쾨셈 술탄

 

'''이름'''
터키어
쾨셈 마흐페이케르 술탄
(Kösem Mahpeyker Sultan)
오스만 터키어
كوسم سلطان
본명
아나스타시아
(Αναστασία)
'''출생'''
1589년 혹은 1590년
베네치아 공화국령 티노스 섬
(현 그리스)
'''사망'''
1651년 9월 3일 (61세)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톱카프 궁전
'''장례'''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배우자'''
아흐메트 1세
'''자녀'''
메흐메트 황자, 게브헤르한 술탄, 아이셰 술탄, 파트마 술탄, 한자데 술탄, 무라트 황자, 쉴레이만 황자, 카슴 황자, 이브라힘 황자, 아티케 술탄
'''아버지'''
불명
'''어머니'''
불명
1. 개요
2. 후궁 시절
3. 첫 번째 섭정기
4. 두 번째 섭정기
5. 세 번째 섭정기, 그리고 죽음
6. 사후
7. 각종 매체에서
8. 여담


1. 개요


오스만 제국의 태후(발리데 술탄). 아흐메트 1세의 후궁 출신으로 아흐메트 1세 사후 즉위한 오스만 제국 황제들의 섭정으로서 대리청정을 맡아 제국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했고 외국에서는 '''여제'''로 불릴 정도로 사실상 황제에 버금가는 큰 권세를 누렸다. 휴렘 술탄 시기부터 시작된 '여자 술탄 시대(Kadınlar Saltanatı)'[1]는 쾨셈 술탄이 권력을 쥐고 있을 당시 절정에 달했다.
한 황제의 후궁이자 황제의 모후였으며, 의 섭정이었던 사람이다. 휘렘 술탄보다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권세로는 그녀들조차 능가했다.

2. 후궁 시절


쾨셈 술탄은 오늘날 그리스의 티노스(Tinos) 섬 출신으로, 태어났을 당시의 이름은 아나스타샤였다. 오스만 제국의 하렘으로 끌려오기 전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나, 보스니아 대총독이 황궁에 진상하여 황제 아흐메트 1세의 후궁으로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이후 개종하며 마흐페이케르(Mahpeyker)라는 이름[2]을 얻게 되었으며, 훗날 황제가 되는 무라트 4세이브라힘을 낳았다. 하지만 1617년에 아흐메트가 2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동생인 무스타파 1세가 뒤를 이었고, 선제의 후궁들은 모두 별궁에서 생을 마치도록 하는 관습에 따라 황궁에서 쫓겨났다. '''그런데...'''

3. 첫 번째 섭정기


1618년, 정신병자 황제 무스타파가 폐위당하고 아흐메트 1세의 장남이자 마흐피루즈 하티제 술탄(Mahfiruz Hatice Sultan)의 소생인 오스만 2세가 황제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는 재위 4년만인 1622년에 이미 제대로 된 군단이라기보다 특권계층에 가까워진 예니체리를 폐지하려다가 그들에 의해 시해당하고 무스타파가 복위했는데, 역시 1년만에 봉기가 일어나 폐위당하는 일이 벌어진다[3].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된 인물이, 아흐메트 1세와 쾨셈 술탄의 사이에서 태어난 무라트 4세.
아들이 황제가 되자, 쾨셈 술탄의 입장도 크게 달라졌다. 당장 별궁에서 나와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음은 물론이고, 무라트의 나이는 아직 12세에 불과했으므로 쾨셈이 모후의 자격으로 섭정을 할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당시 오스만 제국의 상황은 이미 막장이 된 지 오래라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심심하면 반란이 일어나는데다 사파비 왕조가 그 틈을 노리고 오스만 제국령 메소포타미아를 거의 집어삼키고 있었는데, 쾨셈을 중심으로 한 오스만 제국 정부는 내부 반란과 사파비 왕조의 침공에 맞서 이렇다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4].
그러던 1632년, 황제 무라트는 친정을 선언한다. 이미 자신의 나이가 20세가 되었으니 직접 통치를 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으로, 제아무리 황제의 권위가 바닥을 치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법적으로는 여전히 전제군주정인 마당[5]에 황제가 직접 나서겠다고 하는데야 쾨셈으로서도 그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따라서 무라트가 정권을 잡고 쾨셈은 제국의 제 2인자로 물러나 앉게 되었지만, 재상 이하 고위 관료들의 국정회의인 디반(Divan) 회의를 방청하는 등 나름대로의 영향력은 계속 발휘했다.

