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후

 


'''더 후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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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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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더 후
THE WHO
'''
'''멤버'''
'''피트 타운젠드, 로저 달트리, 존 엔트위슬, 키스 문'''
'''입성 연도'''
'''1990년'''
'''후보자격 연도'''
'''1990년'''
<bgcolor=#0c0000> '''후보선정 연도''' ||<bgcolor=#0c0000> '''{{{#ffd700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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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ho'''
'''출신지'''
잉글랜드 런던
'''현재 멤버'''
로저 달트리 (보컬)
피트 타운젠드 (기타, 보컬)
사이먼 타운젠드 (기타)[1][A]
존 버튼 (베이스)[A]
로렌 골드 (키보드)[A]
잭 스타키 (드럼)[2][A]
'''과거 멤버'''
존 엔트위슬 (베이스)[3]
키스 문 (드럼)[4]
더그 샌덤 (드럼)[5][6]
케니 존스 (드럼)[7]
'''장르'''
, 하드 록, 로큰롤
'''활동 기간'''
1964년1983년
재결성: 1989년, 1996년
'''데뷔'''
1965년 싱글 ‘My Generation
'''링크'''

1. 개요
2. 역사
2.1. 디투어스, 하이 넘버스
2.2. 더 후 출범
2.2.1. 60년대 - 70년대
2.3. 키스 문의 죽음 - 현재
3. 음악적 특징
4. 여담
5. 음반 목록


1. 개요


1964년 결성된 영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비틀즈, 롤링 스톤스와 더불어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이끌었던 밴드들 중 하나이자 하드 록, 헤비 메탈 장르의 단서가 된 밴드 중 하나로 거론되며 거친 무대매너와 연주력, 기성세대에 반발하는 가사로 많은 평론가들에게 펑크 록의 창시로 대접받는다.
모드#s-2족의 상징이기도 하다.

2. 역사



2.1. 디투어스, 하이 넘버스


영국 일링 아트스쿨에 재학하던 피트 타운젠드는 음악적인 환경에서 자라며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키워가고 있었다. 어느날 동네 친구인 로저 달트리로부터 밴드를 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로저는 이미 베이시스트 존 엔트위슬을 구했다고 했는데 길을 가다 우연히 베이스 기타를 들고 있던 존을 만났다고 한다. 당시 피트는 스타일이 거친 로저와의 밴드 활동이 내키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로저가 어릴 적부터 계집애같다는 놀림을 받는게 싫어 대장간같이 힘쓰는 곳을 전전하며 거칠게 살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세 사람이 모이면서 밴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더후의 베타 버전인 '디투어스 (The Detours)'가 결성된 것. 그러나 당시 유행하던 알앤비와 컨트리 음악에 영향을 받은 밴드라 인기는 그냥저냥이었다.
피트, 로저, 존은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인 음악을 하기로 결정하고 드럼 좀 친다는 친구 한 명을 가입시켜 연습을 시작한다. 연습이라 해봐야 하교 시간 후에 교실 하나 빌려서 연주하는 정도였는데, 워낙 재능이 있었던지라 얼마 안 가 학교 축제나 동네 등에서 콘서트를 열 정도로 성장하게 된다. 이 와중에 키스 문이 최종 멤버로 가담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참으로 골때린다. 기존 멤버인 피트, 로저, 존은 같은 학교 친구로 싸움을 자주 벌이는 말썽꾼이었는데 키스 역시 이들과 같은 학교였으나 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밴드가 한창 연습에 열을 올리던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난다. 만취 상태인 더벅머리 한 명이 술병을 들고 막무가내로 연습실로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드럼 세트로 가서 드러머에게 고함을 지르며 강제로 그를 내쫓은 것이다. 그러고는 자기가 드럼을 치기 시작했는데 당시 피트의 증언에 따르면 거의 실성 직전의 발광적인(...) 연주였다고. 전 드러머가 산지 얼마 안 된 새 페달을 연주 한 곡으로 박살냈다고 한다. 이러니 다른 멤버들에게 욕설과 몰매를 맞고 쫓겨날수 밖에 없었지만... 키스의 연주실력은 멤버들의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고 얼마 안 가 정식으로 밴드에 가입하게 된다.[8]
이후 밴드명을 '하이 넘버스 (The High Numbers)' 로 개명하게 되고, 매니저 피터 미든과 계약을 맺어 당시 유행하던 모드족 컨셉을 받아들여 밴드의 방향을 전환한다.[9] 당시 하이패션이던 모드 패션은 이들에게 있어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알앤비 음악을 시끄럽고 강렬하게 연주하면서 점차 이름을 알려나갔으나, 전체적으로 구닥다리 블루스를 연주하는 느낌이라 큰 음악적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 때 피터 미든이 써준 싱글 I'm The Face를 발매하지만, 당시에 넘쳐나던 알앤비 곡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에 상업적으로 망했어요.
사실 모드 붐에 묻어간 면이 없진 않았으나,[10] 오히려 당시 모드족 붐을 적절히 반영하며 "시대를 반영한" 밴드가 된다. 단순히 묻어가는 차원이었다면 시대의 흐름에 쓸려 내려갔을텐데, 그만큼 당대 젊은이들의 분위기를 잘 반영했고, 이러한 점이 공감을 얻은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모드족의 대변자이자 스스로 모드족으로 칭한 밴드는 거의 없었다.
위기를 느낀 멤버들은 밴드 이름을 새롭게 바꾸고 활동하기로 결정했고, 모드 컨셉은 유지했지만 음악적 감각은 없었던 매니저 피터 미든을 잘라버리고 다른 프로듀서를 찾기위해 킹크스의 앨범 제작에도 참여했던 미국인 프로듀서 셀 타미와 계약을 맺은 다음에 '''The Who'''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거친 느낌의 알앤비를 연주했던 특성을 잘 살려서 '''Maximum R&B'''이라는 슬로건을 매 공연마다 붙이게 된다. 개명 이후 공연.

