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바클리

 

'''찰스 바클리의 주요 수상 및 헌액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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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영구결번'''
'''피닉스 선즈 영구결번'''
No. 34
No. 34

'''1993년 NBA 정규시즌 MVP'''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

하킴 올라주원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찰스 바클리'''
헌액 연도
2006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No. 34'''
'''피닉스 선즈 No. 34 '''
''' 찰스 웨이드 바클리
(Charles Wade Barkley) '''
'''생년월일'''
1963년 2월 20일 (61세)
'''출신지'''
앨라배마 주 리즈
'''국적'''
미국 [image]
'''신장'''
198cm (6' 6'') [1]
'''체중'''
114kg [2]
'''출신학교'''
어번 대학교
'''포지션'''
'''파워 포워드 ''', 스몰 포워드[3]
'''드래프트'''
'''1984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지명'''
'''역대 소속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1984-1992)'''
'''피닉스 선즈 (1992-1996)'''
휴스턴 로키츠 (1996-2000)
'''역대 등번호'''
''' 34번''', 32번[4], 4번[5]
'''수상내역'''
''' NBA 정규시즌 MVP (1993) '''
'''올-NBA 퍼스트 팀 5회 (1988-1991, 1993) '''
NBA 올스타 11회 (1987-1997)
NBA 올스타전 MVP (1991)
올-NBA 세컨드 팀 5회 (1986-1987, 1992, 1994-1995)
올-NBA 서드 팀 (1996)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85)
NBA 올해의 리바운드왕 (1987)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6)'''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1996 애틀란타 올림픽 금메달'''
1. 소개
2. 플레이스타일
3. 생애
3.1. NBA 선수 시절
3.1.1.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3.1.2. 피닉스 선즈
3.1.3. 93시즌, 마이클 조던과의 대결
3.1.4. 휴스턴 로케츠
4. 기타
4.1. 식성과 체중관리 관련
4.2. NBA의 펠레, 입담꾼로써의 면모
4.2.1. 그 굴욕의 현장들
4.3. 직설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신념
4.4. 안습한 연봉
4.5. 여담


1. 소개


'''SIR CHARLES'''

'''"누군가는 영웅이 되어야 한다. 어쩌면 그 영웅이 나일지도 모른다"'''

Somebody has to be the hero. It might aswell be me.

NBA 선수. 별명은 리바운드하는 둥근 산(Round Mound of Rebound)[6], '''찰스 경(Sir Charles)''', 척(Chuck). 포지션은 파워 포워드. 공식 신장이 6-6(198cm)이다. 강한 자부심과 에고로 인기와 동시에 트래쉬토크와 선수,심판과의 몸싸움, 말다툼 및 구설수로 유명한 선수이지만 2미터도 안되는 키로[7] 인사이드를 초토화하고 리바운드왕을 차지하며 '''강력한 몸싸움[8],스피드와 수준급 득점력,기술을 겸비해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을 풍미한 전설적인 파워포워드이다.'''
92-93시즌 시즌 MVP이며 드림팀 1,3에 두차례 선발되어[9]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NBA 무대에선 결국 우승반지없이 은퇴, 무관의 제왕이란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국내 팬들에겐 "코트의 악동"으로 소개된바 있다. 1984년 1라운드 5번픽으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드래프트됐다.[10]
시즌 MVP를 받았던 92-93 시즌 피닉스 선즈 소속으로 펼친 절친 마이클 조던시카고 불스와의 파이널전은 지금도 NBA 농구팬들이 꼽는 파이널 최고의 명승부중 하나이다. 팀 던컨, 칼 말론을 위시해 보통 뛰어난 기량과는 무관하게 '스타성'과는 거리가 있었던 파워 포워드라는 포지션에서 특유의 스타성과 끼를 과시하며, 가장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선수중 한 명이다.[11]
은퇴 후 농구 실력만큼이나 화려한 입담으로 샤킬 오닐과 함께 농구해설자및 진행자로 맹활약하고 있다.[12]

2. 플레이스타일


플레이를 보면 힘이 매우 좋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힘을 토대로 리바운드 자리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거나, 골밑으로 파고든다. 선수생활 후반기에는 슛도 꽤 좋아진 편. 패스 센스도 뛰어난 편이다.
힘도 대단하지만 부상전의 찰스는 운동능력이 정말 대단했다. 볼 핸들링도 포지션 대비 매우 좋은 편이어서[13], 그 큰 덩치로 오픈코트를 드리블하며 혼자 달려나가며 덩크슛으로 마무리 하는 모습은 지금 보아도 놀라울 뿐...
선수 시절 초기 팔팔했던 찰스의 호쾌한 플레이.
혼자서 수비진영에서 부터 리바운드를 잡아 드리블 해나가 마무리 하는 것을 코스트 투 코스트라고 하는데, 드리블과 리바운드가 좋다보니 이런 장면이 종종 나오곤 했다.
하지만 요즘 선수들이 코스트 투 코스트를 하는 장면들을 보면 바클리는 가끔 따끔한 일침을 가하기도 하는데 바클리 본인이 그 역동적인 코스트 투 코스트로 90년대 NBA를 수놓았던 걸 생각하면 좀 아이러니한일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는 NBA관련 토크쇼에서 블레이크 그리핀의 코스트 투 코스트를 보곤 패널들이 극찬을 했는데 그중 몇몇은 이 자리에 찰스 바클리가 없어 다행이라는 말도 했었다.
물론 바클리가 꼰대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고 이유가 있다. 빅맨의 코스트 투 코스트는 본래 느린 빅맨이 가장 먼 거리를 질주하는 특성상 전개속도는 당연히 가장 느리지만, 장점이 그 의외성이다. 보통 수비리바운드 후 빅맨이 가드에게 아웃렛 패스를 빠르게 넘겨주고, 다른 가드와 윙들은 양쪽 3점으로 빠지거나 골밑으로 쇄도하기 때문에 수비리바운드 이후 수비는 1차적으로 가드와 윙들을 찾는다. 그런데 빅맨이 난데없이 골밑으로 질주하면 "저러다 패스하겠지? 어? 어?"하는 사이 기습적인 돌파득점이 가능한 것. 빅맨들은 몸이 육중해 가속도가 붙으면 막기가 훨씬 어려워서 이미 의도를 깨달은 순간 막기 너무 늦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괜히 가드에게 볼운반을 맡기는게 아니라 대부분의 빅맨들은 볼핸들링, 특히 드리블과 더블팀 대처 요령이 부족해 과거엔 시도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바클리, 웨버, 데이빗 로빈슨 등 볼핸들링과 스피드가 탁월한 빅맨들의 영향으로 8,90년대에 이들을 보고 자란 빅맨들이 00,10년대에 들어 종종 하는 플레이가 됐다. 문제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 것. 자베일 맥기같은 선수들은 실력도 안되면서 코스트 투 코스트를 하겠다고 나섰다가 괜히 공격권만 날려먹는 경우가 있었다. 바클리가 까는 건 주로 이런 선수들이다.
사실 패널들이 농담삼아 저런 얘기를 했지만 실제로 바클리는 케빈 가넷, 블레이크 그리핀이나 앤서니 데이비스처럼 가드급에 준하는 볼핸들링을 지닌 빅맨들이 저거 한다고 욕하진 않았다. 다만 빅맨들이 코스트 투 코스트 욕심에 어이없는 턴오버를 하거나, 빠른 속공기회를 놓쳤을때 이를 지적하는 것이다. 덩크슛은 이런 상황에서 가장 확실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슛이고, 찰스는 이 효율적인 덩크에 매우 능했다. 다 힘과 유연함, 높이, 그리고 배짱[14]이 있으니 가능한 거다. 식서스 시절에는 리그에서 가장 덩크를 많이 하는 선수 중 하나였으며 덕분에 TS%는 4시즌 연속으로 리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거기다 그의 무지막지한 엉덩이 포스트업 또한 유명하다.
수비도 데뷔 초기엔 훌륭했다. 키는 작았지만 매우 높은 점프력과 긴팔이 있었고, 덕분에 수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블락해버리는 타이밍이 정말 좋았다. 이 인간의 별명이 '''날으는 냉장고'''였던 걸 기억하자. 괜히 날아다닌다고 표현한 것이 아니다. 커리어가 길어지면서 체중 조절도 잘 안되고, 등과 무릎에 부상을 달고 다니면서 수비는 점점 버리기 시작했지만 중요한 순간에 뜨문뜨문 클래스를 보여주긴 했었다.
다만 전성기 때도 올디펜스팀급[15] 수비력은 아니었다. 참고로 바클리는 "래리 버드가 있는 한 나는 리그에서 가장 수비 못 하는 선수는 아니다"라고 버드를 간접적으로 깐 적이 있는데, 정작 버드는 바클리는 한 번도 못 든 수비팀에 세 번이나 선정됐다. 1대1 수비는 괜찮았지만 팀 수비에서 그리 센스가 뛰어나진 않았으며, 무엇보다 스틸이나 블럭을 노리는 도박성 수비가 많았다. 필리시절 스틸을 시도하다 래리 버드에게 위닝샷을 얻어맞은 적도 있으며, 93년 시카고 불스의 우승 당시 그 유명한 존 팩슨의[3점 슛 장면 전에 무리하게 스틸을 시도하려다가 피펜이 돌파를 하도록 허용한 적이 있다. 전성기 당시 바클리의 수비력은 맨투맨 수비는 상급이었고 팀수비는 떨어져 전체적으로 보면 포지션 대비 평균 이상 정도였지만, 보통 그 정도 키의 선수들은 키로 인한 제약으로 수비에서 약점을 보인다는 걸 생각하면 대단한 수비력이었다. 다만 운동능력에 많이 의존한 수비였기에 운동능력이 눈에 띄게 하락하기 시작한 94, 95시즌 언저리부터 수비력이 크게 하락했다.
몸이 매우 두텁고, 탄탄한 하체가 있었기에 장신들의 골밑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고, 거기에 샤킬 오닐을 테이크 다운 시켜버릴 정도의 무지막지한 힘과[16] 유연함, 거기에 키 대비 매우 긴 팔이 그 키로도 NBA에서 리바운드 왕을 차지할 수 있었던 비밀이다.
덧붙여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덩크, 블락, 드리블을 반대로도 할 수 있었던 건 그의 플레이의 큰 장점이다. 웬만한 탑 테크니션 중에서도 좌우를 가리는 선수가 간혹 있다는 점에서 양손 모두 뛰어난 스킬을 보유했다는 점은 엄청난 장점.
어떤 의미로 래리 버드처럼 다시 나오기 어려운 유형의 선수이다. 요즘 NBA 팬들은 유니크한 플레이어로 앨런 아이버슨을 많이 꼽지만, 사실 단신의 공격형 가드는 능력을 배제하고 스타일만으로 보자면 꽤나 자주 나왔고, 나오고 있다. 하지만 2미터가 안 되는 단신으로 세계 최고의 농구재능이 모이는 NBA에서 빅맨 포지션에서 활동하며, 올어라운드함을 바탕으로 득점과 리바운드에서 재능을 발휘한 바클리는 그야말로 유니크하다고 볼 수 있다. 현역 선수로 비유하자면 드웨인 웨이드가 몸무게를 불려서 빅맨을 보는 모양새이니 이건 뭐... 그래서인지 NBA 팬 중에는 마이너하지만 언더사이즈 빅맨에 대한 로망을 가진 팬들이 많다. 물론 등장하는 족족 수준 미달이라 팬들의 탄식을 자아내지만...
일단 현재 플레이어들 중에는 드레이먼드 그린이 그나마 가까운 편이며, 실제로 그린과 바클리는 많이 비교되고 있다. 다만 다재다능한 언더사이즈 빅맨이란 점에선 유사하지만 스타일 자체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린은 공격력은 평범한 편이지만 수비가 수비왕급이며 리바운드도 8,9개 수준으로 특출나진 않다. 반면 바클리는 엄청난 득점력과 리바운드 능력자이며 수비는 지극히 평범하다. 득점의 경우에도 언더사이즈에 대한 편견과 반대로 바클리는 어마어마한 힘과 운동능력으로 상대를 뭉개버리며 골밑에서 득점을 할 수 있는 선수지만, 그린은 힘과 민첩성 등에서 바클리보다 훨씬 떨어지고 키까지 작기 때문에 골밑득점에선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점퍼로 득점보조를 하는 선수.
슈팅 레인지에선 시대를 고려해도 그린이 훨씬 앞선다. 첨언하면 슈팅'''레인지'''가 앞선단 말이 슈팅력이 앞선다는게 아니다. 바클리는 슛터치가 매우좋고 3점라인 밖에서부터의 플레이도 가능했던 선수이다. 잽스텝 점퍼나 페이더웨이 점퍼를 주 득점 루트중 하나로 사용하던 바클리는 슈팅력이 좋은 선수이다. 슈팅'''레인지'''만 놓고 보면 바클리는 3점이 중요시되지 않던 시절의 포워드라 3점에 익숙치않지만 그린은 3점에 그나마 익숙하다. (슈팅레인지=슈팅력이 아니다. 일례로 스카티 피펜은 슛거리가 3점슛이 무난할 정도로 길지만 슈팅력이 딸린다. 94년 플레이오프 하이라이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바클리는 3점부터 롱2점, 잽스텝 전퍼, 포스트업 페이더웨이 점퍼등 다양한 점프슛을 보여준다.)
패스는 둘다 뛰어나지만 주득점원인 바클리보다 톱에서 컨트롤타워 역할도 하는 그린이 어시스트에서 앞선다. 물론 전체적인 수준에선 MVP급인 바클리가 훨씬 앞선다. 사실 바클리의 특이한 점은 언더사이즈 빅맨이란 것도 있지만, 언더사이즈임에도 불구하고 득점과 리바운드에서 강세를 보이는 정통 포스트업형 빅맨이란 점이다. 그린이나 벤 월러스, 척 헤이즈 등 언더사이즈 빅맨들은 아무래도 키에서 오는 불리함 때문에 수비를 파거나 슈팅레인지를 늘이는 등 다른 쪽으로 발전하는 편이다. 그러나 바클리는 키가 가드급임에도 골밑에서 정면승부해 상대를 뭉개버리는 화끈함이 있었고, 이 때문에 많은 팬들을 보유했다. 그래서인지, 2019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지명받은 듀크 대학교의 포워드 자이온 윌리엄슨이 보여주는 플레이를 보고 제2의 찰스 바클리를 기대하는 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체격조건과 운동능력에서 전성기 바클리급의 기대치가 있다는 평가다.

