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니코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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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안드로니코스 1세 (Ἀνδρόνικος Αʹ)
'''휘'''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Ἀνδρόνικος Κομνηνός )
'''생몰년도'''
1118년 ~ 1185년 9월 12일
'''재위 기간'''
1183년 9월~ 1185년 9월 11일
1. 개요
2. 생애와 치세
2.1. 탕아의 귀환
2.2. 무대가 마련되다
2.4. 도살자의 끝
3. 평가
4. 가족 관계


1. 개요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콤니노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찬탈을 통해 어린 친족을 죽이고 제위를 차지했다는 점에서는 조선세조와 비슷한 포지션이다. 다만 그 위업은 세조가 위대한 명군으로 보일 정도.
보통 동로마 제국암군을 뽑을 때 알렉시오스 3세같은 유명(?)한(그리고 '''억울한''') 사람이라던가 다른 막장 황제들에 가려져서 잘 언급되지 않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 어떤 황제도 감히 이룩 못한 기적을 행한 암군이자 폭군'''이라고 볼 수 있다. 그야말로 '''노련하게 정력적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마왕.'''

2. 생애와 치세



2.1. 탕아의 귀환


안드로니코스 1세는 조부인 알렉시오스 1세의 삼남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의 아들로, 마누일 1세와 사촌지간이었다. 거의 동년배였던 안드로니코스와 마누일은 자주 어울렸던 것으로 보이며, 1146년 마누일이 제위에 오른 직후의 원정에 참가하는 등 젊은 시절에는 황족으로서 주로 군에 종사했다.
1152년에는 킬리키아에 부임하여 아르메니아 공국을 공격하였고, 이후 공적을 인정받아 1153년에는 니소스 - 브라니세바(Braniseba)[1]등의 제국 서북방으로 발령받는다. 여기에서 안드로니코스는 야심을 드러내는 데, 바로 헝가리 왕국신성 로마 제국의 후원을 업고 마누일 황제 암살을 두차례나 기도한 것(1154년). 그러나 마누일의 측근들에 의해 이는 실패하였고 안드로니코스는 체포되어 수도의 감옥에서 9년여간을 지내게 된다.
1164년, 기어이 탈옥에 성공한 안드로니코스는 제국의 북쪽 국경인 다뉴브 강을 넘어 몰다우 지방을 거쳐 갈리치아 공국에 의탁한다. 갈리치아와 불편한 관계이던 제국은 對 헝가리 왕국 전쟁의 사전 준비를 위해 갈리치아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고있던 안드로니코스를 일종의 외교 사절로 이용하였고, 공적을 인정하여 안드로니코스를 다시 받아들인다(1165년).
1166년, 안드로니코스는 다시금 킬리키아로 발령받는다. 그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막장 행보를 시작한다. 당시 안티오히아를 수복한 상태이던 마누일은 전 황후가 죽어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를 새로 황후로 들인 상태였는데, 안드로니코스가 황후의 자매이던 필리파와 내연 관계를 가진 것이다.[2] 결국 황제의 추궁을 받게 된 안드로니코스는 키프로스 - 킬리키아 일대에서 횡령한 세금과 함께 예루살렘 왕국으로 도망친다.
다시금 국외에 의탁하게 되었으나 여기서도 호의를 이끌어 낸 안드로니코스는 이번엔 보두앵 3세의 미망인이자 알렉시오스 1세의 증손녀인 친척 테오도라 왕비[3]와 추문을 뿌리게 된다. 당시 제국의 영토는 안티오히아에 이르고 있었고 예루살렘 왕국은 제국에 의존하고 있었으니 사실상 주변의 기독교권은 전부 그의 적이 된 셈이었다. 결국 안드로니코스는 테오도라와 함께 이슬람권으로 도피한다.
다마스커스를 시작으로 시리아에서 이라크, 이란, 조지아 지역을 아우르는 도피는 제국의 적국인 룸 술탄국까지 이르게 된다. 여기서 안드로니코스는 '''튀르크인 군사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제국령을 침범하고 약탈'''하였는데, 이러한 막장 행각은 제국의 인내심을 폭발시켰고 교회가 파문을 내리게 만든다.
명실공히 제국의 공적이 되어버린 안드로니코스의 행각은 아내와 자식들이 제국 측에 잡히면서 끝난다. 온갖 일탈 행위를 저지르고 다닌 그였지만 결국 한명의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던 것. 콘스탄티노플로 향하여 마누일 앞에 무릎 꿇은 안드로니코스는 황실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사실상의 항복 선언을 하게되고, 마누일은 그를 용서하여 흑해의 해안지대에 요양지를 마련해준다.[4]
그렇게 탕아의 행보는 멈추는 듯 했다.

