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 음악
1. 개요
2. 특징
3. 음악사적 영향
4. 역사
4.1. 탄생 배경
4.4. 1960년대: 록의 기반 수립
4.5. 1970년대: 다양한 하위 장르로의 확장
4.5.1. 공격적인 사운드의 하드 록
4.5.2. 전위적인 분위기를 담은 프로그레시브 록
4.5.3. 퇴폐적이고 중성적인 글램 록
4.5.4. 주류에 대한 반항을 담은 펑크 록과 개러지 록
4.6.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새로운 장르들로 서서히 대체되다
4.7. 1990년대: 대안을 찾아 나서다
4.8. 2000년대 이후: 쇠퇴기
5. 한국
5.1. 1960년대: 태동기
5.2. 1970년대~80년대: 청년문화로의 발전, 그리고 정권의 문화탄압
5.3. 1990년대: 전성기의 끝과 짧았던 펑크 붐
5.4. 원인 분석
5.5. 그래도 생명력을 이어나가고 있는 인디 씬
5.6. 결론
6. 세부 장르
6.1. 록의 뿌리
6.2. 컨트리 록 / 포크 록 / 루츠 록
6.3. 사이키델릭 록
6.4. 펑크 록
6.5. 하드 록과 헤비메탈
6.6. 소프트 록과 팝
6.7. 얼터너티브 록
6.8. 글램 록
6.9. 프로그레시브 록
6.10. 재즈 음악과의 퓨전
6.11. 클래식 음악과의 퓨전
6.12. 기타
7. 관련 문서
1. 개요
대중음악 장르의 하나이다. 보통 Rock을 미국식 영어 발음대로 락이라고 읽는 경우도 많다. 덕분에 TV 프로그램 등에서 말하는 사람은 락이라 하는데 자막은 록으로 나오는 현상이 벌어진다.
재미있게도 락이라는 단어가 러시아어로 넘어오면서 'рок'으로 차용되었는데, 이 단어가 원래 운명, 숙명 등의 뜻을 가지고 있던 단어라 러시아 한정 묘한 뉘앙스가 생겼다.
2. 특징
"이 세상에 존재하는 록 밴드의 수만큼 다양한 종류의 록이 있다"고 할 정도로 록은 그 정의가 넓은 장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특징적인 요소라면 60년대에 등장하여 널리 퍼진 앰프에 연결하여 소리를 증폭시킨 일렉트릭 기타가 있으며, 그 연주법은 블루스에 기반을 둔 펜타토닉 스케일과 슬라이딩, 벤딩 등의 연주법이 있다. 현대 대중음악은 전부 미국 흑인의 음악 문화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중 척 베리나 시스터 로제타 사프와 같은 로큰롤의 선구자들에 의해 블루스 기타와 보컬이 록의 근간을 이뤘다. 즉, 흑인들의 블루스에서 비롯된 정제되지 않은 리듬과 즉흥성에서 오는 강렬한 리듬감은 록의 중추로서 작용한다. 또한 거기에 주선율을 놓고 코러스와 벌스가 반복되는 구조는 컨트리와 포크에서 비롯되어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으로 인해 정립되어 현재까지 전해오는 록의 형태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또한 보편적으로 4/4박자의 드럼 리듬이 가장 널리 쓰이며, 비틀즈 등의 영향으로 인해 드럼, 일렉트릭 베이스, 일렉 기타, 보컬리스트가 기본이 되는 4인조의 형태에 다른 세션이 추가되는 밴드 구성이 가장 흔하다. 또한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으로 디스토션 효과를 먹여 찢어지는 소리가 나는 기타 또한 록을 상징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3. 음악사적 영향
195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약 반세기 동안 대중음악을 지배한 장르이다. 50년대의 역사적인 첫걸음에 이어 60년대는 저항성과 개척정신, 70년대는 예술성과 세련미, 장르의 세분화가 중심이 됐으며, 그 후 80년대는 상업화, 90년대는 분해와 재조합을 겪었다. 2000년대 이전 팝 음악은 록 음악적인 색채를 지닌 음악을 지칭했을 정도로 긴 세월동안 대중음악계에서 록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1980년대 이후, 특히 2000년 이후 록 음악의 영향력은 많이 줄었다. 컴퓨터와 음악 소프트웨어의 발전 때문이다. 전통적인 악기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다양한 음을 쉽게 낼 수 있게 됨에 따라, 음악은 악기라는 물리적인 제한에서 벗어났다. 이에 따라 힙합이나 일렉트로닉 등 연속적인 멜로디가 아니라 끊어지는 비트 위주로 전개되는 음악이 크게 발전하였고, 악기의 한계로 인해 한정적이고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멜로디를 내던 록 음악의 영향력은 감소했다.
솔로 가수가 메인스트림이던 시대를 한동안 밴드 음악이 중심이 되게끔 주류로 바꾼 것도 록 음악이다.[1] 록 음악의 성공으로 생산의 중심 주체가 '가수' 등 솔로 뮤지션에서 록'밴드' 단위로 바뀌어서 록밴드가 대세가 되었고, 그 록밴드의 악기 구성이 일렉트릭 기타, 일렉트릭 베이스, 드럼으로 완전히 정형화되고 정착되었다. 여기에다 세컨드 기타나 키보드 등이 추가 되거나, 기타리스트가 리드싱어를 겸하거나 하는 식으로 밴드마다 약간의 가감이 있어서 대개 3~5인조의 멤버 구성이 대부분이다.[2] 이러한 구성은 대부분의 밴드가 그렇다는 것 뿐, 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 시대부터 수많은 하위 장르들이 우후죽순 등장하며, 단순히 악기 구성 만으로 록을 정의하긴 힘들어졌다. 다만 밴드 음악을 한다고 해서 록이 절대 아니다. 현재는 다시금 솔로 가수들의 영향력이 확장됨에 따라 밴드 음악이 일정 부분 쇠퇴하면서 약간 빛바랜 감이 있는 업적이라 할 수 있다.
4. 역사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Dani California 뮤직비디오. 록음악의 역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해낸 뮤비이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멤버들이 각 시대의 중요한 록뮤지션들과 흡사하게 변신하여 흉내내는 유머러스한 개인기(?)를 선보인다.[3][목록]
4.1. 탄생 배경
록 음악은 전신은 로큰롤 혹은 로커빌리라 불리는 장르였다. 로큰롤은 12마디 블루스를 (당시 기준으로) 격렬하고 퇴폐적인 댄스리듬으로 바꾸면서 탄생한 장르이다. 로큰롤은 1940, 50년대의 미국의 노동자 및 하층계급 백인 청년들이 자신들과 가까이 일하던 가난한 흑인들의 문화에 열광하고 뒤섞이면서 출현하였다.[4] 당연히 이러한 하층민들이 클래식이나 찬송가 특유의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할 이유가 없었고, 자연스럽게 로큰롤은 훨씬 더 자유롭고 표현을 직설적으로 띄는 성격을 띄게 된다.
이러한 배경으로 발전한 로큰롤이 원조이기 때문에, 그 후신인 록 음악의 발전사 역시 기존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성향과 기존 시스템을 따르는 상업적 성향이 반복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록 음악계의 사회비판과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새로운 방향 제시가 대중의 호응을 얻으며 대중음악(팝)으로 변화하고, 다시 이를 비판하면서 또 다른 장르가 출현하는 식이다.
그래서 록 음악의 역사에는 메인스트림의 위치를 차지한 장르와 이의 안테테제의 대립구도가 자주 언급된다.[5] 이 기준은 음악적 완성도에 중점을 둔 메인스트림 뮤직과, 새로운 시도와 메세지 전달에 중점을 둔 얼터너티브 뮤직의 대립으로 보는 관점에서 기인한다. 사실 이것은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록 음악의 특성과도 상당히 부합하는 관점이라 볼 수 있다.
4.2. 1940년대~1950년대: 미국 로큰롤(로커빌리)의 출현
록 음악의 기원은 1940년대 후반~1950년대이며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시체제가 풀리면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경직된 분위기에서 풀려난 수많은 청년층들이 기존의 중후한 스탠다드 팝, 재즈 장르의 이외의 더욱 신나고 경쾌한 음악을 추구하면서 자연스레 발생했다.
당시 미국에서 블루스, 컨트리, 부기우기와 같은 루츠 음악들을 기반으로 크로스오버하여 빠르고 경쾌하게 연주한 음악을 '로커빌리'라고 불렀는데 성인 층을 대상으로 한 당시 스탠더드 팝과는 달리 10-20대와 같은 젊은 수용층을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성장했다. 로커빌리란 장르는 50년대 초중반에 로큰롤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며 그 인기를 가속화시켰다. 초기 로큰롤에서는 피아노를 리드 악기로 썼지만 5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기타가 추가되거나 기타가 리드 악기로 쓰이는 형태를 띄게 되었으며 척 베리의 등장으로 로큰롤 기타 주법이 확립되었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던 '''로큰롤은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불세출의 스타의 등장으로 당시 대중음악계의 주류를 바꿔버리며 상업적인 정점'''을 찍는다.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로큰롤은 58~9년경부터 순식간에 몰락'''하게 되는데, 저질음악 취급하며 꾸준히 로큰롤을 탄압했던 기성 세대들의 불만과 로큰롤 뮤지션들의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생긴 결과였다. 제리 리 루이스는 미성년자 사촌과 결혼했다가 큰 지탄을 받아 몰락했고, 버디 홀리는 비행기 사고로 사망, 척 베리는 미성년자를 동반하고 무단으로 주(州) 경계선을 넘다가 체포되었으며 리틀 리처드는 괴팍한 행동을 하다가 갑자기 팝 가스펠로 넘어가고, 엘비스 프레슬리는 여론의 눈길을 피하고자 군 입대를 선택했다. 로큰롤의 몰락 이후, 미국에서는 로큰롤에서 파생되었지만 가사가 아예 없는, 사운드 기교 중심의 서프 음악이 60년대 초반에 활개를 쳤다.
4.3. 1959년~1960년대 초: 브리티시 인베이전
미국에서는 로큰롤이 기성세대의 탄압과 뮤지션들의 불운한 사고들,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의 고갈 등으로 몰락했지만, 상대적으로 미국보다 개방적이었던 영국에서는 뒤늦게 로큰롤의 열풍이 불며 여러 로큰롤 밴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비틀즈가 1959년 결성되어[6] 리버풀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그 후로 롤링 스톤즈(1962년 결성), 더 킹크스(1964년 결성), 더 후(1964년 결성)와 같은 전설적인 밴드들이 차례차례 결성되었다.
로큰롤이란건 50년대 후반에 생명을 다해버려 이미 죽은 장르라는 취급을 당하던 미국에 1963년부터 비틀즈의 록큰롤 음반들이 큰 성공을 거둔 것을 계기로 다시금 록큰롤의 인기가 부활하기 시작했다. 1964년 초 비틀즈의 미국 공연 때 비틀즈의 인기는 더욱 폭발했고, 이후 비틀즈의 뒤를 이어 여러 영국 밴드들이 미국에 진출하여 인기를 모았다. 이렇게 비틀즈를 필두로 한 영국 밴드들이 미국에 진출하여 큰 인기를 거두고 로큰롤 열풍을 다시 부활시켰던 현상을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부른다.
