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티키오스
1. 개요
Tatikios
1040년대 전후 ~ 1100년대 전후 (추정)
1차 십자군 전후로 활약한 동로마 제국의 장군이자 노예에서 대귀족으로까지 승진한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
튀르크인 노예였기 때문에 타티키오스라는 이름 외에도 튀르크어식 이름이었던 타티크, 타틱, 테티그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2. 초년기
타티키오스는 알렉시오스 1세의 부친인 요안니스 콤니노스가 원정을 나갔다가 잡아온 튀르크 노예였다. 어릴적부터 타티키오스는 신앙심이 깊었으며[1] 일간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그리스인, 혹은 정교회 신자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동양적이고 까무잡잡한 튀르크족의 전형적 이미지의 생김새를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키는 작지만 다부진 신체를 가져서 무예에 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콤니노스 가문은 이들을 일반적인 외국인 노예로 생각하기보단 고용인 정도로 생각했다.[2] 비슷한 연배였던 알렉시오스와 타티키오스는 가족처럼 지내며 함께 놀았다고 전해지며, 알렉시오스의 아버지도 타티키오스의 무예를 알아보고 아들과 함께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알렉시오스가 장교로 입대했을 때도 타티키오스는 그의 부관이 되었다.
알렉시오스 1세가 니키포로스 3세 재위기 제국군 원수(Megas Domestikos)직을 맡아 중앙군을 이끌고 니키포로스 바실라키오스의 반군과 싸울 때, 타티키오스는 지도를 읽고 반란군이 매복해 있는 장소를 정확히 집어내는 안목을 보여주었다. 타티키오스의 뛰어난 전략적 안목을 볼 수 있는 사례이다.
1081년 알렉시오스 1세가 황제가 되자 타티키오스는 메가스 프리미케리오스[3] 직책을 맡게 되었다.
3. 군사적, 정치적 업적
1081년 디라히온 전투 당시 타티키오스는 헝가리인들과 기독교계 튀르크인들로 구성된 부대의 대장으로 임명된다.[4] 패전의 순간에 타티키오스는 부대를 이끌고 흩어지는 궁기병대를 이끌고 로베르 기스카르의 노르만 기병대를 요격하며 피해를 줄인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그러한 분전도 동로마 제국의 참패를 막을 수 없었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조금이나마 살아남았고 일부는 재건된 중앙군 타그마와 바랑기아 친위대가 전멸하고, 제국은 일시적으로 방위력을 상실한다.
알렉시오스 1세는 그나마 남은 소수의 쿠만, 페체네그족 용병들과 제국군 패잔병, 그리고 이름만 남은 군관구 둔전병들로 제국을 지켜야 했다. 결국 제국군은 디라히온 전투 이후 이피로스 해안가에서 완전히 쫓겨나고 테살리아와 마케도니아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이러한 군사력으로 효율적인 방위가 불가능했음은 자명해 보였으며, 계속되는 자금난도 해소하고 중앙군도 재건할 겸 알렉시오스는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고위 귀족들의 반강제적 헌금을 받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교회도 크게 반발하지 않았으며, 귀족들은 고위 품계를 받는 대신 반강제적 헌금을 납부했다. 이로써 재정이 잠시 유연해질 수 있었으며, 이는 곧 중앙군의 재건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로 재건된 연대는 '아르콘토풀라이(Archontopoulai)'로 귀족 자제들과 장교들의 고아들을 모아 만든 3000여 명 규모의 카타프락토이 중기병 연대였다. 또한 타그마 중앙군의 잔존병과 페체네그, 알란, 쿠만족 용병들을 중심으로 모은 포이디라티 연대와 아타나토이 연대 등을 재건했다. 이들은 거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기동부대로서 전체 수천 명 가량이었다. 또한 이전에 키예프 공국과 스웨덴에서만 모집하던 바랑기아 친위대는 잉글랜드와 노르만인들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이들의 수는 유동적이었지만 3천~6천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소 귀족들과 지주들에게 땅과 봉토를 지급하여 일정 수의 병력과 가신, 시종들을 제공하게 하는 프로니아 제도 또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병력의 중장화, 정예화를 이끌었고, 최소한 콤니노스 왕조 시기에는 세습되는 토지가 아니었지만, 이후 동로마 제국이 봉건화되는 문제점을 낳았다는 비판을 받는다.[5]
이러한 노력과 알렉시오스가 이끌어낸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 알렉시오스의 지연전 등을 통해 결국 대노르만 전쟁은 제국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한편 이미 불가리아 북부에 정착한 페체네그족은 제국의 방위력 약화를 틈타 제국의 지배가 확고한 에모스 산맥(발칸 산맥) 이남의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로 쳐들어왔고, 영구적인 정착지를 만들려 하였다. 타티키오스는 500여 명의 아르콘토풀레 병력을 이끌고 1080년대 말부터 북부지방의 페체네그, 마니교도들의 반란을 진압하며 수십 개의 유목부족들을 성공적으로 기습했다. 1091년 페체네그족은 10만이 넘는 군대와 아녀자까지 대동한 부족 전체의 대이동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육박하였지만 제국군과 쿠만족의 연합전선으로 레부니온 전투에서 패퇴하였다. 페체네그 병사들이 제국의 포에데라티로써 병력에 포섭되면서 방위 부담이 줄었고, 제국은 다가올 반격을 준비했다.
