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림 압둘 자바

 

'''카림 압둘 자바의 수상 및 영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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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 1972년 NBA 정규시즌 MVP'''
윌리스 리드

'''카림 압둘 자바'''
(루이스 앨신더/개명)

데이브 코웬스
'''1974년 NBA 정규시즌 MVP'''
데이브 코웬스

'''카림 압둘 자바'''

밥 맥아두
'''1976년 ~ 1977년 NBA 정규시즌 MVP'''
밥 맥아두

'''카림 압둘 자바'''

빌 월튼
'''1980년 NBA 정규시즌 MVP'''
모제스 말론

'''카림 압둘 자바'''

줄리어스 어빙
'''1971년 NBA 파이널 MVP'''
윌리스 리드

'''카림 압둘 자바'''
(루이스 앨신더/개명)

윌트 체임벌린
'''1985년 NBA 파이널 MVP'''
래리 버드

'''카림 압둘 자바'''

래리 버드
'''1971년 ~ 1972년 NBA 올해의 득점왕'''
제리 웨스트

'''카림 압둘 자바'''
(루이스 앨신더/개명)

네이트 아치발드
'''1975년 ~ 1976년 NBA 올해의 블락왕'''
엘모어 스미스

'''카림 압둘 자바'''

빌 월튼
'''1979년 ~ 1980년 [전미 농구 협회|[NBA]] 올해의 블락왕'''
조지 T. 존슨

'''카림 압둘 자바'''

조지 T. 존슨


'''1985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image]
메리 루 레튼

'''카림 압둘 자바'''

조 패타노

[image]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영구결번'''
No. 33
[image]
'''밀워키 벅스 영구결번'''
No. 33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image]
'''카림 압둘 자바'''
헌액 연도
1995년

[image]
'''밀워키 벅스 No.33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No.33 '''
'''카림 압둘 자바
(Kareem Abdul-Jabbar)'''[1]
'''생년월일'''
1947년 4월 16일 (77세)
'''국적'''
[image] 미국
'''출신지'''
뉴욕주 뉴욕시
'''종교'''
가톨릭이슬람
'''신체 조건'''
219cm (7' 2.25'') 103kg
'''포지션'''
센터
'''드래프트'''
'''1969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밀워키 벅스 지명'''
'''등번호'''
'''33번'''
'''역대 소속팀'''
'''밀워키 벅스 (1969-1975)'''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75-1989)'''
'''지도자 경력'''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어시스턴트 코치 (2000)
오클라호마 스톰(USBL) 감독 (2002)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어시스턴트 코치 (2005-2011)
'''수상내역'''
'''NBA 챔피언 7회 (1971, 1980, 1982, 1985, 1987-1988, 2010[2])'''
'''NBA 파이널 MVP 2회 (1971, 1985)'''
'''NBA 정규시즌 MVP 6회 (1971-1972, 1974, 1976-1977, 1980)'''
'''올-NBA 퍼스트 팀 10회 (1971-1974, 1976-1977, 1980-1981, 1984, 1986)'''
'''NBA 올스타 19회 (1970-1977, 1979-1989)'''
'''올-NBA 세컨드 팀 5회 (1970, 1978-1979, 1983, 1985)'''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5회 (1974-1975, 1979-1981)'''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6회 (1970-1971, 1976-1978, 1984)
'''NBA 올해의 신인상 (1970)'''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70)
'''NBA 올해의 블락왕 4회''' (1975-1976, 1979-1980)
NBA 올해의 득점왕 2회 (1971-1972)
NBA 올해의 리바운드왕 (1976)
네이스미스협회 선정 올해의 대학선수상 3회 (1967-1969)
'''NCAA 챔피언 3회 (1967-1969)'''
'''NCAA 파이널 포 MOP 3회 (1967-1969) [3]'''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95)'''
1. 개요
2. 선수 경력
3. 스카이훅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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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HE CAPTAIN'''
NBA의 전 농구 선수. 본명은 퍼디낸드 루이스 앨신더 주니어(Ferdinand Lewis Alcindor, Jr)였지만,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이름을 바꿨다.
빌 러셀, 윌트 체임벌린과 함께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 중 한명이자, 이 셋 중에서도 '''마이클 조던 이전 NO.1 플레이어'''를 논할 때 제일 먼저 언급되는 선수이다.[4][5]
1969년부터 1989년까지 뛰었으며 통산득점 38,387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NBA 통산 1위에 해당한다.
세이버메트릭스로 보더라도 엄청난데
  • WS 단일시즌 1위(25.37 / 1971-72시즌)
  • WS 통산 1위(273.41)
  • OWS[6] 단일시즌 1위(18.31 / 1971-72시즌)
  • OWS 통산 1위(178.92)

