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다 카츠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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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田勝頼 (たけだ かつより)
1546년 ~ 1582년 4월 3일

おぼろなる月もほのかに雲かすみ 晴れて行くへの西の山のは

구름이 드리워 흐려보이던 달도 마침내 맑게 개여서 서방정토를 향해 가는구나. - 지세이

1. 개요
2. 생애
2.1. 카츠요리의 성장 배경
2.2. 당주 계승 이전
2.3. 나가시노 전투. 그리고 다케다 가 멸망
3. 카츠요리에 대한 논란
3.1. 카츠요리 무능설
3.2. 카츠요리 유능설
4. 기타 창작물


1. 개요


일본 전국시대다이묘. 본명은 스와 카츠요리(諏訪勝頼)로, 사실 전국 시대를 거쳐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까지 살았다.
45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카이 다케다 씨의 적통이며 부친은 그 유명한 다케다 신겐. 아명은 시로(四郞), 이름 글자 중 요리(賴)는 원래 스와 가의 계승자라 외조부인 스와 가 당주 스와 요리시게의 이름 글자 중 하나를 딴 것이다.

2. 생애



2.1. 카츠요리의 성장 배경


1546년 다케다 신겐의 4남으로 태어났다. 모친은 신겐의 매부였던 스와 요리시게의 딸인 스와고료닌으로 사료가 부족해 자세한 인물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스와씨와의 동맹은 신겐이 부친인 다케다 노부토라를 추방하고 스와 씨와 적대 관계가 되어 무산되고 결국 신겐의 다케다 군이 스와 가문을 집어삼켜버린 뒤 스와 요리시게를 가이로 데려와 토코 사(東光寺)에서 자결하게 만드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모친이 다케다 가문에 의해 몰락한 다이묘의 혈연이었다는 점과 후계와는 거리가 먼 4남이라는 점 때문에 사실 카츠요리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2.2. 당주 계승 이전


이 시절의 카츠요리는 장수로서 활약한 기록이 약간은 남아있다. 서부 코즈케(上野)의 미노와 성 정벌부터 시작하여, 사가미 오다와라 성 공략, 스루가 다나카 성 공략 등에서 많은 공적을 세웠다. 모친의 혈통인 스와 씨를 자처했으며 이것은 당시의 관습상 정치적으로 스와 씨의 이름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다.[1]
그러나 4남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신겐에 의하여 후계자로 공언된다. 적자인 다케다 요시노부가 중신 오부 토라마사와 결탁해 모반을 꾸민 혐의로 폐적되고 자결하였는데 이후 차남 운노 노부치카는 장님이었으며 운노 가문을 이었기 때문에 후계 명단에서 탈락했고, 삼남은 어린 나이로 죽어 자연스럽게 카츠요리에게 순서가 돌아온 것.
결국 신겐은 다카토오성(高遠城)의 성주였던 카츠요리를 불러 다케다 성으로 되돌리도록 했다. 이것은 공인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신겐이 카츠요리를 자신의 후계자로 정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2.3. 나가시노 전투. 그리고 다케다 가 멸망