2.2. 무대가 마련되다


그러나 최대의 라이벌이자 장애물인 마누일이 사라지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비록 사촌에 의해 가려졌지만, 그는 분명 능력이 있는 남자였다. 배우처럼 연기와 언변에 능숙했으며, 여러 여성을 유혹할 만큼 매력적이었고, 군대를 비롯한 여러 공직을 지낸 경력과 오랜 기간 쌓은 명성(?) 또한 있었다. 1180년 마누일 사후 제국은 어린 알렉시오스 2세를 내세운 황태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를 필두로 한 섭정단(알렉시오스 대군주(1135?~1182)[5])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일어난 혼란은 늙은 야심가에게 기회를 주게 된다.
당시 제국에는 마누일의 친서방 정책으로 인해 많은 서방인들이 존재했다. 상인은 물론이요 관료 집단에도 침투해 있어서 마찬가지로 서방인인 황후와 알렉시오스 대군주의 섭정단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여러모로 이질감을 느꼈던 제국민들은 자신들이 '야만인'으로 보던 서방인에 대해 반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상당히 만연해있던 부정부패는 이를 부채질하여 아직 젊은 미망인인 황태후가 불륜을 저지른다는 소문 따위를 낳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마누일의 장녀인 마리아가 섭정단이 동생 알렉시오스 2세의 제위를 찬탈할 것으로 의심[6]하여 남편과 함께 수도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쿠데타는 '여론을 등에 업었으나 정당성과 실력이 부족한' 황녀파의 숨통을 '정당성과 실력은 갖췄으나 여론의 지지가 부족한' 섭정단이 끊지 못하면서 어중간하게 멈춘 상황이었다. 황녀파는 황족의 명사(?)인 안드로니코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는 '황가에 충성한다'라는 맹세를 한 안드로니코스가 이를 지킬 뿐이라는 명분을 준 셈이 되었다. 요양지를 출발한 안드로니코스는 수도로 향하면서 앞을 막는 사람들과 진압군까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며 수도에 입성하였고 이에 맞춰 일어난 폭동은 성내에 거주 중이던 '''몇 만명 규모의 서방인들의 대학살'''[7]로 이어진다. 이러한 살육을 방관한 - 혹은 부추겨놓고 모른체 한 - 안드로니코스는 황녀파를 손쉽게 제압하였다. 이와 함께 그의 또 다른 당질인 알렉시오스 대군주를 실명시킨뒤 숙청하고, 그토록 염원했던 것을 차지한 실권자가 된다(1182년).

2.3.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황태후와 인척이었던 헝가리가 침공하자 이미 여론의 지지를 잃은 황태후마저 살해해 버린 안드로니코스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알렉시오스 2세를 지키기 위함이라며 공동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는 얼마 안가 어린 황제를 살해하고 마르마라 해에 시신을 던져버렸다. 평생 꿈꾸던 황제의 자리는 그만의 것이었다(1183년).
당연히 반발이 일어났다. 유럽 지역은 물론 마누일의 가계(家系)에 충성하던 아나톨리아 지역에서도 정통한 황제를 죽이고 자리에 오른 찬탈자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안드로니코스는 아직 충성하던 군대를 소집하여 진압에 나선다. 로파디온 - 니케아 - 프루사 등 비티니아 지역에 대한 진압은 잔혹한 대학살로 본보기를 보이며 끝을 맺었고 드러난 반대파는 소멸해버렸다. 찬탈자라지만 명색이 황제라는 자가, 끌어안아야할 자신의 신민을 향해 칼을 휘두른 정신나간 사건이었다.
진압을 마친 안드로니코스는 이번엔 수도로 돌아와 피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아직 남아있던 반대파를 갈아버리던 피바람은 곧 명사(名士)들에게도 들이닥쳤고 황족들도 덮쳤으며 과거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까지 예외는 아니었다. 긍정적이게도(?) 마누일 말기의 부정부패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조금의 혐의나 고발이 있으면 죄다 죽여서 부패의 주역이던 서방인, 황족, 관료들이 소멸해 버렸으니까.

