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미스토클레스

 


<color=black> '''테미스토클레스
Themistocles'''

<colcolor=black><colbgcolor=black> '''이름'''
테미스토클레스
Θεμιστοκλῆς
Themistocles
'''출생'''
기원전 524년
아테나이 페리자
'''사망'''
기원전 459년
마그네시아[1]
'''직업'''
정치가, 군인
'''주요 참전'''
살라미스 해전
아르테미시온 전투
마라톤 전투
1. 개요
2. 생애


1. 개요


아테네정치가, 군인.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자인 명장.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게 한 1등 공신.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서구권에서 최고의 제독을 논할 때에는 호레이쇼 넬슨과 함께 항상 언급된다.[2]

2. 생애


피리에프스 만을 새로운 아테네의 항구로 만들 것을 주장하고 대규모 함대 건조계획을 실천에 옮겨 아테네를 고대 그리스 시대 최강의 해군국으로 만든 아테네 해군의 아버지.
그는 모친이 아테네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BCE 508년 클레이스테네스가 아테네의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을 주는 법을 제정했을 때 비로소 아테네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일로 그는 민주제에 공감하게 되었으며, BCE 493년에 사법과 민정(民政)을 담당하는 아테네의 최고 행정관인 아르콘으로 뽑혔다. 이후 피리에프스 만의 항구 건설 사업을 추진해 만들어냈고, 밀티아데스의 재판에 참여, 그를 무죄로 만드는 데도 공헌했다. 이후 마라톤 전투에 참여했다.
그 이전까지 아테네는 마라톤 전투에서도 알 수 있듯 육군국[3]이었으나, 라우리온 일대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은을 가지고 200여 척에 달하는 갤리선을 건조해 그리스 최대의 해군을 양성하는 계획을 추진했고, 특유의 말빨과 계략으로 정책을 수립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크세르크세스 1세가 직접 지휘하는 2차 페르시아 원정군이 침공하자, 사실상 그리스 해군의 사령관이 되어(명목상 사령관은 스파르타인이었다)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1차 저지하려 기도한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기술된 바에 따르면, 상당한 숫적 열세 속에서도 나름 잘 싸웠지만 테르모필레 전투가 3일 만에 그리스 연합 육군(스파르타)의 패배로 끝났고, 페르시아 군이 포키스를 거쳐 남쪽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이 연합 사령부에 전해지자 아테네 측에서는 사령부에 연합군이 먼저 나서서 페르시아가 아테네에 도달하기 전에 저지해 달라 요청했으나 사령부 측은 "이렇게 된 이상 펠로폰네소스라도 지켜내야 한다"며 아테네 측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시민들에게 "육지를 포기하고 바다에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시민들을 모두 아이기나 섬으로 피신시키고, 남자들이 나서서 해상에서 싸우자"고 설득했으나 이미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아테네 시민들은 아테네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테미스토클레스가 신전 대사제에게 부탁을 하여 제단의 제물을 거두지 말라고 부탁했는데, 제단의 제물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곧 신이 제물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므로 불안에 빠진 사람들이 사제에게 영문을 물었다. 사제는 '여신 아테나께서 바다로 떠났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고, 여신이 안 계시는데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며 사람들이 동요하자 사제는 '나무 성으로 대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사제의 이 말을 이용하여 '나무로 만든 성이란 배를 말하는 것'이라 시민들을 다시 한번 설득했고, 시민들은 결국 고향을 버리기로 결정하고 모두 아이기나로 향하는 피란길에 오른다. 이후 페르시아는 텅 빈 아테네에 들어와 아테네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그 후 장정들이 탄 200척 함대를 이끌고 연합으로 복귀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작전회의를 열었는데, 코린토스 쪽으로 퇴각하여 육군과 합류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다수결의 원칙으로 인해 결국 후퇴론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끝까지 반대하여 총사령관 에우리비아데스를 찾아가 간곡히 설득하여 다시 회의를 열었고, 후퇴하려는 다른 함대 사령관들을 설득[4]했으나 결국 회의는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끝나고 만다. 그러자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인 가정교사 시킨누스에게 부탁하여 크세르크세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게 했다.