2.2. 더 후 출범



2.2.1. 60년대 - 70년대


첫 싱글 "I Can't Explain" 발표 이후 첫 앨범 'My Generation'이 히트하게 되면서 유명해진다. 타이틀 곡인 "My Generation"은 하드 록펑크 록의 시초로 거론되는 위대한 곡으로, 특히 이 곡의 '늙기전에 죽고싶어' (I hope I die before get old)란 가사는 이들의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11] 또한 이들의 독특한 패션은 모드로부터 출발했지만, 모드에게 다시 영향을 미쳤다. 로저 달트리의 화려한 의상은 유행을 선도했고, 피트 타운젠트는 영국 국기유니언 잭으로 자켓을 만들어 입었다. 이는 록 역사에서 일종의 패션 코드가 되었고, 존 엔트위슬은 군복 셔츠나 자켓을 입고 나와 록 역사상 최초로 밀리터리 룩을 선보이기도 했다.
1966년, 2집 'A Quick One' 발표 이후 더 후는 기존의 음악스타일에서 한층 진일보한 모습을 선보인다. 키스 문의 드럼 사운드가 돋보이는 "Happy Jack"이나, 존 엔트위슬의 베이스 라인과 묵직한 그로울링[12]이 돋보이는 "Boris The Spider"가 싱글로 발매된다. 당시 수많은 비트 밴드들이 명멸하던 시기에 이 앨범으로 인해 더 후는 록스타의 지위를 더욱 굳히게 된다.
이후 1967년, 여러 기발한 시도를 하던 타 밴드들의 영향을 받아 여러 시도를 하던 끝에 3집 'The Who Sell Out'이 발매된다. 곡 중 짧게 등장하는 광고음악이나, 라디오 음악을 집어넣어 앨범 전체가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곡들을 구성하는 컨셉트 앨범으로,[13] 수록곡 "I Can't See For Miles"는 빌보드 싱글차트 9위를 기록하면서 더 후의 유일한 10위권 진입 히트곡이 된다.
전작의 성공에 고무받은 피트 타운젠드는 이는 인도힌두교 요기 사상가인, 메헤르 바바 (Meher Baba)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아예 앨범 하나를 통째로 스토리라인으로 구축해 하나의 뮤지컬처럼 만들 계획을 한다. 이에 구상해 낸 스토리가 "정신적 충격을 받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한 젊은이가 자신을 찾아가는 내용"의 드라마였다. '워드 페인팅' (Word-painting) 기법에 의해 곡들이 쓰여지고, 1969년, 록 역사상 최초의 록 오페라로 기록되는 4집 앨범 "Tommy"가 탄생한다.[14] 총 오리지널 24곡으로 구성된 두 장짜리 LP는 1969년 영국 앨범차트 2위에 오르는 성공을 이루었고, 이러한 록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의 시도는 이후 핑크 플로이드, 예스, 등의 다른 밴드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훗날 이 음반은 오페라 버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연주되며, 1975년 켄 러셀 감독의 실사 영화로도 제작이 된다.[15] "Tommy"역으로 보컬 로저 달트리가 출연, 사이비 교주 역에 에릭 클랩튼, "Acid Queen"역에 티나 터너, "Pinball Wizard"역에 엘튼 존이 출연하는 등 /록 음악 팬들에게 상당히 익숙한 뮤지션들이 나온다. 영화 자체도 상당히 수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상당한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이 때를 기점으로 더 후는 더이상 젊은 층의 패기를 대변하는 밴드가 아니었고 이를 싫어한 과거의 팬들과 모드족들은 상당수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걸 상쇄할 만큼 더 후의 음악성은 날로 진보해나간다.
1971년, 5집 "Who's Next"가 발매되었고, 이는 더 후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최고로 손꼽히는 앨범이 되었다. 빌보드 4위, 영국차트 1위에 랭크되는 기염을 토한다. 이 앨범에서는 신디사이저를 적극 도입해 더욱 더 진일보한 음악성을 보여준다.[16] 이전부터 쌓아오던 프로그레시브 록적인 성향을 뿜어낸 Baba O' Riley, 더 후의 곡 중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곡인 8분짜리 대곡 Won't Get Fooled Again 같은 명곡들을 수록하며 이들을 역사상 최고의 록 아티스트 중 하나로 만들어 준다.
1973년. 더블 앨범으로 기획된 록 오페라 앨범 "Quadrophenia"를 발매하여 빌보드 2위, 영국차트 2위의 기록을 남긴다. 하지만 그렇다고 멤버들 성깔이 죽은건 아니라서 1976년 5월 31일 찰튼 애슬래틱스의 홈 구장에서 공연했을 당시, 120데시벨의 소음을 내서 한동안 기네스북에서 '가장 시끄러운 공연'으로 남기도 했다.

