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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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455년부터 1485년까지 중세 잉글랜드 왕국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내전. 중세 잉글랜드의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 사이에 벌어진, 왕위계승권 획득을 위한 내전이다. 30년짜리지만 사실상 본격 내전은 1455년 요크 공작 리처드가 랭커스터 왕조에 반기를 든 때부터 1461년 리처드의 아들 에드워드 4세가 즉위할 때까지와, 1469년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서 쫓겨나고 1471년 다시 복위되기까지, 그리고 1483년 리처드 3세의 찬탈 이후 1485년 헨리 7세가 즉위하기까지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해당 기간의 사이에는 에드워드 4세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치세를 누렸다.
이 내전으로 귀족들의 권력이 엄청나게 줄어들었는데, 헨리 7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절대 왕정인 튜더 왕조를 건설한다.
잉글랜드는 백년전쟁에서 프랑스한테 패배한 후 내전에 휩싸이게 되는데 그 내전이 바로 이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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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름의 유래
이 내전이 장미 전쟁이라 이름이 붙은 이유는 두 가문 모두 상징이 장미, 즉 랭커스터 가문이 붉은 장미, 요크 가문이 백장미이기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당대의 용어가 아니라 아이반호의 저자인 19세기의 소설가 월터 스콧이 만들어낸 것으로 1829년에 그가 집필한 글에 처음 나온다. 스콧이 이런 용어를 쓴 모티브는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에서 나온다고 한다.[2]
즉, 요크 가문의 문장은 백장미이고 랭커스터 가문의 문장은 붉은색[3] 장미이긴 한데 둘 다 흔히 생각하는 겹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것.[4] 흔히 생각하는 겹꽃 장미는 그 당시 잉글랜드를 비롯한 유럽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겹꽃 장미는 훗날 18세기에 중국에서 월계화 품종과 저 위의 분홍색 장미를 교배시키면서 나온 것이다.[5] 참고로 저 문장은 현재도 요크셔 주와 랭커셔 주의 문장으로 쓰이고 있다.
여기까지 보면 상당히 막장에 막장을 거듭하는 영주들의 찬탈극 같지만 사실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은 모두 전대 잉글랜드 왕가인 플랜태저넷 왕가의 분파이다. 요크와 랭커스터 가문 모두 14세기 중반 에드워드 3세의 아들들이 플랜태저넷 가문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개창한 가문이기 때문이다. 갈라져 나온 지 100년도 안 되는 셈이니 왕위를 두고 다툰 사람들의 촌수는 대부분 8촌 이내였다고 한다. 근본적으로 왕가의 집안 싸움이라고 할 만한 것.[6] 그래서 튜더 왕가 이전엔 모두 한 왕조로 친다.
3. 배경
백년전쟁(1337~1453) 중 약 1370년쯤에 잉글랜드를 잘 다스리던 군주인 에드워드 3세는 나이가 들어서 국정을 운영하기가 버거워지자 살아남은 아들 중 3남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게 실질적으로 섭정을 맡긴다. 곤트의 존이 후계자였다면 괜찮은 계승으로 이어졌겠지만, 문제는 후계자는 따로 있었다. 후계자는 바로 에드워드 3세의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 하지만 흑태자 에드워드는 병에 걸려 곧 죽을 것으로 보였고, 유력한 차기 후력자는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 2세였는데 그 당시에 나이가 굉장히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곤트의 존은 처음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괜찮은 활약을 했지만 몇번의 부진으로 인해 슬럼프가 찾아왔고 슬슬 정전협정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지휘보다는 잉글랜드 내에서 섭정활동에 더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흑태자가 먼저 사망하였고, 에드워드 3세마저 사망하자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가 리처드 2세로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곤트의 존은 정식 섭정으로 임명된다. 곤트의 존은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인두세를 부과했고, 가난한 평민들에게는 상당히 높은 금액이 부과되자 농민들이 난을 일으켰다(와트 타일러의 난). 어찌어찌해서 농민봉기는 진압했지만, 잉글랜드에서 '곤트의 존'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했다.[7] 그리고 존은 얼마 뒤에 아내의 친정인 스페인 카스티야 왕가에 왕위쟁탈전이 벌어지자 그곳에서 왕을 해보겠다고 잉글랜드를 비운다.
섭정인 숙부도 없어졌고, 머리도 굵어진 리처드 2세는 친정을 시작한다. 하지만 리처드 2세조차 숙부로부터 반면교사를 못 했던 것인지 리처드 2세의 첫 번째 친정은 최악이었다. 존의 섭정시절보다도 잉글랜드의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하였고, 결국 내전이 작게나마 벌어지기도 할 정도였다. 이 일을 계기로 청원파[8] 가 득세한 의회와의 사이는 매우 나빠졌다.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에서 벌어진 왕위쟁탈전에서 실패하고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이 둘을 중재시키고 내전을 종결시킨다. 이 일로 다시 존의 위세가 높아졌고 결국 잉글랜드 국왕 자리보다 더 노른자위 작위라고 불리는 아키텐 공국까지 하사받는다. 하지만 존은 전쟁 중인 와중에 더이상 아키텐의 가치가 예전같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잉글랜드에 계속 머무른다.