2. 선수 경력




뉴욕 출신으로 1947년에 태어났으며 농구 이전에는 야구 외에 수영축구도 했었다. 14세 때인 1961년부터 파워 메모리얼 아카데미(1984년 폐교.) 시절 잭 도나휴 감독[7]에게 농구수업을 받았다. 고교 시절 71연승을 기록하는 등 고교 시절부터 뛰어난 기량을 보여왔고, 1966년에 농구명문 UCLA에 입학하여 존 우든 감독의 가르침을 받아 3년 동안 전부 NCAA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면서 싹수부터 시퍼랬다.
이 시절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루머는 입학 직후 1학년과 상급생으로 나눠져서 연습경기를 했는데 압둘 자바가 주축이 된 1학년팀이 상급생팀을 발라버렸다. 문제는 그 상급생들이 그 직전해 NCAA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한 주전 멤버들이었다는 것. 슬램덩크의 인기로 인해 꽤 유명한 '''사실이다'''. 압둘자바(당시 루 앨신더)는 1965년에 입학해 1학년 시즌이 1965-66시즌이었는데 [8]그가 입학하던 전 시즌인 1964-65년에 UCLA는 토너먼트 우승을 거뒀다(65년 토너먼트 결과). 이를 두고 압둘자바는 "그들(상급생 팀)은 1965-66시즌을 시작하며 전국에선 넘버 원이었지만 캠퍼스에선 넘버 투였죠"라고 언급했다.
다만 이 때 압둘자바에게 발린 팀은 전 시즌 우승팀이었지만 게일 굿리치라는 에이스를 비롯하여 그해 졸업한 선배들의 전력 누출 때문인지 '''전혀 강하지 않았다'''. 1966년 NCAA 토너먼트 결과를 보면 UCLA는 우승은 커녕 토너먼트 진출도 못했다.66년 토너먼트 결과. 상세한 성적을 보면 이 당시 UCLA팀은 18승8패란 평범한 성적을 거뒀다. 66시즌 UCLA 로스터. 물론 압둘자바가 대단한 건 변함이 없지만, 그가 발라버린 팀이 전 시즌에 우승을 거둔 팀임에도 실제 전력은 그리 강하진 않았기 때문에 좀 애매한 케이스.
여담이지만 1966년에 우승한 팀은 Texas Western이란 학교로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당시에 역대 최초로 주전선수 전원이 흑인인 팀으로 NCAA 토너먼트 우승을 거둔 것으로 유명하고 이 팀을 이끈 감독 돈 해스킨스와 선수들의 일화가 영화로 나온게 Glory Road란 작품이다. 글로리 로드 소개. 제리 브룩하이머 제작. 현재 텍사스 웨스턴 대학교는 텍사스 대학교 엘 파소 캠퍼스로 교명을 바꾸어 지금도 존재한다.
아무튼 1학년을 마치고 NCAA 토너먼트에 데뷔한 카림의 대학생활은 딱 한마디로 설명 가능하다. '''역대 최고의 NCAA 선수'''.[9] 이 시기 UCLANCAA 토너먼트를 7연패하는 최전성기를 구가하는 와중에 1967년에서 1969년까지가 압둘자바의 시대였다. 얼마나 사기 유닛이었냐면, 카림이 2학년 시즌 마치자마자, '''NCAA에서 덩크 금지 룰을 만들 정도. 그리고 덩크가 금지당한 이 괴수께서는 손수 스카이훅을 개발해내신다.'''
엄밀히 말하자면 훅슛을 창조해낸 것은 아니다. 이미 NBA 초창기에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전신인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의 조지 마이칸이 리그를 지배할 때, 그가 즐겨 쓰던 슛이 현대에 부르는 훅슛이다. 압둘자바도 이를 참고했고, 특유의 길죽길죽한 비주얼과 높은 타점으로 독특한 폼을 선보였던 것이다. 훅슛은 기본적으로 빅맨이 팔을 '''위로''' 쭉 뻗은 상태에서 쏘는 것이라 일반 슛보다 타점이 훨씬 높고 쏘는 속도도 빠르며 블럭하기가 훨씬 힘들지만 한손으로 쏘는 것이기 때문에 정확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압둘자바의 훅슛은 기존의 훅슛과 다르게 팔을 아예 '''골대 반대방향으로''' (물론 수평으로 뻗는게 아니라 ↗요 정도 각도로 위쪽으로) 뻗은 상태에서 카림 특유의 높이와 점프력을 이용해 올라가서 쏘는 것이기 때문에 안 그래도 타점이 높은데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더 올라가기 때문에 앞에서 막는게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비교적 타점이 낮은 뒤쪽에서 막는다고 해도 기본 높이가 너무 높고 빨리 올라가기 때문에 블럭하기 불가능한 건 마찬가지. 