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도시)

 


니시 (세르비아)

니시 전경
1. 개요
2. 역사
2.1. 초창기
2.2. 나이수스 전투 (269년)
2.3. 4세기의 번영
2.4. 훈족의 파괴
2.5. 슬라브 인의 도래
2.6. 동로마 제국의 회복
2.8. 오스만 제국
2.9. 세르비아 민족주의


1. 개요


세르비아 동남부에 위치한 도시. 인구는 18만 8천명으로, 세르비아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다. 로마 시대의 이름은 나이수스 (Naissus) 인데, 272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태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제1차 세계 대전 시에는 세르비아의 임시 수도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2. 역사


로마 시대 표토층에서 출토된 콘스탄티누스의 두상

2.1. 초창기


머나먼 옛날, 니시 일대에는 트라키아 인이 거주하였는데, 기원전 300년 경에 켈트 족의 대이동이 일어나며 그들의 도시가 되었다. 이후, 일리리아 전쟁으로 발칸 반도를 점령해 나가던 로마는 기원전 74년경에 이 도시를 점령한 후 나이수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정복 기지로 사용하였다. 제정 초기까지 로마 보조병 기지가 도시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동남 유럽에 로마 가도가 건설되자, 니스에는 5개의 도시 (세르디카, 싱기두눔, 테살로니카 등)에서 온 도로가 만나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서기 2세기의 과학자 겸 지리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는 나이수스를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도시'로 분류하였고 5현제 중 마지막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도시를 무니키피아로 승격시켰다.


2.2. 나이수스 전투 (269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절에는 역 (praetorium)이 건설되어 전령의 쉼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3세기가 되며 나이수스에는 다시 군단병이 주둔하였다. 268년에 고트족이 대규모로 로마 제국의 동부를 강타하였을 시에 갈리에누스 황제가 1차러 그들의 진격을 늦추었고, 다음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2세가 나이수스 전투에서 침략자들을 괴멸시켰다. (269년) 5만명의 고트족과 1만 이상의 로마군이 전사한 대격돌이었다고 전한다. 이 전투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원로원과 시민들로부터 '고티쿠스' 칭호를 받았다. 전투로부터 4년이 지난 272년, 당시 장군이던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이 도시를 지나가며 여관집 주인과 사랑을 나눈 결과로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가 태어났다. (콘스탄티누스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후손을 자처한 것을 보면 만감이 교치한다.)

2.3. 4세기의 번영


콘스탄티누스는 사두 전치를 끝내고 서방을 통일한 후, 316년부터 322년까지 고향에 머물렀다고 한다. 324년에 로마 제국의 단독 통치자가 된 그는 다키아 메디테레니아 주를 신설하고 나이수스를 그 주도로 삼아 주었다. 361년에는 율리아누스 황제가 콘스탄티우스 2세와의 전투를 앞두고 도시에 머물렀다. 그의 치세에 도시는 요새화 되었다. 364년에 발렌티니아누스발렌스 황제는 나이수스 근교의 빌라에서 만나 제국을 동과 서로 분할하였다. 4세기의 니시에는 10만명 이상이 거주하였고 수십개의 빌라가 있었다고 한다. 쇠퇴하던 제국의 대부분의 도시들과는 사뭇 다른 행보였다.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의 치세 때에는 나이수스의 상표?가 금괴에 찍혀 팔렸다고 한다. 한편, 4세기에 세워진 대저택이 발굴되었는데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눈길을 끌었다. 또한, 4세기에 세워진 바실리카 (성당)도 초기 교회 건축의 예시로 주목받는다.

2.4. 훈족의 파괴


421년에 호노리우스와 함께 서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 3세도 나이수스에서 태어났다. (연도 미상) 한편, 훈족은 도시의 부를 탐내었고 요새화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441년에 포위된 도시는 443년에 함락되었다. 아틸라는 도시를 약탈하였고 폐허만을 남긴채 떠났다. 448년에 훈족은 돌아왔고, 미처 피신하지 못했던 수만명의 주민들은 학살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몇년이 지나 나이수스를 방문한 프리스쿠스는 쌓여있는 인골을 보고 도시가 방금 전에 함락된 것 같다고 묘사하였다. 교회에 일부 노인들만 남아있었다고 그는 부연하였다. 이후 일부나마 재건된 나아수스마저 480년에 재차 이민족에게 파괴된 후, 한때 거대했전 도시는 한동안 유적이 되어 있어야 했다.

