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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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州市(こうしゅうし'''
코슈시 / Koshu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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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국가'''
일본
'''지방'''
주부
고신에쓰
'''도도부현'''
야마나시현
'''면적'''
264.11km²
'''인구'''
29,575명
'''시장'''
스즈키 미키오(鈴木幹夫, 무소속)
'''상징'''
'''시화'''
벚꽃(サクラ)
'''시목'''
포도나무(ブドウ)
'''시조'''
휘파람새(ウグイス)
홈페이지
1. 개요
2. 출범 전의 역사
2.1. 엔잔시
2.2. 카츠누마초
2.3. 야마토무라
3. 교통
3.1. 철도
3.2. 도로
3.2.1. 고속도로
3.2.2. 국도
3.2.3. 현도
3.2.4. 휴게소
4. 출신 인물


1. 개요


일본 야마나시현 북동부 지역에 있는 시로, 2005년 11월 1일에 히가시야마나시군 카츠누마초, 야마토무라, 엔잔시가 합병되면서 출범되었다. 오츠키시, 야마나시시, 후에후키시, 키타츠루군 코스게무라 및 타바야마무라, 사이타마현 치치부시와 인접해 있다. 인구는 2020년 기준 29,575명이다.
당시 합병 전에는 코슈시, 타케다시, 히가시야마나시시, 후르츠시 등이 후보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2004년 9월에는 야마나시현의 옛 행정구역을 그대로 가져온 카이시가 출범되었으나, 포도나 와인, 감, 안장 마석 같이 옛 행정구역 카이의 다른 이름인 코슈와 관련된 생산물이 많이 있어서 지금의 시로 결정했다고 한다.
고후 분지 동부 및 동남부 산악지역에서 흘러 나와 많은 하천들로 인해 만들어진 카츠누마 선상지 등이 있고, 시 중부 지역은 후에후키 강과 히 강, 오모 강 같은 지류 유역이 흐르지만, 일본 411번 국도가 위치한 야나기사와 고개에서 북쪽으로 원천 유역인 타마 강이 흐르고 있다.
포도와 카츠누마 와인의 산지로 알려져 있고 복숭아, 버찌, 자두, 곶감 등의 특산물이 있다.