타티키오스는 1094년에 로마노스 4세의 아들인 니키포로스 디오예니스의 반란을 진압한다. 디오예니스는 타티키오스와 알렉시오스 1세의 오랜 친구였지만, 황위를 노리려던 음모는 벌해질 수밖에 없었다. 페체네그, 쿠만, 노르만, 차카 등의 위협이 어느 정도 경감되고, 디오예니스 등 구 귀족들의 반란 위협이 사라지면서, 제국은 잃어버린 아나톨리아 수복을 시작할 수 있는 여유를 다시금 되찾게 되었다.
1080년대 후반에 제국은 알렉시오스 황제가 상당수 병력을 타티키오스에게 주어 제국을 위협하는 니케아의 토후 아불 카심을 처벌하라고 명령하였고, 마누일 부투미티스 제독의 해군이 지원하게끔 하였었던 적이 있었지만 아불 카심과의 야전에서 승리하고 니케아로 진격했음에도 현실적인 어려움에 니케아를 수복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타티키오스는 이 실패 이후 잠시 전투에서 손을 떼고 황제의 왼팔인 수석 시종장 직에 몰두했다. 신실한 정교회 신자였던 타티키오스는 관계가 소원했던 알렉시오스 1세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중개역을 했다. 보고밀파 이단과 할키돈의 레온 주교를 비난하기 위해 개최된 블라헤르네 회의에서 황제의 대리인으로 출석한다.
총대주교는 그의 신실함과 신학적 지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를 명예직인 고위 성직자 자리에 올려주었다.
1095년, 제국은 내우외환에서 조금씩 벗어나 한숨을 돌리고 있었지만, 제국이 자력으로 실지수복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음이 확실했다. 황제는 서방 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4만에 이르는 십자군이 서유럽 각지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4. 제1차 십자군 원정 종군
1096년 6월 싱기두논 (Singidounon, 베오그라드) 총독 니키타스는 수만 명에 이르는 군대가 헝가리 국경을 약탈하고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동로마 제국 국경을 넘어 도망쳐온 헝가리 생존자들은 이들이 성지 탈환을 위해 모인 십자군이며, 이미 헝가리 방면의 국경도시인 셈린을 불태우고 4천 명을 학살했다는 것을 니키타스에게 알렸다. 이미 2만여 명정도의 선봉대가 북프랑스의 영주 '가난뱅이 월터'의 지휘 아래 동로마 국경을 넘은 상태였다.
