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크롬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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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Cromwell, 1485 - 1540
1. 개요
2. 생애
2.1. 출신과 젊은 시절
2.2. 앤 불린과의 동맹
2.3. 앤 불린과의 갈등
2.4. 토머스 크롬웰의 몰락
3. 인물평
4. 여담
5. 대중문화에서


1. 개요


헨리 8세 때의 정치인. 헨리 8세는 첫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을 새 왕비로 맞이하며, 종교도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바꾸었다. 토머스 크롬웰은 헨리 8세의 비위에 맞춰가면서 그 과정을 추진하였으며, 토머스 모어의 처형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증인을 들어서 반역법으로 처넣게 했다.).
이후 헨리 8세가 2번째 왕비 앤 불린을 처리하는 것을 지지하는 등, 수석장관에 올라 왕의 비위를 맞추면서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여 적을 많이 만들었다. 하지만 헨리 8세의 3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 다음 4번째 왕비로 클레페의 앤을 맞아들이는 과정을 성사시키는데, 헨리 8세가 소위 '''초상화보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앤 왕비와 이혼하면서, 토머스는 왕의 총애를 잃게 된다. 결국 정적들에 의해 구속되어 처형된다.

2. 생애



2.1. 출신과 젊은 시절


비천한 평민에서 잉글랜드의 제2인자로 떠오른, 상당히 극적인 삶을 산 인물이다. 1485년 토머스 크롬웰은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퍼트니(Putney) 지방은 강도가 들끓어 밤에는 나가지도 못할 정도로 위험한 지역이었다. 크롬웰은 후에 자기가 "ruffian" 즉 상당히 거친 청년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크롬웰은 10대에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서 이탈리아에서는 용병으로 일하고, 피렌체에서는 은행가의 조수로 일을 했으며, 후에는 상업에도 손을 대면서 식견을 넓힌다. 30세 정도가 되었을 무렵,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성공적인 상인이자 법률가로 커리어를 쌓으면서 엘리자베스 위크스라는 여성과 결혼한다.
엘리자베스는 한번 결혼을 했던 과부였는데, 부부의 금슬은 좋았으며 크롬웰이 부인을 위해 여러가지 선물을 한 기록도 남아 있다. 아들 그레고리[1]와 두 딸 앤과 그레이스가 태어났으나, 앤과 그레이스는 소녀 시절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만다. 1528년에는 크롬웰은 아내 엘리자베스도 전염병으로 잃는다. 그 후 그는 재혼하지 않는다. 또 결혼 전/또는 초기에 태어난 사생아 딸 제인이 있다.

2.2. 앤 불린과의 동맹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법률가로 자리를 잡은 크롬웰은 1523년 잉글랜드 하원 의원직을 얻는다. 그러나 그의 인생의 전환점은 1516년부터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위해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토머스 울지 추기경은 본래 푸줏간 아들로 태어났으며, 크롬웰처럼 낮은 신분을 극복하고 권력을 쥔 인물로, 헨리 8세가 즉위했을 당시부터 모셔왔다.
울지 추기경은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한 왕이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교황청에 혼인을 무효화해 달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일의 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교황청이 끝끝내 무효화를 거절하자, 왕과 앤은 분노했다. 결국 울지 추기경은 왕의 신임을 잃고 몰락한 후, 모든 직위와 재산을 빼앗기다시피한 채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2]
크롬웰은 토머스 울지 추기경과 함께 몰락하는 대신 자기가 왕의 오른팔 자리를 꿰어찬다. 우선 크롬웰은 개신교 성향이었기 때문에, 앤 불린 및 그녀의 친정 불린 가문과 같은 종교적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크롬웰은 잉글랜드의 종교개혁가톨릭 수도원의 해산을 이끌었으며, 교황이 아니라 왕이 그 나라 교회의 수장이어야 한다는 사상을 지지했다.
결국 1534년 잉글랜드 교회의 독립을 선언하는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통해 교황청에서 독립하여 잉글랜드 국교회가 성립되고,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된 헨리 8세아라곤의 캐서린과의 결혼을 간단히 무효화하고 앤 불린과 결혼한다. 이 모든 과정에 크롬웰이 큰 역할을 했다. 같은 해 왕은 크롬웰을 수석 대신으로 임명했으며, 사실상 크롬웰은 잉글랜드의 제2인자가 되었다.