2. 출범 전의 역사



2.1. 엔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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塩山市[1]
산간 지방을 중심으로 승석문 시대 때 나온 고고 유적지들이 분포되어 있으며, 전반기 말에는 시시노마에 유적을 비롯해 중반기 때 나온 시모아오노의 안도지 유적과 나카하기하라의 쥬로하라 유적, 카미하기하라의 도노바야시 유적에서 출토된 깊은 용기 형식의 토기는 뛰어난 미술품으로 중요문화재에도 지정되었다.
야요 시대 및 고분 시대에는 촌락지 분포가 산간 지방에서 선상지로 옮겨졌고, 야요 말기 때부터 고분 시대 전반기 때 니시다 유적에서 촌락지 터 등이 검출되었다. 고후 분지에서 고분 축조가 전반기 때 분지 남부 소네 구릉 지역에서 전개되어 후반기에 각 분지에 고분 축조가 확산되었지만, 명확한 고분은 발견되지 못했다.
고대 율령제 때는 야마나시군에 속해 있었으며 그 중 대부분은 야마나시히가시군으로 비교가 되었다. 헤이안 시대 때의 촌락 터전은 산간 지방이나 오모 강변 오른쪽을 중심으로 분포된 오오키도 유적 등이 있다. 히가시군 지역은 고대 카이국에서 관리인으로 세력을 지녔던 고대 호족 사이구사 가문의 세력을 기반으로 신사 등에 사이구사 가문과 관련된 전통 승계가 남겨저 있다.
헤이안 시대 후반기 때는 고후 분지 각 지역에 장원이 세워졌지만, 목초 장원이 후지키 및 오야시키에서 구 마키오카 지역에 이르는 곳에도 세워졌고, 카이겐 가문의 일족 중 한명인 야스다 요시사다가 목초 장원을 본거지로 삼고, 후지키에 호코지를 건립했다. 이후 요시사다를 포함한 카이겐 가문의 일족들은 겐페이 전쟁에서도 활약을 펼쳤으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숙청으로 야스다 가문은 몰락했고, 고대 호족들과 사이구사 가문의 족보를 물려받은 오조 가문이 세력을 갖추었다.
오래된 사찰이 많고, 카마쿠라 시대 후반기 때인 1330년에는 목초 장원의 주인이었던 니카이도 사다후지가 무소 소세키를 청하고 에린지를 건립했다. 1380년에는 타케다 가문의 사찰 소유지에 기부하고 밧스이 도쿠쇼가 건립한 코가쿠지가 있다.
에도 시대 전반기에는 막부직할령과 이타미 가문의 도쿠미 번령과 하타모토령에 속했던 모든 마을이 있다. 1705년에는 모든 마을이 고후 번령이었고, 야나기사와 영주 가문 시대 때 지분된 고후 신덴 번에 속한 마을도 있었다. 1724년에는 카이 일국이 막부 직할령이 되면서 모든 마을이 이사와 관직 대리가 지배하게 되었고, 고산쿄 령 가운데 타야스 가문령이나 시미즈 가문령에 속한 마을과 고후 관직 대리로 옮긴 마을도 있었다.
생업은 지리적인 특징 때문에 북부 지역은 밭 농사가 중심이었고, 남부 지역은 벼 농사가 중심이었다. 그 외에 히가시군 지역에서 한창이었던 양잠과 하기하라 담배, 그리고 감 같은 과수 재배도 진행되었다. 또 하기하라산 입회지에서 생계를 꾸리는 일이 진행되었고, 쿠로카와킨잔(黒川金山)에서 채취하는 일은 근세 초반까지 진행되었다.
에도 시대 때 정비된 코슈 가도 외에 오메 가도와 치치부 가도 등 무사시국으로 통하는 가도가 개통되었고, 직소 설치 외에 부역을 맡은 마을들도 있었다. 또 에도 시대 때 카이국에서는 대규모 무장 봉기가 일어났지만, 1792년에 일어난 후토마스 소동은 지역 모든 마을 사람들이 참가했었고, 1836년에 일어난 텐포 운동에서 몰려든 무장 세력들이 갖가지를 때려부수며 피해를 받았다.
1872년, 세법 폐지를 상대로 반대한 마을 24곳의 주민들이 야마나시현청에 진압을 하고 나서 주모자가 단죄를 받은 다이쇼기리 운동이 일어났다.
1875년에는 후지무사 시로가 주도한 오메 가도의 개수 공사로 인하여 지금까지 내려온 그대로 다이보사츠 고개길을 넘는 대신 야나기사와 고개길이 새로 개발되었다. 메이지 시대 때는 양잠업이 진흥되었고 1903년에는 츄오 본선의 엔잔역이 개업되자 누에고치 시장으로 발전되었고, 코슈 가도와 카츠누마슈쿠의 역참으로 번창했던 카츠누마 대신 히가시야마나시군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 1881년 임야 민유 구분으로 인하여 하기하라산이 몰수되자 양잠의 주요 목재수요가 있었고, 난벌이나 도벌 등의 인적요인으로 임야가 황폐되었다. 1907년에 발생한 엄청난 수해로 오모 강 유역에서 둑이 무너졌고, 막대한 피해가 나왔다. 소작지률이 높고 양잠업으로 인해 지원받은 소작인이 성립되어 있었지만, 1920년에 서리 해로 일어난 시치리무라의 시모오조농민조합 투쟁은 모든 현에서 소작 쟁의로 발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뒤에는 양잠업이 쇠퇴한 반면 포도 등의 과수 재배가 증가되었고 다이보사츠 고개와 같은 자연적인 자원, 타케다 가문과 관계된 고찰이나 사적 등 역사적인 자원을 이용한 관광업으로 바뀌었다.