이토록 특이한 슛이라 기존의 훅슛과 구분해서 '스카이훅'이라고 부르는 것. 슛 장면을 보면 알겠지만 보통 훅슛은 툭 던지는 느낌이라 포물선을 그리 높이 그리지 않지만, 스카이훅은 길고도 높은 포물선을 그린다. 물론 이렇게 하면 난이도는 극악으로 올라간다. 훅슛이 공을 올려놓는 느낌이라면 스카이훅은 거의 반대쪽에서 투척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그러나 카림은 극강의 손끝감각으로 이런 어려운 슛을 높은 확률로 넣을 수 있어 주무기로 써댈 수 있었던 것. 다른 빅맨들도 스카이훅이 위력적인 건 알지만 '''알아도 어려워서 못 쓴다.''' 보통 선수들 같으면 터프샷이라 피해야 하는 페이더웨이를 주무기로 썼던 마이클 조던과 같은 케이스다. 정리하자면 훅슛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처럼 훅슛을 던지는 것은 NBA 역사상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NCAA는 단기간 리그파괴를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 NBA의 빅맨들에겐 20년의 재앙을 선물해줬다. 졸업과 동시에 1969년 드래프트에 참가, 전체 1번 지명으로 창단된 지 2년 된 밀워키 벅스에 지명 됐다. 그러고는 '''당연히''' 신인왕 획득. 이 때 NBA의 라이벌 리그인 ABA에서도 카림을 꼬시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는데, 바로 원하는 팀에서 데뷔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드래프트 당시부터 엄청난 대우를 받았던 것.
입단 2년차에 일찌감치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지금도 존재감이 없는 밀워키 벅스 역사의 유일한 우승이 이 시기였다. 이 때 밀워키는 고작 창단 3년차로, 창단 후 가장 빨리 우승한 구단이 되었고, 이는 여지껏 안 깨지고 있다. 커리어가 굉장히 길어지고,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시절의 모습이 많이 방송되어서 기억엔 많이 남아있지만 밀워키 벅스에서 6시즌을 보냈던 선수이다. 빌 러셀에 치이고, 윌트 체임벌린에 치이는 등 우승에 한끝 모자랐던 은퇴를 앞둔 오스카 로버트슨이 도와 우승을 이뤄냈다.[10]
하지만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대도시인 뉴욕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학생 시절을 보낸 압둘 자바에게 미국 중부지역의 소도시 밀워키는 그에게는 그야말로 따분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우승직후 팀에게 끊임없이 '''"내가 들어와서 당신들 숙원인 우승도 시켜줬잖아. 나 밀워키에서 할 만큼 했으니, 고향인 뉴욕이나 뉴저지로 트레이드 해줘"''' 하고 징징 시전.[11] 결국 팀은 그의 소원대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트레이드 시켰다. 그후 밀워키 벅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12]
그러고는 1975년 이적 후에는 핵심선수로 뛰다가 1980년 매직 존슨제임스 워디가 온 후에는 그들에게 공격을 맡기고 자신은 골밑 수비에 전념하는 런앤건의 골키퍼가 되어 41세[13]까지 선수로 활약하며 1980년대 쇼타임 레이커스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나이들어서 매직 존슨에게 팀 리더 역할을 물려주기 전까지 LA 레이커스의 제1옵션이었다. 물론 매직이 팀의 리더가 된 후에도 속공상황이 아닌 하프코트 오펜스 상황에서의 카림은 안정감 그 자체라 '''38세 시즌까지''' 평득 20점에 야투율 50% 후반대를 찍었다. 그만큼 늙었어도 괴수였단 이야기.