2.3. 앤 불린과의 갈등


크롬웰과 앤 불린의 동맹이 언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성공회가 잉글랜드의 국교가 된 후, 가톨릭 수도원을 강제로 해산하기 시작했다. 이 때 거둬들인 재산을 크롬웰은 국고에 돌리길 원했고, 앤은 교육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기를 주장하면서, 의견 충돌이 빚어졌다. 불린 가문과 크롬웰 사이에서 왕의 측근자리를 두고 기싸움이 계속되다, 이 일을 통해 적대감이 분출되었는지도 모른다. 얼마 후인 1536년 앤 불린의 측근이 감사성찬례[3]에서 크롬웰을 맹비난한다.
앤 불린은 이때 이미 딸(엘리자베스 1세)만을 낳았을 뿐 유산을 거듭하며 아들을 낳는데 실패한 상태였고, 헨리 8세는 이미 앤이 아니라 그녀의 시녀제인 시모어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제인 시모어는 왕이 자신을 정부로 삼으려 하자 결혼을 위해 정절을 지켜야 한다고 답했는데, 왕은 여기에 신선한 충격을 받고 아마도 이 시점에서 앤과 이혼하고 제인과 재혼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다(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크롬웰은 이제 시모어 가문과 동맹을 맺고 적극적으로 앤 불린과 불린 가문을 몰락시키는 과정에 참여한다. 토머스 크롬웰은 앤의 궁정에 있던 음악가 마크 스미튼에게서 앤과 부정을 저질렀다는 자백을 받아내는데, 이 고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을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마크 스미튼은 앤과 간통을 저지른 남자들의 이름을 댔는데, 앤과도 친밀하지만 왕과 친했던 여러 궁정 인사들의 이름이 나왔다. 토머스 크롬웰은 왕의 명을 받아 앤의 "부정"을 조사하는데, 이 과정에서 앤 불린의 남동생 조지 불린의 부인이었던 로치포드 부인이 "앤과 조지는 근친상간을 저지르는 사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앤을 결정적으로 옭아맨 죄목이 되었다. 앤의 외삼촌이자 대귀족인 하워드 가문의 노포크 공작은 조카와 사이가 틀어진 채였고, 기꺼이 앤의 몰락을 도왔다.
앤 불린은 순식간에 간통근친상간죄로 처형을 당했다. 약 열흘 후 왕은 제인 시모어와 결혼했다. 크롬웰은 여전히 왕의 오른팔이었다. 그러나 제인은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은 지 얼마 안돼 산욕열로 사망한다.

2.4. 토머스 크롬웰의 몰락


종교개혁의 지지자였던 크롬웰은 헨리 8세에게 개신교 신자인 왕녀를 새 왕비로 얻어주기로 마음먹었고, 그 결과 독일 클레페 공국의 왕녀인 클레페의 앤과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러나 해당 항목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듯이, 파멸적인 결과를 낳았다. 헨리 8세클레페의 앤이 너무 추해서 손을 댈 수 없다고 불평하다가, 앤의 시녀 캐서린 하워드와 눈이 맞았다.[4]
가톨릭 세력을 이끄는 노포크 공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크롬웰을 몰락시켰다.
죄목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지만[5] 그거야 왕이 죽이려고 들면 얼마든지 날조가 가능한 이야기이기도 하니 그 신뢰성에 의문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당시의 왕은 알다시피 영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기로 유명했던 헨리 8세 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 죄목들 중에 자신의 맏딸 메리 1세[6]와의 결혼을 획책하려 했다는 것이 있다.
다른 일반적인 재판 등을 거치지 않고, 의회를 통해 사형 판결이 통과되었다. 이건 다시 말해서 사권[7]이 박탈된 후 처형당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 법안이 통과되면 '''재판 없이 형을 집행하는 게 가능했다.''' 당연히 현대에서는 통과 불가.
이렇게 죽은 사람이 헨리 8세 시대에 셋이나 되는데, 바로 이 토머스 크롬웰과 캐서린 하워드, 그리고 마거릿 폴(Margaret Pole)[8]이다. 이 처형이 1540년부터 1542년까지 불과 3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토머스 모어가 처형당하기 전에는 재판 씬이 있는데 크롬웰이 체포당한 후 처형당할 때에는 없는 이유다.
왕이 등을 돌리자, 왕국에서 왕 다음으로 강했던 인물 크롬웰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감옥에서 그는 헨리 8세에게 왕과 클레페의 앤의 결혼 무효화를 찬성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면서, "가장 관대하신 군주여, 제게 제발 자비, 자비, 자비를(Most gracious Prince, I cry for mercy, mercy, mercy)."라는 애원으로 편지를 끝맺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자비를 베풀어주지않고 처형했다.
아무튼 죽을 때 특별한(?) 왕의 은총(?)으로 그의 사형 집행인은 아직 미숙한 젊은 풋내기로 결정되었는데, 그 이유인즉, 집행인이 풋내기므로 단번에 참수를 하지 못할 테니 그야말로 푸줏간의 고기처럼 난도질하게 되므로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꼴로 죽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장면은 드라마 튜더스에서 잘 묘사된다(...).[9] 그러다보니 보다 못한 경비병이 도끼를 빼앗아 끝내줄 정도. 참수된 목은 런던 브리지에 효수되었다.
그가 죽은 날은 바로 헨리 8세캐서린 하워드가 결혼한 날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를 죽이고 보니 국정 운영이 개판이 되면서, 헨리 8세는 크롬웰을 경솔하게 죽인 걸 후회막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잘못된 증거로 크롬웰을 잡아들였다면서 장관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처형 1년 후에 프랑스 대사관이 "헨리 8세는 자신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를 죽였다며 후회했다"고 한 기록이 있을 정도니 어지간히도 그리워했던 듯.