그러나 그 사이에 조용히 충성파들의 세력을 단결시킨 리처드가 청원파들을 숙청시키기 시작했으며 곤트의 존도 왕국의 상황이 골치 아프게 돌아가고, 일단 자신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목숨이 저당잡힌 신세나 마찬가지가 되었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반하지 않고 조용히 섭정으로 지낸다. 심지어 리처드 2세가 자신의 막내 남동생인 우드스톡의 토마스를 살해하는 것도 지켜본다. 숙부의 기력이 예전같지 않음을 확인한 리처드 2세는 살아남은 청원파이자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를 추방하고, 존이 사망하자 헨리의 영지 상속을 막기 위해 랭커스터 영지마저 몰수했다.
이로써 리처드 2세가 숙부와 그의 세력들을 다 몰아내고 왕권을 찾았으나 왕권은 아직 불안하기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곤트의 존이 부재했을 때 리처드 2세의 통치에 불만과 의심이 많았으며 숙청당한 청원파 잔당들은 프랑스에 있는 잉글랜드 왕국의 영토 등지에서 여전히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왕권이 이렇게 불안한데도 리처드 2세는 아일랜드를 방문했고, 그 사이에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되레 반란군을 조직해서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급하게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리처드 2세를 사로잡아버렸다(!). 그리하여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왕위에 올라 헨리 4세가 되었고 랭커스터 왕조를 열게 되었다(1399). 하지만 리처드 2세의 잔존세력들이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킨 탓에 헨리 4세는 이들을 정리하는 게 급선무였다.[9]
이게 왕위계승의 법칙에서 상당히 의미가 큰 사건이다. 원래 리처드 2세 사후에 왕위 계승자는 당시에 7살짜리 어린이였던 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10] 였다. 에드먼드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 중에) 차남인 클래런스의 공작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후손이다.[11] 정확히 말하자면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동딸인 필리파의 친손자다. 리처드 2세가 후손 없이 사망하면, 에드워드 3세의 큰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의 후손이 멸절되었으니, 차남인 라이오넬의 후손으로 왕위가 넘어갈 차례였다.[12]
그런데 이때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나이도 어리고 자신에 비하면 한참 만만한 집안인 에드먼드 모티머가 왕이 되는 게 꼴보기 싫었는지,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오르기 위해 더 엄격한 왕위 계승의 법칙을 주장한다. 그의 논리는 왕위는 군주의 아들이 군주의 남자 형제보다 우선이며, 군주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형제가 상속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즉 에드워드 왕자의 외동아들인 리처드 2세가 아들 없이 죽으면, 에드워드 왕자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이 왕위 계승자라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은 아들이 없이 죽었으므로, 라이오넬의 바로 아랫 동생인 곤트의 존이 후계이며, 곤트의 존의 장남인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즉 여계 후손의 왕위 계승을 아예 부정해버린다.[13]
이 왕위 계승의 법칙은 동양에서라면 당연하게 여겨졌겠지만 서양에서는 꽤 생소했고,[14] 사람들의 반응은 "왕이 되고 싶어서 헛소리까지 하는구나(...)" 정도였다. 물론 실권자인 볼링브로크의 헨리 앞에서 그 말을 했다가는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에 불만이 크게 없었고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헨리 4세로 즉위한다.[15]
이를 정리한 후 헨리 4세는 죽고 아들 헨리 5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1413). 과감한 성격이었던 헨리 5세는 국내가 안정되자 다시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캐바른 헨리 5세는 1420년 트루아 조약을 체결해 헨리 5세의 자손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랭커스터 왕조의 전성기를 연 헨리 5세는 트루아 조약 체결 후 2년 만인 1422년 8월에 전염병으로 급사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생후 9개월의 헨리 6세였다.[16]
하지만 헨리 6세는 아버지의 능력은 이어받지 못했는지[17] 잉글랜드는 잔 다르크 등 먼치킨들이 등장한 프랑스에 점점 캐발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1453년 잉글랜드의 프랑스 내 마지막 보루였던 보르도가 함락당하면서 백년전쟁이 끝났다.[18]
그렇게 백년전쟁에서 패배하자 헨리 6세의 귄위는 땅에 떨어졌고 설상가상으로 섭정을 맡던 요크 가문과 헨리 6세의 중신, 왕비 간에 갈등의 골까지 깊어지자[19] 요크 가문은 ''''우리도 한번 뒤집어봐?'''' 라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뒤집고 랭커스터 왕조를 연 것처럼 우리도 못 할 게 뭐냐"는 생각에 따라 요크 공작 리처드는 헨리 6세의 랭커스터 가문과 전쟁을 시작했다. 카스티용 전투로 백년전쟁이 끝난 지 고작 2년 뒤였다.