3. 스카이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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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워키 벅스 시절의 스카이훅슛
그의 주특기인 "스카이 훅슛"은 타점이 높고 깊은데다 슈팅 레인지가 넓어서 '''막을 수 없는''' 신기였다. 훅슛은 원래 골밑에서 포스트업을 하다가 한손으로 대충 던져놓거나 덩치들이 힘으로 욱여넣다시피하는 막슛(혹은 반대쪽 팔로 '''막'''고 올리는 슛...)에 가깝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상대 수비와 직각으로 서고, 일차적으로는 슛하지 않는 반대 손으로 수비를 견제하며 던질 수 있기에 빅맨에게는 배우면 좋은 필수 무기로 각광받았는데... 이러한 훅슛과는 달리 그의 훅슛은 위 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말 부드러운 릴리즈를 가졌고, 조금 과장해서 3점 라인 안쪽이라면 어디에서나 던질 수 있는 정도이다. 웬만한 중거리슛의 거리에서 던졌기 때문에 안 그래도 막기 어려운 훅슛을 거의 막을 수 없었다. 보통 막으려면 뒤쪽에서 달려들어서 공을 릴리스하기 전에 찍어야 하는데 이게 말이 쉽지(...).
젊은 압둘 자바의 스카이 훅슛은 빠르고, 민첩하게 올라갈 수는 있었지만 LA 레이커스 시절의 압둘 자바보다는 릴리즈가 좀 더 느리고, 레인지도 조금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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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다 못 막은 것은 아니고, 자바처럼 영화 코난에 출연하기도 했던 NBA 선수 '''윌트 체임벌린'''은 한 경기 동안 두 차례 블록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것도 이미 커다란 무릎부상으로 전성기때의 운동능력을 거의 상실한 채로! 그러나 이 장면은 잘보면 첫번째 슛은 스카이 훅슛보단 일반적인 훅 슛에 가깝고, 두번째는 '''골텐딩'''이다.[14]
막은 사람으로 치면 디트로이트 시절 데니스 로드맨도 있다. 그밖의 네이트 서몬드 같은 수비 실력만큼은 레전드였던 선수들도 종종 블락하곤 했다.
이 슛이 하도 유용하기에 당대 뿐만 아니라 최근까지 근 30년간 많은 선수들이 연습을 시도했지만 택도 없었다(...) 가끔 NBA게시판에 뉴비들이 "스카이훅 킹왕짱이라던데 왜 저거 연습하는 사람이 없음?" 이란 질문을 간간히 올리는 경우가 있는데,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다'''. 근래에 자바가 교습다니면서 여러 센터들에게 전수하기도 했지만 실전에서 써먹은 선수는 '''거의''' 전무. 왜 거의냐면 딱 한명 제대로 써먹은 선수가 있기 때문인데, 또 다른 먼치킨인 매직 존슨이 바로 그 선수. 물론 매직 또한 스카이훅을 그대로 따라하진 못했고, 베이비 훅, 혹은 주니어 스카이 훅이라고 손목을 쓰는 훅슛이라기 보단 반대쪽으로 던지는 플로터처럼 띄우는 스타일로 나름대로 응용버전을 개발해서 말년까지 유용하게 써먹었다. 87년 파이널 4차전에서는 이걸로 결승골을 성공시키기도. 아래의 장면이 그것.[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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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타


