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맥헤일
1. 개요
前 NBA 선수이자 前 NBA 감독 및 단장(GM).
2. NBA 시절
1980년대 보스턴 셀틱스 왕조에서 래리 버드, 로버트 패리시와 함께 3번의 우승, 2번의 준우승을 이뤘다. 이들 3명은 역대 최고의 프론트 코트로 손꼽히기도 한다.
데뷔 초기에는 주전 포워드 세드릭 맥스웰의 백업이었던 식스맨이었고, 1984년과 1985년 2차례 식스맨 상을 받았다. 1984-85 시즌 도중 세드릭 맥스웰이 무릎 부상으로 빠지자 본격적인 주전 선수로 투입되기 시작했다.
13시즌동안 보스턴에서 17.9점(FG 55.4%), 7.3리바운드, 1.7블록, 1.7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번의 식스맨 상을 받았고 1번의 ALL-NBA 1st TEAM 과 2번의 NBA All-Defensive 1st TEAM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올스타에도 7번 선정되었다. 커리어 하이인 1986-87 시즌에는 평균 득점 26.1점(FG 60.4%), 9.9리바운드, 2.2블록, 2.6어시스트을 기록했고, 이해 ALL-NBA 1st Team과 NBA All-Defensive 1st Team에 선정되었고, 이해 MVP 투표에도 4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등번호 32번은 보스턴 셀틱스의 영구결번으로 선정되었고, 1996년 ESPN이 선정한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인 중 1명에 선정되었다. 2016년 ESPN이 선정한 NBA 랭킹 31위(PF 랭킹 6위)에 선정되었고##, SI에 선정한 NBA 랭킹 49위에 선정되었다.##
1980년대 보스턴 셀틱시의 래리 버드-케빈 맥헤일-로버트 패리시의 3인방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매직 존슨-카림 압둘 자바-제임스 워디의 3인방과 자주 비교되곤 했다. 이들 6명은 나중에 모두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3. 플레이스타일
1980년대 중반 팀의 에이스인 래리 버드에 이은 2인자였고, 맥헤일보다 반세대 후의 찰스 바클리나 칼 말론에 살짝 가리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를 풍미했던 명 파워 포워드이다.
로우 포스트에서 환상적인 풋워크를 가지고 있어서 골밑 득점력이 매우 뛰어났고, 특히 포스트업 기술이 매우 뛰어났는데, 그 하킴 올라주원이 케빈 맥헤일의 포스트업을 보고 배웠다고 말했을 정도로 뛰어난 풋워크와 포스트 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1] 게다가 자유투도 빅맨으로서는 매우 뛰어난 통산 79.8% 성공률을 기록했다.[2][3]
수비력도 아주 좋았는데 NBA All-Defensive 1st Team에 3회, NBA All-Defensive 2nd Team에 3회 선정될 정도였다. 다만 리바운드는 커리어 평균 7.3개, 커리어 하이가 9.9개일 정도로 압도적이지는 못했다.[4] 찰스 바클리가 버드보다 골밑이 훨씬 쎄지만 파워 포워드가 주포지션이였으니
신장보다 미친듯이 긴 팔을 가져서[5] 골밑 장악력과 수비력이 좋았고, 아무래도 백인 선수라 강력한 하드웨어와 운동능력이 아주 뛰어났던 선수는 아니었지만, 뛰어난 센스와 매우 뛰어난 기술로 상대를 압도하던 선수였다. 찰스 바클리는 현역 시절 가장 상대하기 힘든 선수로 맥헤일을 꼽았을 정도.[6]
4. 은퇴 후
은퇴 후 1994년에 고향팀인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부단장으로 프런트 생활을 시작했고, 1995년부터 단장으로 승진하여 케빈 가넷을 지명한 후 1996/97 시즌부터 8시즌 동안 울브스를 플옵 컨텐더 팀으로 만드는 데 공헌했으나, 2000년에 터진 조 스미스 이면계약 파동으로 5년 동안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박탈당하는 등의 물의를 빚기도 했다. 울브스가 한창 암흑기에 접어들 무렵인 2005년에 감독대행을 했고, 2008년 퇴임 후 2009년까지 감독을 지내기도 했다.