이 논리에도 나름 명분은 있었는데, 헨리 4세의 왕위를 부정하고 에드먼드 모티머를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보면 된다. 에드먼드 모티머는 자녀가 없이 죽었고, 남자 형제가 없었다. 즉 에드먼드 모티머가 사망하면, 에드먼드 모티머의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 형제 또는 그 장남이 왕위 계승자다. 에드먼드 모티머의 큰누나인 앤 모티머는 3대 요크 공작인 리처드의 어머니였다. 3대 요크 공작 리처드는 제1대 요크 공작이자,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 중에) 4남인 랭리의 에드먼드의 친손자다.[20] 따라서 요크 공작 리처드는 헨리 4세와 그의 후손의 왕위 계승을 부정하고, 자신이 앤 모티머의 아들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켰다.[21]
요크공 리처드는 백년전쟁이 끝나기 직전 시기에 프랑스 주둔 잉글랜드군의 사령관이었는데, 전쟁의 패배 원인을 자신에게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못한 헨리 6세의 측근들에게 돌렸다. 그는 헨리 6세의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헨리 6세의 후계자이기도 했고, 1453년 헨리 6세가 정신병으로 통치 불가 상태가 되었을 때는 호국경을 맡아 헨리 6세 및 왕비 마가렛의 측근들(대표적으로 서머셋 공작 뷰포트 가문)을 내치기도 했다. 하지만 1455년 1월 헨리 6세는 정신을 차리고 요크 공작의 결정을 모두 되돌리고 요크 공작을 호국경에서 파면, 서머셋 공작을 복귀시킨다. 요크 공작에게서 위협을 느낀 마가렛은 요크 가문에 반대하는 귀족 세력을 결집했고, 요크 공작은 이에 자극받아 군사를 일으켰다.
4. 전개
4.1. 요크 공 리처드의 죽음
1455년,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요크 공작은 서머셋 공작을 죽이고 국왕 헨리 6세를 생포하는데 성공한다. 전투 직후 헨리 6세는 두 번째 광증에 시달리는 상태로 발견되었고 요크 공작은 다시 호국경에 취임, 처가인 네빌 가문과 함께 정권의 요직을 차지했다. 하지만 1456년 헨리 6세는 두 번째로 회복했고 요크 공작을 다시 해임하는 한편, 요크 공작 세력과 마가렛이 이끄는 요크 반대파를 화해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요크 공작이 마가렛의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밀어내고 헨리 6세의 후계자가 되려 하는 이상 화해는 불가능했다.
1459년 무력 투쟁이 재개되었고, 러드포드 다리 전투에서 요크파가 패하면서 요크 공작과 네빌 가문 등은 해외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고, 조정은 랭커스터파가 장악했다. 하지만 1460년에는 요크파가 장악한 칼레로부터 네빌 부자[22] 와 마치의 에드워드(훗날의 에드워드 4세)가 병력을 이끌고 상륙하여 런던을 장악, 노스햄튼 전투에서 랭커스터파에 승리하여 다시 헨리 6세를 생포, 정권을 장악하고 아일랜드에 있던 요크 공작을 불러왔다. 하지만 여기서 요크 공작은 악수를 두는데, 귀족들 앞에서 옥좌에 직접 손을 대고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귀족들은 아무리 헨리 6세가 결점이 있는 왕이라고 하더라도 현재 재위 중인 왕을 물러나게 할 생각은 없었고, 요크 공작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밀어내고 헨리 6세의 후계자가 되는 것으로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마가렛 왕비는 북부 웨일스의 랭커스터파 병력을 소집하고 스코틀랜드로부터 지원군을 받는 등 요크파와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요크 공작은 이를 요격하기 위해 북상했지만 1460년 12월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대패했고 요크 공작과 그의 둘째아들 에드먼드, 처남인 솔즈버리 백작 리처드 네빌까지 전사했다.[23] 마가렛 왕비는 요크 공작의 잘린 목을 요크 성문 위에 내걸고 '요크 공작은 요크 성이나 다스려야 한다'고 조롱했다고 한다.
4.2. 에드워드 4세의 즉위
요크 공작의 왕위 요구는 그의 맏아들 마치 백작 에드워드에게 계승되었고, 에드워드는 모티머스 크로스에서 랭커스터파 웨일스 병력을 상대로 승리한 후 런던에 입성하여 에드워드 4세를 자칭했다. 런던으로부터 북진한 에드워드 4세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요크파 군대는 랭커스터파의 주력을 타우튼 전투에서 격파, 자신의 왕위를 굳힌다. 단, 헨리 6세와 마가렛 왕비,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치는 데 성공하여 이후 전쟁의 불씨가 된다.