  • 무하마드 알리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계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흑인 고유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진보 성향의 인물이다. UCLA 2학년 시절 수니파로 개종했으며[16]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차출을 거부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활약한 흑인 전차부대의 역사를 조명하는 책을 포함해 여러 책을 집필했고, 각종 매체에서 인종 문제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언하였다.
  • EA의 고전게임인 Lakers vs. Celtics and the NBA Playoffs에 등장했는데 스카이훅슛은 쏘면 대부분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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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구 이외에도 부업으로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다. 대표적으로는 사망유희에 출연했으며 자바와 이소룡의 대결은 액션 영화계에서 알아주는 명장면이다. 기골이 매우 장대하고 리치가 길며 싸움을 잘하는 흑인 캐릭터로서 깊이 각인된 장면.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작중 자바가 맡은 배역의 이름은 하킴(...) 실제로 이소룡에게 무술 지도를 조금 받았으며, 이 때 배운 정권으로 시합중에 자신에게 하드파울을 시전한 켄트 벤슨을 가격했고, 턱이 부서지는 부상을 입히게 했다. 이소룡은 이에 대해 실망의 표현을 했고, 압둘 자바도 크게 뉘우치고, 그 이후 누군가를 경기중에 때린 적은 없다. 여담이지만 카우보이 비밥 2화에서는 이 하킴을 오마주한 압둘 하킴이라는 캐릭터가 나오며, 역시 이소룡절권도를 사용하는 스파이크 스피겔과 위 영상을 오마주한 대결을 벌인다.
카림이 사망유희에 출연한 것은 눈에 띄는 피쳐링이었고, 이 후 스포츠맨들의 영화 출연 행각에 영향을 준 바가 있다. (장 클로드 반담미키 루크의 영화 더블팀은 콜로세움에서의 격투를 다루는 등 이소룡의 영화를 오마쥬한 흔적을 보이는데, 여기에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맨을 출연시켜 기골이 장대하여 리치가 매우 긴 파이트를 보여준다.)
이외에도 1980년작 코미디 영화 '에어플레인!'[17]에서는 로저 머독이라는 비행기 부조종사 역으로 나름 비중있게 나온다. 이름이 로저라서 조종사랑 항공관제사가 알겠다는 뜻으로 "ROGER!" 할때마다 자기 부르는 줄 알고 '"뭐?" 라 말한다. 그리고 꼬마 승객이 "나 당신 알아요, 분명 카림 압둘 자바야!" 라고 하는데 딱 잡아뗀다. 그리고 "울 아빠가 당신은 디펜스 능력이 부족하댔어요"라고 깐족거리니 꼬마의 멱살을 쥐고 "내가 그 얘기 NCAA 때부터 들었거덩?"하며 자폭한다. 중후반에 상한 생선을 먹고 실려나간[18] 후에는 안 나온다.
  • 하지만 은퇴한 뒤엔 수 차례의 사업 실패로 인해서 시망하고, 이 때문에 미국 운동선수 사이에서는 늙어서 자바처럼은 되지 말자 식으로 수군거린다고. 지못미... 하지만 사업실패 문제도 있었지만, 그의 돈은 대부분 빈민구호의 기부로 이어졌다고 한다. 자선사업으로 빈민가의 아이들에게 캠프를 보내 과학과 공학, 수학등을 가르치는 자선재단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인해 현역시절 트레이드마크인 고글과 우승반지, 트로피도 모두 자선재단 기부로 인한 경매에 들어갔다.
  • 1990년엔 친정팀 LA 레이커스를 비롯해 1993년 4월 24일 밀워키 벅스에서 등번호 33번이 각각 영구결번 지정 되었고, 2009년 9월에는 前 NBA 선수 및 NBDL 선수들로 구성된 팀을 이끌고 감독 자격으로 방한하여 KBL 올스타팀과 대결을 펼친 적이 있다. 당시 무명시절의 샘 해밍턴이 행사에 참여해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이 이야기하기를 예상 밖으로 재밌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19]
  • 만화 슬램덩크에서 채치수의 방에 붙어있는 포스터의 주인공이다. 그 밖에도 서태웅의 1학년 팀과 채치수의 2, 3학년팀이 연습경기를 할 때, 채소연이한나 매니저가 위에 언급된 1학년 시절 압둘자바의 팀이 선배들을 연습시합에서 박살내버린 일화를 얘기하며 등장했다.
  • 드라마 마지막 승부에서는 시력이 나쁜 이동민이 고글을 끼고 운동을 하자, 고참인 김만재가 건방져보인다, 렌즈끼라며 갈구고, 이에 동민은 기합을 받으며 나는 압둘 자바다! 나는 압둘 자바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다(...).