4. 두 번째 섭정기


1640년, 황제 무라트 4세가 사망했다. 비록 친정을 한 기간은 8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나톨리아 반도의 반란도 모두 진압하고 사파비 왕조에게서 승리를 거두며 메소포타미아 지방도 모두 되돌려받은 후의 죽음이었는데,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는 동생 이브라힘을 처형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는데, 무라트는 11명이나 되는 아들을 남겼지만 모두 어렸을 때 죽어 후계자가 없는데다 이브라힘마저 처형할 경우 황실의 대가 끊어지기 때문. 따라서 이브라힘이 다음 황제인 이브라힘 1세로 즉위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의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이브라힘 1세는 26세의 나이로 즉위할 때까지 평생 카페스(Kafes)라는 독방에 갇혀 산데다[6] 형 세 명이 맏형의 명령으로 처형되다 보니 언제 자신의 차례가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살았기에[7], 그만 시도 때도 없이 두통에 시달리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등 정신병에 걸리고 만 것.[8] 따라서 섭정이 필요하게 되었고, 쾨셈 술탄은 다시 제국의 실질적인 제 1인자로 나설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재상인 케만케쉬 카라 무스타파 파샤(Kemankeş Kara Mustafa Paşa)가 끼어들었다. 무라트 4세 치세 말에 재상을 지낸 그는 이브라힘이 즉위한 이후에도 그대로 재상으로 유임되었는데, 이브라힘은 그를 신뢰하고 막강한 권한을 준 것. 하지만 흡사 삼국지유선제갈량에 비유할 수 있을 이러한 관계[9]에 불만을 품은 관료들이 점차 생겨나게 되었고, 쾨셈은 그들을 포섭하여 1644년에 카라 무스타파 파샤에게 죄를 씌워 처형하여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10].
무스타파 파샤를 처형한 뒤, 쾨셈 술탄은 황제 다음 가는 지위를 굳힐 수 있었다. 후임 재상으로 쾨셈과 뜻을 함께했던 술탄자데 메흐메트 파샤는 처형당하지 않기 위해 이브라힘에게 아부하기에만 급급한 인물이었고[11], 그 뒤를 이은 재상들도 재능이 영 아니었기 때문.
일이 이렇게 되자, 황제 이브라힘은 점차 폭정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툭하면 사소한 잘못을 빌미로 재상과 고관들을 처형했으며, 1645년부터 베네치아 공화국과 전쟁[12]에 돌입했는데도 불구하고 애첩들에게 금은보화와 토지를 선물하는 등 사치를 부리고 중과세를 거두기 시작한 것. 이 결과 제국 내에서 황제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나중에는 1647년에 쾨셈 술탄을 중심으로 몇몇 대신들이 주도하여 이브라힘을 폐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나 불발에 그치고, 주모자들은 처형되거나 유배에 처해지고 쾨셈도 황궁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이듬해에 다시 예니체리 군단과 일부 성직자들이 쾨셈의 동의를 얻어[13] 봉기를 일으켰고, 이브라힘을 폐위하고 감금한 뒤 시해했다.