4.2.1. 축출과 복위
에드워드 4세는 구 랭커스터파 정적들에게 관대한 편이었기에 치세 초기는 상대적으로 평온했다. 하지만 에드워드가 자신의 가장 큰 지지자인 워릭 백작 몰래 상대적으로 격이 떨어지는 우드빌 집안의 미망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고 우드빌 가문원들을 중용하기 시작하면서 네빌 가문과의 관계가 흔들리게 된다. 이에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의 동생 클래런스 공작 조지를 끌어들여 에드워드를 납치하지만 국왕이 없는 상태의 국정을 전혀 감당하지 못하고 에드워드를 풀어주게 된다. 에드워드는 관대하게 두 사람을 용서하지만 이들이 다시 잉글랜드 북부 반란을 사주했음이 밝혀지자 이들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두 사람은 프랑스로 망명한다.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부르고뉴 공국과 결혼 동맹을 맺은 에드워드 4세를 견제하고자 했고, 자신의 궁정에 있던 마가렛 왕비가 워릭 백작과 화해하도록 했다. 에드워드 4세가 워릭 백작이 사주한 잉글랜드 북부 반란을 진압하는 동안 1470년 가을 워릭이 이끄는 랭커스터파 군대가 런던을 점령, 헨리 6세가 복위되었고 워릭의 동생 몬태규 후작 존 네빌이 에드워드 4세에게 등을 돌려 에드워드 4세는 막내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훗날의 리처드 3세)와 함께 부르고뉴로 망명하는 처지가 된다.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은 처음에는 에드워드 4세를 지원하는 데 미적지근한 반응이었으나, 루이 11세가 잉글랜드를 끌어들여 부르고뉴 침공을 계획하자 에드워드 4세에게 병력을 지원한다. 에드워드 4세의 상륙 이후 랭커스터 정권에서 입지가 좁아진 클래런스 공작 조지가 에드워드 4세에게 합류하는 등 요크 지지파가 에드워드에게 집결하자, 에드워드 4세는 런던을 점령하고 다시 헨리 6세를 확보한 후 바넷 전투에서 네빌 형제를, 투크스버리 전투에서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전사시키며 승리했다. 전투 승리 직후 헨리 6세는 런던탑에서 의문사했으며 에드워드 4세의 왕위는 그가 사망할 때까지 위협받지 않았다.
4.3. 리처드 3세의 찬탈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병사하고 나서 평화롭던 요크 왕가에 그의 형제인 꼽추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온갖 악당짓, 수양대군 짓을 한다는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연극인 리처드 3세의 이야기다. 희곡도 에드워드 4세의 즉위와 함께 시작한다.[24]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의 숱한 위기마다 그를 충실히 보좌한 막내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를 신뢰했고, 죽기 직전 어린 아들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이자 호국경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어린 왕의 친위세력이 될 수 있는 왕의 외삼촌 앤서니 우드빌을 호국경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하고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 리처드를 런던탑에 감금했다. 곧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이 정당한 결혼이 아니므로 에드워드 5세 형제는 사생아이며 글로스터 공작이 정당한 왕이라고 선포되었고, 에드워드 5세 형제는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리처드 3세의 찬탈은 기존 요크파 내부에서도 큰 반발을 불러일으켜 리처드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하나였던 버킹엄 공작이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반란의 생존자들 및 우드빌 가문 등 에드워드 4세의 지지자 상당수가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 후계자인 제2대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25] 와 연합하여 리처드 3세를 적대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리처드 3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외아들 미들헴의 에드워드가 사망하면서 요크 왕조의 앞날은 더욱 어두워졌다. 자신의 정당성 강화를 위해 조카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 한다는 루머까지 돌 정도였는데 리처드의 지지층 이탈만 가속시킬 뿐이었고, 헨리 튜더는 자신이 즉위하면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요크 가문을 포용하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4.4. 튜더 왕조 창건
1485년 웨일스에 상륙한 헨리 튜더의 반란군은 보스워스에서 리처드 3세의 진압군과 결전을 펼쳤다. 전투 도중 후방에 물러나 있던 헨리 튜더를 발견한 리처드 3세는 그를 죽이고 전투를 빨리 끝내기 위해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돌진했지만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반란군에 포위당한 리처드 3세는 낙마한 끝에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의 왕관을 헨리 튜더가 쓴 순간을 잉글랜드에서의 중세의 끝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헨리 튜더는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헨리 7세로서 튜더 왕조를 세운 이후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다.
5. 결과와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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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다른 전쟁들, 흔히 외부의 다른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경우는 보통 병력을 통솔하며 전장에 나서서 싸우는 식으로 직접적으로 참전하는 귀족이 있는가 하면 후방에서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참전하는 귀족이 있어서, 전장에 나선 귀족이 전사해도 후방에 있던 귀족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귀족의 수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더군다나 설령 그 전장에 나선 귀족이 포로로 잡히면 어지간해서는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기 때문에 귀족층의 생환률이 상당히 높았다. 그 이전에 귀족층들은 돈이 많기 때문에 질 좋은 장비로 무장하고 있어서 허접한 장비로 무장해서 잘 죽어나가는 부하들과는 달리 사상률 자체도 낮았다.
하지만 장미 전쟁의 경우 영국의 모든 귀족이 직접적으로 참전해야 하는 싸움이다보니 사상자 비율이 높았고, 포로로 잡는것도 살려서 보내면 또 싸워야 하는 적수가 되기 때문에 포로를 잡지 않게 되면서 귀족의 생환률이 상당히 떨어졌다. 이 때문에 장미 전쟁이 종료되어 제2대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가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7세으로 즉위할 때까지 살아남은 귀족 가문은 전쟁 전의 3할에 불과했다. 자연스레 세습직인 의원들도 숫자도 줄어 29명밖에 남지 않았다.[26] 이는 국정을 논의하기엔 너무 적은 수였고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힘도 약해지게 된다. 귀족들이 내전으로 엄청나게 약해지자, 잉글랜드에서는 왕의 권력이 아주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장미전쟁이 끝나고 헨리 7세는 잉글랜드에서 유일한 절대왕정인 튜더 왕조를 세운다.
