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문

 



'''키스 문
Keith Moon
'''
[image]
'''본명'''
키스 존 문 (Keith John Moon)
'''출생'''
1946년 8월 23일, 잉글랜드 런던 웸블리
'''사망'''
1978년 9월 7일
'''국적'''
'''영국''' [image]
'''활동 시기'''
1962년 ~ 1978년
'''소속'''
더 후
'''직업'''
음악가, 배우
'''장르'''
, , 하드 록
'''악기'''
'''드럼''', 보컬
1. 개요
2. 어린시절
3. 초기 밴드와 그의 생활
4. The Who 밴드에서의 키스 문
5. 기행
6. 굴곡 많은 삶, 약물중독과 갑작스러운 죽음
7. 보컬로써의 활동
8. 기타


1. 개요


영국의 드러머. 생전 1960년대 레전드 록밴드 더 후의 소속이었다.
역사상 최고의 드러머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전설적인 드러머이다. 해외 팬들 사이에선 일명 '드럼 구타'로 통하는 과격한 드러밍이 특징이며, 라이브에서는 뭐든 다 때려부술 것만 같은 거칠고 광적인 퍼포먼스를 내뿜는다.[1]
그의 과격한 스타일의 드럼 연주는 이후 70-80년대에 널리 유행하게 되는 하드록과 헤비메탈 음악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며 사실상 '''키스 문에게 영향을 받지 않은 하드록 드러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헤비록 역사에서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뮤지션이다.

2. 어린시절


1946년 영국 런던 북서부 미들섹스 병원에서 기계 수리공 "알프레드 찰스 문"과 청소부 "캐서린 위니프레드 문" 사이에서 태어났다. 런던의 웸블리 지역에서 자랐으며 형제로 여동생 Linda, Lesely 두 명이 있었다. 지극히 평범하게 안정적인 유년 시절을 보냈다. 키스는 어릴적부터 자연스레 음악을 많이 들어왔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아버지,어머니 모두 음악을 좋아하여 집에서 항상 레코드 플레이어를 틀어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키스의 성격에 대해선 그의 부모님이 말하길, 아주 활동적인 아이였지만 가끔씩은 정도가 지나쳐, 홀로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 따져보면 ADHD 성향이 심했던걸로 추정하고 있다.
부모님께 음악인이 되고 싶다는 뜻을 밝혀, 부모님이 나팔과 트럼펫을 배우도록 해주었지만, 너무 어려워 포기하고 14살 때 어머니에게 선물 받은 드럼키트로 이 때부터 아무 교육없이 자기혼자 막 두드리면서 드럼을 익혔다고 한다. 단, 이것은 부모님의 증언이고 다른 전기를 보면 키스의 드럼 선생으로 여러명이 거론되는데, 키스가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고 본인이 이리저리 다니면서 대충 어깨 너머로 배운게 아닌가하는 추측도 있다. 즉, 정식 선생은 없었다는 이야기.

3. 초기 밴드와 그의 생활


1962년 초, 키스는 드디어 첫 밴드인 에스코트에 합류했다. 에스코트는 본인들이 노래를 만들어 연주하는 그룹이 아니라 다른 노래를 커버해서 부르는 그룹으로, 수많은 야외 행사나, 클럽에 초청되어 백밴드 역할을 많이 했었다. 그렇게 이리저리 무대의 맛을 본 키스는 그 해 말, 커버밴드 에스코트를 탈퇴하고 '비치 콤보'라는 밴드로 옮긴다.
키스는 밴드 활동을 하면서 기술학교를 졸업하여 아버지처럼 (잡다한 기술을 익힌)수리공이기도 했는데, 밴드에 좀 더 욕심을 가져 전념해보고 싶었으나, '비치 콤보'는 별다른 의욕이 없는 밴드라 밴드활동이 활발하지 않았고 이에 키스는 자신이 그냥 아버지처럼 수리공의 인생으로 평생 살게 될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비치 콤보'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탈퇴한다.
'비치 콤보'에서 받은 무기력함으로 인해 자칫 드러머의 길을 영원히 포기할 뻔하기도 했는데 드럼에 대한 욕망이 충족되지 않고 별다른 진전없이 가볍게 넘어가는 것에 회의감을 느껴 음악을 관두고 수리공으로 정착할 생각이였다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에는 아버지의 영향도 있는데 키스의 아버지가 수리공으로 하던 일 중, 전기공사의 돈벌이가 괜찮았고 아들에게 기술을 물려주기도 쉬웠기에 자연스럽게 일을 물려줄 생각이였다. 그래서 키스는 건축회사에 안정적으로 일찍 자리잡기도 했었다. 의외로 굉장히 충실하고 안정적인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키스의 미래는 곧 바뀐다. 1964년 17살의 나이로 더 후의 드러머로 영입이 된 것이다!
더 후에 어떻게 영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고. 꽤나 황당한 스토리이다.

