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스키기 에어맨

 

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 육군항공대에서 복무했던 흑인 군인들
1.1. 배경
1.2. 시작
1.3. 영광 : 332비행대 "Red Tails"
1.4. 그늘 : 477 비행대
1.4.1. 최초의 흑인 폭격 비행대
1.4.2. 이어지는 푸대접
1.4.3. 프리먼 비행장의 반란
1.4.4. 반란 이후
1.5. 전쟁이 끝난 뒤
1.6. 매체에서 등장
2. 1번 항목을 소재로 한 미국 TV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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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 육군항공대에서 복무했던 '''흑인''' 군인들



일반적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흑인들로 구성된 것으로 유명한 제332전투비행대를 일컫는 단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332전투비행대 외에도 미 육군항공대에서 복무했던 흑인 조종사들 외에도, 흑인들로만 구성된 항공승무원 및 지상 근무요원들을 통칭하는 단어이다. 이름의 유래는 이들이 훈련받았던 기지가 위치한 미국 앨러배마주 터스키기에서 유래했다.
단편적으로 보면 21세기 시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미국의 인종 차별 문제와 미군 내에서의 유색 인종 불신이 낳은 특이한 무용담이고, 넓게 보면 그러한 인종 차별을 없에기 위해 미군 내의 흑인들이 치열하게 투쟁해온 과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러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 부대인 만큼, 이 문서에서는 2차 대전을 전후로 한 미군내 인종 차별 철폐 과정도 간단히 언급한다.

1.1.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30년대말, 1940년대초 당시 미국의 흑인들은 미국내에서 일종의 2등시민 취급을 받았고, 이로 인해 정치,사회 분야에서 숱한 차별을 받고 있었다. 군 복무도 예외는 아니어서 흑인들의 입대는 인종을 분리한 채 극히 제한적으로 이뤄졌다. 육군의 경우 흑인 병사들로만 구성된 소수의 전투부대를 백인 장교의 지휘하에 운용하였으며, 실험적, 정치적인 성격이 짙었던 육군 전투부대 이외의 경우에는 물자 수송[1]이나 부대/함정 내 잡역에 동원[2] 되는데 그쳤다.
항공분야의 경우, 1930년대 후반에 미 정부의 민간 조종사 양성 정책에 편승하여 흑인 조종사들이 생겨났지만 전체 조종사 수에 비하면 그 비중은 초라한 것이었다.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에 대한 군문의 차별을 없애려는 시민운동가들의 노력 덕에 1930년대 말에 흑인들도 군의 조종사가 될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시작했고, 1941년 9월에 최초의 흑인 전투비행대가 창설되었다.

1.2. 시작


최초의 흑인 전투비행대인 제99전투비행중대는 이들은 최초의 흑인 항공 요원으로서 훈련에 매진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인종 분리 정책이 이들의 발목을 또 다시 잡았다. 항공부대의 운용은 조종사와 항공기, 정비사만으로 이뤄지는게 아니라 전문적인 항공 의무관을 포함한 각종 지원 인력들이 있어야 하는데 이들 조종사들을 지원할 흑인 인력이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조종사, 정비사 양성과 함께 지상 지원인력의 양성도 같이 이뤄졌다.
더 큰 시련은 미 육군 항공대 지휘부의 편견이었다. 원래 계획한 규모 이상의 흑인 병력들을 터스키기에 떠넘기고 원래 목적 이외의 명령도 더해지면서 기지 운용 및 항공 요원 양성에 어려움이 더해졌다. 때문에 항공장교로 양성된 흑인 장교들은 오랫동안 백인 장교들의 지휘하에 있어야만 했다.