문제는 당시 귀족은 고등교육을 받아서 사회 운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고급 인력이었기 때문에 귀족의 수 감소는 사회 운영의 어려움으로 이어졌고 결국 사회 운영에 필요한 귀족 대신 사회를 운영할 인재 수를 메우기 위해 요먼, 젠트리와 같은 평민 출신의 실력자(제3계급)를 많이 등용하게 된다. 이는 후일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바탕이 되고 영국의 왕가 역시 프랑스 혁명과 같은 대규모의 혁명을 피해나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스티븐 리의 블로그에서 장미 전쟁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주고 있다. #
한편 이 전쟁은 랭커스터 가문 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이후로 지금까지 랭커스터 공작(Duke of Lancaster)[27] 이라는 칭호는 잉글랜드 및 이후 영국 국왕이 보유한 비공식 칭호들 중 하나로 간주된다. 명시적으로 랭커스터 공작의 칭호를 국왕에게 부여하고 있지는 않지만 랭커스터 공작령(Duchy of Lancaster)은 왕실 자산을 관리하는 기관처럼 되어있고, 관행적으로 국왕/여왕을 랭커스터 공작이라고도 부르는 등 관례가 남아있다. 특히 랭커스터에서...[28] 반면 랭커스터 가문의 맞수였던 요크 가문의 요크 공작(Duke of York) 칭호는 용도가 바뀌어서 주로 잉글랜드·영국 국왕의 둘째 아들에게 부여하는 칭호가 되었다. 이 관행에 따라 엘리자베스 2세의 둘째 아들인 앤드루 왕자가 요크 공작의 칭호를 쓰고 있다. 이상하게도 약 20명의 역대 요크 공작들은 자신의 작위를 후손에게 물려 준 사례가 한 번도 없다. 남성 후계자 없이 사망하거나 스스로 영국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앤드루 왕자 또한 남성 상속인이 없기에 이론적으로 다음 요크 공작은 해리 왕자이다. 하지만 해리 왕자는 왕가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기에 찰스가 즉위해도 요크 공작 작위를 받을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추후에 윌리엄이 즉위한 후에 윌리엄의 차남인 루이가 받을 가능성이 높다.
랭커스터 대학교와 요크 대학교가 정기전을 치루는데, 서로의 특수한 관계성 때문에 장미전쟁의 영향을 받아 정기전 이름은 'Roses'라고 부른다.
조지 RR 마틴이 장미 전쟁에서 영감을 얻어서 얼음과 불의 노래의 다섯 왕의 전쟁 의 설정을 완성했다고 한다. 사실 그 이전에 스타크 가문과 라니스터 가문의 이름부터가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에서 따왔다.
현존하는 영국 귀족 가문들 중 가장 오래된 가문들은 이 시대와도 관련이 깊다. 영국 귀족 서열 1위인 노퍽 공작 하워드 가문은 리처드 3세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존 하워드가 하사받은 공작위에서 기원하며,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네빌 가문은 리처드의 숙부의 계보인 애버개브니 후작으로, 네빌 가문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노섬벌랜드 백작 퍼시 가문은 모계 계승을 거쳐 노섬벌랜드 공작으로 이어졌다. 랭커스터 왕조의 사생아 분파이자 가장 충실한 지지자였던 서머셋 공작 보퍼트 가문은 다시 사생아를 통해 가문이 이어져 보퍼트 공작 서머셋 가문이 되었다. 이외에도 헌팅던 백작 헤이스팅스 가문, 데본 백작 코트니 가문, 더비 백작 스탠리 가문, 슈루즈버리 백작 탤벗 가문 등이 있다.
6. 동음이의어
6.1. 창세기전 외전
1에서 모티브를 따온 사건.
팬드래건 왕국의 성왕 라시드 팬드래건 사후, 당시 태자였던 헨리가 왕위에 올랐으나, 어머니인 로빈의 신분 문제,[29] 그리고 우드스톡의 실종에서 비롯된 첫째 왕자가 아닌 둘째 왕자의 왕위 계승 등으로 인해 올리비아에게서 태어난 왕자 및 그를 지지하는 귀족 세력들이 반기를 들면서 시작된 전쟁.[30]
로빈 태생 왕자들이 주축이 된 콘웰파는 붉은 장미를, 올리비아 태생 왕자들이 주축이 된 버몬트파는 백장미를 사용하여 장미 전쟁이란 명칭이 붙었다.