이런 영국의 브리티시 인베이전 밴드들에게 영향과 자극을 받아 미국에서도 다시 록음악이 부흥하게 되어 많은 록 뮤지션들이 새로 쏟아져 나왔고, 영국과 미국의 이런 다양한 록 뮤지션들에 의해 저변이 넓어지면서 록 음악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록 음악 열기가 영, 미 뿐 아니라 세계로 퍼지면서 전 세계적으로도 록 음악 열풍이 불어서 록 음악이 세계 대중문화의 중요한 분야로 자리잡게 된다
4.4. 1960년대: 록의 기반 수립
4.4.1. 록의 예술화, 포크 록
미국에 상륙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도취시킨 비틀즈의 영향은, 당시만 해도 로큰롤과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던 장르인 포크음악의 유망주였던 한 미국 청년에게도 크게 미쳤는데, 그가 바로 밥 딜런이었다.[7] The Freewheelin' Bob Dylan(1963)의 성공 이후 포크 장르의 일약 스타로 떠올랐지만, 포크 엘리티즘 특유의 폐쇄적이고 강압적인 포크 커뮤니티에 슬슬 질려가고 있던 데다가, 단조로운 포크 사운드만으로는 음악적 표현의 한계를 느껴서 뮤지션으로서의 회의감에 빠져있던 차에 비틀즈를 접하게 된 것이다.
밥 딜런은 비틀즈의 로큰롤이 지닌 에너지와 자유로운 환희에 본인의 10대 시절을 떠올리며 다시금 매료되었다. 이후 그는 전기 기타를 들어 포크 커뮤니티를 배신하고[8] , Bringing It All Back Home(1965), Highway 61 Revisited(1965), Blonde on Blonde(1966)[9] 세 장의 포크 록 앨범을 냄으로서 음악적 변화를 추구했다. 포크와 록 두 장르를 결합한 혁신적인 사운드와, 은유적이고 문학적인 그의 가사는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가사는 남녀 간의 사랑 위주였던 기존의 록 음악에서 탈피하고 사회 전반에 걸친 메시지와 철학적인 내용을 담아 록 음악이 예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밥 딜런이 비틀즈에게 먼저 영향을 받았지만, 그 후 비틀즈 역시 밥 딜런에게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밥 딜런의 깊이 있는 작사면에서 영향을 받아서, 사랑 문제를 벗어나 좀 더 문학적이고 은유적인 내용들을 가사에 담기 시작한다. 록 음악 역사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시점인 것이, '''가사적인 면에서 록 음악이 문학적이고 고차원적인 예술로 나아간 첫 발자국'''이었으며, 이렇게 애초엔 장르를 달리하던 두 뮤지션의 상호 화학작용에 의해 ''''포크 록'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고 만개하게 된 것'''이다.
4.4.2. 유기적이고 감상적인 구성의 사이키델릭 록
이런 가운데 1965년에 발매된 비틀즈의 6집 Rubber Soul은, 철저히 싱글 위주였던 그때까지의 대중음악계 관행을 깨고 최초로 싱글곡 컷팅 발표 없이 정규앨범만을 발표하여 파장을 몰고 왔다. 게다가 앨범 전체에 흐르는 유기적인 구조와 감성적인 통일성은 록음악도 앨범 자체가 하나의 감상 단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비틀즈의 혁신적인 시도에 영향과 자극을 받아 비치 보이스[10] , 롤링 스톤즈, 더 후, 버즈 등도 너나 할 것 없이 야심적인 명반 앨범 만들기에 주력하였고, 마치 백가쟁명같이 다양하고 풍요로운 명반 앨범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비틀즈가 이어서 발표한 Revolver 앨범도 사이키델릭 록의 태동과 제3세계 음악의 접목 등 중요한 혁신과 실험으로 또 한번 진일보한 성취를 이루어낸다.
Revolver 등을 통해 시작된 사이키델릭 록의 시대는 1967년에 만개했다.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그 선봉이었으며, 더 도어즈의 The Doors, 러브의 Forever Changes,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Are You Experienced?, 핑크 플로이드의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 등의 명반들이 쏟아졌다. 사이키델릭 록은 이후 하드 록과 프로그레시브 록을 비롯한 여러 록음악 장르의 탄생에 영향을 주고 흡수되면서 독자적인 장르로서의 사이키델릭 록은 사라졌지만, 그 '''음악적 요소들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실험적인 록음악의 DNA에 영원히 남아있다.'''[11]
4.5. 1970년대: 다양한 하위 장르로의 확장
음악 시장의 메인스트림을 장악한다. 영국에서는 하드 록, 프로그레시브 록, 글램 록이 유행했고, 미국에서는 하드 록과, 좀 더 팝 친화적인 록인 소프트 록, 그리고 블루스, 컨트리, 포크와 같은 로큰롤의 원류 음악을 받아들인 루츠 록이 활성화되었다.
70년대 미국의 록 음악은 영국보다 열세였으나 나름의 독자적인 음악들을 내놓았다. 미국에서도 에어로스미스를 비롯한 아메리칸 하드 록 밴드들이 나타나 인기를 끌었으며, 하드 록에 비해서 좀 더 팝 지향적인 소프트 록 역시 유행했다. 대표적으로 이글스, 플리트우드 맥[12] 이 있는데, 블루스 밴드에서 소프트 록 밴드로 전향한 플리트우드 맥의 1977년 앨범 Rumours이 1500만장을 판매하며 막대한 성공을 거두면서 소프트 록은 상업적인 정점을 찍었다. 또한 블루스, 컨트리, 포크와 같이 록 음악의 뿌리가 되는 음악들에 더욱 집중한 록 음악인 루츠 록 역시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 유행했다. 컨트리 록을 구사했던 더 밴드나, 올맨 브라더스 밴드, 레너드 스키너드와 같은 서던 록 주자들,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등이 루츠 록의 대표적인 밴드들이다.
4.5.1. 공격적인 사운드의 하드 록
하드 록은 블루스와 사이키델릭 록에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좀 더 야성적이고 공격적인 기타 사운드를 위주로한 음악을 추구했다. 60년대 하드 록 음악의 선구자격 밴드인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크림, 더 후와 같은 밴드들의 등장으로 파워풀한 전기 기타 연주 및 드럼 연주 기법 등에 혁신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런 성과물을 바탕으로 뒤이어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딥 퍼플 같은 밴드들이 60년대 후반 - 70년대 초 등장해 명반을 발표하고 큰 인기를 누리며 영국 하드 록의 시대를 이끌었다. 하드 록은 후일 80년대에 들어서 헤비메탈 음악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 전 시대인 6, 70년대의 하드록(혹은 초기 헤비메탈)은 훗날의 헤비메탈과 달리 블루스 친화적인 그루비한 사운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호주에서 또한 하드록 밴드인 AC/DC가 출현하였다.
4.5.2. 전위적인 분위기를 담은 프로그레시브 록
프로그레시브 록은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발히 진행된 록의 한 주류이다. 스튜디오 음향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다양한 실험적인 록 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프로그레시브 록은 그러한 실험 음악의 한 부류이다.
프로그레시브 록은 5분을 훌쩍 넘어가는 대곡지향성, 클래식과 재즈의 요소 도입, 변박과 엇박을 넘나드는 치밀한 곡 구성, 각종 실험적인 음향기법 도입 등의 특징을 가진다. 핑크 플로이드, 킹 크림슨, 예스, 제네시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등의 밴드들이 이러한 프로그레시브 록을 추구하며 영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핑크 플로이드 경우에는 The Dark Side of the Moon(1973)이 미국 시장에서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741주 동안 빌보드 200 차트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앞서 말했듯이 프로그레시브 록의 경우에는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유행했으며, 독일의 프로그레시브 록의 흐름은 영미 중심의 록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독일의 프로그레시브 록은 일명 '크라우트록(Krautrock)'[13] 이라고 부르는데,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영향을 받아 전자음악적 요소를 도입한 것이 특징이었다. 크라프트베르크, 캔, 탠저린 드림, 노이! 등을 위시한 크라우트록의 흐름은 일렉트로닉 뮤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4.5.3. 퇴폐적이고 중성적인 글램 록
글램 록은 양성적인 패션과 퇴폐적인 분위기로 화려함과 섹시함을 강조한 시각적인 요소가 가미된 락의 조류이다. 티렉스의 Electric Warrior(1971)가 성공을 거두면서 글램 록이라는 장르화[14] 및 유행이 시작되었고, 데이비드 보위의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1972)의 대성공으로 당당한 락의 조류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시각적 요소를 강조한 글램 록은 록 공연이 하나의 퍼포먼스로 도약할 수 있게 함으로서, 이후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여는데 효시가 되었다.
4.5.4. 주류에 대한 반항을 담은 펑크 록과 개러지 록
70년대 전반의 록의 지형은 특히나 하드 록과 프로그레시브 록을 중심으로 소비되었는데, 70년대 중반에 들어서 펑크 록이 등장함에 따라 록 음악은 (특히나 영국에서) 급격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펑크 록의 부흥은 당시 영국의 경제적·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일명 영국병으로 인해 영국 경제가 파국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주류 사회에 반항하는 젊은 이들에 의해 펑크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당시의 하드 록과 프로그레시브 록 등 연주가 너무 복잡하고 테크니컬한데다가 현실과 동떨어진 지적 허세를 뽐내는 듯한 가사 투성이인 주류 록 음악과 기업화되어버린 거대 록밴드들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그 대신 '''사운드 면에선 더 원초적이고 단순한 로큰롤 음악을, 가사 면에선 뜬구름같은 추상적인 내용보다는 거리의 생생한 현실 얘기를 다룬 쉬운 가사를 추구'''하였다. 당시의 주류 음악에 대안으로서 등장한 이런 원초적인 로큰롤 음악들을 '''펑크 록'''이라 부른다. 주류 사회에 대한 반항적인 목소리를 담고 있던 영국의 펑크 록은 당시 영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펑크 록이 DIY 정신을 내세움에따라 수많은 펑크 록 밴드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1977년에는 섹스 피스톨즈의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와 더 클래시의 The Clash의 발매와 함께 펑크 록의 인기는 정점을 찍는다.
70년대 영국 펑크 문화의 일부라는 좁은 의미에서의 펑크 록이 아니라, 그 근원이 되는 원초적이고 미니멀한 록이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펑크 록은 그 사운드적 기원이 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들의 음악은 펑크 록 이전의 펑크 록이란 뜻에서 '프로토-펑크'라고 불린다.[15] 이 '프로토 펑크'로 분류되는 음악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 제일 먼저 등장한게 '개러지 록'이다. 1964년경 브리티시 인베이전에 영향을 받은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친구들과 밴드를 구성했는데, 주로 집 차고(garage)에서 연습했기 때문에 '개러지 록'(Garage Rock)이라고 불렸다. 이들 개러지 록 밴드들의 음악은 기술적으로 다듬어지거나 세련되지 못한 아마추어적인 음악이라서 조악하고 거친 사운드를 들려줬는데, 이런 투박한 면이 오히려 신선한 매력으로 작용했고 이후 다른 프로토 펑크 뮤지션들 및 더 후대의 본격적인 펑크 록 뮤지션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프로토 펑크를 논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존재가 바로 뉴욕의 벨벳 언더그라운드다. 당시에 전위 예술이 한창 유행하던 뉴욕에서 이에 영향을 받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데뷰 앨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가 1967년에 발매되었다. 동부 뉴욕의 고독하고 지적이면서도 퇴폐적인 아웃사이더 문화에 영향을 받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은 미니멀하고 거친 로파이 사운드를 담고 있었고, 이는 당시 미국의 웨스트코스트 지역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던 화려하면서 초현실적인 느낌의 록 음악과는 색깔과 정서가 매우 다른 음악이었다.