2.2. 카츠누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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勝沼町
승석문 시대 중반기에 있는 유적은 샤카도 유적분 범위에 포함된 촌락지터에 미야노우에 유적이 있다.
고후 분지 동부에는 고대 불교문화를 선진적으로 수용한 곳이지만, 고대 호족 사이구사 가문이 지은 다이젠지를 비롯한 고찰들이 있다. 가시오 산 정상에 있는 가시오잔쿄즈카는 동부 지방에서 빠른 시기인 1103년에 이름을 새긴 원통형 구리쇠가 발견된 경총으로 알려졌다.
중세 시대 때는 이사와(지금의 후에후키시 이사와초)에 본거지를 둔 카이국의 수호 다케다 가문의 영유지가 있으며 시모이와사키에는 다케다 일족의 분류로 전국 시대 때 노부마사와 수호 아토베 가문의 항쟁에서 멸망한 이와사키 가문의 관터가 있다.
전국 시대 때 무사 가문의 거관인 카츠누마 가문의 집[2]이 있으며, 거관과 중심으로 한 구획이 형성되었다.
1705년부터 카이 일국이 막부직할령화된 1724년까지 고후 번령에 속했다. 가시오 마을은 카츠누마 무라에 속한 다이젠지 령으로 독립되어 있었다. 하타모토령, 고후신덴번령, 고산케, 타야스케령도 존재했었다. 단 오사데무라의 대부분은 고후에서 교대 근무했었다.
1868년 다이젠지 부근에서 에도 시대 말기 때 무사였던 곤도 이사미가 이끄는 코요 진압대가 이타가키 타이스케가 이끄는 세이토 군에게 구축되면서 도망을 갔다. 그것이 코슈 카츠누마 전투였다.
메이지 시대 때도 카츠누마 슈쿠를 중심으로 번영을 이어갔다. 1903년에는 츄오선이 코후역까지 개통되었지만, 당시에는 철도역이 없었기 때문에 히가시야마나시군에서 교통 및 경제 중심지였던 곳은 엔잔이었다. 그 뒤, 역 설치 운동으로 1913년에 카츠누마역이 세워지게 되었다.
에도 시대 후반기 때 재배한 포도는 일부에서만 진행되었으나, 메이지 시대 초반기에 후지무라 시로가 주도한 생산흥업정책에서 과수 재배와 와인 양조업을 장려받았다. 1877년에는 포도주 회사가 설립되면서 프랑스에 교습생을 파견하고 양조 기술이나 와인 양조에 적합한 포도 재배와 품종 개량에도 힘을 쓰며 1887년부터 1897년까지 포도를 재배하는 농가도 늘어났고, 많은 양조 회사도 세워졌다. 게다가 양조용 품종이나 재배 기술 개량, 판매하는 방법 등 다양한 시행착오가 실시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농지를 축소하는 정책이 시행된 적도 있었으나 종전 뒤에는 중핵시로 발달되었다.

