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워디

 

'''제임스 워디의 수상 및 영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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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영구결번'''
No. 42

[image]
'''1985'''
'''1987'''
'''1988'''

'''1988년 NBA 파이널 MVP'''
매직 존슨

'''제임스 워디'''

조 듀마스

[image]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No.42'''
'''제임스 애거 워디
(James Ager Worthy)'''
'''생년월일'''
1961년 2월 27일 (63세)
'''국적'''
미국
'''출신지'''
노스캐롤라이나 주 개스토니아
'''출신학교'''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키'''
206cm (6' 9")
'''체중'''
102kg (225 lbs)
'''포지션'''
스몰 포워드
'''드래프트'''
'''1982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지명'''
'''소속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82~1994)'''
'''등번호'''
'''42번'''
'''수상내역'''
'''NBA 챔피언 3회 (1985, 1987, 1988)'''
'''NBA 파이널 MVP (1988)'''
NBA 올스타 7회 (1986–1992)
올-NBA 서드 팀 2회 (1990, 1991)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83)
NBA's 50th Anniversary All-Time Team
NCAA 챔피언 (1982)
NCAA Final Four Most Outstanding Player (1982)
Consensus first-team All-American (1982)
1. 개요
2. NBA 입성전
3. NBA 시절
4. 플레이 스타일
5. 현역 은퇴 후
6. 기타


1. 개요


'''BIG GAME JAMES'''
제임스 워디(James Ager Worthy)는 前 NBA 농구선수로 포지션은 스몰 포워드. 1980년대에 매직 존슨, 카림 압둘 자바와 함께 쇼타임 레이커스를 이끌었던 선수였다.

2. NBA 입성전


명문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에 입성한 워디는 1학년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레전드급 감독인 딘 스미스는 웬만해서는 1학년을 주전으로 내세우지 않았고, 이때까지 유일한 예외는 나중에 NBA에서 MVP를 차지하는 밥 맥아두였다. 그러나 스미스는 이례적으로 워디를 1학년임에도 주전으로 내세우게 된다.[1]
1학년 시즌을 발목부상으로 일찍 접어야했던 그는 NCAA Division I 남자농구 챔피언십에서 당시 팀 동료로 샘 퍼킨스와 앨우드와 함께 준우승을 차지했고, 1982년 NCAA Division I 남자농구 챔피언십에서는 샘 퍼킨스와 당시 신입생이었던 마이클 조던과 함께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제임스는 팀내 1옵션으로 평균 15.6점을 기록했는데, 얼핏 낮아보이지만 당시 감독이었던 딘 스미스는 팀농구를 매우 중요시하는 성격으로, 절대 한 선수에게 공격권이 몰리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 낮은 수치는 아니었다. 일례로 훗날 NBA에 데뷔하자마자 평균 28점을 퍼부으며 총득점 1위를 차지한 조던은 대학을 초토화시키던 시절에도 20점 전후를 기록했다.
당시 워디는 드래프트 최대어였지만 대학 최고의 선수는 아니었다. 당시 대학을 지배하고 있던 선수는 그의 동기이자 전국적인 규모로 인정받는 대학선수상 (네이스미스, AP, 존 우든, 오스카 로버트슨, NABC, 스포팅 뉴스)을 모두 석권한 랄프 샘슨이었다.[2] 샘슨이 드래프트 참가를 선언했다면 1순위가 샘슨, 2순위가 워디가 되었겠고, 실제로 샘슨은 드래프트 참가를 고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1순위를 두고 동전던지기[3]에서 클리퍼스가 이겨서 꿈도 희망도 없는 꼴찌팀 클리퍼스에서 뛸 것을 우려한 샘슨이 대학 잔류를 선언, 워디가 1순위로 지명된다.[4]