노부나가 포위망에 의하여 오다 노부나가를 궁지에 몰아넣던 아버지 신겐이 죽자 카츠요리가 자연스럽게 그 뒤를 잇게 된다. 신겐의 죽음이 알려졌을 경우에 대한 파급 효과를 우려하여 신겐의 죽음은 함구되었으며 형식적으로는 신겐이 은거하고 카츠요리에게 가문을 잇게 하였다고 발표되었다. 그 이후 전공을 세우며 활약하였다.
그러나 다케다 신겐이 죽은 것으로 오다 - 도쿠가와 동맹을 압박하던 벽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고 이에야스는 그 틈을 타서 다케다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로 한다. 신겐이 죽은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던 오쿠다이라 미마사카노카미 사다요시, 사다마사 부자는 다케다 가를 배신하고 이에야스의 밑으로 들어갔고 이에야스는 오쿠다이라 사다마사(奧平定昌, 나가시노 전투 이후 노부나가에게 공적을 인정받아 노부나가의 이름 한 글자를 하사받아 노부마사(信昌)으로 개명.)를 대 다케다전의 최전선인 나가시노 성에 배치했다.
물론 카츠요리에게도 도쿠가와를 집어삼킨다는 야심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가 후에 군을 보내어 나가시노 성을 포위한다. 물론 도쿠가와 측도 다케다 공략의 요지가 될 나가시노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오다 - 도쿠가와 동맹 대 다케다가의 싸움으로 크게 번졌다.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이 직접 손을 쓸 때는 반드시 승산이 있을 때만 군을 움직이는 신중한 전략가였기 때문에 다케다 4명신은 노부나가가 친히 군을 몰고 왔다는 사실에 패배를 직감하고 카츠요리에게 철퇴를 주장한다. 그러나 카츠요리는 이것을 물리치고 결전을 강행한다.[2]
그러나 몇가지의 요인 때문에 다케다군은 오다군에 의하여 패배하고 다케다 가는 많은 장병들을 잃는 것만이 아니라 다케다 4명신 중에 3명(야마가타 마사카게, 바바 노부후사, 나이토 마사토요)을 잃고 그 밖에도 많은 중신들을 잃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그 후로 4명신 중에 유일하게 생존한 코사카 마사노부의 부대와 합류한 다음에는 우에스기 겐신과 화친을 맺으나 이미 때는 늦어서 그 후로도 사양길에 접어든 다케다 가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하나둘 성을 빼앗기다가 오다 노부나가의 카이 총공격을 받고 본거지 코후에서 도주. 이때 사나다 마사유키와 오야마다 노부시게 둘 중 한 곳을 가려고 했는데 카츠요리는 오야마다 노부시게를 택했다. 그러나 오야마다 노부시게는 이미 오다 측에 붙어 다케다를 배신한 뒤였고[3][4] 결국 노부시게에 의해 퇴로까지 막히게 된 카츠요리는 텐모쿠잔에서 적에게 포위된 뒤 아들 다케다 노부카츠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자결한다. 여기서 유래하여 텐모쿠잔은 마지막 대결장을 의미하는 관용구로 쓰이기도 한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케다 신겐의 사위였던 아나야마 바이세츠의 아들 아나야마 카츠치요를 노부카츠의 양자로 올렸으나 카츠치요가 요절했고, 다시 이에야스의 5남인 노부요시가 카츠치요의 양자로 올렸으나 노부요시마저 요절하면서 결국 카이 다케다씨는 단절되고 만다. 다만 다케다 신겐의 차남 운노 노부치카의 아들 다케다 노부마사를 시조로 하는 이즈 다케다씨는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부인은 호조 우지야스의 딸로, 삼국 동맹의 일환으로 카츠요리에게 시집 왔으나 텐모쿠잔에서 카츠요리와 함께 어린 나이로 자결했다.

3. 카츠요리에 대한 논란



3.1. 카츠요리 무능설


일반적으로 카츠요리에 대해서는 악평이 많은데 이것은 뛰어난 군략가였던 아버지 신겐에게서 다케다 가를 물려받고 비교적 짧은 시간에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배하여 명문가였던 다케다 가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유명한 서적인 <갑양군감>에서는 카츠요리가 풍림화산의 하타지루시 사용이 금지되었고, 어디까지나 정식 후계자는 카츠요리의 아들인 노부카츠였으며 카츠요리는 노부카츠가 성장할 때까지의 후견인일 뿐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갑양군감>에 여러모로 신뢰성의 하자가 있기 때문에 역사적 근거가 전무한 것으로 취급받고 있으며, 실제로는 어디까지나 신겐의 병사를 숨겼을 뿐 카츠요리가 신겐의 실질적인 후계자로 행동했다.
카츠요리의 실책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나가시노 전투에서 4 명신의 철퇴 주장을 듣지 않고 결전을 시도함으로서 크게 패하여 중신들과 병사들을 잃어서 다케다 가의 군사력을 줄인 것이다.
또한 외교 정책의 실패로 우에스기의 후계자 다툼 때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편을 듦으로써 호조를 적으로 돌렸다. 사실 그 전부터 호조와의 관계는 최악이었으나 이것을 계기로 호조는 도쿠가와와 편을 맺고 다케다를 공격하게 된다. 이에 대항하여 다케다는 우에스기와 동맹 관계가 되나 우에스기 가 자체가 몰락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다케다 가의 유지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째서 이것이 실패인가, 하니 당시 우에스기 가문의 후계자 후보 중에 한 명인 우에스기 카게토라호조 우지야스의 아들이었다가 우에스기와 호조가 동맹 관계가 될 때 우에스기 겐신의 양자가 된 것이며 또한 호조 우지야스는 당시 다케다 카츠요리와 동맹 관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카츠요리가 카게토라의 편을 들어서 우에스기의 후계자로 만들었을 경우 다케다는 호조와 우에스기의 양쪽을 다 아군으로 만들 수 있는 것에 비하여 실제로는 카게카츠의 편을 들어서 호조를 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타카텐진 성 전투에 있어서 원군을 보내지 않고 방치함으로서 성병들을 죽도록 놔두었다. 이것은 무명을 날리던 다케다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에 이 이후로 가신들의 다케다에 대한 충성심이 크게 감소하여 다케다 가를 배신하는 가신들이 늘어나게 된다.
결국 카츠요리의 실책들이 다케다 가를 끝장냈다는 것이 카츠요리 무능설의 골자이며 오랜 세월 동안 정설로서 받아들여졌다.