정찰로 파견된 500여명의 기병대가 각지로 흩어진 십자군의 약탈단에 중과부적으로 패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제국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전령을 보내고 수비를 준비했다.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경악했다. 교황은 빨라야 그해 8월에나 십자군 본대가 출발한다고 전보를 보내왔는데, 식량은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고 마르마라 해를 통행하게 해 줄 해군도 비티니아의 제국군 요새들에 보급작전을 수행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최대한 빨리 십자군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하라고 했지만, 굶주린 수만 대군을 선무하는 일은 니키타스의 자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니키타스는 군사 소도시 싱기두논에서 항전을 준비했다. 잘 훈련된 니키타스의 주력군이 온존했다면 충분히 월터의 십자군을 막아내었겠지만, 주력 부대가 주변 도시인 네소스에 있는 상황에서 니키타스는 겨우 천여 명이 약간 넘는 병력으로 방어를 준비해야 했다. 게다가 셈린을 불태운 은자 피에르와 레지날드의 주력부대까지 싱기두논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셈린을 넘어온 십자군은 마치 당연하다는듯이 동로마제국을 공격했다. 싱기두논 방어군은 철저히 붕괴하고 도시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니케타스는 수백 명의 잔존병들과 함께 자신의 야전군 본대가 있는 네소스로 도망쳤다. 분노한 니키타스에게 더 이상 십자군 호위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니키타스는 5000여 정예군을 이끌고 싱기두논과 네소스 외곽을 약탈하느라 정신이 팔려있는 십자군을 기습했다. 동로마 기병대는 산개해있는 십자군들을 하나 하나씩 요격해서 박살냈고, 이번엔 은자 피에르와 레지날드의 십자군이 큰 타격을 입어 겨우 500여명의 생존자들만이 도망치듯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문제는 니키타스가 승리하고 나서 발생했다. 피에르와 생존자들이 도망가고 십자군이 흩어졌지만, 니키타스의 병력으로는 수만 십자군을 궤멸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이미 피에르의 본대도 패잔병들이 들러붙어 수만명에 육박하게 된 데다, 그보다 더 많은 수의 패잔병들이 헝가리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흩어져서 약탈과 파괴를 저지르고 있었다. 수백 명 정도로 뭉친 패잔병들은 동로마 각지의 지방관들과 군사령관들에게 패퇴하여 서유럽으로 돌아가거나 피에르의 본대를 쫄래쫄래 따라갔다.[6]
황제의 근위병들이 피에르와 7500여명의 십자군 본대와 조우하자, 은자 피에르는 황제가 진노했을까봐 두려워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 부콜레온 황궁으로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했다. 하지만 황제의 의중은, 이들을 하루빨리 룸 술탄국으로 보내버려서 투르크인들이 골칫덩이를 처리하게도 놔둘 겸, 룸 술탄국의 방위도 흔들어 놓을 겸 그들을 마르마라 해 건너편으로 보내는 데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바로 십자군에 대한 호위대를 편성했다. 타티키오스는 페체네그 경기병으로 이루어진 수백여 명의 호위대를 이끌고 민중십자군의 본대를 호위했다. 결국 수만 명의 민중 십자군은 제국 함대와 타티키오스의 경호 속에 비티니아에 상륙한다. 비티니아에 상륙한 이들은 룸 술탄국의 수도인 니케아 인근으로 진군해 이교도들을 처벌한답시고 니케아 주위의 농촌을 약탈한다. 이 주위 농민들 절대 다수가 불과 15년 전까지만 해도 제국의 신민이었던 그리스도교도 그리스인이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이들의 파괴행위는 워낙 잔혹해 룸 술탄의 어그로를 끌게 되었다.
결국 제리고르돈 요새와 니케아 근교에서 민중십자군 본대가 룸 술탄 쿨르츠 아르슬란에게 개발살 난 뒤, 타티키오스는 만족스럽게 해군과 함께 수비대형을 갖췄고, 민중십자군을 동로마 용병부대의 일탈 정도로 생각한 룸 술탄국도 이 이상 반격을 가하려 하지 않았다.[7]
제국은 십자군 본대에 대한 예방주사격으로 민중십자군을 겪었다. 이 전훈을 통해 훗날 십자군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호위군을 붙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는 타티키오스에게 아나톨리아 산악지역에서 십자군을 호위할 산악보병대를 훈련시키라 명했다.[출처 필요]
4.1. 니케아 공방전
1096년 8월, 제 1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자, 제국은 저번과 다르게 준비되어 있는 상태였다. 고드프루아 드 부용, 보에몽, 레몽 4세, 보두엥 1세 등이 이끄는 십자군의 산발적 약탈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타티키오스는 알렉시오스 황제의 명을 받아 2000여명의 중투창병 펠타스트를 이끌고 십자군 지도부에 참가했다. 2000여 병력과 50여명의 휘하 중기병을 제외한 비잔틴 해군들도 마누일 부투미티스의 지휘 아래 마르마라 해와 아스카니오스 호수에서 투르크 지원 부대와 해군들을 고기밥으로 만들고 있었다.