그리스 연합이 전의를 상실해 후퇴하자는 의견이 중론인데, 사령관 테미스토클레스가 항복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연합이 살라미스에서 이탈하면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 우려되므로 그들의 퇴로를 차단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편지를 수령한 크세르크세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과거 자기가 도편 추방했던 아리스테이데스를 다시 데려와 "우리가 힘을 합쳐봤자 이미 장군들이 코린토스로 후퇴하려고 하니 도리가 없소"라고 능청을 떨었다. 당연히 아리스테이데스는 "페르시아의 200여 척 함대가 이미 퇴로를 차단하는 것을 보고 왔는데 무슨 수로 후퇴를 한단 말이오?"라고 반응했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짐짓 몰랐다는 듯이 "퇴로까지 막혔다면 결사항전밖에 답이 없구려"라고 한다. 사실상 여기서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리스테이데스를 장군들을 설득할 히든 카드로 만든 것이었다. 예상대로 다음 회의에서 아리스테이데스가 이미 퇴로가 차단당했다는 사실을 장군들 앞에서 알리고, 후퇴마저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자 결국 후퇴론이 꺾이게 된다. 이렇게 벌어진 것이 바로 살라미스 해전이며, 잘 알려져 있듯, 살라미스 해전은 그리스 연합의 대승으로 끝나게 된다.
승리 후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리스테이데스에게 은근슬쩍 "헬레스폰트 해협의 뱃길을 끊어버리면 페르시아 군은 사면초가의 상황이 될 것이오"라고 제안했는데, 아리스테이데스는 "그랬다간 이번 해전에서 우리가 결사항전했듯이 저들도 결사항전하려 들 것이니 절대 안되오."라며 펄쩍 뛰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그 말이 맞다며 동의한 뒤 페르시아 포로를 풀어주며 크세르크세스에게 '연합이 헬레스폰트 해협의 뱃길을 끊어 우리를 봉쇄한 뒤 포위해 공격하려 한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가 대왕을 존경하여 이를 늦추고자 하니 대왕께서는 그 틈에 속히 철군하시라'라고 귀띔하게 한다. 완벽히 속아넘어간 크세르크세스는 마르토니우스만을 남겨두고 속히 철수했는데,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틈을 노려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마르토니우스를 전사시키고 페르시아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 후에도 테미스토클레스는 멈추지 않았는데, 우선 연합을 배신하고 먼저 항복했던 안드로스 섬으로 찾아가 영주에게 벌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하며 "우리에게는 '설득'이라는 신과 '강제'라는 신이 있으니 둘 중 하나를 고르시오"라며 협박했다. 그런데 영주가 "우리에게는 '가난'이라는 여신과 '불능'이라는 여신이 있습니다"라며 지불을 거부했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즉시 공격을 개시해 안드로스를 평정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안드로스 섬 외에 페르시아에게 항복했던 여러 국가에서 먼저 나서 벌금을 지불했고, 이로 인해 테미스토클레스의 주가가 상승하게 된다.
살라미스 해전 전후 그리스 소속 국가들이 모여 델로스 동맹을 결성했는데, 그 중 아테네가 전쟁 중에 파괴된 해안의 성을 보수하는 작업에 돌입하자 '아테네가 스파르타를 공격하기 위해 성을 증축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이 소문을 들은 스파르타가 아테네 측에 항의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직접 스파르타로 담판을 지으러 나갔다. 그런데 막상 스파르타에 도착한 테미스토클레스는 핑계를 대며 담화 날짜를 자꾸 미루거나 "사실무근이다"라며 책임을 회피하며 시간을 끌다가 "정 의심되면 사신을 보내어 알아보시오"라고 말했고, 스파르타는 할 수 없이 사신을 파견했는데, 아테네에서는 사신들을 가두어버렸다. 그리고 노인, 여자, 아이들까지 모두 나선 성 증축이 거의 끝나간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테미스토클레스는 그제야 "아테네를 지키겠다고 아테네의 시민들이 하는 일인데 스파르타가 왜 자꾸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요?"라며 스파르타의 뒤통수를 친다. 이 성은 피레우스 항구를 줄줄이 연결하는 대규모의 성으로 당대 최고의 해상무역 중계점이자 군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의 전성기는 거기까지였다. 스파르타에 잡혀있는 테미스토클레스와 아네테 측의 잡혀있는 사신들을 교환하여 아테네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아리스테이데스가 뛰어난 정치로 인기를 얻자 자연히 인기가 떨어진 테미스토클레스는 결국 BC 479년 집정관직에 선출되는 데 실패해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반 스파르타 정책을 펼치다가 친 스파르타 정치인이었던 키몬(밀티아테스의 아들)의 정치적 공세에 밀려 BC 472년 도편추방당한다. 