4. The Who 밴드에서의 키스 문


1964년, 키스는 더 후의 드러머로 영입되자마자, 바로 직장을 그만두고 밴드일에 전념한다. 키스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밴드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고 더 후는 다음해 1965년, "I Can't Explain." 싱글을 발표. 큰 인기를 끌면서 드디어 1집 My Generation을 발표한다. 이 1집의 결과는 대히트. 첫싱글을 발표하고 2년후인 1967년 두번때 싱글 "I Can See for Miles."는 미국 싱글 차트에 첫 진입하며 히트를 쳤다.
키스는 드럼 외에, 노래하는 것에도 엄청 열정적이였다. 노래를 잘하는 편은 아니고, 백보컬로 끼어 녹음하고 싶어했는데 자꾸 장난치고 멤버들을 웃겨서 녹음할 때마다 녹음실에서 쫒겨났다고 한다. 그래도 기죽지 않고 몰래 숨어있다가 튀어나와 녹음을 방해하고 장난을 쳐서 멤버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더 후는 무대에서 자신의 악기를 파괴하는 퍼포먼스로 유명한데 이러한 공격적인 스타일 역시도 키스와 잘맞았다.#

5. 기행


위에서 언급했든 ADHD끼가 다분했던 그는 좀체로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로, 따분한 일을 못 참아했고 투어를 다닐 때면 호텔 방을 깨부수고 화장실 변기에 폭죽과 다이너마이트를 던져 넣는 일을 반복하곤 했다.[2] 미시간에서 벌인 그의 21번째 생일 파티[3]는 당시 락 그룹들이 벌였던 막장급 파티들 중에서도 최강으로 회자되곤 한다. 키스는 그날 술과 마약에 취해 차 한대를 호텔 풀장으로 가라앉혔다 한다. #
그는 과거 연주도중 다이너마이트를 드럼에 넣어서 폭파시키는 짓을 자주 했는데, 이로 인해 폭발 옆에 있던 피트 타운젠드의 청력이 손상되는 사고가 일어난 적도 있다. 물론 피트는 그런 거 상관없이 그냥 자기가 부수던 기타를 계속 부쉈고, 심지어 옆의 MC가 메고있던 통기타마저 박살내버렸다.

6. 굴곡 많은 삶, 약물중독과 갑작스러운 죽음


키스 문은 1970년대 들어 여러 사건에 직면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그의 운전기사였던 닐 볼랜드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순탄치 않았던 결혼 생활을 들 수 있다. 이런 일들 덕분에 그는 점차 술과 약물에 중독되었고, 점점 미치광이(Moon the Loon) 취급을 받기 시작했으며, 급기야는 더 후의 투어 중에 무대에서 수 차례 실신하기도 했다. 멤버들의 약물 중단권유에도 불구하고 결국 1978년, 알콜중독 치료제였던 헤미네브린 과다복용으로 사망하고 만다.

7. 보컬로써의 활동


보컬로 음반을 한장 냈다. # 음반이름은 two side of the moon [4]
들리는 것과 같이 목소리가 매우 특이하다. #

8. 기타



1974년 라이브에서 드럼 솔로 영상.
레드 제플린이란 밴드명을 제안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항목 참고.
사망하던 해인 1978년의 사진을 보면 토니 몬타나가 연상된다는 평이 많다. 재밌는 점은 키스 문은 토니 몬타나가 나온 1983년 스카페이스가 만들어지기 전에 죽었다. 1978년 영상.[5]

[1] 기타 담당인 피트 타운젠드와 더불어, 실제로 악기를 자주 부쉈다고 한다.[2] 처음에는 체리 밤 500개를 변기에 처박더니 그 다음부터는 M60 크랙커를 처박기 시작했고 결국 화장실에 다이너마이트를 처넣고 문을 닫는 짓까지 했다.[3] 미국에서의 21번째 생일은 합법적으로 술을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기 때문에, 뻑적지근한 부어라마셔라 파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4] 핑크 플로이드의 명작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패러디로 보인다.[5] 일부 팬들은 그는 죽기 전까지도 상당히 천진난만하고, 밴드의 분위기를 살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른 나이에 죽어버려서 안타깝다는 댓글을 달기도 했다. 영상에서 키스 문은 죽기 4달 전이지만, 상당히 활발한 모습으로 녹음에 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