한편 미시건 주에서도 프로토 펑크로 분류할 수 있는 밴드인 MC5, 그리고 이기 팝의 밴드 스투지스가 활약했는데, 특히 '''스투지스는 이후 펑크록의 탄생에 직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친 중요한 걸작인 Fun House(1970), Raw Power(1972) 등을 발표'''했다. 1970년 메사추세츠 주에서 결성된 더 모던 러버스는, 극히 단순한 코드로 이루어진 이들의 셀프 타이틀 앨범 The Modern Lovers(1973)를 발매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상에서 언급한 각종 개러지 록 밴드들, 그리고 벨벳 언더그라운드, MC5, 스투지스, 모던 러버스, 뉴욕 돌스 등의 밴드들은 이후 본격적인 펑크 록이 등장하기에 앞서서 그 청사진을 보여줬다는 의미에서 '프로토 펑크 록'이라고 불린다. 참고로 '프로토' 펑크록이 아닌, '본격적인' 펑크록의 시초는 라몬즈부터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렇게 산발적인 개러지록 등 프로토-펑크 음악들의 영향을 받아, 뉴욕을 중심으로 70년대 중반부터 펑크 록이라는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었으며, 이들의 음악은 영국 펑크록 밴드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라몬즈 등을 통해 후일 영국 펑크로도 이어진다. 뉴욕 펑크를 논할때는 CBGB라는 장소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뉴욕 빈민가인 보웨리에 세워진 CBGB는 원래 다양한 음악을 하는 밴드들을 무대에 올리는 작은 클럽이었다. 그런데, 이 장소를 거쳐간 밴드들, 패티 스미스 그룹, 라몬즈, 토킹 헤즈, 블론디, 텔레비전, CBGB를 거쳐한 이 다섯 밴드들이 펑크 록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패티 스미스와 텔레비전의 경우 아트 펑크(Art Punk)를 추구하며 80년대 포스트 펑크로 이어지는 예술적 흐름을 선취했으며, 라몬즈의 경우 3코드 연주와 다운스트로크만을 이용한 단순한 연주법으로 영국 펑크 밴드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토킹 헤즈와 블론디의 경우에도 후술한 펑크 록 이후의 음악인 뉴 웨이브와 포스트 펑크의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예술성을 추구했던 뉴욕 펑크의 흐름은 미국 내에서는 오일 쇼크로 침체된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성공하지 못했으나, 영국으로 그 음악적 영향력이 전파되어 앞서 설명한 섹스 피스톨즈와 더 클래시를 비롯한 영국 펑크 록의 부흥으로 이어지게 된다.
4.6.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새로운 장르들로 서서히 대체되다
4.6.1. 펑크 록에서 펑크 음악으로
개러지록과 프로토 펑크, 예술성을 추구한 뉴욕 펑크의 흐름을 거쳐, 영국에 당도하게 된 펑크 록은 1977년 정점을 맞이하게 된 이후 급속도로 몰락하게 되는데, 펑크 문화와 결합되어 반문화를 추구했던 이들의 움직임이 주류 미디어의 간택을 받아 주류 문화로 올라오게 되면서 그 정체성이 분열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7년 이후로 펑크 록은 여러 갈래로 분화됨에 따라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고, DIY 에토스를 내세운 펑크 문화도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대안 음악으로서의 원초적인 펑크 록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해 뉴 웨이브와 포스트 펑크, 하드코어 펑크라는 새로운 장르로 발전해서 그 명맥을 이어갔다. 펑크 록의 등장 이후 음악적 성질이 그 대척점에 있던 프로그레시브 록은 완전히 몰락했으며, DIY 에토스의 펑크 록 운동은 80년대부터 나타나는 인디 록의 시발점이 되었다.
뉴 웨이브는 1978년부터 유행하여 1980년 초까지 크게 유행했던, 펑크 록의 후속 장르로, 신시사이저를 적극 차용하는 등 일렉트로닉적 요소를 도입하고, 당대에 유행하던 디스코와 같은 말랑말랑한 팝 사운드와 펑크 록을 결합한 음악이다. 미국에서는 블론디, 더 폴리스 등이 있었고, 영국에서는 엘비스 코스텔로 등이 있었다. 신디사이저의 적극적 차용은 영국에서는 80년대부터 신스팝, 뉴 로맨틱으로 이어져 80년대 영국 팝 시장을 장악하게 된다.
포스트 펑크는 펑크 록을 바탕으로 등장한 실험적인 음악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펑크 록의 혁명적인 등장과 더불어서, 이러한 음악에 자신들만의 독창성과 실험성을 가미한 밴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기적으로는 펑크 록과 거의 동시에 등장했으며, 1977년부터 1980년까지 그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와이어는 Pink Flag(1977)에서 곡 길이가 3분을 넘지 않는 최소한의 구조의 미니멀한 음악을 보여주었고, 갱 오브 포는 Entertaiment!(1978)에서 록에 훵크 리듬을 도입하여 베이스의 역할을 강조했다. 뉴욕 펑크의 일원이었던 토킹 헤즈는 4집 Remain in Light에서 아프로비트를 도입했고, 런던 펑크의 일원이었던 더 클래시는 London Calling에서 레게, 덥 리듬을 도입했다. 조이 디비전은 Unknown Pleasures(1979)와 Closer(1980)에서 음울한 음악 세계를 표현했다. 이와 같이 각자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음악을 했던 이들이지만, 펑크 록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는 점이 공통 분모로서 포스트 펑크로 한데 묶인다. 복잡한 곡 구조를 지닌 프로그레시브 록과는 달리 구조적 단순성을 유지하되 그 표현 방식을 다양화 했다는 점에서 실험성이 구분된다. 포스트 펑크는 당대에는 팝 지향적인 뉴 웨이브에 비해서 상업적으로 큰 인기를 끌지 못했으나, 그 영향력은 8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 후술할 얼터너티브 록 음악의 직접적인 선조가 되었다.
하드코어 펑크는 80년대 초 미국에서 등장한 펑크 록의 하위 장르로, 더욱더 과격하고 빠르며 단순한 펑크 록을 추구했다. 하드코어 펑크의 대표 주자는 블랙 플래그로, 블랙 플래그의 리더 그레그 진은 그들의 1집 Damaged가 앨범이 레코드 사로부터 퇴짜를 맞자 직접 SST 레코드라는 레이블을 설립해 그의 앨범을 발매하고, SST 레코드에서 여러 하드코어 펑크 밴드들을 키워냈다. 이러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지닌 블랙 플래그의 Damaged가 하드코어 펑크 신의 대표작으로 뽑히며, 워낙 과격하고 단순한 음악을 했기에 비평적으로 좋은 소리를 듣진 못했다. 허나 하드코어 펑크에서 출발하여 그 음악색이 변화한 일부 하드코어 펑크 밴드들이 초기 얼터너티브 록의 걸작을 내놓았으며, 하드코어 펑크에 영향을 받아 탄생할 포스트 하드코어 음악 역시 얼터너티브 록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후술할 얼터너티브 록의 선대 장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4.6.2. 하드 록에서 헤비메탈로
펑크 록과 뉴 웨이브의 열풍으로 록의 정체성은 더 다각화되었으며 본래 록 음악이 가지고 있던 음악적 단일성은 다소 희석되었다. 비록 그 기원은 흑인 음악에서 시작된 록이었지만 어느새 백인 메인스트림 음악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록 음악의 안티태제로 흑인 언더그라운드 음악인 R&B, 즉 펑크(Funk), 소울, 디스코 등이 출현했으며 70년대에 주류 문화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특히나 흑인 및 게이 클럽 문화에서 출발한 디스코의 유행은 선풍적이었고, 이에 많은 록 팬들은 록 음악, 특히나 하드 락을 필두로 한 '백인스럽고 남성적인' 록 음악의 위치는 흔들리고 있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백인 남성 록 팬들의 불안감은 시카고 화이트삭스 홈구장인 코미스키 파크에서 관객들이 디스코 음반들을 깨부수고 불태운 디스코 폭파의 밤(1979)이라는 일련의 사건으로 분출된다. 이는 단순히 음악사를 넘어 흑인, 라티노, 여성, 성소수자들의 문화에 위협받는다고 느낀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이 느낀 위기감과 피해의식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평가되며, 디스코 밴드 시크(Chic)의 기타리스트 나일 로저스는 "나치의 서적 소각 같은 짓", 음악 평론가 데이브 마쉬는 "록 음악이 인종청소 당할 것이라는 편집증적인 판타지"라고 비판했다.
그래서일까, 80년대에 들어서서는 메인스트림 록 시장은 하드 록으로부터 파생된 헤비메탈에 의해 점령된다. 헤비 메탈 음악은 그 기원은 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특히 블랙 사바스가 지금의 정형화된 메탈 음악의 원형을 최초로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70년대를 거치며 발전하던 하드 록/초기 헤비메탈은 펑크 록의 등장 이후 이들의 공격성과 속도감을 결합한 NWOBHM[16] 운동으로 발전하여 모터헤드, 쥬다스 프리스트, 아이언 메이든과 같은 영국 밴드들이 인기를 끌었고, 80년대 초중반에 들어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드코어 펑크의 영향을 받아 기존 헤비메탈 음악보다 더욱더 공격성과 속도감이 강화된 익스트림 메탈이 나타났다. 특히나 메탈리카를 비롯한 쓰래시 메탈 밴드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8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는 무게감 있는 메탈의 기타 드라이브와 대중적인 멜로디가 결합된 글램 메탈 밴드들이 크게 인기를 끌면서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4.6.3. 팝의 부상과 흔들리는 록의 위치
70~80년대를 관통하는 밴드로는 퀸이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 Another One Bites the Dust, Don't Stop Me Now 등 수없이 많은 히트곡과 프레디 머큐리의 빼어난 가창 능력은 록의 역사에 있어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분기점임이 틀림이 없다. 다만 다양한 장르를 받아들이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기에 이들을 록의 음악적 흐름에 끼워넣기에는 다소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80년대의 대중음악사에서 록은 헤비메탈 계열의 록이 큰 인기를 얻으며 매너리즘의 길로 빠져들었다. 과거 재즈와 스탠다드 팝의 시대를 뚫고 서프 음악을 제치며 비틀즈,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 등 거대한 흐름을 제시한 뮤지션과 함께 날아올랐지만 점점 혁신에 비하여 더 빠르고 강한 연주만을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록밴드들 속에서 '''1980년대 대중음악계는 새로운 흐름을 맞이하였으니 그건 마이클 잭슨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등장과 함께 여러 장르가 혼합된 "팝 음악"이 등장하며 다양한 팝스타들이 출현했고 이러한 흐름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며 새로운 시대를 개척했다. '''이후 마이클 잭슨은 홀로 거대한 록밴드들 이상의 수입을 거두며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과거 비틀즈가 록 밴드 음악의 선구자이자 당시 대중음악계의 정점이 되어 포크 록, 파워팝, 사이키델릭 록 등 세부 장르들의 기반을 마련하고 이를 대중적으로도 크게 성공시켰다면, '''마이클 잭슨은 대중문화의 흑백 장벽을 무너뜨린 선구자적 역할을 시작으로 여러 다양한 시도를 통해 대중음악계 정점에 오르며 새로운 팝의 시대를 열었다.''' 비록 흑인 음악에서 비롯된 록 음악이지만 백인 음악가들이 장악하여 '백인 음악'으로 인식되던 록 음악에 반해 흑인 음악으로는 R&B와 소울, 펑크 등이 출현했다. 이에 마이클 잭슨은 다양한 음악 장르들을 모조리 섞어 세련된 음색을 창조해냈고, 그 영향력을 바탕으로 사회적인 목소리, 즉 평화와 화합과 더불어 사회 비판을 노래해 미국의 백인과 흑인들은 물론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더 디테일하게 짚자면 그의 음악적 텃밭인 모타운에서 갈고 닦은 R&B와 소울, 펑크를 통한 대중친화적인 흑인 음악들과 각종 퍼포먼스 및 고난이도의 댄스, 1980년대 들어서 널리 퍼지게 된 신디사이저를 비롯한 신문물의 사운드, 새롭게 태동하던 힙합 음악의 요소들의 차용, 심지어 록의 요소마저도 모두 흡수하며 대중음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당시 신세대들은 당연히 기존에 들어왔던 록보다 더 세련되고 새로운 그의 신세대 음악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연출 기법을 발전시켜서 한 편의 짧은 극을 보는 정도로 발전된 뮤직 비디오와 각종 무대 장치를 동원하여 듣는 것 뿐만 아니라 "보는 즐거움"이 중요시 된 것도 마이클 잭슨의 등장 이후부터였다. 나아가 과거 비틀즈의 성공에 뒤이어 수많은 록밴드들이 등장하였듯이 마이클 잭슨의 성공 이후 마돈나, 프린스, 엘튼 존, 조지 마이클과 같은 팝스타들이 당대 음악 차트를 쓸어가버리니 결국 1980년대, 기성세대들의 록밴드들은 본인들을 완벽히 대체한 팝의 뮤지션들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음악 시장의 정점을 꾸준히 차지해 왔던 록 음악이 조금씩 하락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본 조비, 건스 앤 로지스, 저니, 서바이버 등의 밴드들이 80년대에 활동하여 유명한 대표곡들을 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주류 음악계를 바꾸는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한편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탈냉전 시대에는 소련이나 동독 등 공산권에도 록 음악이 유행하였으며 이러한 음악이 서구권으로 역수입되기도 하였다. 차갑고 냉소적인 가사로 소련 말기의 사회 불안정을 비판한 빅토르 최는 그러한 흐름의 첨병이었다.