2.3. 키스 문의 죽음 - 현재


성공도 잠시, 드러머 키스 문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Who Are You" 앨범 발표 후 1978년 9월 7일 사망했고, 그 뒤 밴드는 새로운 드러머 케니 존스를 영입해 여러 앨범을 냈지만 예전의 기량을 보이는데 실패하였고, 1982년 해체하게 된다.[17]
이후 각자 솔로 활동을 펼치다가 1989년 투어를 끝내고 90년대 들어서 재결성 후 1996년과 1997년에 쿼드로페니아 투어 공연을 하고 1999년부터 공연을 다시 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2002년 존 엔트위슬이 코카인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바람에 비틀즈처럼 현재 오리지널 멤버는 단 두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 하지만 그 뒤에도 여전히 세션 멤버들을 대동하고 종종 라이브 공연을 펼치고 있다. 그 중 오아시스 세션으로 활동했던, 링고 스타의 아들 잭 스타키가 드러머로 있으며, 2010년 슈퍼볼 하프타임쇼에 서기도 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록밴드인 만큼 2012 런던 올림픽 폐회식에 마지막 무대를 멋지게 장식하였다. "Baba O' Riley", "See Me Feel Me", "My Generation" 세 곡을 연주했다.
2014년 데뷔 50주년을 맞아 영국 투어에 돌입했고, 두 멤버에 따르면 "'''이번 투어는 긴 이별의 시작'''"이라 밝혔고, 로저 달트리는 "이번 투어는 정말로 마지막이 될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공연을 할 수는 없다. 나는 내 목소리가 얼마나 오래갈지 모른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미국 빌보드 등 외신에 따르면 밴드는 2015년 11월~12월을 마지막으로 런던, 더블린, 벨파스트 등에서 9회에 걸쳐 공연을 펼친다. 영국 공연이 끝나면 미국에서 투어 공연이 이어질 전망. 출처는 이곳. 2014년 11월 3일 데뷔 50주년 기념 히트앨범인 '''"The Who Hits 50"'''이 발매되었다.
2015년 미국 투어는 로저의 뇌수막염으로 연기되고 2016년, 로저가 회복하며 런던을 시작으로 연기되었던 미국, 캐나다투어 일정을 소화하였다. 그 후 유럽 국가들의 공연을 끝으로 2016년의 일정이 끝이 났다. 이후 2017년 로열 알버트 홀에서의 청소년암 환자 지원 콘서트를 시작으로 투어 공연을 할 예정. 2019년 새로운 공연을 하는 듯 하다. 2019년 5월 7일부터 미국 순회공연, 7월 6일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할 예정이며 더불여 영국 한정으로 새로운 엘범(LP&CD(지금은 구매할수 없는 Exclusive CD 와 Standard CD이 있다.)(영국을 제외한 다른나라로의 배송은 안되는듯 하다.) 2019년 5월 7일부터 Moving On! Tour 를 시작했다. 자세한 내용은 영문 위키피디아 Moving On! Tour 참조

3. 음악적 특징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멤버 개개인의 기량은 가히 최상급이었다.'''[18]