3.2. 카츠요리 유능설


그러나 물론 그런 설에 부정적인 의견도 많다.
우선 카츠요리는 아버지인 신겐이 함락시키지 못한 타카텐진 성을 함락시킨 것을 비롯하여 전체적으로 패배보다는 승리를 더 많이 경험한 유능한 장수였다는 점이다. 확실한 1차 사료인 오다 가문의 서류나 편지에서는 카츠요리를 특별히 폄하하거나 우습게 보는 내용이 발견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정반대로 카츠요리를 만만찮은 적장으로 취급하고 있다.
나가시노 전투에서도 단순히 카츠요리의 실책에 의한 패배라고 볼 수 없는 점이 여럿 있다. 우선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측의 패배 요인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철포대를 동원하여 다케다 기마 군단을 꺾었다면서 마치 구세대와 신기술의 대결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 다케다 기마 군단이나 유명한 철포의 삼단 사격은 픽션이다. 신겐 시절에도 오다 가문과 다케다 가문의 동원 병력에는 몇 배나 차이가 나는 상황이었으므로[5] 반드시 패전을 카츠요리의 실책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다케다 가는 카츠요리의 지휘하에 연전 연승을 거두어서 몹시 사기가 높은 상태였기 때문에 전략적인 관점에서 나가시노 전투는 어차피 결전을 치뤄야 할 상황의 카츠요리 측이 그나마 유리한 상황을 골랐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츠요리가 세력으로서 다케다 가문을 한참 능가하는 오다 - 도쿠가와 동맹을 모두 상대해야만 했던 것은 부친인 신겐이 벌린 침공 전쟁 때문이었다. 오다 포위망에 오다 노부나가가 다른 곳으로 전력을 분산시킬 여력이 없는 상황에 오다의 동맹인 도쿠가와를 신겐이 공격했는데 당시로서는 탁월한 신의 한수였을지 몰라도 본인이 시작한 침공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신겐이 중도에 병사하면서 그 뒷감당을 후계자인 가츠요리가 떠맡은 것이다.[6] 물론 신겐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오다, 도쿠가와 가문은 다케다 가문에 대해 위협을 느꼈고 결국 다케다 가문이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을 넘어선 공세에 맞서야만 하는 등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카츠요리를 폄하하는 내용은 거의 대부분 카츠요리와 그 가신 일부에게 다케다 멸망의 책임을 떠넘기고 신겐을 신격화하는 <갑양군감>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책은 1차 사료도 아니고 후대에 작성된 설화집, 카더라 모음집에 가까워 신뢰도가 극히 낮다는 점이 문제. 실제로는 신겐 대에 다케다 가문에는 이미 외교, 내정, 군사 모든 면에서 모순점이 산적해 있었다.
또한 카츠요리의 모친인 스와 고료닌의 신분 문제 때문에 카츠요리는 다케다 가문의 통자(通字)[7][8]조차 받지 못했고, 오히려 스와 가문의 통자인 요리(賴)를 사용했을 만큼 신분이 다소 미묘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애초에 결속력에 심대한 문제가 있었던 다케다 가신들의 충성심이 자연스럽게 카츠요리에게 이어지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카츠요리에 대한 재평가나 변론은 한국사로 치면 백제의자왕에 대한 재평가와 비슷한 느낌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 즉 둘 다 나름대로 할 만큼은 했지만 선대의 실책을 뒤집어 쓴 측면도 있고, 외교적으로 고립된 끝에 자신이 이끈 세력이 패망에 이르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 또한 개인적으로도 둘 다 모계의 힘이 약해서 후계자로써의 위치가 다소 불안정했던 위치에서 후계자가 되었다는 공통점도 있다.