2011년에는 휴스턴 로케츠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별다른 전술 능력이 없이 선수단에 의존한다는 평가를 받긴 했지만 2013-14 시즌에는 2월의 감독상을 수상했고 2014-15에는 56승 26패를 기록하며 서부 컨퍼런스 2위를 차지하는 등 정규시즌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다.(휴스턴 통산 193 승 130 패, 승률 .598) 2015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진출하는 등[7] 의 실적을 냈지만 2015-16 시즌 출발과 함께 4승 7패로 부진했고 곧바로 경질되었다.[8] 이후에는 TNT 등지에서 농구 해설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9]
Inside the NBA All-Star Ultimate Fantasy Draft에서 자신의 팀의 모든 선수들을 보스턴 셀틱스 출신으로 채웠다. 원클럽맨으로서 아직도 셀틱스에 깊은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1] 오죽하면 상대했던 선수들이 케빈 맥헤일을 상대했을때의 페인트존을 '''고문실'''이라고 했을까...[2] 1986-1987시즌에 그는 60%이상의 필드골 성공률과 80%이상의 자유투 성공률을 기록하는데,한시즌 60-80클럽은 오직 맥헤일만이 가지고 있는 대기록이다. 시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가드는 4할대가 일반적이고 빅맨이라도 야투율 50%만 되어도 효율적인 득점원이라 평가받는다. 보통 6,7할대의 미친듯이 높은 야투는 보통 받아먹기 득점만 조금 하는 디안드레 조던이나 타이슨 챈들러 같은 선수들이 주로 기록한다. (디조던은 7할도 여러번 넘겼다) 샤킬 오닐은 야투율 리그 1위를 10번 했는데, 커리어 하이가 60.9%였다. 즉, 6할대 득점은 거의 모든 득점이 골밑에서 이뤄지는 선수들만이 기록하는 것으로, 멕헤일처럼 페이더웨이슛이나 중거리 점프슛도 많이 쏘는데 6할인 선수는 거의 없었다. 끽해야 89-90시즌에 야투율 6할로 25점을 넣은 찰스 바클리 정도. 그런 바클리조차도 자유투 8할을 넘은 적은 없다. 즉, 야투율이 높으려면 거의 덩크나 레이업만 하는 빅맨이어야 하는데, 이런 빅맨치고 자유투를 잘 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슈팅력이 있으면 중거리슛 등 다양한 방법으로 득점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야투율이 자연스레 떨어진다) 야투율 6할과 자유투 8할을 동시에 넘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멕헤일은 슛거리가 긴 빅맨치고 비정상적일 정도로 야투율이 높았기에 가능했던 기록.[3] 사실 이건 그의 팀복도 있다. 맥헤일은 커리어 내내 래리 버드랑 뛰었는데, 버드가 득점왕급에 준하는 득점원이었기에 자연스레 그에게 수비가 몰렸기 때문. 둘의 스탯을 보면 비슷해보이는 시리즈도 있지만, 실제 경기를 보면 버드는 집중수비를 뚫고 하는 반면 맥헤일은 버드에게 수비가 몰렸을때 오픈됐다가 그의 꿀패스를 받아 하는 득점이 많다. 문제는 맥헤일 본인도 전성기 때 '''에이스급''' 득점원이었던 것. 안 그래도 득점력이 좋은데 수비를 분산해주는데다 패스까지 좋은 레전드 동료가 있으니 야투율이 높았던 것이다. 만약 맥헤일이 원맨팀의 에이스였다면 5할은 훌쩍 넘기는 높은 야투율을 기록했겠지만 6할까진 힘들었을 수 있다. 주득점원으로 6할은 바클리나 오닐처럼 골밑 득점력이 초월적인 자들의 전유물에 가깝다.[4] 스몰 포워드 버드가 커리어 평균 10개를 찍은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다만 버드는 종종 센터를 막기도 할 정도로 당시 스몰 포워드치고도 골밑이 매우 강한 선수였다. 그보다 리바운드가 강한 스몰 포워드는 역대급으로 따져도 엘진 베일러 정도 말고는 거의 없다.[5] 무려 8'0 (약 244cm)의 윙스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보통 윙스팬이 긴 선수들이 신장대비 10%정도 길지만, 맥헤일은 무려 17%긴 수치이다.[6] 맥헤일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스타일상 바클리의 천적일 수밖에 없는 선수이기도 하다. 바클리는 포지션에 비해 키가 작은 대신 힘이 매우 좋아서 포스트업으로 밀고 들어오는 어떤 선수에게도 밀리지 않았으며, 운동능력이 좋아 젊은 시절엔 1대1 수비에서 강점을 보였다.(대신 팀수비는 좋았던 적이 없다.) 그런데 맥헤일은 포스트업으로 밀고 들어가는 대신 장신이란 점을 살려 페이더웨이나 점퍼를 던지는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맥헤일은 하킴이 그랬듯 페이크를 해서 수비수를 낚는데 능했는데, 바클리는 운동능력에 크게 의존하는 수비를 하는데다 수비할 때 도박을 하는 성향이 강해(스틸과 블록을 노린다는 말. 이 때문에 중요한 순간에 수비실수를 크게 한 적도 많다.) 이런 페이크에 잘 낚였기 때문에 바클리 입장에서 맥헤일을 막는건 그야말로 지옥이었을 것이다. 물론 맥헤일 입장에선 온갖 페이크에 낚여주는 바클리는 훌륭한 호갱님...[7] 2라운드에서 닥 리버스의 LA 클리퍼스를 상대로 '''1승 3패'''로 뒤져있다가 벤치 멤버 중용이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꺼내 '''3연승을 거두며 대역전승'''을 거두기도 했다. 다만 이건 닥 리버스의 대처능력에 문제가 있었다는 게 정설.[8] 성적부진 때문에 직접 해임되었다기보다는 전술 능력 부족 등등의 사유로 해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가 잘린 쪽에 가깝다.[9] 당시에는 수비를 안 하다시피 하던 제임스 하든에 대한 비판에 같이 끼어들었다가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든이 팀의 리더로서 수비를 당부하자 동료들이 실소를 짓던 장면을 묘사하면서 자신이 바로 그 옆에서 보고 있었다고 말을 덧붙인 것. 휴스턴의 감독이었던, 그런 일들에 '''책임을 져야 했던 위치에 있었던 양반이 마치 구경꾼처럼 행동'''했던 일화를 떠벌렸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