전쟁 초반 헨리가 버몬트파의 장남 조지를 살해하면서 콘웰파가 우위를 점하는 듯 보였으나, 버몬트의 차남 윌리엄, 그리고 삼남 리처드가 어머니의 고국인 비프로스트로 도망쳐서 이 나라의 지원군을 데리고 돌아와 반격하여 결국 헨리가 윌리엄에게 살해당하고 콘웰성이 함락당하면서[31] 버몬트파의 승리로 끝나게 되며, 윌리엄이 새로운 팬드래건의 왕위에 오르며 장미 전쟁은 일단 종결된다. 그리고, 이 일 때문인지 차후 왕이 된 클라우제비츠는 게이시르 제국의 도움도 받았고 비프로스트에 좋지않은 감정도 있어서 차후 제국이 비프로스트를 멸망시킨 것에 대해 일절의 도움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잔당토벌에 도움을 주게 된다.[32]
한편, 우드스톡의 아들로 본래 콘웰파였으나, 한족과의 혼혈이라는 이유로 모두에게 배척받았던 클라우제비츠만이 콘웰파 왕족의 남자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제국으로 망명한다. 클레어 팬드래건은 행방불명이고 켈리 팬드래건은 아예 언급이 없어서 알 수 없다.
윌리엄이 죽고, 리처드가 그의 장자인 필립을 몰아내고 국왕에 즉위하자 클라우제비츠는 이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자기가 팬드래건의 국왕이 되면 버몬트파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장미 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발언을 한다. 또한 리처드 역시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고 한다.[33] 이에 엘리자베스는 장미의 전쟁을 종식시킬 열쇠로 여겨져 '''장미의 신부'''로 불리게 된다.
클라우제비츠는 게이시르 제국의 도움과 지방 영주들을 설득해 리처드에 반기를 들게 함으로써 장미 전쟁의 승리자가 되고,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장미 전쟁은 진정한 종결을 맞게 된다.
다만, 이 때 귀족들이 콘웰파와 버몬트파로 나뉘어 싸운 것이 차후 버몬트 대공과 헤이스팅스 공작 사이의 내전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100% 그런 것은 아니지만 창세기전3 메뉴얼의 내용에 따르면 버몬트에게는 구 콘웰파 귀족들이, 헤이스팅스 공작에게는 구 버몬트파 귀족들과 리처드 잔당들이 가세했다고 한다. 버몬트 대공이 헤이스팅스 공작과 언쟁할 때 버몬트와 친분이 있는 아델라이드 우드빌이 대공을 비호하자 헤이스팅스 옆에 있던 노포크가 '흥! 이래서 콘웰파는 어쩔 수 없다니까!'고 말한 것을 보면 서로 앙금이 상당히 오래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버몬트 대공이 내전이 끝난 후 헤이스팅스편에 섰던[34] 귀족들은 사피 알 딘이 살라딘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모두 처형되었다고 하니 결과적으로 줄을 잘못 선 버몬트파 귀족들은 망했어요.[35] 다만, 이 결과는 왕국과 안타리아 동부의 장래에 있어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는데, 버몬트 대공이 추진한 투르 원정은 표면적으로는 아스타니아에서의 복수를 내걸었지만 진짜 의도는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을 푸는게 목적이었고, 아스타니아 멸망은 어차피 남의 나라 일인데다 실버에로우 동맹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상황이었고, 국익의 관점에서도 득이 안되는 전쟁이었다. 때문에, 군수산업 종사자인 크리사오르 영지의 케이트 호크도 '우리도 막대한 이익을 이 전쟁으로 얻을 수 있겠지만 무의미하게 병사들의 목숨을 희생시키고 싶진 않습니다'하고 반대한 바 있었다. 버몬트 대공이 헤이스팅스를 처형한 후, 커티스를 멸망시키고[36] 투르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엄청난 국력이 소비되었고, 버몬트 대공도 백치가 되어버린 결과를 보면 헤이스팅스가 반대한 것에도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37]
1에서 모티브를 따온 만큼 겹치는 설정과 인물이 많은 편. 실제 역사상 인물들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 랭커스터 가문 - 콘웰파
- 요크 가문 - 버몬트파
- 헨리 4세 ~ 헨리 6세 - 헨리 팬드래건
- 에드워드 4세 - 윌리엄 팬드래건
- 리처드 3세 - 리처드 팬드래건
- 에드워드 5세 - 필립 팬드래건
- 요크 공 리처드[38] - 존 팬드래건
- 헨리 7세 - 클라우제비츠 팬드래건
- 요크의 엘리자베스[39] - 엘리자베스 팬드래건
6.2. 온라인 게임
1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생각되는 웹 텍스트 기반의 온라인 게임.
유저는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게임내에서 사냥을 다니거나 나라를 새워 왕노릇을 하거나 타 유저의 나라에 들어가 정치나 전쟁을 하거나 하는 것이 가능하다.
6.3. 더비 매치
리즈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일컫는 말. 이름의 출처는 1번. 자세한 항목은 로즈 더비 참고.
6.4. 학교대사전
학교대사전에서 교사들끼리 서로를 증오하여 벌이는 사투를 일컫는 말. 이들은 수업시간에 서로를 욕하는데 학생들은 이들 선생을 아주 재미있게 구경한다. 유래는 1.
비슷한 말로는 영역싸움[40] 이 있다.
6.5. TPS 게임
War of the Roses: Kingmaker 문서 참조.