3. 생애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서 10마일 정도 떨어진 리즈 외곽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찰스의 부친은 그와 가족을 버렸다.[17] 그래서 어린 찰스를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온갖 일을 다 하면서 먹여살려야 했다. 이 때문인지 찰스는 이 두 사람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다.[18]
고교시절 농구선수로 두각을 나타내며, 오번대학교에 진학했는데, 대학시절 초반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당시 오번대학교 농구팀 감독이었던 소니 스미스가 찰스를 혹독하게 몰아붙였기 때문. 시키라는 농구 연습은 안시키고 체육관 계단만 오르락내리락 시키고, 심지어는 구타(!!)를 하기도 했다. 한동안 꾹꾹참았던 찰스는 결국 '''"이 멍청한 자식아! 난 그만두겠어!"''' 라고 질러버렸다. 그 특유의 욱하는 성격이 발동했기 때문에 되돌아가기는 힘들 것으로 여겨졌지만 찰스가 엇나갈까봐 걱정한 어머니와 할머니의 설득으로 다시 농구부로 돌아갔다. 소니 스미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줄것을 요구했고, 다행히 이게 받아들여졌다. 이 소니 스미스와는 나름 친분도 쌓게 된 듯. 이 사람도 찰스에게 한 소리 들은 후에 본인이 한 행동이 영 찝찝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 후 오번대학교의 에이스로 맹활약하고 1984년 LA 올림픽 농구국가대표 선수로 뽑힐 뻔도 했지만 선발되지 못했다. 이때 표면적으로는 '농구화가 낡았다고 불평했다.'는 다소 황당한 사유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당시 미국국가대표 농구팀 감독인 바비 나이트의 입김이 작용했을 거란 것이 거의 정론. 바비 나이트는 당시 인디애나 대학교의 감독으로 명장으로 불리는 사람이었고, 한 성격하는 열혈감독이었다. 또한 선수들에게 자신에 지시에 절대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등 말 그대로 철권통치를 했다. 그런 그이기에 비록 코치의 잘못이 있긴 했지만 코치에게 대들고 한 성격하는 찰스 바클리를 용납할 수 없었을 것. 바클리는 이에 많이 투덜거렸다고. 이때 대표팀에 뽑혔던 노스 캐롤라이나 출신의 샘 퍼킨스는, 바클리가 잘리는 걸 보고 다들 "저 친구가 잘렸다니, 나는 100% 잘렸네"라고 했다고 회상했다. 그만큼 실력으로 보면 바클리의 탈락은 납득이 안 갔던 것.
여담이지만 퍼킨스는 올림픽에서 공동주장으로 활약을 펼친후 드래프트에서 바클리보다 한 순위 높은 4번으로 뽑혔는데, 바클리가 대표팀에 뽑혀서 활약을 했다면 퍼킨스에게 밀리는 일은 없었을 수도 있다. 바클리가 지역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지만 오번이 그리 강팀이 아니라 (NCAA 토너먼트에 단 한번 진출했다) 전국구 강팀이자 인기팀 소속이었던 퍼킨스에 비해 미디어 노출면에서 불리했기 때문이다. 근데 올림픽에 나가면 이게 단번에 상쇄되니.
사실 바클리가 워낙 문제아라서 이게 그가 투덜이 짓 했다고만 인식되는데, 바비 나이트 본인은 선수들에게 욕설을 포함한 폭언을 퍼붓고 코트 위에 의자를 던져 징계를 받는 등 문제가 많은 양반이었다. 그의 레전드 경력과 더불어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많이 묻히지만, 이 때문에 커리어 말년에 새삼 논란이 될 정도. 에이스 마이클 조던도 공식석상에서는 "딘 스미스랑 많이 비슷하세요. 말투만 빼고요'라고 유머러스하게 넘겼지만, 시카고 트리뷴에서 불스를 오랫동안 담당한 샘 스미스의 책에 따르면 조던도 실제로 바비 나이트 밑에서 뛰는것에 진저리를 쳤다고 한다.

3.1. NBA 선수 시절



3.1.1.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어찌됐든 대학교에서 3년을 보낸 바클리는 1984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5순위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지명되었다. 그 후 그의 모교인 오번대학교는 바클리의 등번호 34번을 영구결변 시켰다. 대학에서의 전공은 비즈니스 경영학.
닥터 J라 불리던 줄리어스 어빙과 80년대 최고의 센터, 모제스 말론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서 데뷔했다. 루키치고는 운 좋게 강팀에서의 행복한 데뷔였다. 실제로 바클리는 이들을 매우 존경하고, 정말 존경하는 형님으로 모시고 있다. 모제스 말론과 줄리어스 어빙에게 성실한 자기 관리와 프로로서로 갖추어야 할 것을 배우지 못했다면 자신의 커리어에 큰 문제가 있었을것이라고 직접 말했을 정도. 실제로 80년대 당시 필리는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인격적으로 뛰어나고 프로로서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다. (물론 어빙의 불륜 등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또다른 선배선수들이었으며 막강 가드 수비수들이었던 모리스 칙스와 바비 존스는 인품이 대단히 뛰어났으며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선수들이었다. 특히 바비 존스는 역대 특급 수비수들 중 조 듀마스와 더불어 가장 매너가 좋은 수비수로 꼽히는데 많은 수비수들이 하는 더티플레이를 전혀 하지 않고 허슬플레이만으로 질식 수비를 선보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다만 86~89년 사이에 이들이 모두 팀을 떠나면서 분위기가 바뀌는데, 어쩌면 이렇게 좋은 동료들과 커리어를 시작했기에 이들을 모두 잃고 혼자 막장이 되어가는 팀에서 고군분투하는 상황에 바클리가 더욱 막나가게 되었을 수도 있다. 심지어 89년에는 "배드보이즈" 피스톤즈에서 가장 거칠고 터프했던 릭 마혼이 합류해 바클리와 Thump N' Bump를 형성하면서 팀 분위기가 상당히 거칠어지기도 했다. 물론 바클리는 마혼과 죽이 잘 맞았지만, 점잖은 형님들과 성질 죽이면서 뛰다가 자기만큼 성질이 화끈한 마혼이 오니 고삐가 풀린 것. 실제로 바클리와 빌 레임비어와의 난투극이 바로 이때 일어났다.
그러나 바클리는 팀을 이끌던 줄리어스 어빙과 바비 존스의 은퇴, 모제스 말론의 이적 이후 급속히 쇠락해가는 팀에서 고군분투하며 팀을 이끌었다. 말론이 이적한 87시즌부터 6시즌간은 바클리의 기량상 최전성기로 이 기간동안 그는 전 시즌 올NBA팀(퍼스트팀 4회, 세컨드팀 2회)에 선정되었다. 또한 부상이 잦았던 87, 91시즌을 제외하곤 매 시즌 75경기 이상을 뛰어주며 (그는 전 경기 출장이 1번에 그칠 정도로 부상이 잦은 선수였다) 꾸준히 뛰어줬다.
당시의 필라델피아에는 닥터 J와 모제스 말론이 떠나간 뒤에도 꾸준히 괜찮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우승에는 한끝 모자란 선수 구성이었다. 구단 측은 우승 보다는 적당한 돈으로 적당한 입장수익을 벌어들이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당시 엄청난 강세를 보이던 동부에서 유잉의 뉴욕 닉스, 조던의 시카고 불스에 치여 플레이오프에서 수시로 탈락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우승 욕심이 없을 수가 없는 바클리는 이에 불만, 대놓고 구단 측과 싸우고, 언론에 자기 구단 까는 것은 기본에 경기 중의 난투극도 심심치 않게 벌이는 등 구단과 많은 트러블을 일으켰다. 결국 91-92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진출조차 실패하자 불만이 폭발하고 만다. 자길 도와줄 선수가 한 명만 있더라도 나는 우승할 수 있다며 구단에게 트레이드를 요청하며 대립각을 세웠었다. 이때 어찌나 이때 한이 맺혔던지, 은퇴 후 조던과 함께 출연한 오프라 쇼에서 '나도 옛날에 피펜만 있었어봐라!!!'라고 말했을 정도. 나중에 휴스턴 로키츠에서 만나긴 했지만 그때 우승못한 건 흑역사.[19][20]
사실 위에 묘사된 것만 보면 바클리가 필리 시절 불평만 늘어놓은 것 같지만 이와 별개로 당시 바클리는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다. 1989-90시즌에는 실제로 MVP를 간발의 차이로 놓쳤으며[21] 올NBA 퍼스트팀[22]에도 필리 시절에 네번이나 올랐다. (커리어 총 다섯 번 선정. 마지막은 93시즌 MVP시즌에 선정.)
다만 올NBA팀도 어느 정도 걸러봐야 할 필요는 있다. 시대적으로 더 빡센 시대와 덜 빡센 시대가 있기 때문. 또한 팀내 상황도 있다. 예를 들어 위에 언급된 워디는 실력으로 따지면 도미니크 윌킨스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지만 디펜딩 챔피언 팀에 입단해서 실력에 비해 스탯이 낮다. 가장 압권은 4대센터로, 포지션 역대 10위 안에 들만한 센터들이 한 시대에서 뛰어 94년과 95년 당시 패트릭 유잉과 샤킬 오닐은 20-10을 훌쩍 넘기는 좋은 기량과 각자 팀을 결승까지 올려놓는 맹활약, MVP 투표 5위에 오르고도 써드팀에도 못 올랐다. 반면 센터들이 씨가 마른 시대의 디안드레 조던은 올스타도 아니었는데 퍼스트팀. 바클리의 경우 당시 포워드진은 크게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적절한 편이다. 버드와 어빙은 바클리가 전성기에 오르기 전에 기량이 쇠퇴했고, 칼 말론이 한 자리 고정이긴 했지만 말론과 바클리의 기량은 대등했기 때문에 딱히 손해 본 건 없다. 다만 둘의 퍼스트팀 횟수 차이가 나는건 바클리의 원맨팀 시절이 더 길었고, 고질적인 몸관리 문제로 전성기가 급격히 사그러들었기 때문. 일례로 둘은 동갑인데 말론은 99년까지 퍼스트팀에 오른 반면 바클리는 퍼스트팀 선정이 93년에 뚝 끊겼으며, 둘이 리그 최정상급 기량을 유지한 시기도 이와 비슷하다.
실제로 MVP는 피닉스 시절에 올랐지만 사실상 기량상 전성기는 필라델피아 시절이었다. 이때 눈부신 기록을 몇개만 나열하면 1. 90시즌엔 '''필드골 60%로''' 25.2점 2. 88시즌엔 58.7%로 '''28.3점''' 기록 3. 2년차부터 6시즌 연속 필드골 57%이상/20점 이상 기록 등이 있다. 특히 집중수비를 당하는 주득점원으로 저 필드골 수치는 경이적이다. 극단적으로 골밑에서 득점하는 샤킬 오닐도 6할 성공률은 딱 두번, 22.9점/20점이었다. 게다가 바클리는 블럭당할 확률도 높은 단신. 그러나 93시즌(52%) 이후론 단 한번 (96시즌.50%)를 제외하곤 단 한번도 5할을 못 넘기게 된다.

3.1.2. 피닉스 선즈


많은 잡음 끝에 당시 공격형 포인트가드의 선두주자인 케빈 존슨[23]이 이끄는 피닉스 선즈로 3대1 트레이드를 통해 이적하게 된다. 당시 피닉스의 트레이드는 도박적이라는 평가였는데 91-92 시즌 피닉스 선즈의 주전 5명중에 케빈 존슨과 톰 체임버스만 남기고 제프 호나섹, 팀 페리, 앤드루 랭 3명을 바클리와 트레이드한 것. 물론 호나섹은 나중에 칼 말론존 스탁턴과 함께 콤비를 이룰 정도의 훌륭한 슈팅가드였지만, 신임감독 폴 웨스트폴[24]은 과감히 트레이드를 결정했다.
사실 호나섹을 제외하고도 멤버들이 쟁쟁했는데, 댄 멀리[25]는 이미 91-92 시즌 올스타 멤버일 정도였고, 노장이었지만 올스타 출신의 톰 체임버스, 준수한 백업이었던 세드릭 세발로스[26], 올스타급 재능을 가졌으나 약물문제로 징계를 받고 92-93 시즌에야 돌아올 수 있었던 리차드 두마스[27] 등으로 메꾼다는 신임감독 폴 웨스트의 구상이었던 것. 여기에 FA였던 베테랑 슈팅가드 데니 에인지를 영입한 것은 금상첨화.[28] 바클리는 선즈에 입성하여 중견급이었던 팀을 단번에 우승후보로 끌어올린다.

