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도 카즈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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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일명 '''천칭 타법(天秤打法, 텐빙 타법)'''이란 특이한 타격폼으로 이름을 날렸다.
교토의 야구 명문고인 헤이안 고교에 입학하여 3학년 때인 1953년 춘계 코시엔에 출장했지만, 이때는 백업급 선수로써 고작 대타로 1타석 서는 데 그쳤다.
고교 졸업 후, 메이지대학에 입학하여 2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활약했고, 야구부 선배이자 훗날 타이요 훼일즈에서 함께 동료로 뛰게 되는 아키야마 노보루와 함께 1955년 춘계리그 우승, 전일본 대학야구 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같은 해 열린 제2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에서도 일본 대표로 출장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 통산 성적은 '''타율 .259(255타수 66안타), 0홈런 23타점, 베스트나인 3회(1루수 1회, 외야수 2회) 선출.'''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1958년 타이요 훼일즈에 입단했다.
갓 입단한 콘도는 동계훈련 때 빠른 공에 적응 못하며 시행착오를 겪던 중, 검도에서 힌트를 얻어 오른손으로는 배트의 그립을 잡고 왼손으로 배트 중간을 잡은 채 배트 헤드를 위로 눕혔다가 공이 오면 배트를 세워 스윙하는 특유의 타격폼을 창안해 낸다. 이것이 위에 언급한 '''천칭 타법(天秤打法, 텐빙 타법)'''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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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런 해괴한 자세로 안타를 잘도 뽑아냈다는 말이다(...).
아무튼 데뷔 첫해부터 외야수, 1루수를 맡고 시즌 중반엔 3번 타자에 정착하며 주전 자리를 꿰차고 '''타율 .270(468타수 113안타), 13홈런 37타점, 10도루'''이란 준수한 성적을 거둔 콘도는 1969년까지 매년 세 자릿수 안타를 꼬박꼬박 찍으며 원조 '''안타 제조기''' 라는 별명을 얻었다.[2] 4년차인 1960년엔 나가시마 시게오에 이은 타율 2위(.316)를 기록하며 타이요의 첫 센트럴리그 우승에 공헌하였고, 일본시리즈에서도 타율 .400(15타수 6안타)를 찍는 등 맹활약하며 시즌 때와 마찬가지로 타이요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하여 시리즈 우수선수상을 수상한다. 1961년 7월 8일 대 한신 타이거스 전(카와사키 구장 개최)에선 사상 20번째로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였고, 1963년 올스타전 1차전에선 이나오 카즈히사를 상대로 끝내기 2점 홈런을 쳐서 MVP를 수상했다.
또한 자신도 인정할 정도로 느린 발에도 불구하고 주루센스가 뛰어나 1961년 시즌 도루왕(35개) 타이틀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3할 타율을 6번 기록했지만 수위타자와는 인연 없이 타격 2위만 4번 했다.
1970년 시즌 이후 타격 쇠퇴와 더불어 주전 3루수 마츠바라 마코토[3]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하면서 출장기회가 급감한 곤도는 1973년 외야수 미야하라 히데아키와의 1대 1 트레이드로 킨테츠 버팔로즈로 이적했고,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16년 간의 프로 생활 동안 '''1736안타, 109홈런, 483타점, 159도루, 타율 0.285'''의 통산 성적을 남겼고, '''도루왕 1회, 베스트 나인 1회, 올스타전 출장 9회'''를 기록했다.
은퇴 후 타이요 훼일즈와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지도자를 역임했고 1997년에는 한화 이글스의 코치로 부임하기도 했다. 그 후엔 후지TV, 닛폰 방송, NHK의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며 프로야구 마스터스 리그 발족에 공헌하기도 했으나, 2002년 6월 10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인하여 향년 66세로 별세하였다.
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일명 '''천칭 타법(天秤打法, 텐빙 타법)'''이란 특이한 타격폼으로 이름을 날렸다.
2. 프로입단 이전
교토의 야구 명문고인 헤이안 고교에 입학하여 3학년 때인 1953년 춘계 코시엔에 출장했지만, 이때는 백업급 선수로써 고작 대타로 1타석 서는 데 그쳤다.