4.7. 1990년대: 대안을 찾아 나서다
4.7.1. 새로운 대안의 등장, 얼터너티브 록
잉베이 말름스틴의 등장 이후 헤비메탈씬에서는 클래식의 작법이 거의 완전하게 메인스트림에도 녹아들고, 그 영향을 받은 하위 장르들인 파워 메탈, 프로그레시브 록등 스케일이 다른 록 사운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등장한 고민이 '''갈수록 진입 장벽이 높아지는 록 음악에 대한 문제였다.''' 더이상 1960~70년대 개러지 록 시대처럼 음악에 대한 열정만 가지고 사람들이 모여서 밴드를 만들고 음악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고, 점점 고도의 테크닉과 정확도, 조화에 신경쓰다보니 마치 현대의 클래식 음악처럼 점점 '록 음악은 하는게 아니라 듣는 것이다'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면 아주 수준높은 실력의 밴드만이 클래식 오케스트라단처럼 살아남고 나머지는 그나마 언더그라운드에서 진입장벽 낮은 펑크같은 장르만 살아남는 정도의 극단적인 분열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얼터너티브는 바로 그런 록 씬의 불안을 대체하고자 일어난 움직임이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메인스트림에서의 헤비메탈은 1991년 너바나의 앨범인 Nevermind의 흥행으로 인해 몰락하게 되고, '''너바나를 필두로 한 얼터너티브 록'''이 급부상한다. 얼터너티브(Alternative)는 '대안'이라는 뜻의 영단어로 당시 매너리즘에 빠져 그 인기를 잃어가던 헤비메탈 음악의 대안적 음악이라는 뜻에서 명명되었다. 얼터너티브라는 명칭은 90년대에 새로운 음악의 등장과 함께 고안되었으나, 얼터너티브 록의 음악적 기원은 8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얼터너티브의 부흥 이후 많은 밴드들이 얼터너티브의 선조로 재평가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초기 얼터너티브 록은 70년대 후반 등장한 포스트 펑크가 80년대에 들어서서 점차 발전한 형태로, 80년대 초 후기 포스트 펑크/초기 얼터너티브 록 음악들은 그 장르적 특성이 혼재되어 있어 많은 80년대 밴드들이 포스트 펑크 밴드이자 얼터너티브 록으로 동시에 분류된다. 80년대 메인스트림 시장을 헤비메탈이 점령한 기간 동안, 많은 포스트 펑크/초기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은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며 로컬 씬에서 입지를 다졌다. 이러한 초기 얼터너티브 음악은 대학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많이 퍼져나갔기 때문에 칼리지 록이라 부르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80년대 초, R.E.M.이 등장하여 인기를 끌면서 많은 얼터너티브/인디 록 밴드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하드코어 펑크 밴드 출발한 허스커 듀, 미니트맨, 리플레이스먼츠는 하드코어 펑크에 멜로딕한 요소가 가미된 음악을 하여 얼터너티브의 초기 주자로 탈바꿈해 유명해졌다. 영국에서는 80년대 초 쟁글 팝 계열의 음악을 들려준 더 스미스가 큰 인기를 끌었고, 80년대 후반에 더 큐어의 고딕 록과 스톤 로지스의 매드체스터 장르가 인기를 끌었다. 또한 아일랜드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U2는 The Joshua Tree(1987)가 그래미 상을 석권하면서 세계적인 얼터너티브 록 주자로 떠올랐다.
특히나 초기 얼터너티브 록에서 두드러지는 흐름 중 하나는 바로 노이즈에 대한 탐구로, 80년대 초중반부터 시끄러운 기타 노이즈를 음악적 요소로 가미한 밴드들이 등장했다. 영국의 지저스 앤 메리 체인은 Psychocandy(1985)에서 달콤한 멜로디와 노이즈 피드백을 결합한 음악을 들려주었고, 노이즈 낀 전위 음악을 구사하던 소닉 유스는 Daydream Nation(1988)에서 변칙적인 기타 튜닝과 기타 노이즈를 팝 멜로디에 성공적으로 결합시킴으로서 노이즈 음악을 팝, 록의 일부로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픽시스는 노이즈 낀 기타 사운드와 광적인 보컬을 아름다운 팝 멜로디에 결합시킨 역작 Doolittle(1989)를 발매했다. 이러한 노이즈 팝/록의 시도는 영국에서는 슈게이징 장르의 발전으로, 미국에서는 그런지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미국의 하드코어 펑크 신은 이러한 노이즈 록의 흐름을 받아들여 포스트 하드코어로 발전했으며, 빅 블랙, 푸가지와 같은 포스트 하드코어 밴드들 역시 얼터너티브 음악에 영향을 끼쳤다.
80년대 메인스트림 헤비메탈의 움직임과는 별개로 언더그라운드/인디를 중심으로 찬찬히 진행되어서 오던 얼터너티브의 움직임은 결국에 너바나의 등장과 함께 폭발하게 된 것이다.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 역시 R.E.M., 픽시즈, 소닉 유스와 같은 밴드들의 영향력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90년대에 들어서서 얼터너티브 록은 수많은 하위 장르를 낳으며 발전해 나갔다. 주된 흐름으로는 90년대 초 미국의 그런지 열풍, 1993~97년 간의 브릿팝 열풍, 그리고 1997년 등장하여 2000년대로 이어지는 포스트 브릿팝 정도를 꼽아볼 수 있으며, 이 외에도 슈게이징, 인더스트리얼 록, 팝 펑크와 같은 다양한 장르의 밴드들이 등장했다.
그런지는 너바나가 소속되어 있던 장르로 얼터너터브 부흥과 함께 떠오른 장르라고 봐도 무방하며, 90년대 초의 미국 록 신을 지배했던 장르이다. 시애틀의 로컬 록 신에서 발전한 음악으로, 너바나, 펄 잼, 앨리스 인 체인스, 사운드가든 네 밴드가 대표적인 밴드로 손꼽힌다. 이들의 음악색은 펑크, 하드 록, 메탈 등 다양했으나 디스토션과 노이즈가 잔뜩 걸린 기타와 90년대를 관통하는 젊은이들의 '루저' 정서를 대변한 우울한 가사가 장르적 특징으로 삼았다. 그런지 열풍이 지나간 뒤에는 이에 영향을 받은 포스트 그런지가 다시금 유행을 이어나갔다.
4.7.2. 밝고 경쾌한 브릿 팝
90년대 초 미국의 그런지 열풍이 한 차례 지나간뒤, 90년대 중반 영국에서는 브릿팝이라는 음악이 유행했다. 이 음악은 60~70년대의 비틀즈와 킹크스를 비롯한 기타팝, 파워팝 음악을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가까이는 80년대 영국 인디 밴드인 더 스미스와 스톤 로지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장르적 특징으로는 기타와 멜로디 중심의 편곡과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꼽을 수 있다. 오아시스, 블러, 펄프, 스웨이드 네 밴드가 브릿팝의 대표 주자로 뽑힌다. 브릿팝은 90년대 초 유행하던 미국의 록 음악의 대항마로서 영국 매스미디어의 의해 발굴되어 큰 푸쉬를 받았으며, 브릿팝 전쟁과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낳았다.
밝고 경쾌한 브릿팝 음악은 약 3-4년간의 짧은 기간동안 전성기를 맞이한 뒤 급격히 추진력을 상실해 갔다. 결국 1997년 브릿팝과는 대비되는 우울한 분위기의 두 걸작, 더 버브의 Urban Hymns와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의 등장으로 브릿팝의 시대는 끝나게 되며, 이들의 우울한 분위기를 계승한 새로운 기타 팝 앨범들이 나오게 되는데 이들을 한데 묶어서 포스트 브릿팝이라는 말을 쓴다. 콜드플레이, 뮤즈, 트래비스를 비롯한 초기 포스트 브릿팝 밴드들은 더 버브와 라디오헤드의 영향을 받아 이들과 유사한 음악을 들려주었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어 자기만의 음악색을 찾아가면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다. 90년대 록 음악의 게임 체인저가 된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는 현재는 록 음악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명반으로 손꼽힌다.
4.7.3. 다양한 실험적 장르들의 등장과 실패
슈게이징 음악은 8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는 노이즈에 대한 탐구에서 큰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장르로, 층층히 쌓아올린 기타 노이즈에 서정적인 보컬 멜로디라는 이질적 요소를 결합한 장르이다. 시끄러운 기타 노이즈와 대비되는 몽환적인 분위기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크리에이션 레코드 소속의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슬로우다이브, 라이드 세 밴드가 슈게이징의 대표 주자이며,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Loveless(1991)가 슈게이징 장르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Loveless는 장르의 대표작을 넘어서서 90년대 록 음악을 대표하는 명반 중 하나로 일컬어진다. 슈게이징은 90년대 초 등장해 전성기를 맞이한 뒤 이후로는 침잠했으나, 2010년대 들어서 앞서 언급한 세 밴드가 다시 새로운 앨범을 발매함에 따라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인더스트리얼 록은 80년대에 등장한 실험적 장르인 인더스트리얼에 영향을 받아 기계음과 메탈의 헤비한 기타 사운드를 결합한 음악으로, 나인 인치 네일스의 성공으로 메이저 장르로 등극했다. 이후 나인 인치 네일스의 트렌트 레즈너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밴드 마릴린 맨슨이 인기를 끌었다. 대표작으론 나인 인치 네일스의 The Downward Spiral(1994)이 있다.