3. NBA 시절


1980년대에 매직 존슨, 카림 압둘 자바, 바이런 스캇과 함께 LA 레이커스의 '쇼타임 레이커스'를 이끌었다.
1982년 드래프트 1라운드 1픽(전체 1픽)으로 LA 레이커스에 지명되었다. 1982년에서 1994년까지 NBA에서 12시즌을 뛰어 3번의 우승(1985, 1987, 1988)과 3번의 준우승(1983, 1984, 1989)을 이뤘고 7번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ALL-NBA 3rd 팀에 2번 선정되었다.
별명은 빅 게임 제임스(Big Game James)인데 이는 별명에 걸맞게 큰 경기, 특히 컨퍼런스 파이널이나 파이널에서 맹활약하기로 유명했다.[5] 1987-88 시즌에는 생애 유일한 트리플 더블을 파이널 7차전에서 기록하면서 동료 매직 존슨을 제치고 당당히 파이널 MVP를 수상했다.
12시즌 동안 평균 득점 17.6점(FG 52.1%), 5.1리바운드, 3.0어시스트, 1.1스틸을 기록했다. 커리어 하이인 1989-90 시즌에는 득점 21.1점(FG 54.8%), 6.0리바운드, 3.6어시스트, 1.2스틸을 기록해 이해에 ALL-NBA 3rd팀에 선정되었다. 플레이오프때는 통산 9시즌동안 평균 득점 21.1점(FG 54.4%), 5.2리바운드, 3.2어시스트, 1.2스틸을 기록했는데 이는 정규시즌보다 훨씬 더 좋은 성적이다.
1980년대 LA 레이커스의 매직 존슨-카림 압둘 자바-제임스 워디의 3인방은 보스턴 셀틱스래리 버드-케빈 맥헤일-로버트 패리시의 3인방과 자주 비교되곤 했다. 이들 6명은 나중에 모두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은퇴후 그의 등번호 42번은 LA 레이커스에서 영구결번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


빠르고 득점력이 뛰어난 올-어라운드 스몰 포워드. 속공찬스에서 매직과 워디의 속공 플레이가 매우 유명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Magic to Worthy 라고 불렀다. 워디는 206cm로 당시로선 파워 포워드가 더 어울리는 체격과 힘을 지녔는데 스몰포워드에 걸맞는 스피드까지 지녀서 막기가 굉장히 어려운 선수였다. 페이스 업 상태에서 빠르고 경쾌한 퍼스트 스텝을 통해 골밑까지 파고들어가거나 포스트업 상태에서 재빠르게 스핀무브로 수비수를 제치고 들어가곤 했다. 또한 스피드만 빨랐던게 아니라 포스트업 플레이도 상당히 능했다. 그는 2년 후배 마이클 조던과 동일하게 명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딘 스미스 밑에서 뛰며 탄탄한 기본기를 다지고 나왔는데, 이 때문에 풋워크가 대단히 좋았다. 그의 포스트업 완성도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2014년 당시 코비 브라이언트가 그에게 포스트업 관련해 조언을 구할 정도였다 코비는 전성기이던 00년대 중반부터 이미 대단히 뛰어난 포스트업 능력을 갖고 있었다.
워디의 특기 중 하나는 "Statue of Liberty" 덩크로 워디의 전매특허는 아니었지만[6] 뛰어난 점프력과 스피드를 지닌 워디가 오픈코트에서 뛰다가 거의 자유투라인 부근에서 떠서 찍는 덩크를 따라갈 선수는 거의 없었다.
수비도 디펜시브 팀에 들어갈 정도로 아주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뛰어났던 올-어라운드 플레이어.
다만 현재 스몰포워드들과 차이가 나는 점이라면 당시 스몰 포워드들의 특성상 골밑에서 하는 득점이 많았다는 점. 이 때문에 3점슛은 커리어 통산 500개가 안되며, 마지막 두 시즌에서 경기당 1.4개씩 던진게 가장 많이 시도한 시즌이며 성공횟수는 0.4개에 불과하다. 다만 점퍼의 경우 1990년대 이후 스몰 포워드들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지지만 골밑 마무리 능력은 이들을 압도한다. 따라서 현대 기준으로는 스윙맨(2번/3번)보다 코너맨(3번/4번)에 더 가까운 플레이어였다. 당시 대부분 스몰 포워드들의 행동반경은 현대보다 골밑에 훨씬 가깝게 플레이했다. 비슷한 케이스가 커리어 초창기에 3번으로 뛴 찰스 바클리. 물론 당시에도 슈팅 가드에 가깝게 뛰는 조지 거빈같은 스몰 포워드들이 있긴 했다.[7]
1980년대 초중반까지 매직 존슨-카림 압둘 자바에 이은 팀내 3인자였고 1980년대 중후반 압둘자바의 노쇠화 이후에는 팀내 2옵션였다. (1986-87, 1987-88, 1988-89 세시즌동안 플레이오프 한정 팀내 공격 1옵션이었다. 1988년에는 팀의 에이스인 매직 존슨을 제치고 파이널 MVP를 수상) 동시대의 래리 버드도미니크 윌킨스에 가리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시대를 풍미했던 스몰 포워드이다. 팀내에 매직이나 압둘 자바, 바이런 스캇 같이 우수한 동료들이 많았기 때문에 정규시즌 스탯은 아주 뛰어나지는 않지만 오히려 플레이오프만 되면 정규시즌보다 훨씬 더 좋은 활약을 펼쳤기 때문에 정규시즌 스탯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는다.
만약 전성기때 레이커스가 아닌 다른 팀에 있었다면 그의 전성기 전체를 레이커스와 셀틱스가 꽉 잡고 있어 우승 반지는 못얻었겠지만 팀의 에이스이자 리그 내 손꼽히는 스몰포워드로 충분히 활약했을 것이다. NBA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뽑힐 정도니 당연하다.[8] 여담이지만 당시 레이커스는 디펜딩 챔피언인데다 스몰포워드 자리에 올스타에 3번 오른 자말 윌크스란 좋은 선수가 있었기에 이런 초특급 유망주를 식스맨으로 쓰는 호사를 누렸다.