3.1.3. 93시즌, 마이클 조던과의 대결


그리고 바클리는 좋은 동료들과 함께 1993년 정규시즌 MVP를 수상할 정도로 맹활약해 선즈를 서부지구 1위로 이끌었다. 이는 92년 드림팀의 영향이 컸는데,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바클리는 평소보다 철저하게 몸관리를 했고 페이스를 보다 앞서 끌어올린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드림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것은 바클리였다.
또한, 거칠게 없는 언변과 행동으로 마이클 조던과 함께 드림팀에서 가장 많은 화제를 몰고 다닌 인물이기도 했다. 앙골라 전을 앞두고 "앙골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앙골라는 이제 큰일났다(Angola's in trouble)"라고 기자회견에서 말해 폭소를 자아냈으며(실제로 드림팀은 앙골라를 116대 48로 박살냈다), 매직 존슨의 회상에 따르면 시내를 다니다가 어딘가에서 팬들의 환호성이 들리면 멤버들끼리 "ㅋㅋㅋ 저기 찰스 가네"라고 했다고. 다만 앙골라전에서 또 논란이 되는 행동을 저질렀는데, 앙골라의 201cm 포워드 헐랜더 코임브라와 몸싸움을 하다가 팔꿈치로 그의 상체를 가격해 비난을 받았다. 바클리는 "그가 나를 먼저 가격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드림팀은 앙골라를 거의 비참할 정도로 박살을 내고 있었고 코임브라는 고작 71kg에 불과한 비쩍 마른 체격으로 당시 120kg 가까이 나가던 바클리보다 훨씬 작고 왜소해서 더욱 비난이 집중되었다. 이를 두고 미국 언론에서도 바클리가 "추한 미국인(ugly American)의 이미지대로 행동하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http://articles.baltimoresun.com/1992-07-27/sports/1992209182_1_barkley-ugly-american-ghetto 실제로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드림팀으로 온갖 좋은 이미지를 쌓고 있는데 굳이 쓸데없는 행동을 해서 미국 이미지 나빠지게 하냐는 여론이 높았다.
트로피 수여식 때 홈팬들 앞에서 '''"The God wants us to win!!!"'''이라고 외치며 호언장담을 했으며 결국 바클리가 이끄는 피닉스 선즈는 플레이오프 내내 명승부를 연출하며, 커리어 최초의 NBA 파이널에 올랐다.
특히 1993년 NBA 플레이오프는 사실상 최초로 국내에 NBA 포스트 시즌 전 경기가 방영되어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모았다. 신생 방송국 SBS의 개국 특집으로 수요볼링, 목요복싱, 금요골프 등 스포츠 시리즈를 편성 매주 NBA 경기와 하이라이트들을 녹화중계 해줬는데, 이전까지 AFKN을 통해서나 보던 서커스같은 묘기의 '미국농구'를 TV에서 손쉽게 볼 수 있게 되어 90년대 중반 국내에 NBA와 농구붐이 일어나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다만 국내에 NBA 포스트 시즌 전경기가 방영된 적은 없다. 행여나 AFKN(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를 통해서도 채널이 한개뿐이라 전경기를 방영하는것은 힘들었다. 게다가 SBS의 수요농구는 1시간짜리 프로그램으로 1,2쿼터는 하이라이트로 보여주고 3,4쿼터만 정식으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또한 NBA플레이오프 전경기를 중계한다라는것은 현재로써도 시간대의 차이와 경기시간등의 문제로 인해 굉장히 어렵고 힘든것이다. 마지막으로 수요농구는 밤 11시에 방영되었던터라 당시 생활 패턴상 시청이 어려웠고, 그나마도 다른 프로그램이 특별 편성되면 쉽게 건너뛰는 프로그램중 하나여서 당시 NBA의 인기를 반영하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지방에서도 미군부대가 있는 지역이면 AFKN이 어디든 다 나왔고, 부산 같이 일본과 인접한 지역은 일본방송을 통해서도 NBA 경기를 볼 수 있었다. 나중엔 홍콩 스타티비에서 하는 중계도 봤다. 저시대에 NBA를 접해 현재 해설을 하고 전문기자가 된 조현일과 염용근이 부산출신이고, IMF전까지 NBA 카드를 취급하는 가게도 여러군데 성업중이었다.
아무튼, 바클리가 이끄는 피닉스 선즈는 정규시즌 기대 이상의 놀라운 성적을 거두고, 본인도 그 공로를 인정받아 MVP에 올랐지만, 바클리를 보좌해 줄 인사이드 전력의 부재 - 잔부상에 시달린 식스맨 노장 체임버스와 부진한 마크 웨스트로는 한계가 분명한 - 때문에 파이널 후보로는 꼽히지 않았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 LA 레이커스와의 경기에서부터 그 문제점은 확연히 드러나게 되어, 블라디 디박이 이끄는 레이커스에게 홈경기 1,2차전 연패를 당하고 시작하자마자 탈락 위기에 몰렸다. 폴 웨스트팔 감독은 "LA 원정 3,4차전을 잡고 홈에서 5차전을 승리할 것이다."라고 큰소리를 쳐댔지만, 피닉스 이적후 올라운드 플레이어에 가깝게 스타일 변화에 성공한 바클리에게, 로우 포스트에서 사실상 센터와 파워 포워드 역할을 동시에 맡겨야하는 팀의 현실을 감안하면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웨스트팔 감독의 큰 소리는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는데, 3차전부터 무명의 올리버 밀러를 바클리의 인사이드 파트너로 적극 기용한 승부수가 제대로 적중했다. 정통센터가 아닌 스트레치 타입의 디박을 밀러가 거칠게 몰아붙이며 행동반경을 제한해 준 덕분에 바클리는 본래의 막강한 인사이드 폭격은 물론, 외곽을 넘나들며 완벽한 프리롤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케빈 존슨의 돌파 공간 확보, 댄 말리와 데니 에인지의 3점슛 오픈 찬스가 빈번해지며, 피닉스는 3,4차전을 내리 잡아내고 홈으로 돌아와 5차전을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5차전, 31득점 14리바운드를 올린 바클리와 올리버 밀러는 공/수 양면에서 맹위를 떨쳐 레이커스 플레이의 핵인 디박을 고작 12점 4리바운드로 꽁꽁 묶었다. 또한 밀러는 연장까지 가는 혈투 속에서 연장전에만 8점을 올리는 인생 최고의 경기를 펼치게 된다.
1라운드를 악전고투 속에 명승부로 돌파한 피닉스 선즈는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또 다른 강적과 조우하게 되는데, 숀 켐프게리 페이튼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리그에서 가장 에너지 넘치는 팀이 된 시애틀 슈퍼소닉스였다. 시애틀도 확실한 센터 포지션이 약한 대신, 리그 최고의 운동능력과 미친 순발력으로 야생마처럼 코트를 뛰어다니던 파워 포워드 숀 켐프, 중간에 합류한 3점슛 쏘는 단신센터 샘 퍼킨스의 인사이드는 바클리가 이끄는 선즈와 유사한 인사이드 구성이었다. 또 93년부터 합류한 리그 최고의 식스맨이자 샤프슈터인 데들리프 슈렘프와 댄 말리의 슈터 싸움도 팽팽했다. 거기에 가드 포지션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게리 페이튼과 리그 최고 수준의 스피드를 동반으로 한 드라이브 인 기술, 뛰어난 패신센스와 탄력을 겸비한 케빈 존슨의 포인트가드도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이렇게 케빈 존슨-찰스 바클리-댄 멀리 VS 페이튼-숀 켐프-슈렘프 양측의 삼격편대가 충돌한 컨퍼런스 파이널은 그야말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었다. 최후의 7차전까지 팽팽하게 맞선 끝에, 팔꿈치 통증에도 무려 44득점 24리바운드를 올린 바클리의 괴력으로 피닉스 선즈는 마침내 파이널에 진출한다.
이처럼 혈전의 혈전을 치르고, 손에 땀을 쥐는 명승부를 연출하며 올라온 바클리와 피닉스 선즈 앞에 기다리고 있는 상대는......바로 절친이자 최대의 라이벌, 그리고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 그것도 92-93 시즌의 불스는 리그 파이널 3연패를 목표로 하는 최강의 팀이기도 했다. [29]
1993 NBA 파이널은 매니아들이 손꼽아 극찬하는 파이널 최고의 명승부중 하나로 손 꼽히고 있다. 아직도 많은 팬들이 조던의 아성을 가장 위협했던 시리즈로 기억한다. 오픈 코트 상황에서 조던에게 속수 무책으로 점수를 내주었지만, 바클리 역시 시카고의 인사이드 수비 라인을 무시무시하게 두들겨 부수며 맞불을 놓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또한 케빈 존슨, 댄 말리, 데니 에인지 등 선즈의 동료들 역시 플레이오프를 힘들게 뚫고 올라온 투지와 기술로 무장, 조금도 밀리지 않는 대등한 승부를 연출했다.
당시 피닉스의 라인업은 케빈 존슨-댄 멀리-세드릭 세발로스(리차드 듀마스)[30]-찰스 바클리-마크 웨스트(올리버 밀러). [31][32] 선즈는 조던의 수비에 최선을 다했음에도 결과적으로 조던 봉쇄에 실패했다. 조던의 전담 수비를 맡은 댄 멀리는 조던과 비슷한 체격에 당시 디펜시브 세컨팀에 선정된 뛰어난 수비수였으며 뛰어난 외곽포와 허슬플레이, 팀 전술 이해도가 높아 프런트와 코칭스태프들이 아주 선호하는 유형의 선수였다.
그러나 멀리가 뛰어난 수비수인 것과 별개로 그가 맨투맨으로 조던을 막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조던은 멀리를 상대로 통산 20경기에서 31.4점을 기록했으며 멀리는 조던을 상대로 통산 13점에 크게 못 미치는 평균 8점에 그쳤다. 게다가 조던의 전성기(1차 은퇴전)에 둘이 맞붙은 경기는 7경기 뿐이다. 이 7경기 동안 조던은 34.4점을, 멀리는 12.6점을 넣었다. 게다가 92-93 정규시즌 당시 선즈와 불스는 두 차례 경기를 치렀으며 첫 경기에서 조던은 40점, 두번째 경기에서 44점을 기록했다. 전체적으로 조던은 92-93시즌 정규시즌/플옵 통틀어멀리와 8번 매치업되었으며 그 중 30점대 두번, 40점대 5번, 50점대 한번으로 41.1점(3차 연장 경기를 빼면 40.8점)을 기록한다. 멀리가 조던을 효과적으로 잘 막은 적은 없으며 그런 평가를 들은 적도 없다. 당시 멀리는 시즌 16.9점/플레이오프 15.6점을 기록했으나 파이널에서 17.2점을 기록하고 매경기 두자리수 득점에 6차전과 3차전에서 팀내 최고 득점인 21점과 28점을 하는 등 공수에서 맹활약을 했다. 그러나 상대는 마이클 조던이었고, 조던은 매경기 30점 이상을 득점하며 맹활약하고 만다. 경기별로 기복이 커서 2,3,5차전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뿐 다른 경기에서 선방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6경기 중 3경기에서 털렸으면 털린게 맞다.''' 게다가 3차전에서 3차 연장까지 갔어도 양팀의 다른 어떤 선수도 30점을 못 넘긴 걸 생각하면 조던이 맹활약한게 맞다. 상대가 조던이니까 "그 정도면 잘 막았다" 소리가 나오는거지, 6경기 중에 1차전 31점, 2차전 42점, 3차전 43점, 4차전 55점, 6차전 33점을 기록했다면 미친 활약이다. 파이널 평균 41점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역대 최고기록이다. 3차전에서 3차 연장까지 간 걸 뺀다고 쳐도 평균 40.6점이다. 이건 속수무책으로 뻥뻥 뚫린게 맞다. 다만 선즈가 못한게 아니라 조던이 너무나도 잘했기 때문이지만.
또한 멀리가 마치 이전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체력적 부담이 커서 기복이 심해졌다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멀리는 당시 오히려 평상시보다 좋은 활약을 했으며 움직임도 평상시에 비해 둔화된게 아니었다. 조던에 비해 멀리의 움직임이 느려보여서 그렇게 착각한 모양인데, 멀리는 '''원래 조던보다 훨씬 느린 선수다.''' "썬더" 댄 멀리는 외곽슛과 수비력이 뛰어난 선수로 점프력이 대단해 덩크로 유명했지만 스피드는 빠른 편이 아니었다. https://www.nba.com/suns/fitness_over40_111128.html#gref 이 기사에도 나와있지만 멀리는 그 시절 농구선수로서는 드물게 10대 시절부터 웨이트트레이닝습관을 들였으며 현역시절에 본 포지션인 슈팅가드들을 넘어서 '''파워 포워드들하고도''' 힘으로 겨룰 수 있는 선수였다. 실제로 선즈 시절 그의 몸무게는 215~220파운드 사이로 당시 디트로이트와의 처절한 매치업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크업을 해 205~210파운드 사이였던 조던에 비해 10파운드(4.5kg)는 족히 더 나갔다. [33] 이로 인해 덩치에 비해 힘이 세기로 유명한 조던보다도 월등한 파워를 자랑했지만, 덩치가 더 크다보니 당연히 슈팅가드치고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다. 하물며 민첩성이 포인트가드급에 가까웠던 전성기 조던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런 선수랑 매치업했기 때문에 멀리가 둔해 보인거지, 파이널에서 멀리의 움직임은 평상시와 전혀 다를게 없었다.[34] 게다가 당시 조던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제리 크라우스 시카고 불스 단장은 상대 매치업이었던 백인 스윙맨 댄 멀리에 꽂혀있었는데, 이 때문에 쪼잔왕 조던은 더더욱 멀리를 상대로 특유의 투쟁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1차전은 패했지만, 멀리는 조던을 31점으로 비교적 잘 제어했다. [35] 그러나 2차전은 42점을 허용하며 조던의 공세에 번번이 돌파당했다. 다시 3차전에서 표면적으론 조던에게 44점을 허용하긴 했지만, 3차 연장까지 이어진 것 때문에 기록이 늘어난 것 뿐, 정작 조던은 무려 43번이나 슛을 쐈고 필드골 성공율 역시 43%에 그쳤다. 반면 댄 멀리는 필드골 성공율 58.8%로 28득점을 올렸으며, 3점슛을 무려 6개나 넣는 대활약으로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36] 3차전에서 3번의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석패한 후, 4차전에서 조던은 단단히 벼르고 나왔는지 집요하게 골밑을 공략하여 무려 55점을 퍼부었는데, 이 경기에서 조던의 돌파에 계속 당하던 멀리가 다급하게 "도움수비!(Help!)"라고 외치던 입모양이 뚜렷하게 카메라에 잡혀 화재가 되기도 했다. [37] 웨스트팔 감독은 조던보다 빠른 케빈 존슨을 매치업으로 변경하는 뒀는데, 조던은 자신보다 13cm나 작은 존슨을 포스트업으로 탈탈 털어버렸다. [38]
사실 이때 조던은 일반적인 맨투맨 수비로는 막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선수였다. 물론 그렇다고 수비3초룰이 있는 "NBA식 지역방어"로 막을 수 있는 선수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당시 조던을 막는 것은 뛰어난 맨투맨 수비수를 붙히고 돌파시 다른 선수들이 에워싸듯 도움수비를 오는 것 뿐인데(이 방식은 르브론같은 현대농구 슈퍼스타들을 막는데도 유효하다) 이 방식을 쓴 디트로이트와 닉스같은 팀들은 30점 이상을 내주긴 했지만 필드골성공률을 4할대로 떨어뜨리는데 성공하긴 했다. 그러나 그건 이들이 역대급 수비팀이라서 성공한 거고, 조던의 발을 따라갈수 있는 맨투맨 수비수가 있는데다 (존 스탁스, 조 듀마스, 데니스 로드맨) 림프로텍팅이 강한 팀이었다. [39]그러나 피닉스의 경우 최고의 외곽수비수인 멀리가 스피드가 느려서 하필이면 조던과 상성이 안 좋은데다 마크 웨스트를 위시한 센터진은 선즈 전통대로 허접들인데다가 파워 포워드 바클리는 단신이라 림 프로텍터로서 별 위력이 없었다. 선즈는 결코 나쁜 수비팀은 아니었지만 (워낙 페이스가 빨라 실점은 많았지만 페이스 보정을 한 디펜스 레이팅의 경우 중상위권은 됐다) 조던과 상성이 맞지 않는데다가 역대 최고의 선수를 전성기에 상대하는 불운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다만 93시즌 당시 조던은 91,92시즌보다는 골밑까지 파고드는 플레이도 조금 적어지고, 위력이 다소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올림픽 출전과 도박 스캔들로 인한 NBA측의 조사 등이 요인으로 꼽혔다. 물론 '''조던치고''' 예전보다 못했다는 거지 여전히 압도적인 리그 최강이었다. 바로 전 시즌에 넘버2 슈팅가드인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매치업됐을때도 35점을 퍼부었다. 조던이 그나마 막혔다고 볼 수 있는 때는 96파이널 때 평균 27점을 기록한 것이 유일한데, 이때 조던은 등부상을 안고 있어 컨디션이 안 좋았은 것도 있었고, 가드포지션 역대 최고의 수비수 게리 페이튼의 짠물 수비에 고전하며 그답지 않게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 평균 27점이면 다른 선수같으면 대활약이라 할 만한 기록이긴 하다. 실제로 자타공인 "조던을 가장 잘 막은 선수"인 역대급 수비수 조 듀마스도 커리어 기간 조던에게 경기당 평균 30점 이상을 허용했는데, 그 때문에 조던을 30점 언저리로 막아낼 수 있으면 수비에 성공했다 평가할 정도였다. 실제로 조던을 30점 수준으로 막아낼 수 있는 수비수는 조 듀마스 외 댄 멀리와 게리 페이튼(포인트가드라 평소에는 매치업을 안하지만, 96파이널에서 평균 27점으로 막아낸 적이 있다.) 조던은 그 대단한 피스톤즈를 상대로 '''필드골 성공률 70%가 넘으면서 50점 이상을 찍은 적도 있다.'''[40]
이때 훗날 스타가 되는 스카티 피펜과 호레이스 그랜트는 경기당 20분 정도 출전하는 후보에 불과했던 터라 (이날 둘이 합쳐 슛 7개 던져 1점;;; 넣었다) 물론 이때는 그야말로 완벽한 조던의 원맨팀이라 공격의존도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높았다. 오죽하면 팀내 2옵션이 득점이 아니라 리바운드와 수비에 특화된 파워 포워드인 찰스 오클리(12.4점)일 정도. 심지어 팀에서 두자리수 득점을 한 선수는 이 둘 뿐이었다. 괜히 역대 최고선수가 아니다. 신체능력+기술의 조화가 정점에 달했던 93시즌의 조던이라면 어떤 수비수를 붙여도 맨투맨으로 당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선즈 역시 파이널 6경기동안 평균 41점을 조던에게 헌납했다.
바클리는 팔꿈치 통증을 안고 1차전 21득점 11리바운드를 기록하긴 했으나, 필드골 성공율은 36%에 불과했고 결국 경기를 내주고 말았다. 심기일전한 바클리는 2차전에서 최고의 수비수 피펜과 그랜트가 안간힘을 써가며 더블팀으로 제지해도 무주공산처럼 골밑을 맹폭한 끝에, 조던과 동일한 42점을 기록하고, 14리바운드를 따내는 맹활약을 보였으나, 3점차로 석패하고 말았다. 이어지는 3차전은 3차 연장까지 가는 혈투를 벌였고, 바클리가 24점 19리바운드, 댄 말리가 28점, 케빈 존슨도 25점을 기록하는 등, 무려 7명의 선수가 두자릿수 득점을 올린 선즈가 첫 파이널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4차전 바클리는 34점, 12리바운드, 10어시스트로 트리플더블을 기록하며 대활약 했지만, 조던에게 댄 멀리와 케빈 존슨을 번갈아 붙여봐도 무인지경으로 돌파당한 끝에 무려 55점을 헌납, 경기를 내주고 말았다. 팔꿈치 통증이 악화된 5차전은 24점에 6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인사이드에서 위력이 반감되었으나, 25점을 올린 케빈 존슨의 활약과 리처드 듀마스의 25득점 깜짝포가 터진 덕분에 10점차 승리를 거두고 2승 3패로 기세를 만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하이라이트 필름으로 남아있는 6차전. 계속 리드 당하던 선즈는 4쿼터에 질식 수비를 통해 시카고의 득점을 '''9점'''으로 묶으면서(그나마 전부 조던에게 내 준 점수였다) 맹추격, 결국 게임을 역전해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결정적 포제션에서 슛 미스와 실책으로 공격권은 불스에게 넘어갔고 시간은 14초 남아있었다.
당시 불스는 센터가 없이 BJ암스트롱-존 팩슨-조던-피펜-그랜트로 이어지는 스몰라인업을 돌리고 있었다.[41] 그리고 바클리는 피펜을, 케빈 존슨이 조던에게 붙었다. 볼운반을 하던 조던은 스피드만으로 존슨을 제치기 무리였기 때문에 피펜에게 패스하는데, 이때 바클리가 치명적인 수비실수를 하고 만다. 성급하게 피펜에게 오는 패스를 스틸을 시도한 것. 결국 피펜은 바클리를 뒤로 한채 무주공산으로 돌파를 하고, 호레이스 그랜트를 막던 마크 웨스트가 어쩔 수 없이 커버에 들어갔다. 그러자 그랜트가 오픈되었고, 피펜이 골밑에 혼자 남은 그랜트에게 패스를 하자 외곽의 대니 에인지가 커버를 들어온 틈을 타 곧바로 3점라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존 팩슨에게 패스를 돌렸고 팩슨이 3점슛을 성공시켰다. 게임을 결정 지은 조던-피펜-그랜트-존 팩슨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3점슛은 명장면 중의 하나로, 슬램덩크권준호가 한 회를 고스란히 바친 과거회상 3점슛으로 오마쥬하기도 했다.
눈 앞에서 아쉽게 타이틀을 놓치긴 했지만, 바클리는 팀의 구심점으로 시즌 내내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특히 플레이오프에서 보여준 맹활약으로 인해 MVP다운 최고의 모습이라는 극찬을 받은 시즌이었다. 무엇보다 최고 정점의 마이클 조던을 상대로 턱밑까지 치고 올라가 대등한 승부를 벌인 유일한 선수라는 점에서, '조던의 유일한 라이벌'이라는 영광스러운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안타까운 것은 1992-93 시즌이 찰스 바클리가 정상적인 몸 상태로 최적의 기량을 선보이던 마지막 시즌이었다는 것이다. [42]
그 이후론 고질적인 등부상, 무릎부상 등으로 전성기만큼 수비가 불가능했고, 공격도 외곽슛의 비중이 많아져 갔지만 3점슛 성공률이... 사실 전성기의 모습이 조던 부럽지 않을 정도로 워낙 화려했는데도 불구하고 커리어 평가가 그리 높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너무 빨리 기량이 하락세를 보여서였다. 물론 93시즌 이후의 바클리도 슈퍼스타라고 할 만했지만, 알고도 못막던 인사이드 공격력이 떨어지고 외곽슛 비중이 너무 높아지면서 특유의 강점이 무뎌진데다가 수비도 많이 떨어졌다. 바클리는 커리어 최소 1,000개의 3점슛을 시도한 선수 중 가장 성공률이 낮았으며 (26.6%), 또한 성공률 3할 미만 선수들 중 가장 많이 3점슛을 쐈다 (2,020개). 물론 당시 빅맨으로 저런 성공률이 나쁜 건 아니지만 저 정도 성공률이면 가끔 한번 쏴야지 저렇게 많이 쏘면 효율을 깎아먹는 것. 저 시도 갯수가 충격적인 것은 거의 똑같은 경기수를 소화한 '''가드''' 마이클 조던보다도(1,778개) 더 많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조던의 성공률은 32.7%로 높은 건 아니지만 바클리보단 훨씬 높다. 안타까운 건 바클리가 삼점라인 한발짝 앞에서는 매우 효율적인 선수였다는 것이다. 그는 골밑에서 그야말로 상대팀의 재앙이었으나, 골밑에만 집중하는게 아니라 중장거리슛 능력도 있어 수비가 어려운 위력적인 득점원이었다. 그런데 삼점슛을 비효율적일 정도로 많이 쏘면서 스스로의 장점을 깎아먹은 꼴이 됐다. 3점 능력을 어느 정도 갖췄지만 비효율적이란 판단 하에 삼점슛을 스스로 자제했던 조던과 대비되는 케이스.
1992-93시즌이 끝나고 그는 은퇴를 결심했으나, 구단의 만류에도 뜻을 굽히지 않다가 1995-96시즌까지 팀에 남게 되었다.
사실상 그가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던 시절은 93시즌이 마지막이었다. NBA의 슈퍼스타들은 젊은 시절에 폭발적인 운동능력과 재능으로 뛰어난 기량을 보이다 나이가 들면서, 혹은 부상이후 운동능력을 잃으며 하락을 경험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급격한 추락이냐, 완만한 하락이냐에 차이가 있을 뿐. 그러나 드물게 꾸준한 몸관리와 타고난 강골로 오랜 기간 전성기를 유지하는 경우도 간혹 있는데, 마이클 조던. 칼 말론, 르브론 제임스, 디르크 노비츠키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운동 능력이 천천히 하락하는 것을 경험으로 메꾸고 다른 기술을 습득하면서 보완하여 오랜기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43] 바클리는 짐승같은 운동능력에 비해 과체중으로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타입인만큼, 스타일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다면 급격한 추락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바클리의 93시즌 맹활약에는 몇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첫째로 필라델피아 시절 패배에 지쳐 컨텐더 팀으로 트레이드를 원했고, 결국 케빈 존슨, 댄 멀리, 대니 에인지 등 훌륭한 조력자들이 준비된 선즈 이적 후 동기부여가 된 상태였다. 덕분에 악동이라는 명성 답지않게 코트 안팎에서 팀의 리더로서 솔선수범을 보였고, 팀원들과의 케미스트리도 매우 좋았다. 두번째로 바클리는 오프시즌만 되면 공을 놓고 노는 통에 체중 조절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젊었을때야 워낙 재능이 뛰어나 문제가 눈에 드러나지 않았으나, 20대 후반을 넘어가면서 운동능력의 저하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92 오프시즌 역사적인 드림팀의 일원으로 올림픽에 참가하게 되면서 오프시즌 중에도 철저하게 몸관리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시즌 개막 당시 대니 에인지의 표현대로 "환상적인 몸상태(fantastic shape)"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정신적/육체적으로 충만한 준비가 된 바클리는 기대를 뛰어넘는 최고의 활약으로 팀을 리그 1위로 이끌었으며, 조던을 제치고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도 선즈에서의 나머지 3년 동안은 MVP급 포스는 아니더라도, 리그 정상급 기량은 보유하고 있었다. 결장이 조금씩 늘어나고 평균득점이 줄긴 했지만, 꾸준히 평균 20득점-1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했고 올 nba 팀에도 계속 선발되었다. 그러나 파이널 무대와는 더 이상 인연이 없었는데, 94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세미컨파에서 휴스턴 로케츠에게 원정 2연승을 따내며 쾌조의 출발을 보였지만 하킴 올라주원을 막지 못하고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탈락했다. 95년에도 세미컨파에서 휴스턴과 만났는데, 이번엔 홈어드도 가지고 있었고 4차전까지 시리즈스코어 3-1로 리드하며 작년의 복수를 하나 싶었으나.. 5,6차전을 연속으로 내주며 최종전까지 가게 되고 7차전에서 접전끝에 휴스턴의 백업가드 마리오 엘리에게 결정적인 3점을 허용하며 결국 1점차로 분패하고 만다. 이 시즌이 사실상 선즈에서의 마지막 우승 도전이었고, 95-96 시즌에는 5할승률로 간신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고 1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1-3으로 무너진다.