3. 인물평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인물이다. 야심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한 기회주의적이고 교활하며 잔인한 인물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갑작스럽게 출세하면서 상당히 많은 정적을 만들었고, 잉글랜드종교개혁앤 불린의 몰락을 주도하면서 손에 많은 피를 묻혔다. 본래 비천한 신분이었는데다 비참하게 끝났기 때문인지 후대에도 그를 변호하는 목소리는 드문 편. 고전 영화 "사계절의 사나이"에서는 끝까지 고결한 토머스 모어와 대비되는 인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영문 위키에서는 출처가 불명이긴 하지만 왕에게 무례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성격이 그를 죽음으로 이끈 한 원인이 된다. 어느 정도는 일리있는 것이 왕 앞에서 무례할 정도면 상당히 막 나간다는 이야기가 되니 적이 많은 것도 납득이 가는 이야기이기 때문.

4. 여담


토머스 크롬웰은 올리버 크롬웰의 '''먼 할아버지뻘'''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토머스 크롬웰의 누나 캐서린 크롬웰의 증손자가 올리버 크롬웰이다. 외가 쪽인데 크롬웰 성을 이어받은 이유는, 올리버 크롬웰의 할아버지가 윌리엄스라는 본래 성 대신 외가의 성을 썼기 때문. 영어 위키백과의 표현대로면 올리버는 토마스의 'great-great-grandnephew'랜다.


5. 대중문화에서



5.1. 튜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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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배우 제임스 프레인 (James Frain)이 연기했다.[10]
드라마 튜더스에서는 4개 시즌 가운데 3번째까지 출연했다. 꽤나 냉혹-잔인하고, 교활하며, 기회주의적인 성품으로 묘사된다.
시즌1에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신임을 얻어 관직에 오르지만, 후반부에 울지 추기경이 실각하면서 도움을 청하자 이를 외면했다. 후술할 <울프 홀>에서 묘사되는 두 사람의 관계에 비하면, 매우 배은망덕한 모습.
또한 아직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이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던 당시 잉글랜드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던 개신교 집회에 참석하고, 앤 불린에게 종교개혁 관련 서적을 전해주어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을 요구하던 헨리 8세가 가톨릭과 결별하는 데 간접적인 역할을 했다.
시즌2에는 초반에 잉글랜드가 가톨릭과 결별하면서 토머스 모어가 재상직을 물러나자 그 뒤를 이었다. 또한 토머스 모어의 친구였던 리처드 리치를 사주하여 모어가 옥중 면담에서 왕권을 부정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도록 유도한 후, 이를 법정 증언에 활용하여 사형 선고를 이끌어낸다.[11]
후반부에는 헨리 8세가 앤 불린으로부터 애정을 잃고서 제거하려는 주요 조치들을 실질적으로 진두지휘했다.[12] 두 시즌에 걸쳐 자신에게 권력을 가져다 준 정치적 은인들[13]을 냉혹하게 저버린 셈.
여기에 시즌 3 중반에서 찰스 브랜던이 반란을 일으킨 고을의 주모자 74명을 처형했다고 이야기하자[14] '''"그걸로는 모자란다"'''라는 말이 압권.[15] 인과응보일까. 이 때문인지, 크롬웰이 끌려나갈 때의 찰스 브랜던의 차가운 표정이 그의 잔인함에 대한 반감을 전달한다.
적이 많았다는 것은 드라마 튜더스를 통해서 잘 묘사되어 있는데, 그가 반역죄로 구속될 때 그는 "내가 반역자요?"(Am I a traitor?) 하고 다른 신하들에게 물어본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신하들의 "반역자!"(Traitor!)라는 외침뿐. 당대의 역사가 에드워드 홀(Edward Hall) 역시 그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그의 성격적 결함을 지적한 바 있다.

5.2. 울프 홀


BBC의 드라마 울프 홀의 주인공. 원작은 힐러리 맨틀Hilary Mantel의 두 소설 <울프 홀>과 <Bring Up the Bodies>이다. 배우는 마크 라일랜스.