보컬인 로저 달트리는 록 오페라 스타일의 드라마틱한 보컬과 로큰롤의 정열적인 보컬을 모두 능수능란하게 소화하는 사람이라 많은 록 팬들에게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하나로 손꼽힌다. 라이브 퍼포먼스도 정열적인데, 쉴세없이 몸을 흔들고 뛰어다니는 와중에도 특유의 굵직하면서도 울부짖는 듯한 창법이 살아있다. 또한 공연내내 마이크를 쥐불놀이하듯 뱅뱅뱅 돌리다 잡는게 트레이드 마크. 마이크가 날아갈 것만 같은 스릴이 관전 포인트다. 하지만 역시 세월은 못이기는지 90년대 후반부터는 그나마 얌전하게 기타를 치거나 가볍게 몸을 흔드는 정도로 바뀌었다. 언제나 박력 넘치며 와일드한 성격이라 초창기에는 주먹으로 밴드를 이끌다시피 했는데, 작은 키와 예쁘장한 외모, 많은 여자 형제들의 영향으로 행동거지에 여성스러움이 배어있던 게 컴플렉스였기 때문에 짐짓 더 거칠게 행동했다고 한다. 친구 사이다 보니 의견 충돌이 있을 때는 치고받고 싸우는 게 일상이었다고. 그토록 늘 싸우던 멤버들이라 키스가 죽기 전 수년간의 불화로 공백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는 싸우고 헤어진 뒤라 서로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는데 불화의 주요 원인은 피트와 로저였다. 그러다 수년의 공백기 후 피트가 로저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 편지가 얼마나 감동을 주었는지 로저가 펑펑 울며 사과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새 앨범의 계획이 수립되고 레코딩에 들어가는데 그것이 바로 1977년의 후기 명작중 하나인 "Who are You" 앨범이다.
드러머 키스 문의 드럼 연주는 그 자체로 정열이 넘쳐 흔히 천둥 소리로 비유된다. 라이브 도중에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드럼 세트를 부숴먹었다고 하며 실제로도 호르몬 과다분비 등으로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는 정신 질환이 있었다. 키스의 연주를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여타 드럼 연주자들이 썼던 것보다 사용하는 탐의 수가 훨씬 많다. 무대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더블베이스 드럼을 나눠주고 마운트도, 플로어, 스네어를 통틀어 거의 8~16여 개에 이르는 탐을 사용했는데, 놀랍게도 그 모든 탐을 전광석화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슈퍼밴드 Cream의 드러머이자 '드럼의 마왕'이라 불리우던 진저 베이커와의 일화로도 유명하다. 데뷔는 진저 베이커가 훨씬 먼저 했으나 하드 록 시대에 접어들자 두 사람 모두 경쟁적으로 드럼 구성을 늘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이 때 앨리스 쿠퍼 밴드의 드러머이자 키스 문의 친구였던 닐 스미스도 항상 둘보다 드럼 갯수 하나를 늘려서 연주했다고 한다. 이 답없는 경쟁은 당시 병풍에 불과하던 드럼 세계의 확장이라는 훌륭한 결과를 일궈냈다.
전성기 시절 탐이 무려 열 개(...)가 넘는다.