  • 재즈 매니아로 유명한데, 3000장이 넘는 음반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 2015년 9월 셜록 홈즈의 형인 마이크로프트 홈즈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마이크로프트 홈즈를 출간했다. 1870년대 20대 초반의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라고 한다.
  • 커리어 통산 블록 개수가 3,189개로 하킴 올라주원디켐베 무톰보에 이은 역대 3위이다. 그러나 그는 프로 데뷔 후 네 시즌이 지나서야 블록이 집계되어 손해를 봤는데, 만약 첫 네 시즌 동안의 숫자가 집계되었다면 올라주원을 훌쩍 뛰어넘는 기록을 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카림은 블록이 처음 집계된 1973-74 시즌에 평균 3.5개를 내고 그 다음 7시즌 동안 평균 3.5개를(최소 한 시즌 3개) 기록했다.[20] 이 수치를 블럭이 집계되지 않은 초반 네 시즌(321경기)에 대입하면 그의 통산 블록은 4,312개가 된다. 보수적으로 잡아서 평균 3개라고 쳐도 4,152개로 하킴(3,830)의 기록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가 나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역대 선수들을 다 고려하면 카림의 순위는 여전히 3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윌트 체임벌린빌 러셀의 존재 때문인데[21], "평균 7~8개"라는 증언이 과장이라고 생각해 평균 5개라고 생각해도 윌트는 5,225개, 러셀은 4,815개라는 말도 안 되는 수치가 나온다. 사실 "평균 7~8개" 자체가 터무니없다고 보기도 힘든 게 한 양덕이 윌트와 러셀의 당시 블록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는 신문기사를 샅샅이 뒤져서[22] 통계를 내본 결과 윌트는 112개에서 평균 8.8블록, 러셀은 135경기에서 평균 8.1블록이라는 무지막지한 수치가 나왔다고 한다. 참고로 두 선수 모두 마지막 까지 포함된 수치.[23]
  • 본인의 우승 반지 4개를 비롯하여 234개의 기념품을 경매에 내놓았다고 한다. 경매 수입의 대부분은 본인이 새운 재단인 '스카이 훅 재단'을 통해 아동 지원 사업에 쓰일 예정이라고. 이에 압둘 자바는 "내가 현역 시절 받은 반지, 트로피들을 방에 전시하는 것과 어린이들이 교육받을 기회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내가 가진 것들을 다 팔아도 좋다"고 말했다. 이 기념품들은 한화 약 33억에 팔렸다고 한다.# 전당포 사나이들(Pawn Stars)의 에피소드에서도 이 물품들이 나오는데 경매장에 물건을 구입하러 온 릭의 앞에 직접 본인이 나타나서 진품 인증을 해 준다. #
  • 카림이 농구 경기 중에 고글을 착용하는 이유는 대학 시절에 왼쪽 눈을 다친 것 때문이다. 재밌는건 같은 팀의 제임스 워디 역시 85년부터 눈 부상으로 고글을 항상 쓰고 다녔기 때문에 당시 어린 NBA팬들은 저 둘을 "고글 쓴 큰 선수/작은 선수"로 구분하기도 했다. [24]
  • 7,80년대 당시 센터들은 몸무게가 현재보다 훨씬 가벼운 편이긴 했지만 이걸 감안해도 키에 비해 상당히 호리호리한 체격을 지녔던 선수. 몸무게가 225파운드 정도로 비슷한 나이인데다 키가 206cm인 데이브 코웬스와 몸무게가 비슷했고, 선배 선수고 키가 208cm인 윌리스 리드(240파운드)보다는 오히려 더 가벼웠다. 이는 압둘자바가 엄청나게 장수하는데 도움이 됐는데, 당시 농구화는 현재와 달리 보호 기능이 거의 없었기에 압둘자바처럼 기본기가 뛰어나고 몸이 가벼워 발목과 발에 부담이 적게 가는 선수들이 장수에 유리했다. 실제로 그와 비슷하게 장수한 로버트 패리쉬 역시 230파운드밖에 안 나갔다.
다만 가벼운 체격 때문에 몸이 육중하고 파워가 막강한 선수들에겐 비교적 약한 편이었는데, 키는 작지만 힘이 센 모제스 말론이 대표적이었다. 81년 1라운드에서 붙을 당시 31.1점 17.7리바운드, 야투율 51.4%를 기록한 말론을 상대로 26.7점 16.7리바운드 야투율 46.2%를 기록했는데, 특히 야투율은 정규시즌 57.4%에 비해 11%나 떨어졌다. 반면 말론은 정규시즌 52.2%랑 별 차이가 없다. 이때 레이커스는 디펜딩 챔피언이었음에도 플레이오프 막차를 탄 말론의 휴스턴에게 업셋당했다.
카림이 30대 중반을 넘어가고 말론은 최전성기였던 83년에는 파이널에서 붙어 말론의 식서스가 아예 스윕해버렸는데, 득점은 25.8대 23.5로 별 차이가 없고 야투율은 압둘자바가 오히려 55.2% 대 50.7%로 앞섰지만[25] 리바운드에서 18개 대 7.5개로 완전히 압도당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카림이 말론의 밥이었다 이 정도 수준은 절대 아니지만, 상성상 말론을 상대하면 평소보다 훨씬 힘들어했다는 얘기. 말론의 동료이자 또다른 레전드였던 줄리어스 어빙은 '말론이 압둘자바를 산채로 자아먹곤 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으니, 이러나저러나 카림의 최고 난적은 말론이었다.
  • 키가 14세 때 이미 6-8, 즉 203cm에 달했다고 한다...