1.3. 영광 : 332비행대 "Red Tails"


제332전투비행대 참조

1.4. 그늘 : 477 비행대



1.4.1. 최초의 흑인 폭격 비행대


흑인들로 구성된 최초의 폭격 비행대는 1943년 5월에 중대규모로 창설되었다. 이 비행대는 B-25폭격기를 장비하였으며, 이후 제477폭격비행대 휘하에 총 4개 비행중대 규모로 확장되었다. 최초 구상은 총 7개 비행중대를 거느리는 것이었으며 당시 폭격비행대 구성과 이후 실전배치까지의 기간은 약 4개월 정도 걸렸고, 고등교육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첫 흑인 폭격 비행대라는 걸 감안해도 1944년 11월에는 실전배치가 가능하리라 보았다. 그러나, 당시 미군내에 만연한 인종차별은 이들이 날아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4.2. 이어지는 푸대접


루즈벨트 대통령과 인권단체들의 압력으로 흑인비행대를 구성했지만, 기존의 백인 장교진들은 대부분 이들을 자신들과 같은 군인으로서 대해줄 의사가 없었다. 부대내 각종시설은 흑인용, 백인용으로 구분하였고, 공공 이용 공간은 줄을 그어서 줄 너머로의 이동을 제한하였다. 흑인 장교들의 장교클럽 사용은 엄격히 제한(사실상 금지)되었고 그조차도 백인 지휘관들이 흑인 장교들을 교육생 신분으로 묶어버리면서 완전히 금지시켜 버렸다. 최초 창설 이후 2년간 부대 이동만 해대면서 시설은 점점 열악해졌다. 1945년 3월에는 켄터키주 프리먼 비행장으로 이전하였는데, 여기는 B-25를 운영하기엔 열악한 환경이었다. 거기에다 고속 승진을 해대는 백인 장교들과 달리 교육생 신분으로 묶인 흑인 장교들은 진급조차 막힌채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흑인 부대원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불만은 고조되었다.

1.4.3. 프리먼 비행장의 반란


1945년 4월, 교육생 신분의 흑인 장교들을 초급 장교로 전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이에 흑인 장교들은 백인들에게만 허용된 장교클럽의 이용을 시도했다. 그러나, 백인 지휘관들은 이들을 저지하고 몇몇을 체포했다. 이에 흑인 장교들이 반발하면서 이른바 프리먼 비행장의 반란이라는 시위사태로 비화되었다. 최종적으로 104명의 흑인 장교들이 체포 및 기소되었다가 인원 단체 및 정부의 압력으로 흑인장교 3명만 재판에 회부되고 그중 1명이 유죄 평결 및 불명예 제대하게 되었다.

1.4.4. 반란 이후


프리먼 비행장의 반란 이후, 부대는 사정이 좀 나은 다른 기지로 다시 이전하였고, 2개 비행중대가 해체되었다. 대신 Benjamin O. Davis Jr.가 최초의 흑인 전투비행대인 제99전투비행중대를 이끌고 날아와서 477비행대에 배속시켰고 데이비드 자신은 혼성비행대로 변경된 477비행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477 혼성비행대의 고위 지휘관들이 모두 흑인들로 물갈이되면서 부대는 수습되었다. 477비행대는 대 일본전 투입을 목표로 다시 훈련에 들어갔지만, 이들이 전장에 나설 기회는 없었다.