3.1.4. 휴스턴 로케츠


이후 선즈가 리빌딩에 들어가자 우승반지를 위해 자기를 2년연속 물먹였던 휴스턴 로케츠로 이적한다. 자기가 선즈로 왔을때처럼 샘 카셀, 로버트 오리, 마크 브라이언트, 처키 브라운과의 1대 4 대형 트레이드였다. 바클리-클라이드 드렉슬러-하킴 올라주원[44]으로 이뤄진 이름만 봐도 헉소리가 나올법한 어마어마한 빅3를 결성했으나 전성기가 지나 은퇴에 가까워오는 노장들이라 한계가 있었다.[45][46]게다가 이 팀을 이끄는 포인트가드 맷 멀로니는 평범 그 자체인 선수고, 행동반경이 겹치는 올라주원, 바클리의 조합도 그리 좋지 않았다.[47]그러나 워낙 개인기량들이 막강해서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고 실제로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올라가지만 6차전에서 존 스탁턴에게 결승 3점을 얻어맞고 석패하고 만다.
이후 99-00시즌까지 우승을 위해 플레이하던 중, 필라델피아와의 19번째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친정팀이었지만 트레이드로 인한 충돌과 아름답지 못한 작별로 인해 선수 생활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필라델피아 구단과 팬들 모두 노장인 바클리를 환영해주었고, 바클리 또한 만년에 친정팀이었던 필라델피아에 돌아오자 뜨거운 환영에 감동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경기에서 바클리는 경기 시작 후 겨우 8분정도 흘렀을 때, 점프 후 착지 실패로 무릎인대가 끊어졌다. 당시 바클리는 이렇게 허무하게 은퇴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눈물까지 흘릴 정도였고, 이후 단 한경기를 위해 미친듯이 재활에 돌입한 후 4개월만에 밴쿠버 그리즐리스와의 경기에서 6분간 출장하며 2점, 1리바운드, 1블락,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그간의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바클리가 은퇴할 당시 훗날 그의 직장이 되는 TNT에서 짤막한 특집방송을 편성해 방영했는데 훗날 그와 개그 콤비를 형성하는 케니 스미스가 그를 아낌없이 칭찬하는 걸 볼 수 있다. 2020년 시점에서 보면 약간 웃기기도 한데 현재 그와 케니는 절친한 동료가 되어 서로를 거리낌없이 까는 사이기 때문. 댓글에서 "케니와 어니(진행자 어니 존슨)이 찰스에게 잘해준 마지막 순간이야"란 말도 있다. 은퇴 당시 TNT에서 유명 사이드라인 리포터 크렉 세이거가 인터뷰했는데, 찰스는 돌아와서 다시 뛸 가치가 있었냐는 질문에 "물론입니다. 재활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고, 제 (코트에서) 마지막 기억이 득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코트 위에서 실려나가는 것이 아니고요. 사실 전 리바운드를 정말 잡고 싶었어요. 리바운드를 잡기까지 오래 걸렸죠. 내내 불안했습니다. 제 무릎상태가 7%정도 밖에 안됐거든요. (제가 잡은) 그 리바운드가 제 쪽으로 왔으니 행운이 따랐죠. 점프해서 잡을 순 없었으니까요. 오늘 득점할 수 있을지는 몰랐습니다. 그냥 리바운드를 한개라도 잡고 싶었어요. 제가 가장 자부심을 갖고 있는게 바로 제 리바운드 능력이니까요."라고 답했다.
너무 빨랐던 전성기의 종료와 은퇴 이후 방송을 하면서 개그 이미지가 붙은 것 때문에 평가가 많이 깎였지만 적어도 1993년의 찰스 바클리는 NBA 역사에 남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같은 해에 NBA 역사상 최고의 선수도 최고의 해를 보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 [48]