2.4. 도살자의 끝


찬탈과 폭정으로 안밖을 가리지않고 적을 만들어낸 제국이 외침을 받지 않을리가 없었다. 이미 헝가리의 침공이 있었으며 혼란을 틈타 키프로스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8]와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계 세력이 떨어져나갔고 룸 술탄국의 압박 또한 이어졌다. 숙청을 피해 달아난 황족들이 주변 국가로 망명하면서 서방인 학살에 대한 보복과 함께 좋은 명분을 제공해 주었으며 이는 곧 시칠리아 왕국의 침공으로 현실화 되었다. 시칠리아군은 상륙 즉시 디라히온을 함락시키고 수비군과 요격군을 격파하며 파죽지세로 동진하였고 제국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까지 순식간에 무너트렸다.
정권에 충성하지 않는 군대와 시민들은 저항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안드로니코스의 실책으로 요격군이 족족 격파당하자 테살로니키가 위치한 마케도니아 지방에서부터 수도에 이르는 트라키아 지방까지의 방위 체계는 모조리 붕괴되었다. 그럼에도 안드로니코스는 신나는(...) 학살을 수도에서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안드로니코스의 총신이자 간신이었던 스테파노스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9]의 악의에 의해 살생부에 오른 이사키오스 앙겔로스가 자신을 잡으러온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를 우발적으로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겁에 질린 이사키오스는 교회로 도주하였고 이를 알게 된 수도 시민들은 그 동안 쌓인 불만을 한꺼번에 터트리는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당황한 안드로니코스는 폭동을 진압하고 이사키오스를 잡아들이려 했으나 이미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기아 소피아에 도망가있던 용감한(?) 이사키오스는 즉흥적으로 황제로 추대되어 이사키오스 2세가 되었고 대세를 읽은 군과 근위대는 안드로니코스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결국 시내로 끌려나간 폭군은 오른손이 잘리고 눈이 뽑히게 되었으며 온갖 모욕을 당하다 죽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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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개인으로만 보면 대단한 인물이다. 분명 능력있었고 매력적인 남자였음에 분명하며, 외국을 떠도는 고달픈 도피 행각에도 불구하고 건강을 유지하고 야심을 키워나가는 근성도 있었다. 사실상의 항복 선언 이후에는 마누일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도 보였으며 수도로 향할 때에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끌어들이는 카리스마까지 보여준다. 마누일대제가 없었다면 좀더 나은 평을 남겼을지도 모르는 인물이다. 그러나 황제라는 목표 자체에 매몰되었던 것인지 황제가 된 이후의 행동은 전대 황제들과 너무나 비교되는 비전 없는 폭군, 암군의 모습이었다.
사실상 동로마 후기 몰락의 원인의 상당수가 이 사람과 이 사람 덕(?)에 오른 이사키오스 2세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안드로니코스는 마누일 1세가 힘들여 구축한 외교 관계를 박살내서 주변국으로부터 고립을 가속화 시키고 도움이 될 만한 국가를 이탈시켜 국제적 위상 추락을 야기했다. 선대의 황제들이 구축한 체제를 통해 멈춰놓은 탁시스(Taxis) 체제의 붕괴는 그의 선동 정치와 파플라고니아 출신들의 득세로 확정되었다. 그가 섣부르게 정치에 손을 대면서 중앙 - 지방간의 상호 의존 관계가 끊어지자 결속력을 잃은 국가는 와해되기 시작했으며, 이를 수습해야할 이사키오스 2세는 실정를 거듭한 끝에 형해만 남은 국가를 형 알렉시오스 3세에게 물려주었다. 알렉시오스 3세는 필사적으로 파탄난 제국을 수습하려했으나, 결국 안드로니코스가 던진 부메랑인 4차 십자군에 의해 제국을 구원하는데 실패하였다.
선대 콤니노스 황제들이 100여년간 애써 중흥시킨 제국은 당시 유럽 최강국 중 하나였으며, 가장 유서 깊고 가장 부유한 선진국이었다. 물론 테마 제도가 사실상 해체된 뒤 제국의 군사력은 양적인 축소를 겪었고, 마누일 1세의 말기에는 군비의 비중도 높아지면서 체제는 불안함을 보이고 있었다. 분명 콤니노스 100여년을 지내면서 황제 개인에게 제국이 많이 의존하게 되었지만, 국내외의 연결고리가 많은 알렉시오스 2세가 무사히 장성할 때까지는 버틸만한 기본은 있는 나라였다. 그러한 제국의 미래를 개인의 욕심으로 크게 전환시키고 결과적으로 망쳐버렸다는 점에서 안드로니코스를 폭군이자 암군으로 평할 수 있겠다.