4.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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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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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노부나가의 야망에서의 능력치는 전형적인 맹장형. 지력, 정치는 혁신까지는 밑바닥을 찍었었다. 심지어 통솔과 무용이 통합되었던 창천록에서는 그야말로 호부견자 급의 처참한 능력치[9]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나마 혁신에서부터 상향이 되었지만 그래봐자 지력, 정치는 50대.
태합입지전5에서의 능력치 역시 맹장형. 통솔은 79, 무력은 85로 괜찮은 편이나 다른 능력치는 그다지 좋지 않다. 다케다가 기마 특화라 기마, 군학 기능은 3으로 좋지만 풍림화산이 없어서 사실 적으로 만나면 손쉬운 편. 1575년 시나리오에서 첫 평정을 열면 바로 발생하는 이벤트인 나가시노 전투에서 원래대로면 좆망테크를 탈 수밖에 없지만,[10] 풍림화산을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배운 다음에[11] 평정을 열어 이벤트를 발생시키면 카츠요리는 총대장이니 후방으로 피신시킨 다음 풍림화산이나 걸고 나머지 기마대(다케다 4명신 중 3명이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장수의 질적으론 꿀리지 않는다.)의 돌격으로 총대장인 이에야스만 점사하면 이에야스, 노부나가를 황천으로 보내버릴 수 있다.
1582년 시나리오로 시작할 경우 이이다 타카토오성을 내주면(즉 본성인 코후성이 노부나가, 이에야스와 인접하게 되면) 자택으로 들어갔을 때 텐모쿠잔 이벤트가 발생하게 된다. 분기는 3가지로, 본성인 코후에서 항전 or 마사유키 따라 누마타로 피신 or 노부시게 따라 이와도노로 피신인데,어떤 선택지를 골라도 기본적으론 병력 12,500명의 오다 노부타다 군대와 붙게 된다. 역사대로 노부시게를 따라가면 노부시게가 배신하고 오다 노부타다의 추격군과 만나 7,500명 vs 12,500명의 가장 불리한 싸움을 하게 되고, 코후에서 항전할 경우 오다 군의 계략으로 거성 방어도가 바닥(초기 상태라면 90 → 55)이 된 상태에서 공성전을 하게 된다. 마사유키를 따라가면 너무 멀어서 추격군에 따라잡히지만 마사유키가 배신을 안해서 병력만 10,000명 vs 12,500명인 상태에서 노부타다와의 야전이 기다리고 있다. 어느 쪽을 골라도 지면 게임 오버, 승리할경우 피신 없이 거성인 코후성으로 돌아오나, 노부시게를 따라가면 노부시게는 오다 소속으로 가버리니, 나머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좋다. 또한 이 시나리오도 기본적으로 사기 등에서 아군이 불리하며, 노부타다는 별 거 없지만 타키가와 가즈마스도 참전하니 풍림화산 정도는 이벤트가 일어나기 전에 사나다 유키무라에게 배워두는 것이 좋다.
2016년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사나다마루에서는 2화 만에 퇴장하였다. 배우는 히라 타케히로.[12]
키소 요시마사의 배반 이후 무너져가는 다케다 가를 지키고자하지만 중신인 아나야마 바이세츠의 배반 이후 카이를 포기하고 이와비츠성으로 입성해 코즈케에서 후일을 도모하자는 사나다 마사유키의 진언을 들으려하였으나, 사나다는 호죠와 밀통하고 있으며 근거지인 카이를 버려선 안 된다는 오야마다 노부시게의 진언으로 결국 카이에 남기로 결정한다. 사나다가를 믿지 못해 이와비츠로 가지 않은 그지만 이와도노로 떠나기 전에 사나다 가의 인질들을 흔쾌히 풀어주고 호위 병력까지 딸려 보내주려고 하는 대인배로 등장한다. 사나다 노부시게는 그런 그를 슬픈 분이라고 표현했다. 결국 이와도노에 관문 앞에서 오야마다는 배신, 이도저도 갈 수 없어 토쿠사 산에 진을 치지만 곧바로 몰려온 타키가와 카즈마스 군에 다케다 군은 괴멸. 카츠요리는 아버지 신겐의 혼령을 보고 절규하면서 할복한다.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동명의 만화가 있는데, 작가가 그 요코야마 미츠테루다. (원작자는 닛타 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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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바사라 시리즈의 외전인 전국 바사라 사나다 유키무라전에서는 오다 군에게 납치당해 동굴 천장에 매달린채로 등장한다. 그 상태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여버린다. 얼굴은 나오지 않았으며 의상 배색은 카쓰요리 초상화에서 그대로 가져온 듯.
전국무쌍 시리즈에서는 클론 무장으로 나오다가 전국무쌍 사나다마루에서 정식으로 참전, 다케다 카츠요리(전국무쌍) 문서 참조.