1.5. 전쟁이 끝난 뒤


2차대전 중 미군은 332비행대를 포함하여 흑인 및 유색인종을 전투부대로 투입하였다. 이런저런 트러블이 있었고 개중에는 477 비행대 건 같은 불상사도 벌어졌지만, 백인 이외의 인종이 전투에서 열등하다는 편견은 당연히 서로의 목숨을 부여잡고 싸우던, 이들과 함께 독일군과 싸웠던 백인 장병들 사이에서는 크게 사라졌다.(다만 본토에서 띵가띵가 놀던 시민들은 그딴거 없었고, 백인 병사들과 전우애를 나누던 흑인 병사들은 전역 후 린치에 시달리게 된다. 독일군의 마우저 소총보다 무서운게 미국인들이 들고다니던 샷건이었던 것.)
1948년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은 미군내에서 인종, 피부색, 종교, 국적에 따른 차별을 폐지하는 행정 명령 9981에 서명하면서 특정 인종만으로 구성된 부대들은 모두 해체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역전의 제332비행대와 상처만 남은 477비행대도 포함되었다. 이후로도 미군내에서 차별을 없애려는 시도는 계속 이어져서, 21세기 시점에서는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미군내의 차별은 없다. 그러나, 인종, 종교, 국적 등으로 인한 트러블은 21세기에도 현재진행형이다.
최초의 흑인 비행대를 이끌었던 벤자민 오 데이비스 주니어[3]는 미군의 4번째 흑인 육군 장교이자 최초의 흑인 공군 장교로 이름을 남겼으며, 한국전쟁에도 F-86을 타고 참전했다.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당시의 미군 사정을 훌륭한 인품으로 극복하고 전공까지 세운 공을 기려서 1998년에 명예 4성 장군이 되었다. 그는 2002년에 향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데이비드 이외에도 터스키기 출신 대원들 다수는 전후 미 공군 및 우주항공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데이비드처럼 한국전쟁에 참전한 인물도 많다.
프리먼 비행장의 반란에 연루된 477비행대의 흑인 장교들은 1995년에 모두 사면 복권되었고(50년 걸렸다), 시위 관련 기록도 삭제되었다. 최초의 흑인 전투비행대였던 제99중대는 1988년에 미 공군 항공교육훈련사령부 예하 훈련비행대로 재창설되었다. 현 99중대는 2차대전 중의 역사를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 꼬리날개 끝부분을 붉은색으로 칠하고 있다. 부대의 역사에 걸맞는 부활이랄 수 있다.
제332전투비행대는 종전 이후 477비행대와 합쳐지면서 제332전투비행단으로 승격되었다가 행정 명령 9981의 발효로 해산하였다. 그리고, 2002년에 중동지역을 활동무대로 하는 제332원정항공단으로 부활하였다. 재창설 당시엔 2차대전중 332비행대 소속이었던 터스키지 에어맨들이 직접 축하하기도 했다.
477비행대 역시 1948년에 해산하였지만 60년만에 F-22를 장비한 전투비행대로 부활하였다. 2006년에는 2차대전 중 및 그 이후로도 이어진 공적을 기려서 '''터스키지 에어맨들 모두에게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이 수여'''되었다.

1.6. 매체에서 등장



2. 1번 항목을 소재로 한 미국 TV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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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을 소재로 제작된 미국TV 영화. 1995년 작이며, 주연으로는 『매트릭스』의 모피어스 역으로 유명한 로런스 피시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활약했던 '붉은 꼬리날개천사들"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 제332전투비행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주인공 모두가 흑인인데, 그 이유는 이 영화가 흑인들로만 구성된 최초의 전투비행대인 332전투비행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 '터스키기'는 이 부대가 창설된 비행장 이름이다.
참고로 스토리면에서는 나름대로 교훈적이고 인간적인 면에서 볼 것도 있지만, 비행 장면을 빼면 영화는 정말 재미없다고 한다. 그리고 TV 영화라서 매우 저예산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폭파 씬은 실제 2차대전 당시의 기록 필름을 사용했다.
2012년엔 역시 같은 소재로 영화화한 레드 테일이 개봉하였다. 이 작품 역시 화면 연출이 최신 기술로 세련되어진 것을 뺀 나머지는 이 1995년작과 수준 차이가 없다는 평이다.

[1] 물자 수송임무에서 제일 유명한 사례는 '레드볼 익스프레스'로 알려진 서부전선 미군 보급부대의 트럭 운전수들이 있다.[2] 진주만 공습 당시의 모범적인 전투행위로 해군 십자장을 받은 도리 밀러가 대표적인 예이다. 진주만 공습을 영상화할 때 등장하는 대공 기관총을 잡은 흑인 병사가 바로 이 사람을 묘사한 것이다.[3] 그의 아버지 벤자민 오 데이비스 시니어는 최초의 흑인 육군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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