그 다음해, 한 스파르타인이 페르시아와 내통하다 발각된 사건이 있었는데 테미스토클레스가 관련자로 지목되어 누명을 쓰게 되고, 테미스토클레스는 결국 유랑자가 되었다. 반역죄까지 뒤집어 쓴 테미스토클레스는 한때의 적 '''페르시아'''로 도주해 크세르크세스의 아들인 아르타크셀크세스 1세의 부하가 되어 사트라프(페르시아의 지방 총독)로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가 마그네시아 총독 재임기에 6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는 페르시아를 배반한 이집트를 아테네가 함대를 보내 원조했다는 이유로 테미스토클레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아테네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고민 끝에 친구들과 잔치를 베푼 후 음독자살했다고 되어 있지만, 자연사했다는 견해가 정설이다. 그래도 실제 역사 또한 테미스토클레스가 조국인 아테네를 침략했다는 기록이나 그와 비슷한 기록이 일체 없으므로, 실제 테미스토클레스 또한 아테네의 적이 되지 않은 상태로 죽음을 맞이했을 것으로 보인다.
상당히 뇌물을 밝히고,[5] 계략에 능해 그의 정적인 아리스티데스를 도편추방시키기도 했다.[6] 특히 그의 계략이 빛을 발한 것은 살라미스 해전인데, 크세르크세스에게 항복하겠다고 뻥을 쳐서 퇴로를 막으러 함대를 분산시키게 하고, 그걸 다시 동맹국 함대가 일부러 눈치채게끔 해 철수하려던 동맹국 함대를 저지하고, 이로 인한 분란을 다시 크세르크세스에게 알려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해 격파했다. 그 직후에 그는 또 '''페르시아에 항복할 테니 아테네인들의 신변보장을 해달라'''고 크세르크세스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속임수에 능하다는 것이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던지 페르시아군이 퇴로를 막았다는 소식을 동맹국 지휘관들에게 알릴 때 자신이 알리는 것이 아니라, 정적인 아리스티데스를 통해 알렸다.[7]
[1] 이오니아에 위치한 도시이다.[2] 전쟁사에서 테미스토클레스가 인정받는 이유가 육군과 해군의 시너지를 가장 먼저 깨닫고 이것을 실전에 직접 운용했다는 데 있다. 그 이전까지 해군은 병참지원이나 육군을 배에 태워서 실어주는 수송선 같은 1차 보조역할에만 국한돼왔으나 테미스토클레스 이후부터는 해군도 하나의 독자적인 영역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 때문에 서구권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를 해군의 아버지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다.[3] 해양무역이 발달했지만 해군력은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적대적인 도시 중 해양도시였던 아이기나와의 분쟁에서 번번이 물먹었다고... 당시 테미스토클레스의 대함대 건설 주장은 마라톤 전투의 주역이었던 중장보병파들의 강력한 반대와 더불어 찬성 측도 그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 조달의 어려움으로 지지부진했지만 새로운 은광이 발견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은광의 은을 시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대신 대함대 건설의 재원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면서 대함대 건설의 이유를 페르시아의 위협 대신 전통적인 앙숙이었던 아이기나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교묘하게 내세워 관철시켰다고...[4] 설득도 하고 협박도 했다. 본거지 아테네가 페르시아 군에게 불타버린 후 회의석상에서 조롱하는 타 도시 사령관들에게 "정 그러면 아테네 함대는 아테네 시민들을 모두 데리고 그리스를 떠나 식민도시로 이주하겠다"고 협박했는데 당시 그리스 연합함대에서 아테네 함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인지라 모두들 조용해졌다고 한다. 즉, 육군이 좁디좁은 코린트 지협에서 페르시아 육군을 막아도 아테네 함대(함선 숫자가 200척에 달했다)가 빠진 나머지 그리스 함대는 페르시아 함대에게 엄청난 숫적 열세에 처하게 되기 때문에 페르시아 함대를 막지 못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었다.[5] 그 시대엔 그게 일상다반사라지만.[6] 그 '''정직한 사람이란 평판이 너무 자자해 지긋지긋해서''' 추방에 표를 던진 사람이 있었다는 일화의 주인공이다. 페르시아 전쟁이 터지면서 돌아오지만.[7] 자신이 그런 말을 하면 '''절대 안 믿을 거'''라며 그에게 맡겼다. 아리스티테스는 명성 그대로 참으로 성실하게도 남들은 다 도망치는 판에 싸우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방금 군대에 합류하면서 페르시아군을 목격한 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