존 엔트위슬이 보여준 베이스 라인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것이었으며 소위 말하는 기관총같은 베이스 테크닉을 록계에 처음 선보인 것이 바로 존이다. 녹음에서건 무대에서건 늘 과묵한 사람이었지만, 그 속에 있는 활화산과도 같은 격동과 열정을 베이스라인으로 고스란히 표출한다. 이 베이스 연주는 리드 기타의 역할을 대신할 정도로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빌리 시언, 존 디콘, 러시의 게디 리 등 후대 베이시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노년기의 연주 영상을 보면 노련한 정도가 아니라 '''웬만한 후배는 능욕하는 수준'''이라 입이 떡 벌어진다. 베이스를 신체의 일부마냥 마음대로 다뤄 괴물같은 스피드와 테크닉을 뽐내기 때문에 "Thunder Fingers" 라는 별명이 있었다. 또한 여러 가지 악기를 쓴다는 특징이 있는데 60년대 말부터 모습을 드러낸 헤비쉐입 베이스를 아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영상이나 사진을 보면 알렘빅, 딘, 깁슨, 워윅 등 온갖 브랜드의 헤비쉐입 베이스를 다룬다.
피트 타운젠드는 세계 제일의 리듬 기타리스트라 불린다. 동시대의 에릭 클랩튼이나 제프 벡같은 유명 기타리스트에 비해 화려한 면모는 적었지만 밴드 음악의 기초를 탄탄히 구축했고, 성격답게 공격적이고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과격한 연주를 했으며 피드백과 파워코드를 대중화시키기도 했다. 그 외에도 풍차 돌리기나 악기 파괴 등의 무대 퍼포먼스로 후대 밴드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대부분의 곡은 피트가 작곡한 것이기도 한데, Tommy 같은 록 오페라나 My Generation 같은 과격한 사운드의 초창기 앨범부터 The Who's Next 같이 신시사이저를 이용한 세련된 앨범까지 보여주면서 후의 중심축이 되었다. 보컬 실력 역시 출중해서 Goung Mobile같은 곡을 직접 부르거나 대부분의 백보컬을 담당했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보컬 능력이 떨어져 힘에 겨워할 때가 있고,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로저가 피트의 파트를 담당했던 적이 있었다.
밴드 자체는 인기가도를 달릴 때도 데뷔 당시처럼 늘 티격태격댔다고 한다. 옆에서 보기에는 당장에라도 깨질 것같은 분위기였다는데… 가까울수록 더 싸운다고 하니 그만큼 절친했다는 증거도 된다.
데뷔 당시와 전성기의 음악 스타일이 상당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 성공을 거두었고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장르로는 펑크 록, 프로그레시브 록 등에 주로 영향을 주었으며 레드 제플린, 더 클래시, U2, 러쉬, 펄 잼, 블러, 오아시스, 라몬즈, 그린데이 등의 밴드에게 영감을 준 록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밴드로 기록되었다.

