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딘
1. 개요
독일어: Konrad (콘라트), Konradin (콘라딘)
이탈리아어: Corrado II (코라도 2세), Corradino (코라디노)
시칠리아어: Curradu II (쿠라두 2세), Curradinu (쿠라디누)
소년기에 사망하여 통칭 '''콘라딘'''(콘라디노)이라 표기된다.
슈바벤 공작, 시칠리아의 왕, 예루살렘의 왕.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마지막 당주였다. 그가 16세의 나이로 후사없이 죽으면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단절되었다.
2. 상세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일원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 콘라트 4세와 비텔스바흐 가문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1256년 아버지 콘라트 4세가 27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슈바벤 공작, 시칠리아 왕, 예루살렘 왕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선출되지 못했다. 후계자 선출을 놓고 제후들의 의견이 갈리며 신성 로마 제국은 대공위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콘라딘은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위와 함께 부여되던 이탈리아 왕위 역시 물려받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 콘라트 4세는 교황이 아들을 보호해주리라 믿었지만, 교황들은 콘라트 4세의 믿음을 배신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와 후임 알렉산데르 4세 및 제후들은 어린 콘라딘이 당주로 있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영지를 나눠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1258년 콘라딘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시칠리아를 대리 통치하고 있던 콘라트 4세의 이복 동생 만프레디가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콘라딘이 죽었다는 소문은 거짓이었지만 만프레디는 왕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동생이자 훗 날 카를로 1세로 즉위하게 되는 앙주의 샤를 (Charles d'Anjou)이 만프레디를 제거할려는 교황의 지원을 입고 나폴리로 처들어왔다. 1266년 만프레디가 전사하자 10대 소년왕 콘라딘은 시칠리아에서의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외삼촌 루트비히 2세의 지원을 받아 슈바벤 공국을 담보로 군자금을 마련하여 시칠리아를 침공했다. 그러나 1268년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시칠리아의 국왕, 카를로 1세로 즉위한 앙주의 샤를에게 포로로 잡혀 나폴리에서 참수당했다.
3. 영향
그의 죽음으로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단절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또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본거지이자 독일 왕국의 5대 부족 공국이었던 유서 깊은 슈바벤 공국이 콘라딘이 군자금 마련을 위해 저당잡혔기 때문에 그의 사후 여러 제후들에게 분할되며 해체되었다. 그리고 그 남쪽 부분은 스위스 연맹이 된다.
아울러 아모리 1세 사망 후 모계로 이어진 예루살렘 왕국의 혈통이 단절되었다. 이에 키프로스 왕이자 콘라딘의 섭정이었던 위그 3세가 예루살렘 왕위를 이었다. 이로써 키프로스-예루살렘 왕국은 후자의 멸망시까지 동군연합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