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하워드
'''Thomas Howard'''
1473-1554
제3대 노퍽 공작 (Duke of Norfolk).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왕비였던 앤 불린의 외삼촌이자 캐서린 하워드의 백부.
1. 생애
15세기 잉글랜드의 대귀족이었던 하워드 가문의 수장.
노퍽 공작가는 원래 헨리 7세가 등극전 리처드 3세에게 제 1대 노퍽 공작으로 임명받은 존 하워드가 리처드 3세를 지지해서 싸우다 보즈워스 전투에서 전사했고, 이 때문에 그의 아들인 2대 노퍽 공작은 노퍽 공작 작위를 몰수당했었으나 이후 다시 공작으로 복위했다. 헨리 7세가 보즈위스에서 승리하고 귀족들을 소집했을때는 잉글랜드-웨일즈에 귀족 가문이라곤 29개 가문만이 응했고 헨리 8세 시절까지 복구된 가문을 합쳐도 약 50여개에 불과했는데 왕족이 아닌 공작 가문은 노퍽 공작이 유일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왕실을 빼면 가장 뼈대있는 집안이었다. 튜더 왕조는 헨리 8세를 제외하곤 남계혈족이 남지 않았고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남계는 장미 전쟁 과정과 사후 처리에서 숙청되었기 때문이다.
조카딸 앤 불린과 캐서린 하워드가 헨리 8세의 왕비로 오르는 과정을 지원하였다가 후에 두 왕비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발을 빼어 살아남았다. 아버지는 제2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이름이 같다),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틸니. 외가 쪽으로는 에드워드 1세의 후손이었다.
첫 아내는 에드워드 4세의 딸 요크의 앤(Anne of York) 공주였고, 두번째 아내는 엘리자베스 스태포드로 제3대 버킹엄 공작인 에드워드 스태포드와 제4대 노섬버랜드 백작 헨리 퍼시[1] 의 딸 엘리노어 퍼시의 딸이었다. 엘리자베스 스태포드와는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으나 후에는 심하게 악화되었다. 토머스 하워드는 엘리자베스 홀랜드라는 정부를 아예 집에 공공연히 들여 살게 했고, 부인은 결국 토머스 하워드와 갈라섰으며, 후에는 토머스 하워드가 자기를 거의 감금시키고 생활비도 적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 학대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군사적으로 상당히 활약했다. 1536년 헨리 8세의 종교개혁에 반하여 은총의 순례(Pilgrimage of Grace)라는 민중 봉기가 일어났을 때 토머스 하워드는 반란군에게 사면을 제안하면서 해산을 촉구했다. 이듬해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무자비하게 반란군을 탄압했다.
헨리 8세의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 8세는 토머스 하워드의 조카딸이자 젊고 재치있는 앤 불린과 결혼하여 후사를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는 왕의 결혼 무효화 신청을 거부한 로마 교황청과 대립하고, 결국 수장령을 통해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수립하면서 완전히 가톨릭과 갈라선다. 조카 앤을 왕비 자리에 앉히기 위해 토머스 하워드는 볼린 가문과 헨리 8세의 오른팔이자 종교개혁 지지자였던 토머스 크롬웰과 협력했다. 8년의 노력 후 앤 불린은 마침내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었으나, 딸 엘리자베스를 낳은 이후 아들을 낳지 못해 왕의 사랑을 잃기 시작했다. 공작과 앤의 사이는 틀어졌고, 그는 앤 불린의 재판에서 앤에게 화형 또는 참수형을 언도하면서 앤 볼린과의 관계에서 손을 씻어버린다.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이 심했던 시대, 토머스 하워드는 가톨릭 세력의 선봉장이기도 했다. 종교개혁 지지자이자 여러모로 정치적 이견이 있었던 토머스 크롬웰과의 사이는 이제 악화일로를 걸었다. 1540년 클레페의 앤과의 결혼을 주선한 후 왕의 신임을 잃은 토머스 크롬웰이 체포되던 순간, 토머스 하워드는 크롬웰이 목에 걸고 있던 가터 훈장을 나타내는 목걸이를 손수 뜯어버리면서 복수를 음미했다. 하워드는 이 때 이미 클레페의 앤을 대신할 후보로 조카딸 캐서린 하워드를 지원하고 있었다. 크롬웰이 처형을 당하던 날 캐서린 하워드는 헨리 8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캐서린 하워드가 처녀 시절의 성생활과 불륜 혐의로 런던탑에 수감되자 왕은 하워드 가문이 캐서린 하워드의 과거를 숨기고 자신을 기만했다고 분노했다. 캐서린 하워드는 사권 박탈법(bill of attainder)에 의해 처형되고 하워드 가문의 여러 사람들이 런던탑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는 다시 멀쩡하게 궁정에 복귀했다!