4. 여담


  • 국내에서는 이상하게도 매니아를 제외하면 인지도가 바닥에 가깝다. 그것도 80년대 앨범 "Who Are You"가 소개되고, 미국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 시리즈같은 범죄 드라마 시리즈에 음악들이 사용되면서 뒤늦게 알려지게 되었다.[19][20] 특유의 거친 스타일이 한국인의 성향에 잘 맞지 않은 듯.
  • '레드 제플린' (Led Zeppelin)이라는 이름은 원래는 추락한 비행선의 이름에서 따온 밴드명인데, 이 밴드명을 지어준 장본인이 바로 키스 문이다. 야드버즈에서 지미 페이지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다 탈퇴하자 홀로 남은 지미 페이지는 새로운 멤버들을 영입한 뒤 이름을 "뉴 야드버즈"로 지었는데, 야드버즈의 실질적 리더였던 (탈퇴)멤버 제프 벡은 그 이름을 쓰지 말고 새로운걸 지으라고 요청했다. 지미 페이지가 밴드명을 뭐라고 지을까 고민하던 차에 지인이었던 키스 문이 "너희 밴드는 제플린 비행선처럼 금방 높이 뜨겠지만, 무거운 납처럼 곧바로 추락할 거야"라며 장난 반으로 지어준 것이다.
  • 악기 해체의 미학을 철저히 구현한 밴드로, 요즘은 흔할 악기 부수기의 원조격이지만 시작은 아주 사소했다. 피트 타운젠드는 천장이 낮은 클럽에서 공연하던 중 자신의 기타를 머리 위로 높게 들어올렸는데, 천장에 기타 헤드가 부딪히며 넥이 부러지는 바람에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오히려 환호했고, 피트는 그렇게 기타를 부수기 시작했다. 악기해체장면
  • 상술했듯 매우 거칠고 열정적인 퍼포먼스로 유명하다. 지금이야 8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들이 됐으니 훨씬 덜하지만 4인조 시절에는 정말 소위 말해 발광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라이브 영상을 보면 로저 달트리는 시도때도 없이 마이크를 돌리고 피트 타운센드는 윈드밀은 물론 점프하고 뛰어다니고 키스 문은 드럼을 두들겨패다시피 하며 라이브가 끝나면 세상 끝난 것처럼 악기를 죄다 부숴놓는다. 과묵한 것으로 알려진 존 엔트위슬만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베이스를 연주한다. Won't Get Fooled Again 라이브 영상에 '존은 활동 과잉(hyperactive)스러운 세 아이를 돌보는 쿨한 베이비시터같다.'라는 댓글이 최다추천을 받을 정도.
  • 가는 곳마다 호텔 을 몽땅 부숴놓기로 유명했다. 특히 키스 문의 주도하에 이런 일이 많았는데 변기에 M60 폭죽을 넣어서 폭파시키거나 호텔 수영장에 캐딜락을 처박아 버리거나 창밖으로 티비를 던져 박살을 내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후에 이를 모두 변상해준 다음에 까지 두둑하게 얹어주고 나갔다 한다. 그 후로 롤링 스톤즈가 이 퍼포먼스를 따라했고, 1970년대엔 레드 제플린을 비롯한 여러 후배 밴드들도 이걸 고스란히 따라했다.[21] 90년대엔 오아시스가 이 짓을 하고 다녔다. 그것도 아직 데뷔앨범도 내기 전부터. 이로인해 원조이자 주범이었던 키스 문은 홀리데이 인과 쉐라톤, 힐튼 호텔 등에서 영구 거부를 당했고 죽을 때까지 이런 몇몇 호텔에 숙박할 수 없었다.
  • 1967년 어떤 쇼 공연 도중 키스 문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22] 공연이 끝나고 악기를 부수는데, 키스 문이 숨겨뒀던 화약들을 일시에 폭발시키는 바람에 키스는 황급히 무대 밖으로 나가버리고, 피트 타운젠트는 머리가 타고 귀에 이상이 생기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무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이 사건은 신문에서 대서특필 되었다. 놀라운 점은, 피트 타운젠드는 이로 인해 청력이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기타를 다 부수고 심지어 MC의 어쿠스틱기타까지 부숴버렸다. 영상을 보면 기타를 부수는 피트 타운젠드의 바로 앞에서 드럼이 폭발하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피트 타운젠드의 위엄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존 엔트위슬은 피트 타운젠드와 키스 문이 엄청난 파괴적 퍼포먼스를 보이는 와중, 조용한 성격으로 알려진 것과 같이 조용히 자기 베이스를 잡고 있다가 드럼이 터져 충격을 입었다.