[1] 스와는 독자적인 신앙 사회의 전통이 매우 강해서 외부의 침략자일 뿐인 다케다 씨로는 통제가 어려웠다. 이를 위해서 신겐은 스와 당주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스와의 혈통을 잇는(요리賴의 통자를 사용하기도 했다) 카츠요리를 이용해 스와를 제어할 명분을 얻으려 한 것.[2]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학설도 존재한다.[3] 이후 오야마다 노부시게는 주군을 배신한 무장이라 하여 처형당했다. 반면 사나다 마사유키는 최후까지 주군을 배신하지 않은 인물로 평가되었으며 이후로도 별탈없이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등용된다.[4] 이에 대해 오야마다 노부시게로서는 멸망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는 의견이 있지만 사실 본인이 그냥 판단을 잘못한 것이다. 우선 오야마다 노부시게가 주군을 배신한 것은 다케다 가문의 패망이 이미 확정된 시기였다. 때문에 주군 배신이라 임펙트가 엄청 컸지 이미 다케다 세력이 끝장났고 뒷정리가 들어간 상황에서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없었다. 또한 오야마다 노부시게의 반란은 미리 내통에 의한 것이 아닌 주군이 막다른 궁지에 몰리지 승자인 오다에 대세에 편승하기 위한 즉흥적인 것에 불과했다. 전국시대에서도 미리 내통하여 배신한 것과 대세가 결정되어 승자에 편승하기 위한 배신은 상당히 차이가 컸다. 게다가 당시 이러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그냥 대세에 편승해 편을 바꾸는 배신정도면 몰라도 아예 주군을 죽음으로 내모는데 협력하는 것은 배신이 난무하던 전국시대에서도 그리 많지 않았고 당사자를 좋게 보지도 않았다. 다이묘들 자신들부터가 부하들을 거느린 영주인데 궁지에 몰린 주군에 대한 통수는 전혀 유쾌한 일이 아니기 때문. 오야마다 노부시게가 가츠요리를 죽이는 데 크게 기여했음에도 처형당한 것과 아나야마 바이세츠나 키소 요시마사 등 수많은 다케다 가문의 가신들은 배신을 했음에도 별탈 없이 항복이 인정되어 오다, 도쿠가와에 편입된 것도 이 때문이다.[5] 오다 가가 지배하던 오와리는 당시 가장 부유한 영지 중 하나였다.[6] 신겐이 노부나가 포위망을 완성시켜놓긴 했지만 오다는 결국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을 돌파해 버렸고 도쿠가와도 이때까지 망하기 일보직전이었지만 간신히 버텨냈다. 그리고 이후 노부나가 포위망의 중심이었던 신겐이 사망하고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과 뒤에서 조종하던 아시카가 쇼군도 오다에게 패하면서 노부나가 포위망은 완전히 무너졌고 그 뒷감당은 전부 다케다 카츠요리가 뒤집어썼다.[7] 당주에게 계승되는 글자다. 다케다 가문의 경우 조부 노부토라(信虎), 부친 하루노부(晴信)에서 알 수 있듯 노부(信)를 통자로 사용하였다.[8] 이런 통자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닌데 이후 폐적이 돼서 그랬지 다케다 신겐의 장남도 요시노부(義信)로, 시각장애로 인해 눈이 멀어서 운노 가문을 물려받게 되는 차남도 노부치카(信親), 요절하여 후계자가 되지 못한 삼남인 노부유키(信之)들은 제대로 통자를 이어 받았다. 즉, 카츠요리는 다케다 가문보다는 외가인 스와씨를 잇는 후계자였지 다케다 가문의 후계구도엔 애시당초 후보군으로 조차 여겨지지 않았던 셈이다.[9] 그래도 완전히 바닥은 아니고 통솔이 중박을 치는 B급형 무장이지만, 지략이나 정치력이 부족해서 주변의 오다나 도쿠가와, 호조, 우에스기 사이에서 버텨 나가기에는 벅찬 능력치이다.[10] 병력, 사기가 모두 뒤지는데다가 아군은 기마대라 붙어야되는데 앞에는 진지와 함정이 기다리고 있고, 그렇다고 유인을 하자니 적은 철포대라 멀리서 쏘면 그냥 망했어요...[11] 군학4에 풍림화산을 들고 있는 다른 장수로는 고사카 마사노부도 있지만, 마사노부는 성주기 때문에 기능사사를 받을 수 없다.[12] 유명배우이자 1988년작 다케다 신겐에서 다케다 노부토라를 연기했던 히라 미키지로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