팝 펑크는 대중적인 멜로디를 강조하며 재등장한 펑크 록의 한 갈래로, 하드코어 펑크 씬을 통해 펑크 록의 전통을 유지하던 미국에서 출발하였다. 사회 비판과 저항이 중심으로 하던 기존의 공격적인 펑크 록과 하드코어 펑크와는 달리 90년대를 관통하는 '루저' 정서를 바탕으로 개인적인 정서를 대중적인 멜로디와 코드 진행을 통해 표현한 펑크 록이다. 그린 데이가 이러한 팝 펑크의 시도를 통해 펑크 록을 다시금 메인스트림으로 돌려놓았으며, 이후 sum41, blink-182와 같은 후발주자들이 뒤따랐다. 당시 폐쇄적인 하드코어 펑크 신에서는 이들을 배신자라며 비난했으나, 그러한 비난과는 별개로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면서 펑크 록의 대표주자들로 떠올랐다.
또한, 얼터너티브 록의 시대를 맞이하여 다양한 장르의 록 음악이 쏟아져 나오자, 이러한 음악들을 경계없이 뒤섞은 크로스오버 음악들도 여럿 등장했다. 90년대 초 그런지 음악의 유행과 함께 인기를 끈 밴드 스매싱 펌킨스는 드림 팝, 프로그레시브 록, 사이키델릭, 고딕 록 등을 여러 록 음악의 요소들을 결합한 음악을 들려주었으며, 벡은 록의 경계를 넘어서서 힙합과 컨트리와 같은 음악까지 뒤섞은 음악으로 주목을 받았다.
90년대에 유행했지만, 메인스트림의 얼터너티브 록 조류와는 이질적인 흐름으로 포스트 록 장르의 등장이 있었다.[17] 포스트 록은 앰비언트, 프리 재즈, 크라우트록, 최소주의 클래식 음악과 같이 인스트루멘탈의 역할이 강조된 실험적인 음악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탄생한 록의 흐름으로, 영국 밴드 톡 톡의 Laughing Stock(1991)과 미국 밴드 슬린트의 Spiderland(1991)가 발매된 1991년이 포스트 록의 시작점으로 거론된다. 포스트 록은 멜로디 중심의 기존 록 음악과는 달리 악기의 소리와 질감 그 자체를 강조하는 음악을 추구했다. 때문에 보컬은 중요시되지 않으며, 곡의 길이는 길지만 반복적인 모티브를 중점으로 이루어진 최소주의적 음악들이 많다. 91년의 등장 이후 미국에서는 토터즈의 쓰릴 쟈키 레이블을 중심 하나의 장르로 발전해 이어져왔고, 영국에서는 슈게이징 장르와 결합하여 성장했다.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에는 시규어 로스와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가 Ágætis byrjun(1999)과 Lift Your Skinny Fists Like Antennas to Heaven(2000)의 발매로 장르 내에서 주목을 받았다.
4.7.4. 힙합 문화, 랩 음악과의 융합 시도 등장
80년대 후반부터 메인스트림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힙합 음악은 등장 초기부터 이러한 얼터너티브 록 음악들과의 결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Run-D.M.C., 비스티 보이즈와 같은 초기 힙합 주자들은 록 음악을 샘플링하며 얼터너티브 힙합을 구사했으며, 90년대 초에는 헤비메탈 음악과 힙합의 랩을 결합한 뉴 메탈, 랩 메탈 음악들이 등장했다.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림프 비즈킷, 콘과 같은 밴드들이 이러한 랩 메탈을 시도하여 인기를 끌었다.
4.8. 2000년대 이후: 쇠퇴기
2000년대에 들어서서 여전히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이 인기를 끌었으며, 새로운 흐름으로 개러지 록 리바이벌이 등장했다. 개러지 록 리바이벌, 혹은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이라 불리는 이 흐름은 좀 더 기타 중심의 기본적인 록 음악을 구사하는 밴드들로, 60-70년대 개러지 록/뉴 웨이브/포스트 펑크와 같은 고전적인 음악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음악을 보여주었다. 2001년 스트록스의 Is This It과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White Blood Cells의 성공으로 메이저로 떠올랐으며, 더 킬러스, 인터폴, 프란츠 퍼디난드, 리버틴즈, 악틱 몽키스, 더 블랙 키스와 같은 후발 주자들이 뒤따랐다. 개러지 록 리바이벌은 2000년대 중반이 되어서 대부분의 밴드들이 상업적으로 실패하며 리바이벌 열풍은 사그라들었다.
2000년대에 중요한 음악적 특징은 록 음악이 인디와 메이저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록 음악의 인디를 중심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인디 록의 흐름의 대표적인 밴드로는 Funeral(2004)로 명성을 얻은 아케이드 파이어가 있으며, 이를 비롯한 많은 인디 밴드들이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인터넷을 통해서 소비되었다. 또한 2000년대에는 디지털 기기의 발전으로 일렉트로니카 음악이 발전하면서 이를 록의 결합하려는 시도 역시 자주 일어났다. 라디오헤드의 Kid A(2000)는 이러한 시도의 시발점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LCD 사운드시스템이나 The XX와 같이 록 음악 인스트루멘탈과 일렉트로니카를 결합한 음악들을 시도하는 밴드들이 나타났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지금에 이르기까지, 록 음악은 개러지 록 리바이벌을 끝으로 이렇다 할 조류를 형성하지 못하며 팝 음악의 메인스트림의 바깥으로 밀려나간 상태이다. 많은 인디 록 밴드들이 여전히 새로운 앨범을 내놓으며 명맥을 이어나가곤 있으나, 새로운 흐름으로는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2010년대 들어 Imagine Dragons나 Fall Out Boy, Coldplay, Maroon 5 등의 아티스트들이 시도하는 일렉트로닉 락으로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도 아직 미미한 편이다. 당장 빌보드 차트만 봐도 힙합, R&B가 압도적인 대세이며 락 장르의 음악은 찾기가 어려운 편.
때문에 2010년대 이후 2020년대에 들어서는 음악사학자, 평론가, 록 매니아들을 필두로 '''"록 음악은 이젠 생명이 다해서 거의 죽은 상태에 도달했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클래식 음악이나 재즈 음악도 계속 끝없이 발전한게 아니라 전성기 때 폭발적으로 발전했다가 나올만한게 다 나와서 수명이 다 한 뒤로는 계속 정체되듯, 록 음악도 마찬가지라는 견해다. 많은 이들은 그간 록 음악이 너무 빠르게 발전해서 이젠 거의 모든 방법론이 이미 다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전 세계가 인정하는 독보적인 음악적 성취와 대중적 인기를 누린 아이콘을 시대별로 간단히 추려보면'''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마이클 잭슨이 각각 1940~80년대까지 당대의 대체불가의 인기를 누리며 시대를 관통하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는데, 그중에서 '''볼드체''' 처리한 두 팀이 록 뮤지션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당대 최고의 인기와 평가를 받은 뮤지션 중 상당수가 록 장르에서 활동했을 정도로 생명력이 넘쳤고 대중의 주목도 역시 높았다.
그러나 너바나로 대표되던 1990년대의 록 음악 얼터너티브 운동도 시대의 주류 변화를 완전히 뒤바꾸진 못했으며, 이미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록 음악보다 힙합과 알앤비가 각종 차트와 판매량 면에서 음악시장을 지배했고, 심지어 2000년 후에 탄생한 밴드 중 시대를 대표하는 원톱 아이콘으로 뽑을 만한 밴드 자체가 없다.
록 음악과 블랙 뮤직 계통의 헤게모니 대립이 팽팽하던 1990년대는 과도기로 치부하더라도, '''명백히 2000년대와 2010년대는 에미넴과 칸예 웨스트, 비욘세와 리한나, 그리고 드레이크등으로 대표되는, 분명히 힙합과 알앤비, 더 나아가 소울의 시대'''이며 이 시기의 대중음악과 뮤지션들은 '''백인 록 음악가의 영향보다는 마이클 잭슨, 자넷 잭슨, 머라이어 캐리, 투팍과 그 이전 레이 찰스, 아레사 프랭클린, 제임스 브라운, 스티비 원더 등의 흑인 음악가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그리고 이는 2020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며 오히려 세부 장르들이 끝없이 탄생하고 진화하면서 더 가속화되는 추세다.
많은 음악사학자, 음악 평론가, 그리고 음악가들은 록 음악의 틀 안에선 더 이상의 혁신적인 흐름이 등장하기는 매우 힘들어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입을 모은다. 물론 록은 음악적 특성상 폭이 아주 넓은 편이고, 크로스오버를 통해 새로운 들을만한 것을 계속 내놓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벌써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은 성급한 진단이라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음악적 폭이 넓다는 특성은 재즈도 마찬가지였다. 재즈의 경우 1960년대에 들어 다양한 재즈 음악가들이 예술적 진보를 추구하며 아방가르드 재즈, 프리 재즈, 퓨전 재즈 등으로 옮겨가며 심하게 난해해졌고, R&B, 소울, 펑크(Funk), 록, 힙합 등의 새로운 장르들의 영향을 짙게 받으며 '대중음악'으로서의 순수 재즈의 생명력은 크게 잃었다. 2020년대에 들어선 현재 재즈는 일부 매니아층이 존재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흘러간 장르 취급을 받는다. 록 음악의 경우도 2010년대에 들어 일부 요소를 차용해 타 장르에 양념처럼 곁들이는 식의 콜라보를 제외하곤 록 자체가 다시 생명력을 얻고 새 장르를 탄생시키거나 대중의 큰 주목을 받는 경향은 확실히 덜해졌으며, 역사를 돌아보았을 때 록도 재즈와 같은 길을 걸을 운명이라는 것은 꽤나 자명해보인다.
이에 음악 평론가 안토니 판타노는 2019년 "장르로서의 록 음악은 죽었으며, 이는 록에게 오히려 좋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요는 록 음악이 이제는 완벽하게 기성세대의 것이 되었으며, 록 커뮤니티 안에서는 과거의 고전 음반들만을 찾아 들으며 그것을 카피하는 카피 밴드들의 출현만이 반복되고 있고, 옛날의 향수를 추억하고 현 세대의 음악을 비난하는 록 팬들의 꼰대화는 오히려 록에게 치명적이니 이에 '대중 음악 장르'로서의 록의 죽음을 인정하고 부담을 내려 놓는 것이 음악적으로는 록 음악가들과 록 팬들에게 오히려 더 낫다는 것.
이러한 록 음악의 몰락을 기술의 발전과 결부시켜 설명하는 이도 상당수이다. 사실 록 음악을 제대로 하는 것은 엄청나게 힘들고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당신이 록스타를 꿈꾸며 밴드를 만들고 싶은 고등학생이라고 하자. 기타, 베이스, 앰프, 드럼등의 라이브 연주장비는 반드시 필요하다. 꼭 고급품이 아니어도 기본적인 가격대가 큰 부담이다. 거기에 마음이 맞는 멤버를 포지션 별로 구해야 하는것도 어려운 일이다. 특히 가뜩이나 없는 사람들 중에서도 유사한 장르를 좋아하는 멤버를 구해야 한다는 조건은 꽤 치명적이다. 본 문서에 서술된 종류만 봐도 알 수 있듯 록의 장르는 셀수도 없이 다양하고, 어느정도 공통분모는 있을지 몰라도 록을 좋아한다고 해서 다 똑같지 않다는 말이다. 쉽게말해 보컬은 브릿팝을 좋아하고, 기타리스트는 헤비메탈팬이며, 베이스는 사이키델릭이 하고싶고, 드럼은 펑크밖에 듣지 않는다면 이 멤버들끼리 모여서 밴드를 만들 수는 없다. 아무튼 이 모든 과정을 어렵사리 이겨내면 이제 합주나 연습을 해야하는데 이 또한 고정적인 비용과 적잖은 시간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록음악은 시작단계부터 장벽이 엄청나게 높은 음악인 셈이다. 어지간한 열정으로는 힘들다. 무엇보다 한국은 아파트로 대표되는 공동주택이 주류라서 층간소음 문제가 가장 결정적인 장벽으로 작용한다.
