쿄고쿠 마리아

 

京極マリア
(1542 ~ 1618)


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로 아자이 히사마사(浅井久政)의 차녀이며 아자이 나가마사의 누나이자 쿄고쿠 타카요시(京極高吉)의 아내이다.
중세 일본에서는 현재와 달리 혼인 후에도 부인은 원래 성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크리스천 중에서는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경우가 있어 쿄고쿠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법명은 요후쿠인(養福院).

2. 생애


1573년에 남편을 따라 아즈치에 거주하면서 가톨릭을 접하게 되었고 1581년에 아즈치 성에서 네키 솔도 오르간티노로부터 세례를 받아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받는다.[1] 1587년에 가톨릭 금지와 신부 추방령이 내려진 이래 1597년에는 키나이에서 23명이 붙잡혀 최종적으로 26명이 나가사키에서 순교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마리아는 그 중 1명인 바오로 미키(パウロ三木)[2]를 방문해 위로했지만, 바오로 미키는 오히려 마리아를 격려하였다.
다음날에 고문을 받던 신자들의 귓불이 잘리자 마리아는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달려갔다가 형리가 으로 제지했으며, 마리아는 그들이 실린 짐수레가 떠나고 신발의 끈인 하나오가 끊어진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따라갔다.
시바타 카츠이에오이치까지 죽고 갈 곳 없는 오차차, 오하츠, 오고우를 보호해줬다.[3] 오하츠를 마리아의 장남인 쿄고쿠 타카츠구(京極高次)의 정실로 들였지만 오하츠와 타카츠구의 사이는 나빴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는 오르간티노 신부와 함께 교토, 오사카 등의 선교 활동을 벌여 2년 사이에 900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차남 쿄고쿠 타카토모(京極高知)가 사는 탄고 국의 센겐지무라로 옮겨 타카토모의 비호 아래에 이 건물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녀는 백성들로부터 '센겐지 님(泉源寺様)'이라고 불리며 사랑을 받았고, 1618년에 사망했다.

3. 전국 바사라 시리즈


쿄고쿠 마리아(전국 바사라) 참고.

[1] 마리아의 남편 타카요시는 그녀가 세례명을 받은 며칠 후 사망했다고 한다.[2] 일본의 26위 순교성인 중 한 명. 축일은 2월 6일.[3] 히데요시가 아자이 세자매를 살려주고 그녀들을 후원해 준 건 히데요시가 아니고 마리아와 사촌인 오다 노부카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