4. 기타



4.1. 식성과 체중관리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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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번대 시절에는 피자를 너무 좋아해서 거의 흡입하다 시피해서 학교 근방 피자집을 혼자서 먹여살린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일화로는 피자집에 전화해서 "나 바클리에요 ㅋㅋ"라고 한마디로 알아서 5판이나 배달했다고 한다. 다만, 바클리는 연습 끝나면 저녁시간이 늦어서 선수들과 자주 피자 배달을 시켜서 먹은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피자를 좋아하는 것은 맞는 듯 하다.
그래서 대학시절 팀 동료가 '저 친구는 밥을 먹는게 아니라 그냥 뱃속에 넣어놓는거 같어.'라고 해서 별명이 냉장고(...)였다. 프로 시절에는 하프타임에 피자를 다섯 판씩 먹었다는 루머도 있었다. 오번 대학 시절엔 200파운드 후반대에 달했지만 프로데뷔 이후 전성기 때는 250~260파운드 사이를 유지했다. 드레프트 당시 필라델피아에 가기 싫어서 드래프트를 앞두고 일부러 폭식, 드레프트 당일 300파운드를 넘기는 등 몸부림을 치지만 그래도 필라델피아가 뽑았다. 그때 뚱해진 표정이 볼만 하다. 로켓츠 시절 몸무게는 공개된 적이 없지만 저때보단 육안으로 봐도 훨씬 육중하다. 워낙 먹성이 좋다보니 현역시절 198cm의 키임에도 7피트 선수들과 비슷한 몸무게였지만, 워낙 날씬한 농구선수들과 비교해서 뚱뚱해보였지 몸매 자체는 그냥 힘 좋아보이는 장사형이었다. 그러나 은퇴하고선 몸이 거의 폭발(...)을 하는데 은퇴한지 얼마안된 2000년대 초반에 Inside the NBA란 분석 프로그램에서 몸무게를 잰 결과 무려 330파운드에 달했다. 이후 공개 다이어트로 290파운드 정도로 감량하는데 성공하지만(웃통을 깠는데 똥배가 거의 없어졌다) 금새 또 쪄서 2010년대부턴 자켓 벗는것도 버겁게 보일 정도로 비대해졌다. 최고 많이 나갈 때 350파운드에 달했다고...결국 Weight Watcher란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촬영 전 스스로 14파운드, 이후 27파운드 감량하면서 2016년 9월 기준으로 총 41파운드나 감량하는데 성공했다. (http://people.com/bodies/charles-barkley-weight-watchers-spokesman/).
사실 그의 먹성에 선수생활이 걸려있었다고 할수 있었다. 그는 선수생활 내내 250~60파운드 정도의 육중한 체구였지만 [49] 그는 드래프트 당시 290파운드가 넘는 엄청난 몸무게였다. 물론 이 체격에도 그야말로 날아다니는 운동능력이었지만, 이 상태로 프로 생활을 했다가는 무릎이 아작났을 것이다.[50] 위기감을 느낀 빌리 커닝햄 감독은 그에게 혹독한 다이어트를 시켰고, 결국 바클리는 250파운드의 슬림한 (?) 몸으로 데뷔를 한다.
  • 타고난 먹성에 음주가무를 좋아하다보니 위에 언급됐다시피 은퇴 후 몸매관리가 그야말로 최악이다. 사실 운동량이 많은 운동선수들은 은퇴하고 운동량이 확 줄면서 몸이 엄청 불어버리는 게 대부분이긴 한데, 바클리는 그 중에서도 더욱 돋보인다.[51] Inside the NBA에서 팔굽혀펴기를 시켰는데 20개를 겨우 채우는가 하면(막판은 거의 얍삽이로 때운다) 코트에서 1층 꼭대기까지 왔다갔다 하는데 헥헥거린다. 물론 2007년 심판 딕 바베타와의 달리기 시합도 그렇고 조금만 체력관리하면 많이 돌아오긴 하지만... 현역 시절 역대 최강의 포스트업 플레이어 중 하나였던 선수의 안습한 근황...[52]
  • 이 때문에 바클리가 놀림받다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케니 스미스에게 때려주겠다고 하자, 케니가 "당시 찰스라면 무섭지만 지금 찰스라면 하나도 안 무서운걸?"하고 깐족거렸다.감히 누가 나랑 싸워)\"라고 농담 섞어 위협하자 스미스는 \"그땐 한 명도 없었지. 지금은 겁나 많은데? ㅋㅋㅋ\"라고 깐족을 시전했다.">[53][54]
  • 선수시절에 주먹다짐도 많이 했고, 싸움 직전까지 투닥거리던것을 포함하면 셀수 없이 많지만 결코 자기보다 작은 선수와 싸우지는 않았다. 본인의 신조라고... 빌 레임비어[55][56], 폴 모게스키[57], 샤킬 오닐[58][59], 찰스 오클리[60] 등등.

4.2. NBA의 펠레, 입담꾼로써의 면모


  • 특징으로는 거침없는 입담이 있다. 그러나 이런 입담을 발휘하며 같이 해설하는 케니 스미스랑 계속 티격태격하다가 케니 스미스가 우승반지를 보여주면서 해봤어?라는 한마디에 그냥 버로우(...)[61][62] 이런 입담은 농구 해설에도 이어지는데, 해설을 하면서 내놓는 이런저런 예측들이 항상 대다수의 농구전문가들과는 사뭇 다르고, 또 여지없이 그 예측들이 박살나는 통에 NBA계의 펠레로 불린다. 때문에 NBA 팬들은 응원팀이나 선수에 대해 바클리가 입만 열었다 하면 탄식과 기도를...[63]
  • 그래도 그의 이 호언장담이 가끔 빛을 발하는데, 10-11 플레이오프에서 서부지구 8위 멤피스의 샌안토니오 업셋과 3연패를 노리던 레이커스의 몰락을 모든 전문가를 물먹이며 홀로 예측, 적중시켰다. 게다가 많은 이들이 불가능하다 여겼던 댈러스의 우승은 물론 홀로 18-19 시즌 토론토의 창단 첫 우승까지... .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TNT에서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자신만의 캐릭터를 확고하게 다져놓았다. 그만의 특이한 발음, 절대로 한 문장을 끝내지 못하는 화법, 가끔 졸아주는 센스, 맨날 샤킬한테 당하는 허당끼 등은 그를 최고의 인기 많은 해설자로 만들어 놓았다.
  • Inside NBA와 TNT에서 독보적으로 놀림당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본인 자신도 화끈한 입담을 자랑하고 이런저런 공격도 잘 받아주는지라 이것저것 엮어서 예능으로 만들 요소가 넘친다. 야오밍 때문에 당나귀 엉덩이에 키스한 사건, 샌안토니오 여자들이 다 못생겼다고 했다가 까인 사건[64], 클리퍼스 구단주인 스티브 발머와 누가 더 춤을 못추나 비교당하는 등등 전적이 화려하다. 주기적으로 나오는 코너 중에 'Who's play for?'이 있는데, 주전선수들이 아닌 벤치멤버 사진을 제시하고 어느 팀에서 뛰고 있는지 맞춰보라는 코너다. 그리고 바클리는 이걸 거의 다 틀린다(...). 샤크와 대결한 적도 있는데 샤크는 미리 정답을 다 알고 있었던 상태. 적당히 틀린 척을 하다가 마지막에 중국 농구팀까지 맞춰버리면서 바클리를 멘붕시킨다. 영상
  • 입담이 둘째가라면 서럽고 워낙 예능감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 SNL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65]

4.2.1. 그 굴욕의 현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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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슛팀은 절대로 우승 못한다. 그런데 했구나..[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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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오밍이 19득점 이상 넣으면 당나귀 엉덩이에 뽀뽀를 해주마. 뽀뽀 해야겠네..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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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 바베타는 늙어서 뛰지도 못하니까 은퇴하는 게 좋아. 근데 나보다 빠르네..[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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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안토니오는 여자들도 다들 뚱뚱하고 못생겼다. 아니네..[70]
그래도 빼도박도 못하게 된 상황에서 유쾌하게 인정하는 편이다... 본인도 즐기고 있는 듯?

4.3. 직설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신념


  • 흔히 NBA 관련 프로그램의 패널로 출연하면 펠레, 허당 이미지가 강해 성격도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캐릭터일뿐 NBA에 중대한 이슈가 생가면 업계나 여론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논리적으로, 일관성있게 발언해 꽤나 좋은 평을 받는다. 특히 몬트레즈 해럴루카 돈치치에게 인종차별을 했을 때, "만약 백인 선수가 흑인 선수에게 그런 짓을 했다면 무조건 매장당했는데 반대라서 사무국에서 입을 닫는 거냐? 참 대단한 이중 잣대다!"라고 바른말을 한 적이 있었다. 케니 스미스샤킬 오닐은 경기 하다보면 격해지지 않냐며 해럴을 쉴드쳤는데, 바클리는 나도 현역때 많이 싸우고 많이 욕했지만 절대로 인종을 건들지는 않았다며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71]
  • 2000년대 중반 NBA에서 드레스 코드 규정을 만들자 많은 선수들이 개인의 자유 침범이라면서 반발했는데[72] "야 너네들이 공적인 자리에서 정장으로 잘 차려입고 깔끔한 모습을 보여야 애들이 그걸보고 따라해서 정장 입을수가 있는거고 그럼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깔끔해서 보기좋고 이미지도 좋아져서 흑인 청년들 취업률도 올라갈수가 있어." 라는 비판을 했었다.

  • 2020 플레이오프 보이콧 사태 당시 선수들에게 '어떻게 일을 수습할 지 생각도 하지 않고 보이콧을 진행했다'면서 다른 해설위원들과 달리 실망감을 드러냈고 결국 보이콧은 흐지부지 종료되었다.
  • 스티브 내쉬가 브루클린 네츠의 감독으로 선임되자 불편충들이 '내쉬가 백인이라 대접받는 것'이라면서 개소리를 지껄였는데 바클리는 이에 대해 그러한 발언은 절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지적하기도했다.
이렇듯 흑인이라고해서 무조건 편들지 않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으며 오히려 흑인 사회의 이중잣대와 어두운 부분에 날카로운 직설을 해설위원 초기부터 해오고 있다. 백인이라서 발언을 조심해야하는 어니 존슨, BLM에 대해서는 굉장히 호의적인 케니 스미스, 웅얼웅얼거리는 말투에 자신에 대한 공격을 참지 못해 방송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드는 샤킬 오닐 사이에서 최근 굉장히 돋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공화당 인사들에게 우호적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여담 문단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인권과 관련된 문제로 구설수에 자주 오른 마이크 펜스 부통령에게는 '''"닥쳐라"'''와 같은 표현까지 써가며 맹렬한 비판을 가한 바 있다. 또한 BLM의 이중성에는 비판적 의견을 견지하고 있으나, 이를 촉발한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태나 아머드 알베리 살해사건, 즉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는 입장을 보인 바 있다. 미국 사회의 주류를 대변한다기보다는 '''이중잣대 없는 소신'''을 중시한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예전에 데릭 로즈가 "휠체어에 탄 채로 아이들 졸업식에 참관하는게 두렵다"는 말을 꺼냈을때 "'''난 선수시절 부상 후유증으로 지금도 제대로 못걸어. 그래도 그 덕분에 내 가족들은 좋은 집에 살고 좋은거 먹고 앞으로도 사는데 걱정없어. 충분히 내 몸을 희생할 가치가 있었다고'''. '다치기는 싫고 돈은 더 받을래' 라는 개논리가 세상에 말이 되는거냐?"라며 크게 비판했다. 나때는 말야라는 식의 꼰대논리로 볼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자기 신념과 희생정신이 투철했다고 볼수있다.
2020년 연말에 카와이 레너드폴 조지가 있는 LA 클리퍼스제임스 하든이 있는 휴스턴 로키츠에서 슈퍼스타에 관한 특혜 논란이 벌어졌다. 그리고 바클리는 '''"아무리 좋은 성적을 거둬도 팀 분위기를 해치는 선수는 롤플레이어가 될 수 있을 지언정, 최고의 선수는 될 수가 없다."'''라며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힌 적이 있었다.

