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트 4세
1. 개요
독일어: Konrad IV. (콘라트 4세)
이탈리아어: Corrado IV (코라도 4세)
프랑스어: Conrad II (콩라드 2세)
시칠리아어: Curradu I (쿠라두 1세)
라틴어: Conradus IV (콘라두스 4세)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1237~1254)이자, 슈바벤 공작(1235~1254), 이탈리아 국왕(1237~1254), 시칠리아 국왕(1250~1254), 예루살렘 국왕(1228~1254)
2. 상세
프리드리히 2세와 이사벨 2세 사이의 외아들.
모후의 죽음으로 태어나자마자 예루살렘 왕으로 등극했다.
1228년 이탈리아의 안드리아에서 태어났으며 독일을 처음 방문한 1235년까지 이탈리아에서 살았다. 콘라트는 욜랑드의 자식 중 둘째였으며,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식이기도 했다. 예루살렘 왕국을 다스리는 동안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가 대리 섭정으로서 예루살렘을 통치했다. 그러나 롬바르디아 전쟁에서 콘라트가 자립을 선언하고 프리드리히 2세가 섭정의 타당성을 잃어버렸다.
프리드리히 2세가 반항적인 장남 하인리히를 쫓아냈고, 1237년 콘라트는 빈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이 타이틀은 콘라트가 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는 보증수표였다.[1] 마인츠 대주교 지크프리트 3세가 1242년까지 독일 섭정으로 행세했으나, 프리드리히 2세가 튀링겐의 백작 하인리히 라스페와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1세를 선택해 대체하였다. 1240년부터 콘라트가 직접 독일의 정치를 맡았다.
그러나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1245년에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했고 콘라트 4세의 폐위를 멋대로 선언하자 하인리히 라스페가 교황을 지원하여 1246년 3월 22일 독일에서 대립왕으로 선출되었다. 하인리히 라스페는 1246년 8월 니다 전투에서 콘라트 4세를 이겼으나, 불과 7달 만에 사망했다.
1246년 콘라트 4세는 바이에른 공작 오토 2세 비텔스바흐의 딸인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1252년에 콘라딘[2] 이란 아들이 태어났다. 1250년에 콘라트 4세는 독일에서 또 다른 대립왕인 홀란트의 빌럼과 그의 라인 강 동맹을 패배시켜 잠깐 상황을 안정시켰다.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죽자 콘라트는 시칠리아와 독일의 영토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교황과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1251년 빌럼에게 패배하자 콘라트는 부유한 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하기로 결심했다. 1252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함대와 함께 아풀리아를 침입하여 통치 대리인으로 있던 이복동생 만프레디가 시칠리아에서 영향력을 퍼뜨리는걸 견제했고 국가를 엄격히 통제했다. 1253년 10월 콘라트의 군대는 반란 상태에 있었던 나폴리를 정복했다.
그러나 콘라트 4세는 교황의 지원자들을 진압할 수 없어 1254년에 파문당했고, 말라리아에 걸려 이탈리아 바질리카타의 라벨로에서 죽었다.
콘라트 4세의 죽음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은 대공위시대로 접어들었고, 1273년 루돌프 1세가 독일 왕이 됨으로서 혼란이 수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