고교 졸업 후, 메이지대학에 입학하여 2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활약했고, 야구부 선배이자 훗날 타이요 훼일즈에서 함께 동료로 뛰게 되는 아키야마 노보루와 함께 1955년 춘계리그 우승, 전일본 대학야구 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같은 해 열린 제2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에서도 일본 대표로 출장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 통산 성적은 '''타율 .259(255타수 66안타), 0홈런 23타점, 베스트나인 3회(1루수 1회, 외야수 2회) 선출.'''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1958년 타이요 훼일즈에 입단했다.
3. 프로 생활
갓 입단한 콘도는 동계훈련 때 빠른 공에 적응 못하며 시행착오를 겪던 중, 검도에서 힌트를 얻어 오른손으로는 배트의 그립을 잡고 왼손으로 배트 중간을 잡은 채 배트 헤드를 위로 눕혔다가 공이 오면 배트를 세워 스윙하는 특유의 타격폼을 창안해 낸다. 이것이 위에 언급한 '''천칭 타법(天秤打法, 텐빙 타법)'''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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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런 해괴한 자세로 안타를 잘도 뽑아냈다는 말이다(...).
아무튼 데뷔 첫해부터 외야수, 1루수를 맡고 시즌 중반엔 3번 타자에 정착하며 주전 자리를 꿰차고 '''타율 .270(468타수 113안타), 13홈런 37타점, 10도루'''이란 준수한 성적을 거둔 콘도는 1969년까지 매년 세 자릿수 안타를 꼬박꼬박 찍으며 원조 '''안타 제조기''' 라는 별명을 얻었다.[2] 4년차인 1960년엔 나가시마 시게오에 이은 타율 2위(.316)를 기록하며 타이요의 첫 센트럴리그 우승에 공헌하였고, 일본시리즈에서도 타율 .400(15타수 6안타)를 찍는 등 맹활약하며 시즌 때와 마찬가지로 타이요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하여 시리즈 우수선수상을 수상한다. 1961년 7월 8일 대 한신 타이거스 전(카와사키 구장 개최)에선 사상 20번째로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였고, 1963년 올스타전 1차전에선 이나오 카즈히사를 상대로 끝내기 2점 홈런을 쳐서 MVP를 수상했다.
또한 자신도 인정할 정도로 느린 발에도 불구하고 주루센스가 뛰어나 1961년 시즌 도루왕(35개) 타이틀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3할 타율을 6번 기록했지만 수위타자와는 인연 없이 타격 2위만 4번 했다.
1970년 시즌 이후 타격 쇠퇴와 더불어 주전 3루수 마츠바라 마코토[3]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하면서 출장기회가 급감한 곤도는 1973년 외야수 미야하라 히데아키와의 1대 1 트레이드로 킨테츠 버팔로즈로 이적했고,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16년 간의 프로 생활 동안 '''1736안타, 109홈런, 483타점, 159도루, 타율 0.285'''의 통산 성적을 남겼고, '''도루왕 1회, 베스트 나인 1회, 올스타전 출장 9회'''를 기록했다.
은퇴 후 타이요 훼일즈와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지도자를 역임했고 1997년에는 한화 이글스의 코치로 부임하기도 했다. 그 후엔 후지TV, 닛폰 방송, NHK의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며 프로야구 마스터스 리그 발족에 공헌하기도 했으나, 2002년 6월 10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인하여 향년 66세로 별세하였다.
4. 기타
- 나가시마 시게오는 콘도에 대해 "나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 중 1명"으로 고평가한 바 있다.
- 1966년 5월 10일 대 한신 타이거스 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쳤지만, 홈런을 치기 전 타임이 되어 있었기에 끝내기 홈런이 무효가 되어, 다시 타격을 했을 땐 투수 땅볼로 끝난 적이 있다(...)
[1] 일설에는 고질병이던 팔꿈치 통증을 완화시키려고 만들어낸 타법이란 얘기도 있다.[2] 물론 그 별명은 얼마 후 장훈이 이어받게 된다.[3] 1962년부터 1980년까지 타이요 훼일즈에서 뛰며 구단 사상 최다 기록인 '''2081안타 330홈런 1172타점(통산성적은 2095안타 331홈런 1180타점)'''을 기록했음에도 불구, 안타 1위를 2번한 것 빼곤(그마저도 1994년부터 타이틀 시상) 단 1번도 타이틀 수상 경험이 없었을 뿐더러 센트럴리그 우승과도 경험이 없었던 무관의 제왕이었다. 198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 처음으로 센트럴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을 맛보고 은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