니케아는 오랫동안 비티니아의 주요 요충지이자 룸 술탄국의 수도였다. 도시는 이에 걸맞게 튼튼히 방위되어있었다. 높이 10m, 길이 5Km가 넘는 튼튼한 성벽과 함께 300여개가 넘는 첨탑들이 촘촘히 배치되어 사각을 매우고, 산을 낀 지역은 공격 자체도 힘들었다.
하지만 십자군에게도 이점은 존재했다. 황당하게 궤멸된 민중십자군 이후로 투르크 제후들은 십자군을 깔보았고 침공을 이미 알고 있었던 룸 술탄국의 킬르치 아르슬란조차도, 그들을 다량의 거지떼 정도로만 취급한 채 십자군에 대한 방어를 방기하고 다니슈멘드 왕조와 싸우러 간 상황이었다.
아무리 튼튼한 성벽이라고 해도, 소규모 예비대로 모든 지역을 방어하기는 어려웠다. 1097년 4월에 시작된 공성은 이번 십자군이 단지 무장 순례자 집단이 아닌 숙적 비잔티움 병력까지 가세한 대규모의 정예병이라는 사실을 확신시켰다. 경악한 아르슬란은 다니드멘슈 왕조와 얼른 화평을 맺고 4만 대병을 니케아로 출발 시켰다.
하지만 로베르 2세와 레몽 4세가 이끄는 반격군에 룸 술탄국 병력은 분쇄되었고, 포위전의 승기는 십자군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6월 초, 타티키오스는 마누일 부투미티스의 해군의 지원을 받으며 니케아에 대한 파상 공세를 지휘했다. 6월 17일에 비잔틴 군대는 니케아의 보급선들을 불태우고 마르마라해와 아스카니오스 호수의 제해권을 장악했다.[8] 십자군 지도자들은 6월 19일에 총공세를 가해 니케아의 숨통을 끊기로 했다. 함락은 이제 목전에 다가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1세는 최대한 온전히 니케아를 수중에 넣고 싶었다. 함락된 성은 서유럽의 관습대로 3일간 약탈당해야 할 터였는데, 니케아는 겨우 15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제국의 땅이었고, 신민들의 절대 다수는 그리스도교도 그리스인인 상황이었다.
황제는 마누일 부투미티스를 룸 술탄국의 진영으로 파견하여 비밀 조약을 체결했다. 황제는 명목상 수천의 투르크 수비대와 킬르치 아르슬란의 만삭인 아내를 포함한 가족들을 포로로 잡아 안전을 도모해주는 대신, 니케아를 아무 손실 없이 비잔틴에 넘기는 것이었다. 술탄은 황제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6월 18일 밤, 타티키오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이 다른 십자군들 몰래 아스카니오스 호수의 제국 해군과 양동 작전을 벌여 니케아를 점령했다. 투르크 수비대는 약속대로 싸우는 척 하다가 도망쳤고, 로마군은 신속하게 니케아를 점령했다.
6월 19일 아침, 총 공세를 준비하던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쌍두 독수리 깃발이 니케아에서 휘날리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십자군 영주들은 동로마가 투르크와 작당하여 자신들을 엿먹였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십자군 영주들에게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를 내리며 치하했지만, 니케아를 약탈하지 못한 십자군은 동로마에게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4.2. 도릴레온 협곡 전투
1097년 여름, 십자군은 첫 번째 성지 안티오키아를 향해 갈 방법을 논의했다. 동로마 제국의 타티키오스와 마누일 부투미티스는 아나톨리아 남부 지중해 해변을 거쳐 안티오크로 향하는 우회루트로 향하자고 주장했다. 중부 아나톨리아의 고원지대는 여름에 식수를 얻기 힘들 뿐더러 룸 술탄국의 잔존병들이 매복하고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십자군은 한시라도 빨리 성지를 밟고 싶어했다. 레몽 4세와 로베르 2세 등의 영주가 타티키오스의 주장을 지지했지만 대부분의 십자군 기사들은 아나톨리아 중부를 가로지르자는 아데마르 주교와 보에몽의 주장에 찬성했다.
하는 수 없이 타티키오스는 동로마 산악 보병들을 이끌고 십자군 제 1진에게 길을 안내했다. 보에몽, 탱크레드 등의 노르만 십자군과 로베르 2세가 그와 합류했고, 고드프루아와 레몽이 이끄는 본대는 그 후위를 따랐다. 선두를 이끌던 로마-십자군 연합군의 수는 1만여명이 조금 넘었다. 기세등등하게 출발한 십자군이였지만 아나톨리아의 무더운 여름과 식수 부족으로 진격에 애로사항이 꽃피었고, 전진은 더뎌지기만 했다.
