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미오도리
組踊/くみおどり/クミオドリ
1. 개요
쿠미오도리는 18세기 초 류큐 왕국(지금의 오키나와)에서 시작된 전통 무대 예술이다. 음악, 무용, 대사와 연기가 어우러져 있다.
대사는 류큐 왕국의 공용어이자 사실상 류큐어의 표준어라고 할 수 있는 오키나와어 슈리 방언으로 되어 있다. 음악은 류큐 음악이 사용되며, 오키나와의 정형시인 류카가 중간중간에 노래로 삽입되어 있다. 류큐의 여러 옛 이야기들이 작품의 소재로 쓰인다는 것도 특징. 역사적으로 오키나와에 유교의 영향력이 짙었기 때문에 충효를 강조하는 주제들이 많다.
2. 역사
구미오도리의 창시자는 류큐 왕국의 예능인이었던 타마구스쿠 쵸쿤(玉城朝薫, 1684~1734)이다. 1718년, 류큐 왕국의 쇼케이 왕[2] 은 연회를 담당하는 관직인 오도리부교(踊奉行)에 타마구스쿠 쵸쿤을 임명하였고, 이듬해 청나라에서 오는 책봉사들을 위한 연회를 맡게 하였다. 쵸쿤은 이전에 일본에 방문하여 노가쿠, 가부키 등의 일본 무대 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이를 참고하여 류큐의 독자적인 무대예술인 쿠미오도리를 만들어냈다.
1719년, 책봉사를 위한 연회에서 쵸쿤의 두 쿠미오도리 작품인 <二童敵討(니두티치우치)>, <執心鐘入(슈신카니리)>이 공연되었다. 그 해에 이어서 <銘苅子(메카루시)>, <女物狂(온나무누구루이)>, <孝行の巻(코우코우누마키)>가 상연되었다. 처음으로 상연되었던 쵸쿤의 이 다섯 쿠미오도리 작품들을 '''쵸쿤고반(朝薫五番)'''이라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쿠미오도리는 류큐의 사족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나갔으며, 쵸쿤을 이어서 여러 극작가들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었다.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작품은 약 70여 편 정도.
1872년 류큐 왕국이 일본 제국에 의해 류큐번으로 격하되고, 1879년에 오키나와현이 설치되면서 완전히 멸망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쿠미오도리 예능인들은 직업을 잃게 되었지만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상업적인 공연으로 쿠미오도리는 지속되어 나갔다. 한편 서민들의 입맛에 맞춘 오키나와 연극(沖縄芝居)라는 장르가 탄생하기도 했다.
1972년 5월 15일 오키나와가 일본에 복귀한 동시에 쿠미오도리는 일본의 중요무형문화재에 지정되었다. 2010년 11월 16일에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되었다. 현재에도 우라소에 시의 국립극장 오키나와 등에서 상연되고 있다. 중국의 경극과 마찬가지로, 본래 여자와 아이역은 남자들이 담당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여성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3. 작품예시: <二童敵討(니두티치우치)>[3]
실제 역사적 사건이었던 1458년의 고사마루·아마와리의 난(護佐丸・阿麻和利の乱)을 소재로 하고 있다. 당시 류큐 왕국은 왕위다툼이 일어나 왕궁인 슈리성이 불타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때의 인물들인 나카구스쿠[4] 의 고사마루(護佐丸)[5] 와 카츠렌구스쿠[6] 의 아마와리(阿麻和利)[7] 는 강대한 아지[8] 이자 건국 공신들이었다. 아마와리는 자신의 경쟁자였던 고사마루를 역적으로 모함하여 자결하게 하고, 슈리성을 공략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여 멸망하고 만다.
(1) 무대는 아마와리가 자신의 권력욕과 야망을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하며, 고사마루를 무너뜨렸으니 곧 슈리성을 치겠다고 선언한다.
(2) 아마와리는 무대에서 물러나고, 고사마루의 두 자식인 치루마치(鶴松), 카미쥬(亀千代) 형제가 등장하여 복수를 다짐하는데, 어머니가 나타나 둘에게 단검을 건네준다. 형제는 아마와리를 찾아나서며 어머니와 이별한다.
(3) 아마와리는 부하들과 함께 나와 들놀이를 즐기는데 이를 치루마치와 카미쥬가 발견한다. 아와마리는 형제가 고사마루의 자식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형제는 아마와리에게 술을 바쳐 취하게 하고 함께 춤을 추며 마음을 놓게 한다. 아마와리가 방심한 틈에 형제는 단검을 뽑아 아마와리를 쳐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
유네스코 무형 문화재 지정을 기념하여, 지역 언론사인 오키나와 타임스(沖縄タイムス)에서 유튜브에 니두티치우치 공연 전체의 동영상을 업로드 해놓았다! 게다가 일본어 화자가 오키나와어 대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일본어 자막이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