  • 키스 문은 약을 하도 많이 해서 무대에서 기절한 적이 있다. 1973년 Quadrophenia 투어 도중 공연전에 말 진정제를 브랜디와 섞어 마신 탓에[23] 공연 중에 무대 위에서 기절한 것(...). 그 상황에서 피트 타운젠트는 즉석에서 "관객 중에 드럼 칠 수 있는 사람 있어요? 잘치는 사람으로." 라 외쳤고, 그때 지원한 스콧 할핀이라는 젊은이가 드럼을 치게 된다. 그는 더 후의 심각한 였기 때문에 모든 노래를 줄줄 외우고 있었고,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24]
  • 이런 괴팍한 행보와는 별개로, 키스는 성공적인 영화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데이빗 에섹스가 주연한 록 음악 영화 스타더스트에서 드러머 역으로 출연한 이래로 크고 작은 영화에서 발군의 연기력을 선보인다.
  • 일본 애니메이션 케이온!!에서 히라사와 유이가 선보인 팔을 풍차처럼 돌려서 피킹하는 '풍차 돌리기'[25] 필살기는 원래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젠드의 시그니처 무브이다. 또한 2기 3화에서 밝혀진 바로는 타이나카 리츠 또한 키스 문의 열렬한 광팬이다. 케이온 극장판에서 엔딩곡 Singing!의 MV영상에서는 더 후를 오마주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26] 케이온 연출을 맡은 야마다 나오코 감독이 더 후의 열렬한 팬이라 넣은 듯 하다. 그 후에도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애니메이션)의 오프닝곡으로 My Generation이 채택됐는데 이쯤하면 더후 덕후라고 봐도 무방하다.
  • 노브레인의 전 기타리스트이자 모노톤즈의 현 기타리스트인 차승우가 더 후의 팬이다, 실제로 2014년 모노톤즈 공연 당시 My Generation을 커버했을 정도.
  • 이렇게만 보면 단순히 폭발적인 퍼포먼스, 망나니 같은 행적을 지닌 시끄러운 록 밴드 정도로 보이겠지만, 알게 모르게 록/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진 크고 작은 콘서트들에 출연한 바가 있다. 즉 로니 제임스 디오와 더불어 록 역사의 살아있는 화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출연한 콘서트를 보면 1967년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Monterey Pop Festival),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Festival), 1969, 70년 와이트 섬 페스티벌(Isle of Wight Festival)[27], 그리고 드러머 키스 문이 사망한 이후에도 1985년 라이브 에이드(Live Aid)에 출연했으며, 로저 달트리가 게스트 보컬리스트 자격으로 1992년 프레디 머큐리 추모콘서트에 출연하기도 했다. 여기에 비교적 덜 유명한 콘서트들까지 더하면 1979년 폴 매카트니쿠르트 발트하임캄보디아에 보낼 자선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콘서트 'Concert for the People of Kampuchea'에도, 독일의 유명한 음악방송 무대인 'Rockpalast'[28]의 1981년 무대에도 섰다. 게다가 2015년에는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에까지 출연하여 그야말로 살아있는 록의 역사가 되었다.[29]