킬리치 아르슬란에게 있어서 이 때는 설욕을 위한 최적의 시기였다. 아르슬란은 놀랍게도 자신의 정적이었던 다니드멘슈에게 동맹을 청했다. 아직까지도 투르크인들은 십자군이 정확히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 알지는 못했다. 그들은 저 프랑크인들의 명목상 지휘자가 알렉시오스 1세이며, 타티키오스를 위시한 동로마군이 투입되었고, 이 모든 거대한 군사 전략이 아나톨리아를 수복하려는 동로마 제국의 대반격 정도일 것으로 생각했다. 다니슈멘드는 룸 술탄국이 멸망하면 다음으로 공격당할 것은 다니슈멘드 왕조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나톨리아 각지에서 내분에 전념하던 투르크 제후들은 최소한 이번만은 연합하여 십자군[9] 에게 타격을 입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렉시아스에 따르면 투르크 제후들은 카파도키아 전역에서 병력을 끌어모았다. 그 수는 가장 적게 잡은 사료가 2만 5천에서 가장 많게는 10만에 달했다고 한다.[10]
1097년 7월 1일 새벽, 룸 술탄국과 연합한 투르크 제후들은 도릴라이온 협곡의 십자군 제 1대에 파상공세를 가했다. 중기병으로는 고지를 선점한 룸 술탄국의 경장 궁기병대와 대처하기 어려웠으므로, 보에몽은 말들을 숨기고 기사들에게 하마하여 대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노련한 노르만 기사들은 밀집하여 장창으로 다가오는 경기병들을 찔러죽이는 등 활약을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공격당한 타티키오스와 2000여명의 동로마군도 중앙으로 밀집해 보에몽의 좌익을 수비했다. 3대 1로 밀리는 수적 열세 속에서, 동로마군은 투창과 다트[11] 를 던져대며 분전했고, 마침내 레몽과 고드프루아의 본대가 투르크 연합군의 우익을 덮쳤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전투는 우열을 알 수 없는 난전 상태였다. 양군이 한데 뭉쳐 혼전을 벌이는 동안. 우회한 교황청군과 아데마르 주교가 룸 술탄국의 병력 후미를 기습해 궤멸시켰다. 투르크군은 갑작스러운 퇴로 차단에 패퇴했고, 십자군은 대승을 거두어 수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4.3. 안티오크 공방전
타티키오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타우루스 산맥을 넘기 시작한 십자군은 곳곳에서 룸 술탄국 매복 부대와 가뭄, 보급 문제에 시달렸다. 기병들은 더위에 쓰러진 말을 잡아먹었고, 갑옷을 벗어던져 보병들이 전리품으로 가져가게 하였다. 탕크레드와 보두엥 등은 각각 동서로 소 아르메니아 왕국의 실지와 에데사로 향해 자신들의 영지를 늘리러 갔고, 병력의 부족과 동로마 제국의 소심한 지원으로 십자군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타티키오스는 십자군 영주들의 심기가 불편해지고 자신을 신경질적으로 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마침내 안티타우루스 산맥을 넘은 십자군은 고대 도시이자 성지인 안티오크 성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성은 10만 이상이 상주할 수 있게 지어졌지만, 중세 시기 동안 도시가 지리적으로 쇠퇴함에 따라 5만 정도로 인구가 줄었다. 하지만, 중세 시대의 기준으로는 아직까진 대도시의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12] 거기에 더해 적어진 인구는 오히려 식량 저장량을 높여서 수성을 용이하게 했다.
성의 수비자는 안티오키아 영주 야기 시안이었다. 그는 유능하였으므로, 효과적으로 십자군을 요격하고 공성 무기를 파괴하는 등 공격을 막았다. 그렇게 공성이 길어지면서 보급이 위태로워지고 십자군은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보에몽은 십자군 영주들이 제국을 배신하고 타티키오스를 암살할 모의를 짜고 있다고 귀띔했고, 타티키오스는 이 말에 속아넘어가 2000여 명의 군대를 끌고 십자군을 이탈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보에몽은 도주한 타티키오스를 비난하며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결국 그는 안티오키아를 차지하고 공국을 설립한다. 타티키오스와 보에몽의 악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보에몽이 안티오크의 수비대장 피루즈[13] 의 매수에 성공하여 점령 후 안티오크의 소유권을 자신에게 넘기도록 제후들을 설득하면서 동로마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타티키오스의 이탈을 부추겼다는 말이 있는데, 선후관계가 잘못되었다. 피루즈의 이탈은 1098년 1월 말이며, 피루즈의 매수는 4월에서 5월 사이에 이루어졌다.[14] 그러니 보에몽이 피루즈의 매수에 성공해서 제후들을 설득하고 타티키오스를 쫓아내야 했다는 서술은 잘못되었다.