5. 현역 은퇴 후


  • LA의 지역방송국 스펙트럼 스포츠넷에서 전력 분석을 맡고 있다.
  • 2015년에 LA 레이커스의 어시스턴스 코치로 뛰기도 했다.

6. 기타


  •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고글(보호안경)인데, 1985년 3월 유타 재즈와의 경기에서 눈 부상을 당한 이후로 커리어 내내 항상 고글을 착용했다.

[1] 여담이지만 스미스의 역대 세번째 1학년 주전이 바로 마이클 조던이다.[2] 샘슨의 기세는 그야말로 무서워서 1년 전인 2학년 시절에도 네이스미스, 존 우든, 오스카 로버트슨 상까지는 받았으며, 다음시즌인 4학년 시즌에도 거의 석권할 뻔했다. 이때 유일하게 그로부터 스포팅 뉴스 선정 상을 뺐어간 선수가 바로 2학년 마이클 조던. 조던은 본인의 3학년 시즌에 모든 상을 석권하고 NBA에 진출한다.[3] 이때는 양 컨퍼런스 꼴찌 팀들이 동전던지기로 1순위를 정했고, 서부 컨퍼런스 꼴찌 클리퍼스와 드래프트 지명권을 트래이드해온 레이커스가 동전 던지기를 했다. 당연히 레이커스는 디펜딩 챔피언이니 꼴찌는 아니었지만.[4] 아이러니하게 만약 샘슨이 드래프트에 나섰더라면 클리퍼스는 커녕 명문 레이커스에서 행복한 데뷔를 할 뻔했다. 심지어 샘슨은 나중에 하킴 올라주원과 뛸때 볼 수 있듯 파워포워드 소화가 가능했기 때문에 센터 카림 압둘자바와 초장신 트윈타워를 구성해서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였을 것이다. 물론 이 경우 휴스턴 때보다 더 달리는 농구를 했을 것이기 때문에 선수생활이 더 짧아졌을 순 있지만, 어쨌든 80년대에 레이커스의 위력은 더욱 무서웠을 것이다.[5] 89년에 63승을 기록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는 역대급 강팀이자 최강의 수비팀으로 플레이오프에서 시카고 불스를 제외한 모든 팀을 스윕해버릴 정도였는데, 이때 플레이오프에서 이 팀을 상대로 한번이라도 40점을 넘긴 선수는 마이클 조던과 워디 단 둘 뿐이었다.[6] 팔을 위로 쭉 뻗고 날아가는 모습이 자유의 여신상 같다고 붙은 이름. 테런스 스탠스베리란 선수가 덩크 콘테스트에서 선보이기도 했다.[7] 한때 NBA의 대세였던 2-3번을 오가는 스윙맨의 시초격 선수 중 하나로, 거빈은 전성기 때 두 명의 가드와 함께 출전했고 스몰포워드로 뛰었으며 스몰포워드에 맞는 체격을 갖고 있었으나 플레이스타일은 누가봐도 슈팅가드였다. 이 때문에 그는 역대 포지션 랭킹에서는 슈팅가드로 분류된다. 사실상 스몰포워드 포지션에서 출전한 슈팅가드.[8] 참고로 당시 2순위는 올 NBA세컨팀까지 오른 테리 커밍스, 그리고 3순위는 도미니크 윌킨스이다. 그의 재능으로 보면 도미니키 윌킨스처럼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리그를 뒤흔든 불운의 에이스로 기억됐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