2.3. 야마토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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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和村[3]
무로마치 시대인 1416년 2월, 카마쿠라에서 일어난 우에스기 젠슈의 난에 가담한 카이국 수호 다케다 노부미츠가 츠루군에서 우에스기 켄슈 세력에게 패한 뒤 도쿠사 산에서 자살을 하고 말았다. 세이운지는 중국에서 츄호 민폰(中峰 明本)으로부터 임제 선불교를 배운 고카이 혼죠(業海本浄)가 1348년에 개창한 사원이며 호쿄인탑(宝篋印塔)이 있다.
전국 시대인 1582년 3월에는 오다 및 도쿠가와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한 다케다 카츠요리가 니라사키의 신푸성에서 군나이 영주 오야마다 노부시게가 거처한 이와도노 산성으로 퇴역하던 중 코마카이에서 노부시게의 배반을 알고, 히 강 골짜기를 따라 텐모쿠산으로 달아나 타노 마을에서 패한 뒤 사망했다. 다케다 가문이 멸망한 뒤 텐쇼 임오의 난을 거쳐 카이를 지배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인해 죽은 카츠요리의 명복을 빌기 위해 케이토쿠인이 건립되었고, 하시카노 산이 봉납되면서 타노 마을을 사찰 영토에 부여받았다.
에도 시대 때는 히 강가에 촌락지가 성립되었다. 오른쪽 강변에 하시카노, 츠루세가 성립되면서 쿠스지니령에서 야마나시군 쿠리하라스지에 속했고, 왼쪽 강변에는 히카게, 타노, 도쿠사가 성립되면서 야츠시로군 이사와스지에 속했다. 산간 지방에서 논이 적었기 때문에 생업은 얼마 되지 않는 밭 농사 말고도 양잠이나 담배 등의 작물을 재배했고 산림업이나 제탄업, 코슈 도로를 따르는 코마카이슈쿠나 츠루세슈쿠에서 짐삯벌이로 생계를 꾸렸다.
큐슈의 가톨릭 선교사 영주 아리마 하루노부의 유배지로 알려져 있다. 에도 막부 시대 말기에 일어난 무진 전쟁에서 1868년 3월 6일에 곤도 이사미가 이끄는 코요 진압대가 고후로 향했고 메이지 정부군도 참모 이타가키 타이스케가 이끄는 군의 세력이 진군하면서 카츠누마의 가시오에서 충돌이 발생, 그 결과 코요 진압대가 패하고 말았다.
근대 시대 때는 밭 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업 뿐만 아니라 양잠과 산림업이 진행되었다. 1903년에는 츄오선의 개통과 동시에 하지카노역이 개업하면서 코마카이 및 츠루세에 있었던 역참은 쇠퇴하였다. 1880년에 진행된 메이지 덴노의 행차에 즈음하여 코마카이슈쿠에서 코마카이교에 이르는 직선도로가 건설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1951년에는 논밭을 만드는 계획이 실시되었고 마을에서도 벼 농사가 시작되었다. 1961에는 20번 국도에 있는 사사고 터널이 개통되었고, 1977년에는 사사고 산을 관통하는 주오자동차도가 개업되면서 현의 경제에 큰 영향을 준 반면 과소화가 진행되는 일도 있었다. 최근에는 과수 재배, 쇠로 살을 만들거나 비석에 사용된 코슈 안장마석의 생산, 히 강 계곡이나 다케다 가문의 종언 땅을 살린 관광에 힘을 넣고 있다.

3. 교통



3.1. 철도



3.2. 도로



3.2.1. 고속도로



3.2.2. 국도



3.2.3. 현도


  • 주요 지방도
    • 34번 야마나시현도 시라이코슈선
    • 38번 야마나시현도 엔잔카츠누마선
  • 일반 현도
    • 야마나시현도 201호선 엔잔정차장다이보사츠레이선
    • 야마나시현도 205호선 밋카이치바미나미선
    • 야마나시현도 207호선 히라사와치노선
    • 야마나시현도 210호선 소마구치엔잔선
    • 야마나시현도 213호선 시모오기와라밋카이치바선
    • 야마나시현도 214호선 큐소쿠카츠누마선
    • 야마나시현도 216호선 만리키코야시키선
    • 야마나시현도 217호선 후카사와토도로키선
    • 야마나시현도 218호선 다이보사츠하지카노선
    • 야마나시현도 508호선 다이보사츠토게선

3.2.4. 휴게소


  • 미치노에키 카이야마토 (20번 국도)

4. 출신 인물



[1] 당시 시 남서부에 위치한 시오노야마에 유래되었으며 고대 시대부터 갑으로 유명한 야마나시시와 함께 명승지로 알려졌다.[2] 다케다 노부토라가 동생 노부토모를 조상으로 삼고 있었으며, 다케다 가문이 군나이 영주 오야마다 가문을 복종시키자 군나이 지방에 대한 감찰로 축조된 저택이다. 엔잔에 있는 쿠로카와킨잔에도 가깝고, 요즘에는 금속융해물이 부착된 토기가 출토되어 있었다.[3] 1941년 2월 11일, 군의 경계 합병으로 탄생되었으며 크게 화합한다는 취지를 담아 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