보에몽이 타티키오스의 이탈을 꼬드겼다는 것 자체도 안나 콤네나의 서술에 따른 것이고, 안나 콤네나는 애초에 십자군에 대해 서술할 때 편견을 감추지 않았다. 특히나 동로마와 적대한 적이 있었던 보에몽을 서술할 때는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교차검증은 항상 필요하다.
툴루즈의 레몽과 함께 종군한 아귈레르의 레몽의 서술에 따르면 이 때는 보에몽 본인조차 떠나겠다는 뜻을 밝힌 적이 있다. 더군다나 이 쪽의 서술에 의하면 타티키오스는 본인과 소수의 인물만을 데리고 알렉시오스에게 지원을 요청하겠다며 떠난 것이라 본인의 소지품과 군막 등의 일체를 두고 떠났다. 물론 암살의 위협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원정의 장래를 비관적으로 보고 도망쳤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후에 블루아의 에티엔과 같은 주요 제후들의 이탈도 따르는 것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이 때까지는 동로마와 십자군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지 않았을 무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다수의 십자군들은 여전히 알렉시오스 1세가 직접 군을 이끌고 지원을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타티키오스가 알렉시오스에게 원군을 받아오겠다고 핑계를 대자 먹힌 것이다. 툴루즈의 레몽이 안티오크를 보에몽에게 넘기는 것을 반대한 명분 중 하나가 당초에 십자군이 점령한 땅은 동로마에 귀속된다는 맹세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중재안이 동로마군이 지원을 와서 소유권을 요구한다면 동로마에게 넘기고, 아니라면 보에몽에게 주도록 하는 것이었다. 십자군과 동로마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시점은 십자군이 안티오크를 완전히 차지했을 무렵이다.
그러니 타티키오스가 최소한의 눈치라도 있었다면 보에몽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정말로 보에몽이 그런 말을 했고 타티키오스가 그에 따라 움직였다면, 보에몽의 말을 명분으로 삼아 발을 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어쨌든 그의 이탈은 남은 십자군 모두에게 큰 충격을 줬고, 굳이 보에몽의 부채질이 아니더라도 모두들 그를 비난했다.
5. 여담
타티키오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코가 잘려져 있었다. 코가 잘리는 형벌은 반역자들에게 흔히 처해지는 제국식 형벌이지만, 그는 평생 황제에게만 충성했으므로 코가 잘린 이유가 반역 때문은 아닐 것이다. 역사가들은 그가 노예로 팔려왔던 시절에 코가 잘렸거나, 전투를 전두지휘하던 중에 코가 잘렸으리라 보고 있다.[15] 어릴 적부터 주인이자 죽마고우였던 알렉시오스 1세가 이를 불쌍하게 여겨 황금 코를 만들어주었다고 하며, 십자군들은 그를 보고 황금의 코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타티키오스는 본의 아니게 안나 콤니니가 반정을 일으키도록 도운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황제와 폴로를 하다가 낙마했는데, 그 반동으로 알렉시오스 1세의 무릎으로 날아가 상처를 입혔다. 무릎의 상처는 금방 나았지만 황제는 그 후 통풍으로 고생하게 되었고, 1118년에 사망한 이유도 그때 생긴 고질병적 통풍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황제가 후계 구도를 확실히 하지 않고 죽었기에 안나 콤네나에게 기회가 생긴 것이다.
비록 시작은 투르크인 노예였지만, 말년의 그는 동로마 제국의 대귀족 가문 하나의 창시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투르크족 이름인 타티크는 그리스어로 타티키오스로 바뀌어 그의 가문의 성씨가 되었다.