인터넷과 온라인 매체가 보편적인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자 이러한 상황은 더욱 가속화되었는데 록이 아니라 랩스타가 되고 싶은 고등학생이 있다고 치자면 인터넷에서 적당히 마음에 드는 비트를 다운받은 다음, 자신이 쓴 가사로 녹음하고, 그것을 유튜브나 힙합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리면 된다. 힙합이 음악적으로 쉽다는 것이 아니라 '''록에 비해서 진입장벽이 훨씬 낮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전자음악이나 힙합은 록에 비해서 낮은 진입장벽 덕분에 음악에 재능있는 많은 이들이 몰린다. 인재가 몰리니 거기서 일부는 스타가 되고, 그 스타를 보고 또 많은 이들이 자신도 힙합이나 전자음악에 투신한다. 일종의 선순환이다.[18]
역으로 말하면 록은 이와 정확히 반대인 악순환에 몰린 것이다. 하기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다보니 록을 하려는 사람은 줄어들고, 새로운 록스타가 없으니 점점 옛날 음악, 쿨하지 않은 음악으로 인식되며, 이런 인식은 다시 록을 하려는 사람을 더욱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는 견해다. 게다가 사운드적으로도 아날로그적인 밴드 위주의 사운드가 베이스이다 보니 들이는 노력과 시간에 비해서 현 세대 청중들을 사로잡을 만한 획기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기가 더이상 어려운 이유도 있다.[19] 악기 연주 위주로 낼 수 있는 사운드보다 컴퓨터를 통한 멜로디와 비트가 더욱 새롭고 다채로운 사운드를, 빠르게 변해가는 시장에 발맞추어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한 시대라는 점이다. 이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특히나 록의 입지가 좁은 한국에서는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난다.
다만 아직 완전히 무너졌다고 볼 수는 없다. 최근 힙합계에서 Lil peep, Lil Uzi Vert를 필두로 트랩 비트에 얼터너티브 록 음악을 샘플링한 장르가 이모 힙합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였는데, 이의 연장선으로 MGK와 Yungblud이 펑크 록과 싱잉랩을 섞은 <I Think I'm Okay>라는 곡을 발매했다. 이 곡은 록 씬이 아닌 힙합씬에서 "신선한 스타일"의 음악으로써 유행하고 있는 추세다. '''흥미로운 점은, 대중음악계에서 줄곧 주류를 차지하던 록 음악의 자리를 대체시킨 주인공인 힙합씬에서 록이 다시금 주목받을 수 있도록 새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5 Seconds of summer, Jonas brothers, Maroon 5를 포함한 팝 밴드들이 아직 빌보드 차트에서 건승하고 있기 때문에 쉽사리 꺼지지 않으리라는 예측도 나온다. 허나, 이들도 기존의 록 음악을 담습하는 히트 뮤지션들일뿐, 새로운 세대를 위한 방향 제시를 한것이 아니라서 여전히 장르의 장래가 불투명한것은 사실이다. 당장 록 음악을 한껏 향유하던 기성세대들이 모조리 노쇠하거나 고인이 되버린 이후에도 새로운 서브 장르들이 대중들을 다시 장악하면서 활성화되느냐 아니냐가 중점이기 때문이다.[20] 이게 실패하면 예전의 히트곡들이나 예전의 방식들을 그대로 연습해서 선보이기만 하는, 클래식 오케스트라들의 현 주소처럼 되버린다.
5. 한국
- 록밴드 문서 한국 록밴드의 현실 항목 참조.
현 시점에서, 록의 원조격인 서구권을 포함한 전 세계적으로 록 시장이 약해지는 추세지만 한국은 그 경우가 더 빨랐던 편.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후술되어있다.
5.1. 1960년대: 태동기
한국 록 음악의 태동기는 1960년대에 신중현[21] 을 비롯한 한국의 1세대 록 뮤지션들이 등장하고 부터이다. 하지만 1960년대의 한국은 정치 상황도 전체주의 군사독재를 겪는 중이었던 데다가 아직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었던 사회 분위기 때문에 당시 서구권에선 청년문화의 대표격이었던 히피 문화와 록 음악은 높으신 분들(정부)의 눈에는 단순히 탄압의 대상일 뿐이어서 한국엔 제대로 들어오지 못했다.
즉, 모든 서구권과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 대부분이 록음악을 필두로 한 새로운 청년문화의 혁명에 휩싸여 있었던 1960년대에 한국은 그런 열풍에서 한참 비켜나 있었던 것이다.
5.2. 1970년대~80년대: 청년문화로의 발전, 그리고 정권의 문화탄압
1970년대부터는 그래도 상황이 나아져서, 중류층의 가정에도 '전축'이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했고 '빽판'이라고 불리던 불법복제 해외음반들이 유통되기 시작했으며 신촌과 명동 등지의 음악다방에서 DJ들이 록과 팝음악을 트는게 유행하면서 한국에서도 조금씩 록음악 팬들이 많아지고 록음악 문화의 저변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70년대 초중반에 록음악을 듣고 자란 한국의 록키드들이 대학생이나 성인이 되어서 70년대 후반~80년대에 열풍을 몰고온 '록 그룹사운드'의 주력 멤버들이 되었다. 이렇게 서구의 원조 록음악을 들을 기회가 이전보단 훨씬 많아지고, 대학가 그룹사운드를 중심으로 록뮤지션들도 많이 생겨났지만 정부의 검열은 여전히 엄격해서 자유로운 창작활동에는 장애가 많았다.
1970년대에 대표적인 한국 록밴드로는 신중현과 엽전들, 산울림, 송골매, 들국화를 들수 있다. 이들 70년대 밴드들은 독재정권의 탄압과 간섭이 극에 달했던 유신 시기에 활동을 했기에 각종 검열과 금지에 시달려야 했다.
1980년에는 하드록 밴드 마그마가 대학가요제에 나오면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이상하게도 유독 대학가요제에서 주목을 받은 록밴드는 정규한장내고 해체하여, 보컬이 솔로로 데뷔/장르 변경을 하는 패턴을 이어가 버리고 말았다.(대표적으로 마그마, 티삼스) 마그마의 등장으로 포크 록이 주류였던 한국에서도 하드록, 헤비메탈이 주목을 받는 시기가 온다.
이후 1980년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밴드 시나위, 백두산, 부활도 데뷔를 하게 되었고 이들은 80년대 한국 록밴드 3대장으로 불리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대학가요제 쪽에서도 역시, 마그마 뒤를 이을 록밴드들이 주목을 받기도 하였으며 87년에는 티삼스, 88년에는 무한궤도가 주목을 받았다. 1980년대는 록밴드들이 공중파TV나 라디오 음악 순위 프로그램의 정상권에 자주 진입했고, 심지어 가요톱10 골든컵을 더러 수상할 정도로 록음악이 한국 대중음악의 주류의 위치에 제일 가까이 근접했던 시기였다. 1980년대는 대중문화와 프로스포츠를 장려해서 검열도 과거 박정희 정권 때에 비해서는 상당히 완화되었기 때문에 록 음악같이 자극적인 컨텐츠도 널리 공중파에 나오는 것이 가능해졌던 것도 록 음악이 과거보단 인기를 얻게 된 하나의 원인이었다.
5.3. 1990년대: 전성기의 끝과 짧았던 펑크 붐
1980년대 밴드 붐 이후로 대중들에게 록 음악이 익숙해진 일본에서는 그 흐름이 그대로 이어지면서 1990년대 J-Rock이 최전성기를 맞은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90년대 들어서 서서히 불씨가 꺼져가고 있었다.
주목 받은 신인 록밴드 가수로는 N.EX.T[22] , 윤도현[23] , 김경호, 걸, 이브, 노브레인, 크라잉넛, 크래쉬 등 80년대에 비교하면 양적으로는 크게 밀리지 않았다. 한국 대중음악이 댄스음악을 받아들여 인기를 얻고있던 시점에 수많은 댄스그룹을 제치고 1위를 달성한 걸이 있었고 넥스트는 애니메이션 음악을 담당하면서 외국의 음악잡지등에서 극찬을 받기도 하였으며, 김경호는 외국의 록보컬들과 비교해고 손색이 없는 가창력과 무대매너로 호평을 받았다. 기대주로 불리던 윤도현 밴드 역시도 4집이 입소문을 타며, 재결합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90년대에는 이들 외에도 선배 밴드들이 다시 새로운 전성기를 맞기도 하였는데 시나위 출신이었던 김종서는 솔로로 컴백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며, 시나위는 김바다를 영입하여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부활 역시도 새로운 보컬 박완규를 영입하여 반등의 기회를 보고 있었다. (다만 의견충돌로 인하여 김태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박완규는 부활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음악계의 주도권이 발라드, 차트 댄스뮤직에 완전히 뺏겨버렸다.'''[24] 1990년대 한국 록씬에서도 이를 상업적으로 의식하여 비교적 전통적인 당대 록 사운드를 선보이려 했던 1970, 80년대에 비해서 전형적인 발라드 형식이라서 슬프지만 나름 웅장하면서도 거친 록 음악 요소를 가미한 소위 '록 발라드'라 불리는 한국만의 짬뽕음악들이 난무하였다. 대중적으론 한층 더 어필하기 쉬웠지만 장르적 특색과 음악성에 있어서 독이 된것이다. 이는 1990년대 한국의 록 음악이 1970, 80년대 록 음악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예술적으로 저평가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현상이 가속화 되면서 2000년대 부터는 록 음악에 대한 관심이 1990년대보다도 훨씬 더 사그러들게 된다.
다만, 인디에서는 약간 이야기가 다른데, 삐삐밴드를 시작으로 '''90년대 중반부터 인디씬을 중심으로 펑크 붐이 불기 시작했고, 조선 펑크의 선구자인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이 등장하면서 인디에서는 그나마 저항정신을 노래하는 한국 특유의 펑크 록 무브먼트인 조선 펑크가 싹트기 시작한다.[25] 1999년쯤에는 1세대 조선펑크 밴드들이 인디씬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렸으며 크라잉넛의 말달리자가 히트하면서 인디에서나마 꾸준히 수요가 생기나 싶었지만, 2000년대 중반에 터진 생방송 음악캠프 알몸노출 사건은 조선펑크 씬을 홀랑 말아먹었다.
한국 록 아티스트들의 현실도 암울하지만 해외 유수의 록 아티스트들에 대한 한국 대중 음악 소비자들의 인지도 역시 처참한 수준이다. 그나마 인지도가 높은 록밴드는 단연 린킨 파크, 뮤즈를 들 수 있다. 그나마 린킨 파크, 노엘 갤러거, 뮤즈, 그린데이의 인기는 10대 층에서 나날이 상승중이다. 또한 현재 세계에서 가장 공연 수입이나 앨범 판매 수입이 높은 밴드 중 하나인 콜드플레이의 경우도 내한 당시 수분만에 전석이 매진될 정도의 인지도는 있지만 세계적인 인지도에 비해 한국내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한 커뮤니티에서는 '콜드플레이가 누군데, 사람들이 이 난리 영광임? 솔직히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나 유명한 가수가 좋아한다고 공연장 간다니까 괜히 유행인거 같아서 분위기 타는거 아님?' 이라는 글이 올라올 정도이다. 하지만 보다 마니아틱한 장르들의 밴드는 록 발전에 끼친 영향력에 비해 한국에서의 인지도가 매우 낮다. 2000년대 초반 록씬을 강타한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밴드들의 경우는 인지도가 바닥을 기어다닌다. 일례로 교보문고 본점 음반 판매 코너에서 그나마 한국내 인지도가 높은 편인 악틱 몽키즈의 앨범은 1집부터 5집까지 재고가 아예 없는 수준이다. 악틱 몽키즈는 런던 올림픽 당시 오프닝 공연을 했던 밴드이며 록 페스티벌을 통해 한 차례 내한공연까지 했다.