[1] 개명 전 이름은 퍼디난드 루이스 앨신더(Ferdinand Lewis Alcindor, Jr)[2] 2010년은 코치로 우승함.[3] 카림은 NCAA 역사상 유일한 3년 연속 최우수선수상을 수상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더 무서운건 당시 1학년은 공식 경기 출장이 금지 되어있었다. 즉, 카림은 대학 농구에서 본인이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우승하고 최우수선수상을 탔다. 그는 NBA 커리어도 역대 최고 중 하나지만, NCAA 커리어는 그 마이클 조던도 따라올 수 없는 역대 최고임엔 이견이 없다. [4] 이 셋은 포지션을 불문하고 NBA 올타임 랭킹에서 일반적으로 TOP 5, 아무리 과소평가 하더라도 TOP 10 안쪽에 무조건적으로 들어가는 선수들이며, 특히 카림은 어떤 랭킹을 보더라도 5위 바깥으로 밀려나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세 사람 다 역대 최고 수준의 선수라는 걸 진지하게 부정하는 이는 없으며, 서로간에 앞서거나 뒤쳐지는 부분들이 워낙 뚜렷해 평가하는 사람들마다 순위가 갈리는 편. 현역시절 찍어낸 개인 기록 면에서는 그 누구도 윌트 체임벌린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러나 팀에 대한 공헌도와 반지 개수로 보면 빌 러셀윌트 체임벌린을 훨씬 압도한다. 한편 카림은 개인 기록도 출중하고 우승도 6회에다가 통산 누적 기록이 어마어마하다. 이렇다 보니 셋 중 누구를 역대 최고의 센터로 봐야할 지 의견이 완벽하게 모이지는 않고, 비교적 후시대 선수이면서 개인 기록과 팀적인 성과 모두를 완벽하게 쌓아둔 카림이 흔히 선두를 달린다고 평가받는 것.[5] 시대별로 구분한다면 윌트 체임벌린빌 러셀은 동시대의 라이벌이었고, 카림은 개인 기량은 당대 최고였으나 팀이 비교적 약체이다 보니 정작 전성기인 70년대 우승은 1회에 그쳤다. 이후 카림이 80년대에 거둔 5번의 우승 중 4개는 매직의 지분이 더 컸는데, 정확히는 매직 존슨이 파엠을 가져간 80년 우승의 경우 진짜 에이스 및 팀의 주인격인 선수는 카림이었고 그 뒤로 매직 존슨이 1인자 자리로 치고 올라와 더 큰 지분을 차지했다.(단, 85년 Finals MVP는 카림.) 카림, 러셀, 윌트, 매직, 버드 등이 각축전을 벌이는 와중 마이클 조던NBA를 지배하며 GOAT 자리에 확실하게 오른 것.[6] 공격 기여도.Offensive Win Shares[7] 그는 1972년부터 16년간 캐나다 농구 국대 감독을 지휘했다.[8] 미국 학교는 가을에 개학해 이듬해 봄에 종강한다.[9] 그에 비견될 만한 선수는 카림과 마찬가지로 3년 연속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고 2년 연속으로 무패 우승한 그의 대학 후배 빌 월튼 정도 뿐이다. 카림과 월튼이 재학하는 동안 UCLA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는데,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서 후술되는 7연속 우승을 포함해 무려 9번이나 우승하기도 했다.[10] 사람들은 이를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후배 센터샤킬 오닐과 비교한다. 둘 다 다른 팀에서 시작했고, 많은 업적을 이루어냈지만 본인이 싫어서 먼저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결국 LA로 오는 과정이 닮아있다.[11] 팀도 우승으로 이끌고 해줄만큼 해줬으니 고향팀으로 가고 싶었다는 것이 명분. 트레이드를 먼저 시켜달라는 것이 압둘자바의 요구였고 팀도 어차피 더이상 못 잡을거 아니까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그나마 원래는 고향 뉴욕이나 뉴저지로 가고 싶어했는데 트레이드 카드가 안맞아서 밀워키 벅스 프런트는 압둘자바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안으로 로스앤젤레스로 트레이드 된다.[12] 그렇다고 해도 카림은 밀워키 벅스에서 6시즌동안 매시즌 매경기 40분 이상 뛰면서 20-10을 밥먹듯했고, 밀워키 벅스 유일한 파이널 우승과 73~74시즌 파이널 준우승 등 신생팀 밀워키 벅스의 리그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 거기다 트레이드 하지 않았다면 자유계약으로 나갈 것이 확실했다. 다름아닌, 밀워키 벅스의 우승을 함께 이끈 오스카 로버트슨이 1970년 존 하블리첵 등과 함께 NBA를 연방법원에 제소하여 1976년 FA제도의 초석이 되는 선수의 자유이적을 보장하는 판결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카림 압둘 자바가 75년 이후 팀에 남았더라도 근 시일내에 이루어졌을 FA제도의 수혜자가 될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이 때문에 밀워키 벅스도 미련 없이 자바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 실제로 NBA에서 자유계약제도가 생긴 것은 1976-77 시즌 종료 후로, 최초의 자유이적은 당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가드 캐지 러셀이 되었다. 