4.4. 안습한 연봉


연봉 면에서 베프였던 마이클 조던 이상으로 불운했던 선수였다. NBA는 90년대에 큰 폭으로 샐러리캡이 증가하는데[73] 특히 95-96시즌을 앞두고 새로운 TV중계권 계약 등으로 BRI (농구관련수익)이 급격히 증가해 전 시즌 1,596만 달러에서 한 시즌만에 2,300만 달러로 급증했다. 덕분에 이 시즌을 전후로 계약한 선수들은 연봉대박을 터뜨리기도 했다.[74] 문제는 조던, 그리고 스카티 피펜과 마찬가지로 샐러리캡이 급증하기 전에 장기계약을 맺은지라 휴스턴으로 트레이드되던 96년에 아직 계약기간이 2년이나 남아있었던 것이다. (96-97시즌 469만달러, 97-98시즌 225만달러)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98-99시즌에 더 큰 돈을 만질 수 있었다. 바클리가 노장이었고 98시즌에 14경기를 결장한데다 수비문제가 더 커졌지만 15.2점 11.7리바운드를 기록하는 아주 좋은 선수였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단기계약으로는 1천만달러 이상도 노려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잘 알려져있다시피 피펜을 데려오기 위해 자진해서 1백만달러란 헐값에 1년계약을 맺었다. 결국 피펜이 온갖 잡음끝에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떠난 이후인 99년이 되어서야 커리어 처음으로 그나마 고액계약이라고 할 수 있는 1년/9백만 달러 계약을 맺었지만[75] 하필 이 시즌에 20경기만 뛰고 부상으로 은퇴하게 된다...
종합하면 1. 연봉이 적은 시절에 데뷔해, 2. 장기계약을 맺어 전체적인 리그 연봉 수준이 올랐을때도 계약에 묶여 2년 동안이나 헐값에 뛰고, 3. 큰 돈 만지나 싶었는데 우승을 위해 거물 FA를 영입할 수 있게 스스로 연봉을 포기하고, 4. 말년에 그나마 돈 좀 버나 싶었는데 부상으로 은퇴해버렸다. 비슷한 케이스인 조던이나 피펜같은 경우 1~2까지는 똑같지만 그나마 말년에 거액계약을 해서 커리어 통산 연봉이 조던은 9,328만 달러, 피펜은 1억 919만달러는 된다. 근데 바클리는 불과 4,360만 달러이다. 전성기 기량으로 요즘 뛰었다면 1~2년 안에 벌 수 있는 액수이다.

4.5. 여담


  • 피닉스로 이적하던 시절부터 허리부상을 달고 살았지만 본인은 내색하지 않고 플레이하려 애썼다. 주변에서 허리에 대한 염려의 인사를 건네면 짜증을 낼 정도로 민감했지만 팬들의 염려에는 츤츤거리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한 예로 피닉스 시절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후 인터뷰중 팬들이 보내준 선물을 개봉하다가 관절에 좋다는 로션을 보고서는 "염X할 내가 허리에 대해 잊을만 하면 X같게도 이렇게 기분 잡치는 걸 보내는 XX들이 있다니까! 참 기분 XX같으니까 이런거 좀 보내지마!" 하더니 정성스럽게 코로 냄새를 맡고는 라커에 고이 모신 후 인터뷰를 진행했던 일례가 있다.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시절, 4점을 득점인정 못 받은 적이 있다. 리바운드 후 단독속공을 전개하다가 강렬한 덩크로 속공을 마무리 했는데 워낙 덩크가 쎄고 달리던 관성이 있다보니 덩크한 공이 바클리 머리를 맞고 다시 튕겨나온것을 심판이 노골 처리한 것이다. 첫번째는 그냥 투덜대며 넘어갔지만 두번째는 머리에 공 맞아서 벌게진 자국을 보여주면서 항의했는데도 심판이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76]
  • 피닉스 선즈에서 그가 선즈에서 뛰던 시절에 달았던 34번을 영구결번 시켰다. 사실 그는 피닉스에 단 4시즌동안만 뛰었지만, 그가 있던 동안 피닉스는 파이널에도 진출했고, 여러모로 피닉스에서 한 공로를 인정받은듯 보인다. 친정팀인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또한 과거지사를 모두 잊은 듯 그의 은퇴에 경의를 표하며 34번을 영구결번시켜주었다.
  • NBA시절 그의 위력을 알게해주는 것은 그의 이름을 딴 규칙이 있다는 것. 일명 찰스 바클리 룰이라 불리는 포스트업 백다운 5초룰이다. 바클리는 전성기때 포스트업을 즐겨쓰고 길게는 10초까지 등짝으로 상대를 밀고들어가서 공격을 했다. 이 위력이 너무나도 지저분하게 강렬해서 '항문 포스트업'으로 불리었고 상대 수비수들도 바클리의 진득하니 느린 백다운을 막기도 어려운데다, 무엇보다 수비 시간에 쫓기면서도 아이솔레이션을 강요하는게 전술적으로 까다로웠다. 잘못하면 24초 내내 바클리가 등짝으로 느릿느릿 밀다가 골밑에 들어와서 득점하는 늪 농구가 속출하는 마당... 결국 보다못한 NBA사무국은 『포스트업 상태에서 5초안에 슛이나 패스를 해야한다.』라는 새로운 조항을 만들었다. 바클리와 함께 이 기술을 즐겨쓰던 마크 잭슨[77]도 해당되어 이 규정은 바클리 룰 혹은 마크 잭슨 룰로 부른다.
  • 음주와 도박에 상당히 약해서, 계속 달고 다니다가 얼마전에 기어코 도박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2008년에는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에서 개인수표를 발행해서 판돈을 융통하고는 수표의 결제를 제때 하지 않아서 카지노에서 소송이 걸리기도 했다.
  • 전술한 대로 은퇴 후에는 NBA 방송 캐스터로 일하고 있으며 취미로 골프를 하고 있는데, 평은 영 좋지 않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 마이클 조던과 함께 출연했을 때 어느 강사가 "잠깐 멈췄다가 쳐라"라고 하는 바람에 지금의 괴상망측한 폼이 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옆에 있던 조던 왈, 타이거 우즈가 "그냥 그만둬버려라"라고 할 지경이라고...
  • 선수 시절, 앞으로 정치를 할 의향도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
  • 농구게임에 나오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다른 선수들은 그저 몸값이 문제가 되는 경우인데, 바클리는 그냥 게임에 나오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고. 현역시절에도 NBA 라이브 시리즈에 등장했다가 말았다가를 반복했고, 은퇴 이후에는 거의 나오지 않다가 NBA 2K13이 되어서야 드림팀의 일원으로 게임 내에 등장했다. 하지만, 유저들이 바라는 피닉스 클래식팀의 일원으로는 여전히 등장하지 않은 걸 보면 흠... 현재 NBA 2K21에서도 여전히 클래식팀이나 올NBA팀에 등장하지 않는다.
인디 RPG 게임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제목은 "바클리, 닥치고 잼: 가이덴". 세가 제네시스로 나온 "바클리, 닥치고 잼"의 후속작인 컨셉이다. 관련자료 이 게임 덕분에 스페이스 잼의 주제가가 마성의 필수요소로 다시 부각을 받았다. 이 주제가와 합성되는 동영상은 등장 인물의 얼굴을 바클리로 합성해서(...) 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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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합성소재로 쓰이는 바클리의 얼굴.
거대화해서 고지라랑 농구 대결을 하는 CF도 찍었다. 만화책까지.
  • 2014년 5월 22일 네이버라디오에서 진행되는 주간농구토크 파울아웃에서 더크 노비츠키, 케빈 가넷등과 찰스 바클리를 잠시 비교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었다. 당시 진행을 맡고 있던 농구 해설위원, 스포츠잡지 루키의 편집장인 조 현일과 요즘 (...)하게 떠오르고 있는 이승기 기자는 기량에서 동일선상에 놓을만큼 두 선수 모두가 걸출하고 커리어와 누적 스탯을 비교해봤을 땐 노비츠키, 가넷이 바클리를 넘어섰다 볼수있지 않느냐며 조심스럽게 뜻을 내비쳤다. 아울러 비교와는 상관없이 노비츠키와 굉장히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78] 노비츠키의 은퇴식에도 당연히 참가하여 자리를 빛내주었는데 노비츠키도 감회가 깊었겠지만 바클리도 자신이 그렇게 입에 닳도록 칭찬해왔던 후배가 여간 대견했던게 아니었던건지 다른 선수들에 비해 포옹을 더 오래 나누었다 어린시절에 관한 에피소드와 덕담을 나누며 선수생활 마지막까지 후배를 한없이 위해준 좋은 선배.
  • 말을 할 때 발음이 아주 독특한데, 얼마나 특이한지 스포츠인으로는 드물게 유행어도 가지고 있다. 끔찍하다는 뜻의 terrible을 테러블이 아니라 터러블이라고 발음하는데, 이 특이한 발음이 아주 인기 있어 광고에도 나왔다. 발음 외에 남부 사투리가 제법 묻어나오는데 (다만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짙지는 않다), 라이벌인 칼 말론도 남부 출신이라 구수한 남부 사투리를 쓴다.[79]
  • 애견가이기도 하다. 두 마리의 강아지를 키우고 있는데 이름은 맹고와 유후. Inside NBA에서 가끔 사진으로 등장하고, 하프 타임에 강아지들이 묘기를 하는 장면 등, 강아지가 나오면 꼭 맹고와 유후가 언급되고는 한다. 방송국에서 바클리를 위해 강아지 침대를 선물한 적이 있는데[80] 샤크가 여기 누웠다가 부숴먹었다(...).[81]
  • 2016년 Espn에서 선정한 역대 파워 포워드 랭킹에서 4위에 랭크되었다. 참고로 1위는 팀 던컨 2위는 칼 말론 3위는 덕 노비츠키 5위는 케빈 가넷이다.
  • 1980년대 후반부터 피닉스 시절까지 NBA 아이콘은 조던과 바클리였다. 실력은 물론이고 관중을 이끄는 매력이 대단했다. 이런 면에서 말론, 던컨, 가넷, 노비츠키는 바클리의 적수가 되지못했다. 한 마디로 선수시절 부터 오닐과 함께 엔터테이너 기질이 넘쳤고 악동적인 면모와 화끈한 성격으로 많은 팬들을 흡수했다.[82]
  • OSEN에 서정환 기자에 따르면 팬 서비스가 상당히 좋고 친절하다고 한다.
  • 중국과 NBA간 갈등 사태를 두고 모리 단장을 비판했고#, NBA를 비판한 마이크 펜스 부통령에게 입 닥치라는 말을 했다. 펜스가 인권에 대해 뭐라 지껄일 입장은 아니니 조용히 있으라는 맥락인 듯.