5.4. 원인 분석
결론부터 말하자면 '''록이 전 세대에 걸쳐 확실히 뿌리를 내려야 할 시점(1960~70년대)에 경직된 국가 분위기에 의해 실패'''했고, 세월이 지나면서 '''새로이 등장한 힙합과 발라드, 그리고 K-POP'''으로 대표되는 아이돌 뮤직이 당대의 한국 청년층들을 사로잡으며 '''가뜩이나 뿌리가 약했던 록 음악씬을 너무 빠르게 대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심지어 록의 근원인 미국과 록을 부흥시킨 영국조차도 흑인 음악계열 장르들에 의해 록이 밀리는 추세라서 원체 록 음악씬이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한국이 더 두드러질 뿐, 록 시장이 죽어가는건 어딜가나 마찬가지다.
'''전 세계의 많은 대중음악계에서 입을 모아 "록은 팝을, 팝은 록을 닮아왔다."'''고는 말하지만 한국 대중음악계에서는 조금 엇나간다. J-POP에서는 일렉트로닉 등 가상/전자악기가 대중화 된 현재에도 록 음악에서 파생된 기타-베이스-드럼 반주가 모조리 있는건 아니더라도 삽입되는 경우가 주류인 반면, 한국 아이돌 음악에서 기타-베이스-드럼 반주는 오히려 마이너하다. 아이돌 음악만 듣는 사람이라면 일렉트릭 기타와 베이스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 아예 모른다. SM, YG 등 대형 연예 매니지먼트 회사에 소속된 록밴드가 전혀 없다.[26] 이와 같은 현상은 현재 일본 아이돌과 한국 아이돌의 음악적인 근본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일본 아이돌의 시작은 1970년대 일본 록 뮤지션들의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사운드를 바탕으로 이를 대중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유럽권의 유로비트, 예예(Yé-yé)나 미국의 팝 뮤직이 조금씩 뒤섞여 순화된 음악을 바탕으로 한다. 80년대만 하더라도 소방차와 같은 초창기 한국의 댄스가수들도 사운드나 퍼포먼스면에서 이런 일본 아이돌 뮤직에 영향받은 장르를 주로 보여줬다. 당시 소방차의 무대를 보면 사운드는 물론이고, 안무 도중에 공중제비를 많이 도는 등, 쟈니스 사무소 계열의 남자 아이돌 음악을 거의 그대로 따오다 싶이 했다. 실제 그룹 이름도 쟈니스의 '소년대'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현진영의 등장으로 인해 동시대 영미권의 힙합과 뉴잭스윙, 댄스팝에 직접적으로 영향받은 새로운 댄스뮤직이 등장하여 기존의 80년대 댄스뮤직을 완전히 세대교체를 시켜버렸다.
한국 아이돌 음악의 뿌리는 1980년대 댄스뮤직이 아닌 서태지를 대표로 하는 1990년대 댄스뮤직이다. KPOP에서 힙합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한국 아이돌 그룹이라면 한 두명씩은 꼭 있는 래퍼 포지션 멤버들이 그 증거이다. 그리고 빅뱅, 2NE1, 블락비, 방탄소년단처럼 힙합과 흑인 음악적인 요소를 대놓고 표방한 아이돌 그룹들도 수두룩하다. 일본 아이돌계에선 현재에도 래퍼 담당을 찾기 힘들며, 랩이 쓰이기 시작한 시점도 2000년대 이후 들어서이다. 오히려 한국 아이돌들이 한류 붐으로 일본으로 역수출 되면서 랩이나 힙합적인 요소를 띄는 그룹들이 2010년대 이후에 조금씩 생겼다. 이는 이미 1990년대 초반 서태지때부터 꾸준히 랩을 했던 한국 아이돌과 큰 차이점이다.[27]
이전 서술에서는 서태지의 랩이 힙합과는 무관한 뉴 메탈에서 비롯된 랩으로 데뷔를 했다고 작성되었지만 난 알아요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을 내는데 있어서 영향을 받은 밀리 바닐리와 같은 뮤지션들은 뉴잭스윙에 가까운 힙합, 랩댄스 장르의 아티스트였다. 오히려 록적인 성향이 섞이기 시작한 시점은 2집 이후로 보는 것이 옳다. 여담이지만 2집 하여가를 시작으로 록과 힙합이 뒤섞인 독특한 댄스음악을 하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에 의해 H.O.T., 젝스키스를 비롯한 1세대 기획형 아이돌들도 '전사의 후예', '기사도'처럼 사운드적으로 과격하고 웅장한 음악을 많이 선보였다. 이것이 꾸준하게 내려오면서 현재 EXO나 BTS가 자주 선보이는, 정신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거친 사운드가 겹겹이 쌓인 댄스음악으로 발전한 것이다. 현재 아이돌들이 격한 퍼포먼스나 칼군무가 들어간 음악을 할때,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가사가 많은 것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추구해온 사회비판적이면서 비유가 많은 가사법이 변형되어 내려온 것. 자세한 내용은 SMP 참조.
대중음악만 듣던 사람들 중 일부는 '그럼 록밴드들도 좋은 음악을 만들어야 사람들이 알아줄 것 아니냐.'라는 말을 하지만 '''한국 록의 인지도 부족은 음악성 부족이 아닌 록 음악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와 선입견에 기인한다.'''[28][29]
한국 인디씬은 1990년대부터 펑크록, 모던록, 헤비메탈, 사이키델릭 록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퀄리티 높은 음악들을 뽑아내왔지만 사람들이 몰라서 안 듣는다. 그 이유는 이미 수십년간 독재정권에 의해 박해를 받아오던 한국 록씬이 SM, JYP, YG 등의 대형 기획사들의 자본력을 따라가지 못하고 홍보, 방송 출연 입지 등 모든 면에서 제약을 받으면서 결국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는 의견이 많다. 특히 생방송 음악캠프 알몸노출 사건의 여파로 인디 밴드들이 한동안 방송전파를 타지 못했다. 한국 록밴드의 실력을 지적한다고 해서 이것이 해외 아티스트들이 한국에서 인지도가 낮은 이유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록 음악이 몰락한 시기는 주거문화가 아파트 위주로 바뀌어간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즉 '''층간소음 문제'''로 인해 록 음악을 하기도, 듣기도 불리한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한국 아이돌 계열 아티스트 중 유일하게 록 메탈 사운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드림캐쳐도 마이너한 장르 때문인지 대중성이 부족한 상황이다.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긴 하지만 여타 아이돌들에 비해 국내 인지도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
5.5. 그래도 생명력을 이어나가고 있는 인디 씬
K-POP의 낙수효과 덕분인지는 몰라도 인디밴드(롤링쿼츠 등)의 연주 영상같은게 올라오면 외국인들의 덧글을 심심치않게 볼수 있으며 차라리 이럴바에는 한국에서 록음악의 관심을 퍼트리는 것보다 외국에서 활동을 하는게 낫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인디씬에서는 많은 밴드들이 해외쪽으로 활동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인디밴드의 대부분은 다양한 장르의 밴드[30] 보다는 무난한 모던록과 7080의 유지를 잇는 포크 록(혹은 이에 기반한)으로 대표되는 팝밴드의 비중이 높다.''' (지방 출신의 밴드가 서울로 진출해서 설령 성공해도 힘든건 마찬가지이니 외국으로 가는 것이 낫다. 이는 K-EDM이라고 다르지 않다.)
올드 가수들 가운데 그나마 유명한 가수라고 해봐야 김경호, 박완규 등으로 나는 가수다 기준으로 그나마 인지도가 올라갔지만 여전히 신세대(20~30대)에게 많은 호응을 받기는 어려웠고 그나마 대중들이 많이 들어주는 곡은 록 장르가 아닌 록발라드 정도였다. 2010년 이후에는 R&B와 힙합, 당대 서양의 차트 EDM을 받아들인(다르게 말해서 주류로 수용된 K-EDM의 일부분) K-POP 주류 댄스음악의 열풍에 밀려 록발라드 조차도 사장되었다. 그나마 나가수 시즌 2에 들어서 국카스텐이 그나마 록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링크)
2010년대 이후로는 인디 팝에 가까운 인디 밴드들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으며, 혁오나 잔나비같이 주류방송매체에서도 여러번 소개되어 사실상 '마이저'(마이너 출신이지만 그중에서 메이저) 반열에 드는 밴드도 어느정도 생기고 있다.
5.6. 결론
하지만 한국이 꼭 '록의 불모지'나 '록이 전혀 히트한 적이 없다'라고 말하기에는 어느정도 오해가 있다. 이것은 록 음악을 매니아 기준(딥퍼플이나 레드제플린 같은 하드 록이나 메탈을 원하는 매니아층)으로 정의를 좁게 잡았기 때문이다. 서구권이나 일본만큼은 아니더라도 한국도 부활, 김경호나 버즈와 같은 록 발라드나 들국화, 산울림 표 포크록을 제외하고도 의외로 많은 록 히트곡을 가지고 있다.
한국 대중 음악사에서 성인 가요의 뿌리에 해당하는 신중현의 음악은 블루스와 록에 기반을 하고 있다. 실제로 현재 수많은 록밴드 들이 신중현의 음악을 리메이크하며 재생산하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 한국 대중음악의 거물들이라 할 수 있는 조용필, 신해철, 서태지 등등 모두 록 음악을 했다. 조용필의 최고 히트곡 중 하나인 모나리자나 윤수일 밴드의 황홀한 고백과 아파트, 신해철의 데뷔 밴드인 무한궤도의 그대에게 등등 모두 엄연히 록 넘버이다. 흔히 말하는 뽕끼가 있긴 한데 그건 일본의 최고 록밴드 B'z와 다를게 없지 않은가?
서태지의 음악은 댄스음악을 포함하여 아예 대부분의 음악이 1집 이후부터는 록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자우림이나 최근의 버스커 버스커와 같은 밴드도 충분히 록의 범주에 들어간다. 즉, 우리나라는 록을 거칠고 날뛰는 이미지의 초고음만 내지르는 매니아 음악으로 치부하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시선만 좀 더 넓혀보면 한국 가요계에서도 록 음악이 끼친 영향이 마냥 적다고 볼 수는 없는 셈이다. 맨위에 적혀있듯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록 음악이 쇠퇴했다고 보는게 제일 정확하다.'''
6. 세부 장르
6.1. 록의 뿌리
- 컨트리, 포크
- 로큰롤 / 로커빌리
6.2. 컨트리 록 / 포크 록 / 루츠 록
- 컨트리 록 / 포크 록 / 루츠 록
6.3. 사이키델릭 록
6.4. 펑크 록
6.5. 하드 록과 헤비메탈
6.6. 소프트 록과 팝
6.7. 얼터너티브 록
6.8. 글램 록
6.9. 프로그레시브 록
6.10. 재즈 음악과의 퓨전
- 재즈록 / 퓨전 재즈
6.11. 클래식 음악과의 퓨전
- 오페라 록
- 피아노 록
- 아트 록: 클래식 음악의 영향을 받은 록.