4. 가족 관계


알렉시오스 1세(조부)
이리니 두카이나(조모)
안나 콤니니(고모)
테오도라 콤니니(고모)
알렉시오스 3세(5촌 조카, 테오도라 콤니니의 손자)
이사키오스 2세(5촌 조카, 테오도라 콤니니의 손자)
요안니스 2세(백부)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사촌형)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사촌형, 알렉시오스 대군주의 아버지)
알렉시오스(대군주, 당질)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사촌형)
테오도라 콤니니(이사키오스의 딸, 예루살렘의 왕비, 안드로니코스 1세가 바람을 핀 친족인 당질녀)

마누일 1세(사촌)
마리아 콤니니(당질녀)
알렉시오스 2세(당질)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의 3남)
마누일 콤니노스(장남)
트레비존드의 알렉시오스 1세(손자)
다비드 콤니노스(알렉시오스 1세의 동생)
요안니스 콤니노스(차남)
[1] 현재 세르비아 동부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불가리아 지방에 접하고 북으로는 다뉴브에 닿는 지역.[2] 사실 처음도 아니었다. 과거 킬리키아에 있을 때부터 사촌인 마누일의 누이 에브도키아와 근친상간 관계였던 것. 다만 마누일 역시 당시에 조카와의 근친상간을(...). [3] 13세에 시집왔으나 결혼 당시 28세 였던 보두앵 3세는 후사조차 없이 테오도라가 17세일 때 죽었다. 48세인 안드로니코스를 만났을 때는 한창인 21세 였다. 사실 이러한 나이차 많은 관계나 어린 미망인은 중세에 흔한 편이었다. 다만 안드로니코스가 많이 막장일 뿐.[4] 말년의 마누일은 악화 된 건강 때문에 어린 아들 알렉시오스 2세를 위한 안전 장치를 마련하느라 결혼 동맹을 맺고 무리한 군사 행동을 나서는 등 분주했다. 위험한 친족을 국내에서 통제하에 두는 것 또한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밖으로 다니게 내버려두면?... 그 결과는...[5] 요안니스 2세의 차남인 안드로니코스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는 또 다른 당질[6] 알렉시오스 대군주가 알렉시오스 2세를 폐위시키고, 황제로 즉위하려는 의심을 받기도 하였다. 알렉시오스는 알렉시오스 2세 못지 않게 안드로니코스 1세보다 정통성이 있었다. 왜냐하면 마누일 1세가 요안니스 2세의 4남이고, 안드로니코스는 요안니스 2세의 차남이기 때문이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굳이 조선왕조로 비유하면 (대군의 아들)작위에 불과한 방계황족이다. 즉 알렉시오스 2세에게는 안드로니코스 1세보다 알렉시오스 대군주가 황제의 최측근 황족명사이다.[7] Massacre of the Latins(영어 위키백과). 이 사건이 22년 후 4차 십자군이 탈선한 명분 중 하나가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제위 계승 전쟁 중 일이 꼬여서 대금을 못 받았다고 해도, 채권이나 저당을 잡지, 콘스탄티노플 시를 아예 때려부숴서 강제로 상환받자는 생각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8] 요안니스 2세 황제의 아들의 딸의 아들. 즉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는 6촌 조카손자(재종손) 되겠다.[9] Στέφανος ἁγιοχριστοφορίτης, 안드로니코스 1세 시기의 공문서국 국장(Logothetes tou dromou)이자 알렉시오스 2세를 죽인 실행범으로, 포악한 성격으로 인해 시민들로부터 증오를 받았다.[10] 동로마의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플 히포드롬의 두 기둥에 묶인 안드로니코스 1세를 누가 더 깊이 찌를 것인지를 놓고 제국의 라틴인 병사 두 명이 다투기까지 했다고 한다. 3년 전의 대학살에 대한 서방인의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