5. 음반 목록



[1] 피트 타운젠드의 동생이다.[A] A B C D 투어 멤버[2] 링고 스타의 아들이다.[3] 1964년 ~ 2002년(활동), 2002년 (사망)[4] 1964년 ~ 1978년(활동), 1978년(사망)[5] 1964년(활동), 2019년 (사망)[6] 초창기 멤버였으나 키스 문이 쫓아냈다(...)[7] 1978년 ~ 1983년, 1985년, 1988년, 2014년 (활동)[8] 존 엔트위슬은 "키스 문의 첫 공연 때 밧줄을 갖고 드럼 세트를 꽁꽁 묶어서 고정시키길래 왜 이러나 싶었지만 공연이 시작되자 그 의문이 사라졌다. 키스 문이 드럼을 치자 드럼 세트가 앞뒤로 요동을 쳤기 때문이다." 라고 회상했다.[9] 그 전까지는 딱히 방향성이라 할 것도 없었고, 패션도 신경쓰지 않았다.[10] 모드족이 등장한 것이 1950년대 후반인데(50년대 비트닉 문화가 계승, 발전되었다. 50년대 테디보이 문화가 계승, 발전된 것이 로커), 1960년대 리듬 앤 블루스 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런던의 급진적 보헤미안 문화가 합쳐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모드족 붐이 절정에 도달한 것이 1964년이고 하이넘버스의 첫 싱글은 1964년에 발매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 참조.[11] 후에 메탈밴드나 하드록 밴드들이 이런 레파토리로 곡을 꼭 만들기도 한다.[12] 당시 록계 최초의 그로울링 창법이었다.[13] 앨범 자체가 페이크광고 컨셉이다. 앞커버, 뒷커버의 멤버들이 실제로는 없는 상품을 광고하고 있는 셈.[14] 이전에 헤어같은 훌륭한 록 뮤지컬이 있기는 했으나, 정식으로는 더 후의 "Tommy"가 최초다.[15] 일설에 따르면 본래 이 영화에 스탠리 큐브릭을 감독으로 초청하려고 했으나 본인이 거절했고 멤버들은 'Who's Next'의 커버에 모노리스로 추정되는 콘트리트 물체에 오줌을 갈기고 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16] 앨범 커버에 관하여 충공깽스러운 일화가 있는데, 퇴짜맞은 시안 중에 키스 문이 코르셋을 입고 말채찍을 든 모습이 있었다. 후방주의(?)[17] 1985년 Live Aid 공연에선 당시 멤버들이 모여 공연하기도 했다[18] 멤버들 모두 해당 분야의 역량을 따질 때 열 손가락을 벗어나는 일이 없을 정도. 거의 레드 제플린 다음가는 수준이다,[19] 여담으로 멤버 로저가 CSI 라스베가스 시리즈에 범인으로 출연하기도 했다.[20] 이는 CSI를 처음 기획한 총감독 앤서니 자이커가 이 밴드의 팬이기 때문이다. 각각 라스베가스는 'Who Are You', 마이애미는 'Won't Get Fooled Again', 뉴욕은 'Baba O'Riley'.[21] 레드 제플린의 경우엔 호텔 벽을 뚫은 적도 있었고, 호텔 한 층을 통째로 빌려서 친구들과 술, 마약, 고급 창녀들 및 그루피족이 다같이 흥청망청 노는 난장판식 퇴폐 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존 본햄과 친구들은 호텔 복도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방문을 때려부쉈고, 참가자들은 아무데서나 하고 싶은걸 하며 스트레스를 플었다고. [22] 연주곡은 그들의 1960년대 대표곡 My Generation이다.[23] 상기했듯 호르몬 분비 및 혈기 관련 증상이 있어서 웬만큼 센 약이 아니면 안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찾다 찾다 기어이 도달한 마약이 진정제(...). 말 진정제는 대체로 야생마같이 날뛰는 짐승들에게 쓰인다(...).[24] 그래도 당시 공연 영상을 보면, 다른 멤버들이 스콧을 위해 템포를 조절해주거나 중간중간 손짓이나 말로 가이드를 해주는 등 배려해준 부분이 있다.[25] 윈드밀(Windmill)이라 부르는 그 행위가 맞다.[26] 특히 방과후 티타임 멤버들이 영국 국기이불삼아 껴안는 장면.[27] 2년 연속 출연했다.[28] 우리나라의 EBS 스페이스 공감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듯하다.[29] 말하자면 지미 헨드릭스(몬터레이, 우드스탁, 와이트 섬)부터 시작해 밥 딜런(와이트 섬), (캄보디아 콘서트, 라이브 에이드, 프레디 추모콘서트), 더 클래시(캄보디아 콘서트)를 거쳐 카녜 웨스트, deadmau5(2015 글래스톤베리) 등의 아티스트들과 한 무대에 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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