6.12. 기타
7. 관련 문서
[1] 물론 1930~40년대 스윙재즈 전성기 시절, 마칭 밴드가 시대의 주류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긴 했지만, 록만큼 긴 세월동안 장악을 하진 못했다.[2] 악기 없이 보컬만 따로 두기도 하지만, 보통은 멤버 중 한두 명이 담당한다.[3] 각 뮤지션들을 복사하듯 똑같이 흉내내기보단 그냥 재밌게 재현해낸 것에 가깝다. 록 역사의 대표 뮤지션으로 선정된 이들을 보면 RHCP의 개인적 선호도도 꽤 반영된 듯 하다. 아무튼 이 유튜브 영상은 높은 조회수를 올리며 인기가 높은 영상이기도 하다.[목록] The bands and styles Red Hot Chili Peppers are paying homage to... 0:00 Elvis Presley, 0:26 The Beatles, 0:36 Jimi Hendrix/Cream, 0:56 Parliament Funkadelic, 1:21 Glam Rock, 1:51 The Sex Pistols, 2:02 The Misfits, 2:15 Motley Crue/Poison, 2:47 Nirvana, 3:01 Red Hot Chili Peppers (Themselves)[4] 실례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히트곡인 'Hound Dog'은 1950년대 초, 흑인 여가수 빅 마마 쏜튼의 댄서블한 R&B 원곡을 리메이크 한것이며, 이 외에도 전설적인 흑인 소울 가수인 레이 찰스의 'I Got a Woman'을 엘비스가 50년대 중후반 경에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이렇듯 흑인들의 댄서블한 R&B가 초창기 로큰롤을 성립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것이 정론이다. 당장 로큰롤의 시조격인 척 베리와 리틀 리차드가 흑인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실제 1950년대 당시 R&B와 로큰롤을 비교하면 로큰롤의 템포가 좀 더 빠르고 살짝 거친 사운드가 들어간 점을 제외하면 근본적으로 차이가 거의 없었다.[5] 예시를 들면 1950년대 당시, 기성세대의 재즈와 스탠다드 팝과 대립하던 로큰롤, 1960년대 초창기 록 음악에 반하던 사이키델릭 장르, 1970년대 후반에는 펑크가 이전 세대의 모든 록 장르들을 비판하며 출현했고 1990년대에는 상업화되고 록 씬의 주류를 꽉 채운 메탈 장르에 반대하며 그런지와 브릿팝으로 대표되는 얼터너티브 록이 범람했다.[6] 정확히 말하면 비틀즈라는 밴드명은 1959년에 지어졌지만, 로큰롤 밴드 활동은 2년 전인 1957년 존 레논의 고교 스쿨밴드인 쿼리멘 시절부터 하고 있었다. 또한 공식적인 데뷔 년도는 첫 싱글이 발매된 1962년이다.[7] 사실 밥 딜런은 청소년 시절인 1950년대에 엘비스 프레슬리를 비롯한 로큰롤 스타들의 열성 팬이었다. 엘비스가 서있었던 장소에 영광이라며 키스한 것도 유명한 일화이고 실제로 밥 딜런의 학창시절 사진들을 보면 리젠트 머리와 거친 로큰롤 옷차림을 즐겨입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미국에서 로큰롤이 몰락한 시점에 음악적으로 활약할 기회가 사실상 사라졌고 본인의 또다른 취향이었던 포크 음악으로 완전히 전향한 것이다.[8] 당시 폐쇄적인 포크 커뮤니티는 일렉 기타를 드는 행위는 포크의 순수성을 파괴하는 배신 행위라고 생각했다.[9] 최초의 더블 앨범이다.[10] 비치 보이스의 걸작명반 Pet Sounds 앨범도 바로 비틀즈의 Rubber Soul 앨범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서 만든 앨범이다.[11] 오히려 그 후신인 록 장르보다 힙합 장르에서 사이키델릭 록의 요소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례로 오토튠과 더욱 발전된 기계음으로 더 다채로운 사운드를 살려서 EMO힙합 장르가 탄생된 것이 그 예시다.[12] 나중엔 소프트 록 스타일로 인기를 얻었지만 초창기엔 블루스 록 밴드였는데,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가 이 초창기 플리트우드 맥의 열렬한 팬이었고 영향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13] 독일의 대표음식인 자우어크라우트에서 따온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독자적인 록 음악을 '김치록'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하면 된다.[14] 초기엔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록이란 의미에서 '글리터 록'(Glitter Rock)이란 표현도 병행해서 사용되었으나 갈수록 글램 록이라는 어휘가 더 우세해졌다.[15] proto-( )는 ( )의 이전 형태, ( )의 원조라는 뜻이다.[16] 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 엔워븜이라고 읽는다.[17] 물론 평가하기에 따라 얼터너티브의 한 흐름으로 보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18] 이는 꼭 음악에만 적용되는 일은 아니다. 이를테면 특정 이유로 어떤 스포츠가 크게 주목받고 인기를 끈다면, '운동에 재능있는 아이'들이 그 스포츠 종목으로 몰려드는 경향을 보인다. 미국의 미식축구, 농구, 캐나다의 아이스하키, 유럽과 남미권의 축구가 대표적인 예시다.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는 이스포츠 역시 이러한 선순환 구조를 가지고 있다.[19] 록 음악 팬들끼리도 어디까지를 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여부가 갈린다. 완전히 기타와 드럼만을 사용해야한다는 보수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키보드 정도는 허락하거나 록이라는 형식만 있어도 된다면서 정통 일렉 기타 대신 전자 기기를 주로 쓰는 밴드도 있다. 밴드 imagine dragons는 앞서 말한 보수적인 팬층에게 록이 아니라 팝 밴드같다는 이유로 심한 손가락질을 당해 우울증세를 보인적도 있었다고 밝혔다.[20] 당장 엘비스와 비틀즈, 롤링스톤즈를 보고 자란 세대들은 대부분이 70, 80대 고령에 고인이 된 경우가 수두룩하고 펑크와 메탈, 얼터너티브를 즐긴 세대들은, 아무리 낮게 잡아봐도 중년이고, 심하면 60대에 접어든 경우가 대다수이다. 지금 청년세대들은 몇몇 매니아층을 제외하면 록 음악보다는 다른 장르에 익숙한 세대이다. 즉, 기성세대가 완전히 힘을 잃으면 록 음악의 시장 자체가 클래식처럼 특정 계층을 위한 음악으로만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음악 장르가 끊임없이 진화하고 활성화되려면 신세대를 사로잡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위대하지 못해서 클래식이 유물이 된게 아니다. 절대적인 것은 없는 셈.[21] 훗날 Fender사로부터 경의를 받게 되는 한국 록 음악의 대부이자 나아가서 한국 대중음악계의 대부이다.[22] 이 마저도 사실 이미 큰 명성을 누리고 있던 신해철의 새 밴드나 마찬가지였다.[23] 3집부턴 밴드로 결성하여 활동하고 자신의 솔로1, 2집은 그냥 밴드의 정규앨범으로 인식한다.[24] 사실 이는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고, 1990년대에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기존의 록 음악 씬 vs R&B와 소울, 댄서블한 흑인 음악, 그리고 힙합씬'''', 이 양측 세력이 대중음악의 헤게모니를 다투던 과도기였다. 록 음악의 기반이 약했던 한국에서는 손쉽게 후자의 세력이 주류를 차지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타 국가에선 2000년대에 들어서야 주류가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25] 일찍이 주류로 편입되어서 골수 인디팬들에게는 초심을 잃어버렸다고 항상 까이는 노브레인도 초창기에는 <청춘구십팔>을 들으면 알수있듯이 펑크 특유의 저항정신이 강했었다.[26] JYP에는 DAY6가 있다. 또한 중소 기획사 중 밴드 형식의 아이돌 그룹은 FNC의 씨엔블루, FT아일랜드, N.Flying이 있다.(댄스 그룹으로 바뀌긴 했지만 AOA도 포함.)[27] 이 처럼 일본 음악계는 록밴드에 의해 이끌어져 왔다는 점에서 일본 대중음악계는 한국 음악계와는 상당히 다른 경향을 보이는 것도 특징이다. 현재 일본의 록씬은 굉장히 규모가 거대하여, 수천 개의 록 밴드들이 활동하며 공연하고 있고 전국의 공연 클럽 숫자, 그리고 그 록 음악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어마어마하다. 세계에서 록씬 규모가 제일 큰 국가는 미국, 영국 다음에 일본이다. 경제적 규모로만 보면 영국과 거의 같다고 한다. 이건 굳이 록 음악 뿐 아니라 음악 시장 전반 규모로 봐도 마찬가지다. 특히 일본 음반 소비시장은 그 취향의 다양성으로도 유명한데 그로 인해 본국에서도 마이너한 아티스트들이 사실상 일본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다시피 하고 있는 경우도 흔하게 볼 수 있다.[28] 다만 이는 대중음악의 중요한 요소인 대중성을 간과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작품성이 곧바로 상업성으로 직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My Bloody Valentine의 Loveless가 레코드사를 망하게 만든 명반임을 기억하자.[29] 사실 Kpop장르 또한 록 앨범을 만드는 것만큼 어마무시한 시행착오가 이루어진다. 대중들의 기대치는 우연성이 매우 크게 작용하고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안무, 음악, 파트 분배, 코디까지 철저하게 이루어진다. 이 중 하나라도 이상하면 바로 쏟아지는 눈초리는 덤. 그렇기 때문에 밴드가 기대하는 음악과 대중이 기대하는 음악에 대한 중심을 잡아야 하며, 대중들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요소가 있다면 열심히 주목해주고 역주행으로 이어준다. 밴드 중에는 잔나비, 혁오, 신현희와 김루트가 래퍼 중에는 창모, 애쉬 아일랜드가 이를 통해서 사재기 대란 속에서 1위 내지는 탑 100 안에 오른 바가 있다.[30] 물론 인디에서도 더 깊고 힙한 쪽으로 가면 한국에서도 익스트림 메탈같이 과격한 음악을 하거나 밀레니엄 전후로 인기를 끌었던 조선펑크의 명맥을 잇는 이들도 소수나마 있긴하다.[31] 아래의 다른 익스트림 메탈들이 너무나 광폭한 음악들이라 스래쉬 메탈을 익스트림 메탈에 넣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아래의 다른 익스트림 메탈의 뿌리가 스래쉬이다.[32] 사실 멜데스를 데스 메탈의 하위 장르로 봐야 하느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멜로딕 데스 메탈 참조.[33] 익스트림 메탈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라인드코어를 익스트림 메탈의 범주에 넣아야 하느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34] 위의 두 음악과 메탈코어를 헤비메탈의 하위 장르로 분류하지 않는 이유는, 이 음악들은 여러 음악을 결합시킨 크로스오버 장르들이다. 메탈도 그 여러 음악 안에 하나로써 들어가는 것이지, 메탈의 하위 장르로 발전한 음악들은 아니다.[35] 그러나 메탈코어의경우 분명 메탈로 분류하는 사람들도 많고 멜로딕 데스 메탈과 비슷한점이 많기 때문에 그라인드 코어급의 논쟁이 계속되고있다.[36] Anadolu rock. 터키의 록음악을 말한다. 아나톨리안 록(Anatolian rock)이라고도 한다.[37] 동독에서 만들어진 록이다. 의외로 고퀄이어서 서독에서도 인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