[1] 맨발신장 196cm (6' 5") / 실제 키가 공식신장보다 작다는 말이 많지만, 찰스 바클리가 사고 치고 경찰서에서 찍은 인증사진 보면 신발 신고 2미터 정도의 키로 나온다. 다만 경찰서 신장 측정은 "대충 이 정도 신장"이라는 걸 파악하기 위해 만든 것이고, 눈금 바로 앞에서 재는 게 아니라 앞에 대충 나와 재는 것이기 때문에(당연히 더 앞에 나오면 더 커 보인다) 정확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경찰서 사진을 보면 프로필보다 오히려 큰 203cm로 나와 있다. NBA Open Court와 Inside the NBA의 애청자들은 알겠지만, 바클리는 수차례 방송에서 자신의 신장을 196cm (6' 5") 라고 한 적이 있다.[2] 선수시절 체중 / 이미 은퇴를 한지 20년이 지난 지금은 훨씬 더 나간다. [3] 세븐티식서스 시절 초반에는 스몰포워드로 뛰었다.[4] 필라델피아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91-92시즌 당시 전 시즌 종료 이후 은퇴한 매직 존슨을 기리기 위해 32번을 달고 뛰었다. 원래 필라델피아에서 이 번호는 빌리 커닝햄의 번호였는데(https://www.nytimes.com/1991/11/13/sports/sports-people-pro-basketball-barkley-will-switch-to-johnson-s-no-32.html), 그의 양해를 구해 한 시즌만 달고 뛰기로 했다고 한다.[5] 휴스턴에는 올라주원이 있었다. 당시 슈퍼스타였던 그가 등번호까지 포기할 정도면 얼마나 우승에 목말라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6] 발음상 유사점으로 드립에 가까운 라임이다[7] 당장 저 밑에 마이클 조던과 같이 선 장면을 보라. '슈팅 가드' 마이클 조던과 비슷한 작은 키로 장신 선수를 제치고 리바운드를 따내는 괴물. 찰스 바클리의 키는 6피트 6인치(198cm)인데 조던과 같이 서 있는 장면을 보면 조금 작은 것을 알수 있고 실제키는 6피트 5인치(196cm)정도로 널리 추정되고 있다. NBA 센터의 신장은 보통 6-10(208cm)에서 7-2(218cm) 사이인점을 감안하면 '''매우 작은거 맞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0.1톤의 냉장고가 하늘을 난다."''' [8] 공격시 어찌나 포스트업으로 밀어부쳤으면 포스트업 5초 이상 금지법이 만들어질 정도. 보통 '바클리 룰'이라 칭한다.[9] 수준급의 득점력을 자랑하며 그 화려하다는 드림팀 1에서 팀내 평균 18득점으로 최다득점자이다.[10] 이 해는 하킴 올라주원(1번픽), , 마이클 조던(3번픽), 존 스탁턴(16번픽)이 드래프트된 환상의 해이다.[11] 누적 스탯, 우승 커리어로 종합하면 부동의 1위 파워포워드 팀 던컨이나 통산득점 2위 칼 말론에겐 부족하다. 그러나 전성기에는 마이클 조던에 이어 올스타 투표 2위 단골. 작은 키로 스피드와 파워를 겸비해 골밑을 지배하며 득점력까지 과시하는 다이나믹한 플레이로, 흔치 않은 유형의 파워포워드로 크게 주목받았다.[12] 오닐과 바클리는 강력한 체구에서 기인한 파워넘치는 플레이와 올타임급의 두말할 나위없는 실력, 거침없는 임담과 끼로 무장해 공통점이 많은 선수인데다 특유의 친분으로도 유명하지만 정작 선수시절 전설의 주먹다짐으로도 유명하다.[13] 볼핸들링 뿐 아니라 패스와 시야도 매우 좋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바클리는 고등학교 때까지 키가 178cm에 불과했으며 포지션이 포인트가드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별 주목을 못 받았으나 키가 190 이상으로 크면서 오번 대학에선 센터 역할을 맡게 된다. 가드부터 포워드, 센터까지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한 것이 그를 독특한 선수로 만들었다.[14] 찰스가 말하길 누가 내 앞에서 공격자 파울을 유도하려고 하면 나는 죽여버릴 생각으로 들어가 버린다고...[15] 리그 내 가장 뛰어난 수비수 10명을 뽑아 퍼스트/세컨팀으로 분류. 한 팀당 가드 2, 포워드2, 센터1로 이뤄진다.[16] 은퇴 한참 후에 샤킬 오닐과 벤치프레스 대결을 했는데, 물론 대결 자체는 개그용 페이크였지만 (400파운드를 들어 오닐을 이겼는데, 알고 보니 무게 절반 가까이 가짜였다), 220파운드 (100kg)까지는 진짜로 들었는데 매우 가볍게 드는 걸 볼 수있다. 이 시점의 바클리는 근육이 빠진 대신 살이 엄청나게 쪄서 팔굽혀펴기도 쉽게 못하고 코트 중앙에서 경기장 1층 위쪽까지 갔다오는 것만으로도 헥헥거릴 정도로 몸이 망가졌는데, 그 상태에서도 100키로 정도는 아주 쉽게 든다는 것.[17] 나중에 찰스 바클리가 유명해지자 뻔뻔하게 만나려고 했다.[18] 바클리의 어머니는 그에 관련 다큐에 가끔 출연하시는데 '''아들과 정말 똑같이 생기셨다.''' 나이 먹은 현재와 바클리와 비교하면 더 닮았다. 가발 쓴 바클리처럼 보일 정도...[19] 조금 변론을 하자면 휴스턴 로케츠에서 만났을 땐 바클리 포함 다들 이미 전성기에서 조금씩 내려오던 시점이었고, 바클리 본인전성기 시절에서 한참 떨어진 몸 상태. 하지만 그렇다고 바클리가 스스로 체중 관리를 한 것도 아니라서 피펜이 불만을 터트린 것도 이해는 간다.[20] 바클리가 떠나고, 필라델피아는 한동안 침체기를 거치다 96년경에 구단주가 바뀌고, 앨런 아이버슨을 드래프트하면서 다시 황금기를 맞는다.[21] 1위표는 바클리가 가장 많이 받았는데 2,3위표를 매직 존슨이 더 많이 받아서 역전됐다.[22] 그 해에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 다섯 명(가드2, 포워드2, 센터1)을 뽑는 것. second team과 third팀까지 있으며, 써드 팀 이상 들면 대충 엘리트 선수 대열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퍼스트팀은 그야말로 초일류 선수들만 들며 실제로 레지 밀러나, 제임스 워디, 데니스 로드맨 같이 명예의 전당에 오른 소위 "전설급" 선수들 중에도 퍼스트팀은커녕 세컨팀에도 한 번도 못 오른 선수들이 꽤 있다.[23] 2013년 기준 정치가로 전업해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시의 시장을 지내고 있으며, 전직 농구스타답게 농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여 시의 농구팀 킹스의 시애틀 이전을 온몸을 던져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이 사람의 부인이 재미교포인 미셸 리이다. 참고로 농구선수로도 훌륭한 경력을 쌓았다. 3회 올스타, 2년차 시즌에 기량 발전상. 평균 20-10을 세 번이나 달성하기도 했다.[24] 피닉스 레전드급 선수 출신으로 44번은 피닉스 선즈의 최초 영구결번[25] 92-93 시즌 파이널 한경기 6개 3점슛 성공으로 당시 기록이던 조던의 6개와 타이기록을 세웠으며(훗날 스카티 피펜/케니 스미스가 7개로 경신했고, 2010년에 레이 앨런이 8개로 경신, 2018년에 스테판 커리가 9개로 경신했다.) 케빈 존슨과 함께 드림팀 2 멤버이기도 했다.[26] NBA 선수중 특이하게 하와이 태생. 피닉스 시절에는 눈가리개 덩크왕이었을 뿐이었지만 훗날 LA로 트레이드되어 94-95 시즌 레이커스의 에이스로 올스타까지 선발되었다.[27] 평범한 선수고 스탯이 엄청난건 아니라 지금은 잘 언급되진 않지만 이 시리즈에서 두마스의 예상 외의 활약이 화제가 되었다. 당시 피닉스 외곽라인에서 멀리는 점프력이 좋고 힘이 강하지만 스피드가 조던/피펜에 비해 딸렸고, 에인지는 노장이었으며, 케빈 존슨은 존 팩슨이 주전이었다면 꽤 재미를 봤겠지만 안타깝게 주전이 이미 젊고 작고 재빠른 BJ 암스트롱으로 바뀐 후였다. 그 상황에서 불스 듀오와 거의 대등한 운동능력을 자랑하는 두마스는 매치업 상대인 피펜을 꽤 애먹였다. 시리즈의 숨겨진 공신 중 하나.[28] 에인지는 기량이 특출나진 않지만 투지력이 대단한 라커룸 리더 타입이었고, 베테랑으로서 스탯에 드러나지 않는 공헌을 해줬다. 그는 커리어 초반부터 선배들이 너무 소프트하다며 라커룸에서 일갈하던 깡다구 있는 선수였는데 (셀틱스가 에인지와 버드의 일갈 덕분에 제정신 차려 역전한게 바로 84년 파이널이다), 갓 조직된거나 다름없는 선즈 입장에선 필요한 존재였다.[29] 72승을 거둔 시즌을 최강의 팀으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스카티 피펜이 드림팀 이후 한단계 일취월장하고, 노련한 호레이스 그랜트와 빌 카트라이트가 받쳐주는 인사이드의 안정감을 더 높게 보는 시각도 있다. 무엇보다 93년의 조던은 최고치에 달한 운동능력과 육체적 강인함, 순발력, 내외곽 플레이 기술의 완성도, 연속 우승으로 인한 심리적 우위, 풍부한 경험, 3연패를 향한 동기부여 등, 그야말로 선수로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성도가 극에 달해 정점에 있던 상태다. 플레이오프는 시즌과 달리 선수 개개인의 재능 차이가 승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던의 상태 하나만으로도 93년 파이널의 시카고 불스를 사상 최강의 팀으로 놓을 수 있을 것이다. 72승 시즌의 조던은 여전히 압도적인 리그 최고의 선수였지만, 2년의 공백 후 복귀하여 나이를 먹음에 따라, 93년 당시 농구의 신 조던의 모습과는 분명 거리가 있었다. [30] NBA 덩콘에서 눈가리고 덩크를 성공시켰던 그 스몰 포워드이다. 다만 풀타임 주전은 아니었고, 베테랑 백인 득점머신인 톰 체임버스라는 식스 맨이 있었기 때문에 팀내 비중은 높은 편은 아니었다.[31] LA와의 1라운드에서 맹활약을 펼쳐 팀을 벼랑끝에서 구해냈던 올리버 밀러는 센터 중심의 플레이가 주축이 아닌 불스 전에서는 별다른 카드가 되지 못했다. 대신 리차드 듀마스라는 또다른 뜬금포가 터졌다.[32] 나이를 먹으며 벌크업을 했지만 젊은 시절 디바치는 호리호리한 스타일이라 체구가 육중한 밀러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매치업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전세계가 어느 정도 상향평준화되면서 유러피언 선수들도 꽤 피지컬해졌고, NBA도 신체접촉을 줄이는 방향으로 룰을 변경해 유럽과 NBA 사이 피지컬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당시 유럽은 NBA의 피지컬 차이가 엄청났다. 미국의 대학생들로 구성된 대표팀하고만 싸우다가 프로들로 구성된 드림팀을 맞이한 유럽팀들이 그 엄청난 힘에 혀를 내두를 정도. 그러나 불스의 센터 빌 카트라이트는 그 피지컬한 80년대에 센터로서 골밑을 단단히 지키던 선수로서, 피지컬로 압도할 수 있는 선수가 아니었다.[33] 조던이 216파운드 이상 나간건 2차 3연패 당시다.[34] 사실 조던은 같은 키나 더 큰 선수들을 압도하는 스피드를 지닌 선수였기 때문에 조던을 가장 잘 막는 선수들은 오히려 그의 힘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다면 그보다 살짝 작은 190 초반대 선수들이었다. 조던은 너무 빠르고, 아주 잠깐의 틈만 있다면 3점슛 라인 안쪽 어디서건 바로 슛을 올라갈 수 있는 선수기 때문에 일단 그를 놓치지 않는 발을 가진 수비수가 필요했다. 실제로 그를 가장 잘 막은 수비수는 조 듀마스게리 페이튼으로, 둘 다 193cm 정도 키였다. 이 점에서 발은 그리 빠르지 않지만 힘이 세고 운동능력이 좋아 수비를 잘한 멀리는 상성이 안 좋았다.[35] 다만 선즈는 조던에 집중하느라 피펜이 27점으로 활약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36] 3차전 끝난 후 바클리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젠장, 조던이 43번이나 슛을 쐈어!"라고 투덜거리기도.[37] 이 장면 이후 피닉스 선수들이 다급하게 조던을 감쌌으나 결국 득점과 추가 자유투까지 내주고 말았다.[38] 케빈 존슨은 가드 포지션에서 뛰어난 수비수로 평가받았고, 스피드 역시 조던보다 한 수 위라고 할만큼 엄청난 속도와 순발력을 지녔다. 그러나 조던이 포스트업으로 대응하자 엄청난 체격과 힘의 차이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밀려나 득점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39] 닉스는 유잉이 있고 빌 레임비어의 블럭능력은 그리 강한 편이 아니지만 조던이 골밑으로 들어가는 즉시 레임비어, 마혼, 제임스 에드워즈, 로드맨 등 "깡패"들이 다굴을 놓았다.[40] 이 때 기록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basketball-reference.com/boxscores/198804030DET.html 이때 조던은 야투 27개 중 21개를 넣어 77.8%로 성공시켰으며, 자유투 19개 중 17개를 적중시켰다. [41] 피닉스 선즈의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사이즈가 작다는 것이었다. 주축 멤버들 중 최장신이 208cm인 마크 웨스트였고, 올리버 밀러는 206cm에 불과했다. 웨스트는 불스의 파워포워드 그랜트와 키가 비슷했고 바클리는 스몰포워드 피펜보다 오히려 약간 작았기에 당시 노화로 인해 기량이 저하된 빌 카트라이트를 빼도 별 지장이 없었다.[42] 바클리는 이 때 자신의 딸에게 꼭 승리할 것이라면서 호언장담했었다. 조던에게 지고 난 후 딸이 왜 졌냐고 물어봤을 때 바클리는 "아마 아빠보다 조던이 농구를 더 잘하나봐"라는 서글픈 대답을 한 적이 있다. [43] 특히나 그가 총애하는 후배인 노비츠키의 경우 기본적으로 슈팅능력이 '''180클럽에 들어갈 정도'''였기 때문에 한팀에서 가장 장수한 선수로 남을수 있었다. 초반엔 운동능력으로 승부 보는 경향이 의외로 강해 다치기도 했지만 그래선지 스타일을 좀 더 무겁게, 기술적으로 가져가면서 변화에 쉽사리 적응할수 있었다. 또한 마인드도 상당히 프리하고 너그러웠기 때문에 노쇠화가 진행 되고 나서부턴 궂은일을 마다 하지않았고 완벽에 가까운 스크린을 펼치며 가자미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44] 96-97시즌에 결성되었고 각 각 62, 63, 63년생으로 이미 전성기가 지난 선수들이였다. 2010년대 히트, 캐벌리어스, 스테이트 등 20대 혹은 전성기 기간에 결합된 팀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17-18시즌에 84년생 르브론이 동갑 내기인 멜로, 건강한 보쉬가 결합된 팀이 라고 보면 된다.[45] TNT의 Open Court에서 슈퍼팀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 팀이 언급되자 케니 스미스는 "그건 슈퍼팀이 아니었어. 그건 슈퍼늙은팀 (super-old team)이었어"라고 딱 잘라 말했다. 