5. 세 번째 섭정기, 그리고 죽음


황제의 모후라는 자격으로 정치에 참여했던 쾨셈 술탄의 입장에서, 그 황제를 폐위한다는데 동의했다는 것은 스스로 정치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쾨셈은 전혀 그럴 뜻이 없었는데, 아들의 아들. 즉 손자를 황위에 올리고 태황태후로서 정치를 할 생각이었기 때문. 이에 따라 그녀는 이브라힘의 장남인 메흐메트 4세를 제위에 올렸는데, 이는 메흐메트의 모후인 투르한 하티제 술탄(Turhan Hatice Sultan)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티제 술탄은 1648년 당시 22세에 불과했던데다, 애초에 그녀를 이브라힘의 후궁으로 들인 것이 쾨셈 자신이었기 때문.[14] 게다가 쾨셈은 하티제 술탄을 골방에 가두어 버렸다.
하지만 하티제는 자신을 가둔 시어머니를 증오했으며 일곱 살짜리 황제를 대신해 대제국을 운영할 수 있는 자리를 순순히 시어머니에게 넘겨줄 뜻이 없었다. 결국 하티제의 반발에 부딪힌 쾨셈은 '''아들도 잡아먹은 상황에 손자라고 왜 폐하지 못하겠느냐'''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즉 메흐메트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말을 잘 들을 만한 여자가 낳은 다른 황자를 제위에 올리겠다는 것. 하지만 쾨셈의 시녀 가운데 한 사람이 이러한 음모를 하티제와 메흐메트에게 고해바쳤고, 하티제는 쾨셈보다 자신에게 동조적인 환관 수장과 예니체리 장교들을 불러다가 쾨셈의 이러저러한 반역음모가 벌어지려 하니 기회를 보아 그녀를 해치우라고 명령했다. 결국 쾨셈 술탄은 1651년 9월 3일, 향년 62세 전후의 나이로 암살자들한테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사후 그녀의 시신은 남편 아흐메트 1세 곁에 묻힌다.
권력에 집착한 요녀(妖女) 이미지가 강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내탕금을 풀어 빈자들을 구휼하고 백성들을 위한 각종 공공 사업에 많은 돈을 썼기 때문에 쾨셈이 죽자 백성들 중에서는 태후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15].

6. 사후


쾨셈 술탄이 죽은 뒤, 투르한 하티제 술탄은 모후의 자격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쾨셈 술탄이 꿰뚫어보았듯이 그녀는 정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재상의 협조가 필요했고, 그 결과 이미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난 인물이지만 유능하고 청렴한 것으로 이름이 나 있던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Köprülü Mehmet Paşa)를 재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 최고위 관직에 취임하는 조건으로 '황제는 재상이 승인한 것만 승인할 것', '모든 관직의 임명과 파직에 대한 권리를 재상에게 넘길 것', '황제는 재상에 대해 나쁜 소문이 퍼지더라도 일절 귀를 기울이지 말 것' 등 역대 재상들 가운데 누구도 누린 적이 없는 막강한 권한을 요구했고, 하티제는 그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휘렘 술탄을 시작으로 130여년 동안 계속되어 온 모후들과 애첩들의 시대. 이른바 '여자 술탄 시대(Kadınlar Saltanatı)' 는 막을 내리고, 쾨프륄뤼 가문이 대를 이어 재상으로서 정권을 장악하는 '쾨프륄뤼 시대(Köprülüler Dönemi)' 가 시작된다.

7. 각종 매체에서


터키의 사극 무흐테솀 유즈이을: 쾨셈에서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극 초반부 기준으로 심성은 선한 편이었는데 권력다툼과 역사의 흐름속에서 점점 흑화한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하얀 성에서 베네치아 학자 출신 노예 주인공의 주인인 '호자'는 어린 '파디샤'[16]의 환심을 사려 시도하고 있었는데 마침 파디샤의 할머니 쾨셈 술탄이 파디샤를 몰아내려던 정변을 계획하고 있었다. 호자가 파디샤에게 충고와 예언(?)을 해준 덕분에 정변 계획은 사전에 발각 됐고, 파디샤를 폐위 시키려던 쾨셈 술탄은 목이 졸려 살해 당한다. 그 이후 호자는 파디샤의 신임을 얻어 출세하게 된다.
다음 웹툰에서 쾨셈 술탄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으로 추정되는 하렘생존기가 연재중이다.