6.6. 장미전쟁
장미전쟁(보드 게임) 문서 참조.
[1] 장미 전쟁에 대한 TED 강의. 해당 영상의 제목은 '왕좌의 게임이 영감을 받은 전쟁(The Wars that inspired Game of Thrones - Alex Gendler)'인데, 내용은 대부분 장미 전쟁으로 이루어져있다. 즉, 왕좌의 게임이 뭔지 몰라도 상관없다.[2]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는 왕궁의 정원에서 요크가의 수장 요크 공작과 랭커스터의 주요 인물인 서머셋 공작이 논쟁을 벌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타협이 불가능해지자 요크 공작이 흰 장미를 꺾으며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에게 흰 장미를 들어 지지를 표시해달라고 요청하고, 서머셋 공작은 붉은 장미를 꺾어 이에 대응하는 장면이 나온다.[3] 실제 꽃 색깔은 연분홍색이긴 하지만 위에서도 보이듯 문장 색깔은 새빨갛게 했기 때문에 붉은 장미란 말이 돈 것이다.[4] 어떻게 보면 해당화나 찔레꽃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5] 여기에 대해서는 장미 항목을 참고바람.[6] 랭커스터와 요크가 모두 지명이라는 점에 주목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플랜태저넷 왕조의 왕자 중에서 플렌태저넷 본가(잉글랜드 왕위)를 잇지 못한 차자 이하의 왕자들이 요크(요크셔 지역의 중심도시)와 랭커스터(랭커셔 지역의 중심도시)의 영지를 받아 분가하여 탄생한 가문이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인 것. 즉, 동양식 성씨 개념으로 보면 요크 가문이든 랭커스터 가문이든 모두 플랜태저넷씨의 요크파와 랭커스터파 정도 되는 셈이다. 다른 예로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와 부르봉 왕조를 보더라도 부르봉 왕조의 루이 16세를 법정에서 호명한 이름은 '루이 카페'였다. 카페 왕조 역시 카페 왕조의 왕자가 발루아와 부르봉의 영주로 분가하면서 부르봉 가문과 발루아 가문이 탄생하고, 이후 카페 본가의 대가 끊기자 두 분가가 왕위를 잇게 된 것. 실제로 유럽사를 보면 네임드 왕조는 왕조 창시자의 이름이나 별명을 따와 그 후손들이 '나는 아무개의 후손'으로 지칭하고(카페 왕조의 카페나 플랜태저넷 왕조의 조프루아 '플랜태저넷', 류리크 왕조의 류릭이나 아르파드 왕조의 아르파드, 피아스트 왕조의 피아스트 등의 사례가 있다) 거기서 분가해 나간 왕조들은 자신이 받은 영지의 이름을 따서 분가의 이름을 짓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7] 참고로 와트 타일러의 난 때 존은 프랑스에 갔는데 화가 난 시위대가 존의 거주지였던 성을 불태웠다.[8] 청원파가 왕권을 약화시키는 게 목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청원파는 곤트의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리처드와 헨리의 막내 숙부 우드스톡의 토마스를 필두로 한 왕의 친척들이 대세였다. 왕권이 약화되면 왕과의 혈연이 권력 기반인 그들의 권위도 낮아질 테니 이들은 도리어 왕권이 크게 약화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이들은 왕이 방계 왕족을 못살게 구는 것을 견제하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생판 남이 권신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치적 파벌이었다.[9] 매우 간단히 줄이면 왕이 태클 걸던 사촌형을 추방시키고, 사촌형의 아버지(이자 왕의 숙부)가 죽자 상속받을 유산마저 몰수했다. 근데 사촌형이 돌아와서 왕을 사로잡고 자신이 새로운 왕이 된 거다.[10] 참고로 할아버지인 제3대 마치 백작의 이름도 에드먼드였고, 숙부의 이름도 에드먼드였다.[11] 이 사람도 오래는 못 살고 29살 때 요절했다.[12] 참고로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 중에) 삼남인 곤트의 존의 장남이다.[13] 이론적으로 완전 부정은 아니나 사실상 부정이나 다름없다. 실제 이 규칙이 적용된 프랑스 왕실에서는 천 년에 달하는 기간동안 여왕이 나오지 않았다.[14] 당장 살리카법은 외손자의 왕위 계승은 인정한다.[15] 다행히도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의 숙부이자 보호자인 에드먼드 모티머가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왕위 즉위에 찬성했고, 이 덕분에 잡음은 많았을 망정 직접적인 반대없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16] 이때 샤를 6세도 10월에 잇따라 죽었지만 아들 샤를 7세가 조약을 깨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사실 헨리 5세는 샤를 6세가 자기보다 훨씬 일찍 죽을 것 같아서 맺은 조약이었는데...[17] 사서에 따르면 선량한 인물이었으나 정신병의 징후가 있었다.[18] 다만 칼레는 남아있었다.[19] 제3대 요크 공작인 리처드의 아버지인 케임브릿지 백작 리처드는 헨리 5세에게 반역을 들었다는 이유로 처형되는 등, 헨리 5세 때 나빠진 관계를 헨리 6세가 더 악화시켰다. 