 기와지붕과 자금성에도 없다는 용을 아로새긴 대리석 기둥을 세웠다. 청나라 때에는 만주족과 한족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관례를 편법을 써서 회피하는 식으로 연성공을 부마로 삼기도 했다.
이는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면적만으로도 공자 이하 유교 성현들의 사당인 공묘(孔廟)는 13만 제곱미터에 건물 466칸, 공자 후손들의 저택인 공부(孔府)는 16만 제곱미터에 건물 480칸, 공자 일족의 묘역인 공림(孔林)은 200만 제곱미터라는 무시무시한 크기를 자랑한다. 공자의 묘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파괴되었다가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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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종갓집은 국부천대 때 대만으로 옮겨갔다.[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