8. 여담


그리스인이 아니라 집시 여인 쾨셈이 연회장에서 춤을 추는 걸 보고 아흐메트 1세가 한눈에 반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

[1] 오스만 제국의 황후와 태후, 황녀등 하렘 출신 귀부인 여성들이 무능하고 미약한 술탄을 대신해 제국의 국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던 시기.[2] '달처럼 생긴(Moon-Shaped)' 이라는 뜻의 페르시아어인데, 오스만 제국 당시의 활용을 보면 '초승달'같이 가냘픈 몸매를 가진 여자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3] 여담으로, 이로써 무스타파는 오스만 제국의 역대 황제들 36명 가운데 유일하게 복위했다가 다시 폐위당한 황제가 된다.[4] 다만 무능하다는 것과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라는 점에 유의. 무라트 4세가 즉위한 1623년부터 1632년까지의 6년 동안 쾨셈 술탄은 재상을 여덟 번이나 갈아 치우는데, 이는 그만큼 쾨셈이 제국을 운영하는 데 열심이었던 흔적이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5] 이는 19세기 후반에 오스만 제국의 법 자체가 개혁되어 입헌군주정이 수립될 때까지 계속된다.[6] 이는 오스만 제국의 독특한 황위 계승법 때문이다. 쾨셈 술탄의 남편(?)이었던 아흐메트 1세가 개정하기 전까지는 황자들끼리 내전을 벌여 최후의 승자가 황제가 되되 새로 황제가 된 자는 그의 형제들을 모두 죽여야 했고, 개정된 이후에는 황족 남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많은 자가 황제가 되되 친아들을 제외한 친척들은 모두 죽이는 대신 카페스라고 불리는 독방에 감금해야 했다. 물론 전용 독방에서도 일정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 한은 어느정도 자유로운 행동도 가능했고 여자도 '알'수는 있었지만 아이를 갖는것은 금지되었다. 그리고 황제가 언제라도 이들을 죽일 수 있었기 때문에 카페스에 갇힌 황족들은 대체로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다고 한다.[7] 무라트가 사망한 뒤 재상이 이브라힘을 알현하여 제위에 오르시라고 요청했을 때에도, '이젠 폐하께서 나까지 죽이려고 함정을 파신 거지?!' 라고 반응했을 정도.[8] 나중에는 다리까지 절게되는 질병에 걸린다.[9] 다만 이브라힘이 유선보다는 적극적이어서, 정치는 재상에게 맡겨두되 스스로는 되도록 자주 잠행을 다니며 콘스탄티노플의 상황을 몸소 파악하고 혹 부당한 일이 눈에 띄면 재상에게 시정할 것을 명령했다.[10] 이는 휘렘 술탄이브라힘 파샤를 제거한 것과 상당히 흡사하다. 다만 휘렘이 이브라힘 타도에 앞장섰던 것은 아들들의 안위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지만, 이쪽은 순전히 정권다툼이라는 것이 차이점.[11] 오죽하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이브라힘이 ‘그대는 왜 짐의 말에 반대를 하지 않는가?’ 라고 물었는데, 그에 대한 답이 예술이다. '저희 신민들 가운데 누구도 폐하의 말씀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마다 깊은 뜻이 담겨있다는 것은 아옵니다.' [12] 1645~1669. 오늘날에는 5차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이라고도 하고 베네치아령 크레타 섬을 오스만 제국이 침공했기에 크레타 전쟁, 크레타의 중심도시인 칸디아(現 이라클리온)에서의 전투가 특히 치열했다 하여 칸디아 전쟁이라고도 불린다.[13] 그런데 이거, 생각해보면 '''어머니라는 사람이 아들을 폐위하고 죽인다는 데 동의했다'''는 소리가 된다. [14] 원래 하티제는 우크라이나 출신 노예로 쾨셈의 시종으로 들어왔는데, 그녀를 이브라힘에게 바친 것이 쾨셈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15] 본래 오스만 제국에서는 황제의 모후에게 품위 유지비를 지급하여 자선 사업도 하고 모스크 건축도 후원하고 기타 공공 목욕탕 등도 세우면서 여가를 보내게 했는데, 오스만 역사상 최초의 막장 황제인 셀림 2세 이후 그 자금을 정치 자금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그런데 쾨셈은 복지에 관심이 많아 적지 않은 돈을 썼다고.[16] 당시 오스만 제국 황제였던 메흐메트 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