헨리 8세의 말년, 왕의 유일한 남성 후계자인 에드워드 6세를 낳은 헨리의 세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의 친정인 시모어 가문이 득세한다. 시모어 가문은 프로테스탄트로 가톨릭인 토머스 하워드와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노퍽 공작은 딸을 시모어 가문의 두 아들 중 하나인 토머스 시모어와 결혼시켜 어떻게든 동맹을 맺으려 했지만, 장남인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가 왕가의 문장인 에드워드 참회왕(Edward the Confessor)의 문장을 개인 문장에 포함시키는 등 사고를 일삼아 이는 실패한다. 1546년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와 그의 아들 헨리 하워드는 반역 혐의로 런던탑에 수감되고, 이듬해 토마스 하워드는 아들을 통제하지 못해 반역을 숨긴 죄를 고백하면서 봉토를 왕에게 반환했다. 가족들에게마저 인심을 잃었던 건지, 아니면 가족도 토마스 하워드처럼 기회주의자였는지는 몰라도, 토마스 하워드의 부인 엘리자베스 스태포드(위에서 언급한 별거를 한 부인), 정부 엘리자베스 홀랜드, 딸 메리는 모두 토마스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장남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는 결국 참수당했다. 헨리 8세는 노퍽 공작인 토마스 하워드도 사형시키라는 명을 내리고 눈을 감았지만, 왕이 승하하고 나자 의회는 노퍽 공작을 사면했다. 토마스 하워드는 에드워드 6세의 즉위기간 동안 계속 런던탑에 갇혀 있다가 가톨릭을 지지한 메리 1세가 즉위하면서 풀려났다!
메리 1세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돌려놓기 위한 야심을 품고 있었기에 토마스 하워드는 다시 한번 득세할 수 있었다. 추밀원에도 입성했을 뿐만 아니라 문장원 총재(Earl Marshal)[2] 로도 임명 받았고, 메리 1세의 대관식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1554년 8월 25일 눈을 감았다.
서리 백작인 장남 헨리 하워드의 아들이자 본 항목의 손자이며 동명이인인[3] 토머스 하워드(제 4대 노퍽 공작)는 노퍽 공작 작위를 물려 받았는데,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의 결혼을 허가받았으나 가톨릭 세력의 구심점이 되어 경고를 여러 차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반란에 연루되어 참수 당한다. 그러나 하워드 가문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노퍽 공작 작위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전술 한대로 왕족을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공작 작위이다.
2. 대중매체
앤 불린과 캐서린 하워드를 다루는 창작에서는 그리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조카를 왕비로 올리기 위해 음모술수를 일삼고 단물이 빠지자 재빨리 버리는 비정한 기회주의자로 등장한다. 둘째 부인을 학대했다는 이야기 또한 그가 악인으로 등장하는 이유 중 하나. 운이 억세게 좋은 인물이기도.
2.1. 울프 홀에서의 토머스 하워드
반지의 제왕에서 세오덴을 연기한 버나드 힐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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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하고 고압적인 남자로 조카 앤 불린을 왕비 자리에 앉히려 노력하지만 역시 성격이 강한 인물인 앤과 자주 부딪힌다. 똑같이 앤 불린을 지지하는 토머스 크롬웰과 협력하는데, 헨리 8세의 신임을 받는 토머스 크롬웰을 질투하며 출신이 천한 그를 대놓고 무시한다. 헨리 8세가 말에 떨어져서 죽은 줄 알자 크롬웰이 왕비인 앤불린이 섭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섭정은 자신이 되어야 하며 여자는 섭정을 할 수 없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권력욕을 드러낸다. 이런 면모는 앤이 왕의 총애를 잃자 당장 앤을 적으로 돌리는데 거리낌이 없는 모습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녀를 손수 체포하러 오기도 하고, 재판에서는 재판장 역할을 맡아 사형을 선고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화형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1] 앤 불린이 왕의 눈에 들기 전 결혼하려다 실패했던 헨리 퍼시의 할아버지다[2] 이 직위는 지금도 하워드 가문 후손들이 이어받고 있으며 영국에서 왕가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직위이기도 하다. 현재 문장원 총재는 1956년생인 에드워드 윌리엄 피츠알란-하워드.[3] 사실 하워드 가문에는 노퍽 공작이 된 토머스 하워드가 너무 많아 정확하게 부르려면 몇대 노퍽 공작인지를 명시해야한다. 당장 본문의 토마스 하워드는 2, 3대 노퍽 공작이며, 4, 5, 8대 노퍽 공작의 이름도 모두 토머스 하워드다. 이런식으로 이름을 물려받는건 서양권에서 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