다만 스타들의 자존심 싸움은 의외로 없었는데 드렉슬러와 올라주원은 원래 친구 사이인데다가 한 시즌 반 같이 뛰며 이미 역할 분담이 끝난 상태였고, 바클리 역시 자기가 예전만큼 압도적이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공격에서 롤은 어느 정도 포기하고 리바운드에 더 신경을 쓴 결과 커리어에서 두번째로 높은 13.6리바운드를 잡고, 커리어하이인 한 경기 33리바운드까지 기록했다. 또한 커리어 내내 달았던 34번을 포기하고 4번을 달기까지했다.[46] 90년대 초반까지는 현재 처럼 각 팀이 100득점은 기본으로 하는 빠른 페이스 였으나 중반부터 급격히 페이스가 느려졌다. 이런 시절에도 공격에서 양보한 기록이 첫해 평균 19득점에 13.6리바운드 4어시스트 등 아름다운 기록을 보여주었다.[47] 바클리를 얻기 위해서 로버트 오리, 샘 카셀을 트레이드 할 수 밖에 없었기에 빅3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층은 지난 시즌 보다 약해졌고 팀 샐러리역시 꽉찼으며 바클리 역시 많은 연봉을 포기하고 합류했다.[48] 역대 최고의 마이클 조던 시즌 중에 1992-93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 바클리는 훗날 오픈 코트란 토크쇼에 나와서 당시를 회상하며 "집에 돌아와서 생각했지. 이 자식 나보다 더 잘하는 선수인지도 모르겠는데?? 그 외엔 어떤 선수에 대해서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라고 말했다. 바클리의 전성기 기량은 조던에 충분히 견줄만 했고, 1990시즌 당시 MVP를 아깝게 놓친만큼 동갑이자 절친인 조던보다 한번도 자신이 아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일한 차이는 원맨팀인 필리에서 자기가 뛰고 있는 것일 뿐이라 여겼던 것. 그러나 대등한 동료들과 팀전력으로 정면승부한 파이널 무대에서, 본인은 최고의 활약을 하는데 조던은 이를 능가하는 활약을 계속 보이니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49] 키가 같은 조던이 시카고 시절 195~216파운드였고, 마찬가지로 키가 같고 90년대 슈팅가드 중 가장 파워가 강한 선수 중 하나였던 댄 멀리가 220파운드였다. 바클리는 그보다 15cm나 큰 패트릭 유잉과 몸무게가 비슷했다.[50] 실제로 몸무게 조절이 안되던 휴스턴 시절 기동력도 안 좋아졌고 부상도 점점 잦아졌다. 또한 위에 언급된 자이언 윌리엄스가 성공하느냐마냐도 여기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현역시절 바클리보다도 무게가 더 나간다.[51] 2018년 당시 쇼호스트 지미 키멀과의 인터뷰에서 "은퇴 이후 농구를 해본적이 없다"고 한 적이 있다. 사실 바클리는 큰 부상을 당해 은퇴했고, 체중 때문에 격렬하게 운동을 하는 것 자체가 다소 위험하긴 하지만 그래도 18년동안 농구를 안 했다는 건...[52] 바클리는 현역시절 NBA에서 가장 힘이 센 선수들을 포스트업으로 밀어내던 선수였고, 훨씬 가벼운 웨이드 정도 체격의 선수가 로우포스트에서 상대할 수 있는 급이 절대 아니었다.[53] 정확히는 찰스가 "나랑 싸우려고 줄 선 사람들 보여? (하나도 없다->감히 누가 나랑 싸워)"라고 농담 섞어 위협하자 스미스는 "그땐 한 명도 없었지. 지금은 겁나 많은데? ㅋㅋㅋ"라고 깐족을 시전했다.[54] 물론 기본체격이 있고 선수시절 근육이 있다보니 일반인 수준은 결코 아니다. 샤크와 (가짜로 한) 벤치프레스 대결에서 100kg(225파운드)까지는 가볍게 들었다. 참고로 이 대결에선 둘이 벤치대결한다고 해놓고 225파운드까진 진짜로 하고 305파운드부터는 샤크는 진짜, 찰스는 몰래 플라스틱으로 된 가짜를 추가해서 샤크에게 굴육을 주는 것. 참고로 샤크는 225파운드까진 가볍게, 305파운드는 힘겹게 겨우 클리어하고 400파운드에서 실패했다.[55] 6피트 11인치. 이 인간과는 한두번 투닥거린게 아니다. 가장 크게 싸웠던것은 89-90 시즌, 당시 필라델피아에서 바클리와 함께 Thump&Hump 콤비를 이루던 릭 마혼에게 공을 얼굴로 밀어 도발을 한 빌 레임비어에 그대로 펀치를 날렸고, 한바탕 난투극이 벌어졌다. 싸움이 끝나고, 찰스는 얼굴이 말짱했지만 빌의 눈두덩이 주변이 터졌다. 근데, 불과 1년전까지 팀 동료였고, 리그에서도 미친개로 통하던 릭 마혼을 도발한 빌도 대단하다... 여담이지만 한때 피스톤즈 골밑에는 레임비어, 마혼에 데니스 로드먼까지 동시에 있었다는 건데... 여담이지만 이때 레임비어와 바클리는 워낙 앙숙이어서 사람들이 둘이 언젠가 한번 붙을 걸 다들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클리는 키는 작지만 몸무게는 레임비어보다 더 나갈 정도로 육중하고 힘이 장사인 반면에 레임비어는 악명에 비해 싸움실력은 별로 없었기에 다들 바클리에게 흠씬 얻어맞을 것으로 예상했다. 근데 의외로 바클리의 복부에 어퍼컷을 몇방 제대로 먹이는 등 선방하자 다들 놀랐다고...위 내용은 당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다룬 다큐 Bad Boys에 나오는 내용이다.[56] 해당 영상. 초반 도발 장면부터 레임비어가 바클리의 복부에 어퍼컷을 때리고 이어 레임비어의 눈두덩이가 터진 것까지 모두 볼 수 있다.[57] 7피트. 드리블 해오다가 바클리가 공을 버리더니 크로스라인을 폴 모케스키의 안면에 작렬. 그 거구가 한방에 쓰러졌다.[58] 7피트 1인치. 너무나 유명한 싸움이다. 하지만 사실 둘은 매우 절친한 사이고, 서로의 어머니도 친분이 있는 사이. 둘이 그 때를 회고하며, 팀의 사기 때문에 물러날수 없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바클리와 개인적으로 친한 마이크 타이슨이 이 싸움 장면을 보고 "둘다 별로 잘한 싸움은 아니다"며 깠다. 물론 이건 타이슨 입장에서 그런거고 바클리는 nba에선 유명한 싸움꾼이다. 다만 오닐은 바클리가 "너 편치 날리는거 한 네번 봤는데 한명이라도 맞춰봤냐? ㅋㅋㅋ"라고 놀릴 정도로 덩치와 힘에 비해 싸움실력은 그다지...[59] 훗날 샤킬오닐의 인터뷰에 따르면 하필 이날경기를 샤크와 찰스 엄마가 같이 tv로 관전중이였고 퇴장당하고 락커로 들어갔는데 찰스의 엄마가 오닐에게 전화를 걸어 너네 엄마하고 같이 보고있었다 지금당장 복도로 나가서 찰스랑 사과를 해라 찰스도 나와있을꺼다 라는말에 복도로 나가서 사과를 했다고한다[60] 6피트 9인치. 데뷔초 시카고 불스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여 조던의 보디가드를 자처하였고, 뉴욕 닉스에서 패트릭 유잉과 함께 골밑 수비의 한축을 담당한 블루칼라 형 파워 포워드. 무지막지한 외모와 힘을 가진 짐승같은 이미지의 선수였다. 바클리와 데뷔 시기도 비슷하고, 꾸준히 투닥투닥 거렸으나, 마침내 은퇴를 앞두고서, 프리시즌에서 한판 붙게 된다. 등부상으로 고생하던 바클리에 하드파울을 하다 바클리가 등으로 고꾸라졌고, 오클리를 향해 그대로 돌진. 물론 둘다 퇴장되었다. 오클리는 워낙 터프하고 힘이 장사이기로 유명해서 왠만한 빅맨들도 건들지 못했는데, 말년이던 시카고 시절에 샤킬 오닐에게 하드파울을 하자 오닐이 엉뚱하게 옆에 있던 브래드 밀러에게 주먹을 날린 적이 있다. 물론 오닐 정도 덩치가 오클리가 무서워서 피할리는 없고 착각했거나 가까이 있어서였겠지만 싸움 잘하는 오클리를 내버려두고 만만한(?) 밀러에게 시비거는 것도 그렇고 결정적으로 이 주먹이 민망할 정도로 헛스윙인지라 이 장면을 보면서 TNT 크루는 신나게 비웃었다.[61] 케니 스미스는 휴스턴 시절 올라주원과 함께 2번 우승을 했다.[62] 드림팀1 시절에 조던, 매직과 카드를 하면서 셋이서 누가 더 최고의 선수인가 논쟁을 했는데 논쟁 중 매직과 조던이 "그래서 너 반지 몇 개 있어"라며 어딜 감히 끼어드냐는 식으로 갈구면 그대로 버로우탔다고 한다.[63] 근데 본인도 즐기는데다 천성인지 호언장담을 엄청나게 해댄다. 그리고 자신의 예측을 두고 이런저런 내기를 거는 일도 빈번하다. 대표적으로 야오밍의 NBA 입성을 두고 혹평을 해댔다가 당나귀 엉덩이에 키스를 한 적이 있다[64] 그 이후 사과를 했는데, 이유가 "어제 추로스를 먹었기 때문" 이라고...[65] 한번은 피닉스 선즈 시절, 또 한 번은 은퇴한 이후 TNT에서 해설을 하는 요즈음. [66] 본인이 피지컬 위주의 농구를 했던 탓인지 슈팅 농구를 선호하지 않는 편이며 3점슛 농구로 정점을 찍은 GSW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드레이먼드 그린과의 디스로 점철된 악연은 유명.[67] 원래는 야오밍이 19득점 이상 넣으면 같은 해설자인 케니 스미스의 엉덩이에 키스하겠다는 발언이었다(kiss Kenny's ass). 그렇지만 ass라는 영어 단어는 엉덩이라는 뜻 외에 당나귀라는 뜻도 있어 방송용(...)으로 케니의 당나귀에 키스한 것. [68] 다만 실제로 이 달리기 시합에서는 바클리가 여유있게 승리를 차지했다. 키 차이가 거의 30cm가 날 정도라 다리 길이 덕분에 압도적으로 유리했고, 막판엔 거꾸로 달리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다만 바베타는 현역 심판이라 (심판들은 경기 내내 뛰면서 옆에서 상황을 봐야 하니 체력이 좋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직업이다) 시합 후에도 전혀 숨이 차지 않고 여유있었던 반면, 바클리는 말도 못할 정도로 숨이 차서 결국 승자 인터뷰는 못하고 바베타가 대신 했다.[69] 이 시합에도 웃지 못할 일화가 하나 있는데, 시합이 끝나고 나서 바클리는 바베타를 포옹하기 위해 다가갔다. 그런데 바베타가 친근함을 표시하는 의미로 뽀뽀를 했는데, 하필 '''입에다''' 하는 바람에 바클리는 이걸 갖고 또 TNT 동료들에게 실컷 비웃음을 당했다. 일부 문화권, 특히 노인들은 친근함의 표시로 동성에게 저런 뽀뽀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케니 스미스가 방송에서 한 말에 따르면 바베타 옹은 좀 유명한 듯 하다) 미국 흑인 문화에선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것인지라 흑인인 스미스와 샤킬 오닐, 그리고 흑인 문화에 익숙한 진행자 어니 존슨은 정말 신나게 비웃었다.[70] 움짤의 주인공은 팀 던컨의 애인이다. 찰스경은 "댈러스에서 왔을걸? 현지인아닐거야!"라고 맞받아 쳤다. 이 장면이 이어진 이후 다른 화끈한 산왕 처자를 보자 "최고 장면이구만!" 하며 자폭을 시전했다. 옆에있던 어니, 샤크 케니는 낄낄대는게 포인트영상으로 보자..[71] 실제로 바클리의 인기비결 중 하나가 거침없는 입담이었다. 경기 중 팀동료 맷 멀로니에 대한 파울에 불리지 않자 심판한테 조던이라고 봐주는거 아니냐고 비아냥거릴 정도. (다만 리플레이를 보면 컨택 없이 공을 놓친거라 오히려 굿콜) 오프라 윈프리쇼에선 "유명해지면 주변 사람들이 그냥 돈 다 내줄거라고 기대하죠. 특히 흑인들이요."라고 해 흑인 사회의 패밀리 문화(가난하게 살던 사람들 중 한 명이 크게 성공하면 수십명이 빌붙는 것)에 대해 꼬집었다. 이 말을 들은 오프라가 한바탕 웃고 "이렇게까지 솔직하진 않어도 돼요."라고 할 정도. 이렇게 터부시되는 민감한 주제도 주저없이 거론하던 바클리도 인종차별로 비춰질 수 있는 얘기는 안 했다는 것.[72] 이때는 앨런 아이버슨을 시작으로 힙합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너도 나도 사적, 공적자리 안가리고 힙합패션으로 나오는게 일반적이었다.[73] 84-85시즌만 해도 고작 360만달러였다가, 처음으로 90-91시즌에 천만달러를 넘어 1천1백만달러, 93-94시즌에 1천5백만달러, 98-99시즌에 3천만달러 등으로 계속 증가.[74] 96오프시즌에 알론조 모닝샤킬 오닐 모두 당시 기준으로 유례없는 1억 달러를 넘는 장기계약을, 소속팀 워싱턴과 마이애미 히트와의 쟁탈전의 수혜자였던 2년차 선수 주완 하워드 역시 1억달러를 넘는 계약을 했다. 롤플레이어였음에도 9백만 달러나 받은 데니스 로드맨도 있었다.[75] 당연하지만 그가 이미 만 36세 노장이라 가치가 떨어져서 이 정도 액수인 것. 전성기였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받았을 것이다.[76] 샥틴어풀에서 비슷한 장면이 나오자 "나 저거 해봤어! 카운트 안해줘"라고 바로 언급을 했다. 사실 원칙상 공이 림을 통과하면 바로 득점이기 때문에 다시 튕겨나와도 득점 인정하는게 맞지만, 심판이 이걸 못보고 림에 맞고 튕겨나왔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은 것.[77] 당시 인디애나 페이서스 포인트가드, 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감독이기도 하다.[78] 바클리와 친한 선수가 어디 한둘이겠냐만 줄곧 노비츠키의 플레이를 두고 극찬했으며 거는 기대나 내리는 평가들을 봤을 때 유독 각별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노비츠키가 가장 존경하는 선수가 바클리이기도 하고.[79] 말투 관해서 여담이지만 레전드 중에 조던, 코비는 동부 출신, 르브론과 매직 존슨도 중부 지방의 도시 출신에다 비교적 표준어에 가깝게 말하는 편인데(사석에선 흑인 영어를 쓰지만 심하지 않다), 래리 버드의 경우 인디애나의 시골 출신이라 꽤나 짙은 사투리를 쓴다.(인디애나의 프랜차이저 레지 밀러는 LA출신이라 빠르고 경쾌한 서부 말투이다) 샤킬 오닐은 뉴져지 출신이라 사투리는 안 쓰지만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려 알아듣기 힘들다. 버진 아일랜드 출신의 팀 던컨은 흑인 영어를 전혀 쓰지 않는 깔끔한 영어를 쓰며, 반면 라이벌인 케빈 가넷, 그리고 앨런 아이버슨같은 선수는 말 끝마다 흑인 영어의 억양이 아주 찰지게 묻어나온다. 이 때문에 가넷이 말하는 영상에는 랩하는 것 같다는 댓글이 많다.[80] 바클리가 영구결번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피닉스 선즈의 색깔로 치장을 해놓았다.[81] 부서진 것은 필라델피아쪽 침대였다. 어쩌면 필라델피아의 암흑기를 예견한 걸지도?[82] 필라델피아 시절 NBA 올스타 투표 1위는 거의 고정적으로 조던이었지만 (시카고 시절 그가 1위를 못한 건 루키시즌, 부상으로 거의 못 뛴 2년차, 그랜트 힐에게 딱 1번 뺏겼을때 뿐이다. 9회 1위로 역대 최다) 그 바로 다음은 항상 바클리였다. 서부로 이적한 93시즌엔 서부 최다였지만, 조던에 이은 전체 2위는 스카티 피펜. 다만 피펜의 득표는 조던 빨이 컸는지 94년에는 동부에서도 3위였다. 바클리는 이해 올스타 투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체 1위 득표를 하지만 그 다음해 슈퍼루키 그랜트 힐의 데뷔, 그 다음해엔 절친 조던의 복귀에 본인의 노화로 더 이상 최상위권 못하게 된다. 여담으로 94년 올스타 전의 득표수가 굉장히 낮다. 79만표인 바클리가 1위에 50만표를 넘은 선수가 오닐(60만으로 전체2위)과 BJ 암스트롱 뿐일 정도. 커리어에서 무려 9번이나 백만표를 넘긴 조던의 은퇴로 인한 타격이 컸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