그의 가문은 후대에도 대대로 콤니노스 왕조의 군사 귀족들과 황실 각료로 충성을 바쳤다. 보통 그의 후손들은 황제의 집사장, 궁무처장, 혹은 군사령관, 지방관 등 보좌관이나 군지휘관으로 활동했으며, 그의 후손 콘스탄티노스 타티키오스는 훗날 마누일 1세 시절 시르미움 전투에서도 활약하였다.
그러나 타티키오스 가문은 충성을 바치던 콤니노스 왕조가 붕괴하면서 쇠락하였다. 이사키오스 2세가 안드로니코스 1세를 폐위시키고 제위를 찬탈하자, 콘스탄티노스 타티키오스는 이사키오스 2세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이사키오스 황제에게 패배하였고 동로마 제국의 관례대로 시력을 잃게 되었다.
[1] 향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모든 튀르크인들이 이슬람을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꽤 많은 튀르크인들이 모태신앙으로 정교회를 믿었다. 튀르크족은 원래 종교에 관대한 편이었으며, 현대의 튀르크족들 중에서도 정교회 신도가 각지에 존재한다.[2] 동로마 제국민들은 보통 정교회를 믿는다면 피부색에 별 상관 없이 제국민으로 받아들이는 다민족 국가였다. 제국이 그리스 민족국가라는 개념이 시작된 것은 12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3] 보통 메가스 프리미케리오스 직책은 환관에게 맡겨졌지만 중소 귀족에게도 맡겨지는 경우가 있었다. 노예에게는 엄청난 승진이라고 할 수 있다.[4] 헝가리인들과 튀르크인들이 혼성부대를 이룬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당시 헝가리에는 투르크계로 분류되는 여러 부족들이 살고 있었고 대부분 가톨릭과 정교회 신자였다. 또한 제국령인 불가리아 동부의 오흐리드 근처에도 기독교도 튀르크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우즈, 또는 우쩨족이라고 불렸으며, 디라히온 전투에 동원되었다. 사실 당시 에모스 산맥(발칸 산맥) 이북의 불가리아와 불가리아 동부 일부 지역은 제국의 통치를 간접적으로 받는 튀르크, 페체네그계 유목민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5] 다소 오래된 학설로, 어느 정도 여과해서 수용할 필요가 있다. 프로니아의 봉건성은 그렇게 두드러진 것이 아니었고, 각 프로니아들은 1204년의 혼란기를 제외하면 제국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6] 모든 민중십자군이 깽판만 친 건 아니다. 몇몇은 끝까지 숭고한 순례자의 모습을 지켜서 동로마인들도 감명받은 패잔병 무리도 있었다. 심지어 동로마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식량을 기부하거나 십자군에 참가하는 등 타의 귀감이 되는 십자군들도 있었다.[7] 황제와 술탄 모두 정면승부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티키오스는 단지 민중십자군이 박살나는 것을 선단에서 보고만 있을 수 있었다.[8] 당시 니케아에 주둔한 룸 술탄국 주둔군은 도시가 포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수를 통해서 보급을 문제없이 받고 있었는데 이 광경을 목도하고 빡친 십자군 지휘부가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에게 해군 지원을 요청하여(함선을 직접 육지 위로 끌고 왔다 한다) 동로마 해군이 제호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일단락된다.[9] 당시는 십자군이라는 걸 모르고 동로마 용병이라고 생각했겠지만...[10] 현대 역사가들은 룸 술탄국 연합군이 3만여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11] 우리가 생각하는 조그만한 장난감이 아닌 거의 무게추가 달린 얇은 쇠말뚝급의 무기이다.[12] 13세기 초 기준으로 10만을 넘는 도시는 기껏해야 파리, 제노바, 베네치아 등이었고, 50만을 넘는 도시는 북경, 바그다드,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도뿐이었다. 지금의 대도시인 독일의 베를린, 퀼른, 피사 등은 5만을 밑돌았고, 런던은 13세기 기준으로 4만으로 안티오크보다도 인구가 적었다. 그들과 200년 차이였던 11세기 당시의 안티오크가 얼마나 큰 위용을 자랑했는지 알 수 있다.[13] 이름 외에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으며, 통설은 이슬람교를 수용한 아르메니아인으로 갑옷 공방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가 주둔한 곳의 근처 성벽의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다.[14] Thomas Asbridge, "The First Crusade" 타티키오스의 이탈 p179, 피루즈의 배신 p200[15] 안나 콤니니는 그가 전투에 자기 목을 직접 내놓았다고 표현할 만큼 과감했다고 서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