러셀은 시카고 불스로 1년 계약을 맺고 자유이적했다. [13] 참고로 카림이 로스앤젤레스로 이적한 첫해, 훗날 1981~82년부터 레이커스의 감독을 지낸 레전설 헤드코치 팻 라일리는 선수로 뛰고 있었다. [14] 무지막지한 타점 외에도 바로 저 점이 훅슛이 아닌 '스카이훅'이 막기 힘든 이유이다. 일반적인 훅슛은 타점이 위에 있기 때문에 수비가 찰싹 달라붙으면 블럭이 가능하다. 그런데 스카이훅은 타점이 골대 반대편에 있어서 포물선을 비교적 높게 그리기 때문에 수비수의 팔을 지나갈 때쯤 되면 볼이 하강 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높이로 블럭해봤자 골텐딩이 된다. 사실 골텐딩 룰 자체가 50년대에 조지 마이칸 때문에 생겨난 지라 60년대~70년대 초에는 골텐딩이 지금처럼 엄격하게 불리지는 않았다. 또한 NBA의 규모도 현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선수들이 생계를 위해 부업을 할 정도였다) 현재 룰이었으면 더 막기 어려웠을 것이다. 영상의 장면도 현재같으면 무난히 골텐딩이 불렸을 장면.[15] 매직은 특이하게 포인트 가드였음에도 포스트업과 골밑에서 마무리 능력, 특히 훅슛능력이 일품이었다. 또한 포인트 가드임에도 점프슛을 거의 쏘지 못해 세트슛을 이용했다. (이와 별개로 슛 능력 자체는 좋은 편이었다) 이는 매직의 신체조건 탓인데 206cm란 신장은 지금도 파워 포워드, 적어도 스몰 포워드는 보는 게 일반적인 신장이고 당시에도 빅맨을 보는게 당연한 신장이었다. 게다가 매직은 키만 큰게 아니라 덩치도 크고 힘도 세서 득점을 할때 매치업 상대로 포스트업으로 죽죽 밀어내고 마무리를 하는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훅슛 실력이 늘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소속팀 공격의 거의 전부를 본인이 시작했기 때문에, 패스를 받아서 점퍼로 마무리하는 플레이를 할 일이 없었고 점퍼를 연마할 기회도, 이유도 없었다.[16] 원래 종교는 가톨릭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말콤 X 등의 영향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흑인 미국인들이 꽤 있었다.[17] 레슬리 닐슨류 코미디 영화로 유명한 "ZAZ 사단"의 초기작으로 1984년에는 우주를 배경으로 속편까지 나왔다.(...) 레슬리 닐슨 옹 본인도 의사 역으로 내내 등장한다. 그 전까지 레슬리 닐슨은 멕베스 등 온갖 심각한 역만 도맡아 하던 정극배우였다.[18] 정작 실려나갈 때는 파일럿 셔츠 밑에 레이커스 유니폼 하의, 무릎보호대, 경기용 고글까지 모조리 착용한 모습이다.[19] 샘 해밍턴미니홈피에 사진과 소감중[20] 블록수치에 가장 영향을 주는 요소는 높이(키+팔길이) 다음으로 운동능력이기 때문에 보통 출전시간이 확보될 경우 커리어 초반의 블록 수치가 가장 높은 경우가 많다. 샤킬 오닐의 경우에도 루키 시즌의 블록이 3.5개로 압도적으로 가장 높다. 그 다음은 1999-2000 시즌의 3개.[21] 다만 카림 이상의 블럭 능력을 갖고 있던 네이트 서몬드는 여기에 끼지 못할 확률도 있다. 서몬드는 부상이 비교적 잦아 통산 경기수가 964경기에 불과해서 카림의 2/3도 되지 않기 때문. 물론 이는 러셀도 마찬가지지만 러셀의 경우 마지막 시즌까지 한 경기 (비공식) 21개, 13개 블럭 경기가 나올 정도로 블록 능력이 압도적이었다.[22] 기사에서 "~개 블록을 했다"라고 언급된 경우. 기록이 상충되는 경우 더 적은 기록을 선택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한 기사에서 7개 블럭, 다른 기사에서 9개 블록의 경우 7개 블럭이라고 기록하는 식.[23] 참고로 윌트의 마지막 시즌은 표본이 21경기로 평균 7.6개, 러셀의 경우 표본이 13경기로 8.3개였다. 게다가 "블록 수치가 높은 것만 기사화됐을 것이다"라고 추정할 수도 없는게 블록 수치가 1,2개인 경기까지 그대로 집계되어 있다. 참고로 시즌 하이 수치는 윌트는 15블록, 러셀은 21블록이다.[24] 한국 한정으로 93년 파이널에 올랐던 피닉스 선즈에서 백인에 슈팅이 뛰어난 댄 멀리와 대니 에인지 역시 "3점 쏘는 백인 좀 큰애/좀 작은애"로 구분되기도 했다. 당시 중계화면 화질이 좋지 않기도 했고, AFKN같은 데서 영어 중계를 들어야 했던 경우가 많았는데 애들이 이름을 알아들을 수가 있나...[25] 사실 수치만 보면 안되는게 당시 식서스에는 MVP급인 줄리어스 어빙이 있었고 앤드류 토니도 있어 공격롤을 나눴기 때문에 말론의 득점스탯이 그리 높지 않은 거고, 압둘자바와 달리 원래 말론은 야투율이 높은 선수가 아니다. 즉, 저 야투율은 두 선수 모두 평타 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