2.5. 슬라브 인의 도래


530년경에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나아누스 대제는 나이수스를 재건하였고 대주교구를 설차하였지만 중소 도시에 그쳤다. 프로코피우스는 나이스소폴리스로 가록하였다. 하지만 도시는 재차 아바르 족에게 파괴되었다. 한편, 6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슬라브족의 대이동은 580년경까지 세르비아와 그리스 북부를 슬라브 거주 지역으로 바꿔 놓았다. 551년에 첫 슬라브 인이 니시에 출발했고 580년대에 세르비아는 슬라브 거주지가 되어 있었다. 테살로니카의 슬라브 족은 달마티아로 격퇴되었다.

2.6. 동로마 제국의 회복


615년, 슬라브 인들은 니시를 함락하였다. 그리스 인 주민들은 도망가거나 동화되었다. 785년,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는 마케도니아와 니시를 회복하였다. 하지만 테오필로스 황제의 사망 이후 니시는 1차 불가리아 제국에게 점령되었다. (842년) 불가리아 제국은 1018년에 바실리우스 2세 불가토녹스의 활약으로 동로마 제국에게 멸망하였고 시르미움 테마가 설립되었다. 1072년에는 제국의 혼란을 틈타 도주한 불가리아 왕실의 후예 보딘이 불가리아 황제를 칭했지만 동로마 군대에게 니시에서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1096년 6월 말, 약탈과 학살을 자행하며 중부 유럽을 헤집던 군중 십자군베오그라드를 약탈하고 니시에 당도하였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7월 3일에 치러진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과정은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군중십자군은 전투에서 1/4를 잃었지만 기어코 콘스탄티노플까지 도착한다. (이후 니케아 인근 키지쿠스에서 룸 셀주크 군에게 괴멸당한다) 니시는 마누일 1세 시기에 요새화 되었고, 1155년에 당시 동로마의 속국이던 세르비아의 한 영주에게 넘겨졌다.

2.7.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


그리고 1161년, 마누일은 니시에서 스테판 네마냐 (1166년에 세르비아의 왕으로 즉위)를 만난 후에 도시를 네마냐 왕조에게 주었다. 하지만 마누일이 1180년에 사망한 후 네마냐 조가 독립해 버리며 니시는 제국에서 분리되었다. 이후 헝가리 왕국의 벨라 3세가 일시적으로 점령하였고, 1184년에 동로마 제국이 회복하였으나 결국 1185년에 세르비아의 영토가 되었고 1188년에는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가 되기에 이른다. 1189년 7월 27일, 네마냐 왕조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이끄는 3차 십자군을 니시에서 맞았다. 1203년, 2차 불가리아 제국의 칼로얀이 니시를 점령하였으나 세르비아가 곧 되찾았다.

2.8. 오스만 제국


1375년, 무라드 1세의 오스만 제국군이 25일의 포위 후에 도시를 함락하였다. 1443년, 야노시 후냐디가 이끄는 헝가리-세르비아 연합군이 니시를 회복, 오스만 수비대를 소피아로 몰아내었다. 하지만 1444년의 바르나 전투 이후 무라드 2세는 니시를 재차 오스만 제국령으로 회복하였다. (1448년) 이후 니시는 241년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니시 산작/엘리엇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기인 1720년경에 지어진 니시 성채. 세르비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손꼽힌다. 둘레는 2.1 km 이다. 높이는 8m, 두께는 3m.
https://www.google.co.kr/search?q=nis+fortress+serbia&client=ms-android-lgu-kr&prmd=imnv&source=lnms&tbm=isch&sa=X&ved=0ahUKEwi76OSF7pfZAhWCyrwKHR_KB1UQ_AUIESgB#imgrc=DFh_xpGuSHurSM:

2.9. 세르비아 민족주의


대 튀르크 전쟁 중인 1689년에 오스트리아 군이 니시에 입성하였으나 다음 해에 오스만 제국이 회복하였다. 1737년에 오스트리아 군이 일시적으로 다시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후, 니시는 1804년부터 1817년까지 이어진 세르비아 봉기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스만 군대는 도시 인근 세르비아 반군의 요새던 체가르를 점령하기 위해 2만 대군을 파견하였다. 세르비아 인들은 5번의 공격을 격퇴해 내았으나 6번째 공격에서 오스만 군대는 아군의 시체로 참호가 메워자자 총공격을 시작하였고, 결국 요새는 함락되게 된다.
마지막 순간에 반군 지도자 스테판은 요새 지하의 화약고에 불을 붙였고, 대규묘 폭발이 일어나 주위가 진동하였다고 한다. 2천명의 세르비아 반군과 4천명의 오스만 군이 폭 사하였다. 반란 이후 오스만 측은 952명의 세르비아 반군 해골을 4면에 14줄씩 박아넣어 탑을 세웠다. 이는 현재까지도 남아있고 코소보 평원과 함께 세르비아 보훈 교육과 민족주의의 중심지이다. 유럽에서 가장 기괴한 기념물로 손꼽히며, 현재까지도 돌 틈 사이에 54개의 해골이 박혀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