제3대 요크 공의 백부인 제2대 요크 공작 에드워드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헨리 5세와 함께 싸우다 전사했으며, 헨리 5세는 자신의 능력과 건강에 자신이 있었기에 반역자의 아들에게 요크 공작령을 물려주는 선심을 썼지만 헨리 5세가 요절한 결과 강력한 왕위 경쟁자에게 힘을 실어준 꼴이 되어버렸다.[20] 정확히 보면 랭리의 에드먼드의 둘째 아들인 캐임브릿지 백작 리처드의 장남이다. 랭리의 에드먼드의 첫째 아들인 제2대 요크 공작 에드워드는 자식 없이 죽었고, 그의 작위는 조카인 리처드가 계승했다.[21] 참고로 앤 모티머와 케임브릿지 백작 리처드는 6촌 친척이다. 앤 모티머는 친척 할아버지뻘에게 시집간 셈이다. 실제 나이 차이는 많이 안 나서 리처드가 15살 가량 연상이었다.[22] 요크 공작의 처남인 솔즈버리 백작 리처드 네빌과 그 아들 워릭 백작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23] 요크파가 너무나 허무하게 패배한 나머지 무지개 색깔을 외우는 방법 중 하나인 'Richard of York gave battle in vein'(요크의 리처드가 전투를 헛되게 내주었다)이 이 전투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24] 이에 대해 리처드 3세를 지나치게 추남에 악마화한 것은 내전의 승자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조부인 헨리 튜더를 띄우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25] 어머니 혈통이 랭커스터 가문의 분파인 보퍼트 가문이긴 하지만 보퍼트 가문이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였던 캐서린 스윈포드와의 사이에서 나온 사생아들로 이루어진 집안이다. 나중에 존과 캐서린은 정식 결혼을 하였고 이로써 사생아들도 적자로 취급받게 되었지만 헨리 4세에 의해 왕위계승권이 박탈되는 등, 정상적으로는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는 처지였다.[26] 튜더 왕조가 종결된 제임스 1세 때에도 잉글랜드 전역의 귀족 가문이 30개의 오등작의 가장 아래인 남작 가문을 포함해 50개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다.[27] 여성 공작일 경우에도 그냥 Duke를 쓴다. 여성형인 Duchess으로 쓸 경우 남성 공작의 부인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냥 남성형을 쓰는 것.[28] 랭커스터에서는 종종 God Save the Queen 1절 첫 부분 "God save our gracious Queen, long live our noble Queen"에서 noble Queen을 noble Duke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가사 내의 모든 Queen을 다 Duke로 바꾸는 건 아니고 딱 저 부분만.[29] 사이럽스의 도적 출신이었다.[30] 원래 팬드래건 왕국의 기존 귀족들은 이올린 왕녀가 게이시르 제국 원정을 갔다가 상당수가 갈려 나갔고 그 공백을 메꾼 것이 바로 그레이 스케빈저가 이끌던 용병 기사단이다. 즉, 버몬트 파는 기존 귀족 세력이 많고 콘웰 파는 용병 기사단에서 공을 세운 신흥 세력이다. 로빈 왕비 역시 용병 기사단 출신 기사이다. 반대로 올리비아 왕비는 비프로스트의 왕녀다. 다만, 이 전쟁의 도화선 및 1차적인 명분은 라시드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헨리 팬드래건이 투르 제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려고 시도한 것이라고 한다.[31] 템페스트 시점에서 콘웰성에 가면 폐허가 되어있다.[32] 원래 게이시르 제국은 팬드래건 왕국의 오랜 적이었고 비프로스트는 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통적인 동맹국이었다. 그러나 비프로스트의 공왕 모젤 3세가 공국의 확장을 명분으로 제국과 왕국의 내전에 끼어들었던 적이 있어서 양국의 미움을 사게 된 것.[33] 이 부분이 템페스트의 시작 부분이다.[34] 물론, 버몬트 대공은 헤이스팅스 공작과의 최종결전전에 싸움에서 빠지거나 항복한 자들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항복하지 않고 헤이스팅스와 끝까지 함께 했던 자들은 도망친 그리피스를 빼고 모두 죽었다고 한다.[35] 물론 케이트 호크처럼 줄을 갈아타서 살아남은 버몬트파 귀족들도 많다.[36] 이 일 이후로 명목상으로만 유지되었던 실버에로우는 완전히 와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37] 물론, 버몬트 대공은 그 이전부터 록슬리와 함께 중앙집권국가로의 전환을 계획하고 있었는지라, 그 점에 있어서 헤이스팅스파의 심기를 건드린 것도 있긴 했다.[38] 에드워드 5세의 동생으로 리처드 3세에 의해서 에드워드 5세와 함께 런던 탑에 유폐되었다.[39]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 리처드의 누이. 후에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인 헨리 튜터와 결혼하면서 장미 전쟁이 끝나게 된다.[40] 육식 동물들이 자신의 고유 영역을 지키듯 수업시간에는 교실이 교권 신수설에 의해 그 선생의 것이다. 이를 다른 선생이 침범하면... 같은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이면 신경전이 더더욱 치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