대단히 유능한 행정가로 지극하게 현실적이다. 예를 들면, 크롬웰은 종교개혁을 지지하지만 가톨릭 세력과 협력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당신은 개신교 신자가 아닌가?"란 질문에 "전 은행가인걸요." 하고 태연하게 대답할 정도. 헨리 8세의 눈에 띈 후 앤 불린이 왕비 자리에 앉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그 과정에서 왕의 신임을 받아 엄청난 권력을 쥐게 되지만, 결국 앤 불린과 틀어져 정적이 된다.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유럽에서 용병일을 하기도 하고 상인으로도 살고 법률가로도 활동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은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역시 푸줏간 아들이었던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심복으로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개천에서 난 용이라는 배경을 공유하는 동병상련의 정으로 시작하여 추기경에게 충성하면서 깊은 정을 쌓았다. 드라마 초반에 토머스 울지 추기경이 불린 가문과 틀어지면서 비참하게 몰락한 것이 트라우마로 남았으며, 이를 잊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철저하게 복수한다.
본래 천한 신분이기에 왕의 오른팔로 떠오르면서도 계속해서 주변의 경멸과 무시를 받는다. 이 때문인지 약자인 낮은 신분의 사람들, 여자,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존중을 잃지 않으며, 자기 편에게는 극진하다. 레이프 새들러를 비롯한 여러 청년을 거둬 들이고 있다. 아들 그레고리와는 살짝 서먹한 모습을 보이는데, 대장장이의 아들로 자란 아버지와 부유하게 자라 기사 작위까지 받은 아들과의 세대/문화차이인 듯.
한편으로는 자신을 적으로 돌리거나 적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겐 딱히 자비가 없다. 고문을 할 정도로 잔인하거나 사악하지는 않으나, 어차피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성격. 토머스 모어와는 여러모로 상극이다. 그리고 기댈 곳이 왕의 신임밖에 없는 개천에서 난 용의 숙명인지, 적도 잔뜩 만들었다.
아내와 두 딸을 전염병으로 잃은 후 홀아비로 오래 살다가, 아름답지는 않지만 순수한 노처녀 제인 시모어에게 마음이 있었는데 그녀가 헨리 8세의 눈에 드는 바람에...
[1] 후에 헨리 8세의 셋째 왕비 제인 시모어의 자매 엘리자베스 시모어와 결혼한다.[2] 토머스 울지 추기경이 소유했던 저택은 앤 불린이 받게 된다.[3] 성공회의 예배[4] 캐서린 하워드는 상기 노포크 공작의 조카이기도 했다. 앤 불린과는 사촌지간이다.[5] 그나마도 대부분은 이단에 관한 죄였다.[6] 일반적으로 피의 메리로 알려진 바로 그 분 맞다.[7] 현대적인 인권의 개념 정도로 생각하면 적합하다.[8] 헨리 8세의 사촌이자 솔즈베리 백작부인. 자신이 아라곤의 캐서린의 시녀장을 역임하는 등 일가가 가톨릭이었는데, 특히 추기경이었던 둘째 아들 레지날드 폴이 교황특사가 되어 영국에 대항하는 가톨릭 동맹 결성이 시도하는 바람에 반역자로 몰려서 첫째아들에 이어 처형당했다.[9] 튜더스에서는 사형 집행인이 전날 과음했다는 설정을 추가했다.[10] 트루 블러드에서 프랭클린 모트, 고담에서 아즈라엘, 스타트렉 디스커버리에서 사렉 역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11] 리처드 리치는 이후 크롬웰의 신임을 얻어 고위직에도 올랐지만, 시즌3 종반부에 크롬웰이 몰락하자 금새 발을 빼며 목숨을 보존했다. 리치는 이후 에드워드 6세 제위 시절에 재상까지 오르는 등 71세의 장수를 누렸다.[12] 앤 불린의 시녀들을 심문하여 불린 가문의 주요 인사들에 관한 비리, 역모 혐의를 인정하도록 종용하고, 이를 명분으로 대거 구금 및 참수했다. 극중 내내 사이가 껄끄러웠던 찰스 브랜던과도 이때만큼은 행동을 같이 하는 모습을 보였던 셈.[13] 토머스 울지 추기경, 앤 불린[14] 이 때 이미 찰스 브랜던은 자기가 저지른 짓에 대해 괴로워하고 있었다.[15] 크롬웰의 입장에서 설명하자면, 반란 세력이 가톨릭 수도원 폐쇄 조치의 철회를 요구하며 종교개혁 노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상황이었고, 크롬웰 자신에 대한 문책, 처벌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 더 나아가 일신상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도 강경 진압을 밀어붙였다고 할 수 있다. 헨리 8세의 정치적 신임을 유지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고. 물론 그러한 이유들이 극중, 그리고 역사상으로 나타난 학살에 가까운 유혈 진압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