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페의 앤
1. 개요
클레페 공국의 요한 3세와 윌리히-베르크의 마리아의 딸. 독일식 이름은 안나 폰 클레페. 헨리 8세의 4번째 왕비.
2. 생애
2.1. 헨리 8세와의 결혼
3번째 왕비였던 제인 시모어가 에드워드 6세를 낳고 사망한 뒤 슬슬 재혼을 생각하던 헨리 8세는, 신하들의 권유로 클레브스의 안나에게 혼담을 건넸다.
당시 왕가의 혼인은 대개 국제결혼이라, 혼인이 결정되면 결혼식이 있기 전까지 매년 양쪽에서 초상화를 교환해서 예비 신부와 예비 신랑의 성장과정을 알리곤 했다. 이때 앤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가 당대의 대화가 한스 홀바인[1] 이었는데, 이 양반이 안나의 초상화를 너무 예쁘게 그려서(…) 아주 큰 오해가 생겼다.
그렇잖아도 앤과의 결혼을 권하던 신하들이 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얌전하며 순종적인 여인인지 열변을 늘어놓았는데, 한스 홀바인 이 양반까지 앤의 외모를 너무 미화한 그림을 내놓자, 헨리 8세는 초상화 속의 여인을 새 왕비로 맞기로 결정한다.
2.2. 불행한 결혼
하지만 헨리 8세는 앤의 '''실물을 보고 경악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좀 더 복잡한 이야기가 얽혀 있는데, 헨리 8세는 자신을 전설이나 동화에 나오는 이상적인 왕자/군주로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상당히 로맨틱하면서도 자기도취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직 첫째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금슬 좋게 지내던 젊은 시절에는, 종종 변장하고 왕비를 찾아가 놀래켜주는 이벤트를 벌였을 정도였다. 사실 그 때마다 캐서린 왕비는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보고도, 일단 속아 넘어갔다가 뒤늦게 남편을 알아보는 척을 하며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이런 성격이었기 때문에 헨리 8세는 앤과 처음 만나면 서로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리라 기대를 했고, 특별 이벤트까지 준비했다. 앤이 영국에 도착하자, 헨리 8세는 신하와 함께 변장을 하고서 갑작스레 찾아가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웬 '''뚱뚱하고 늙은 남자'''가[2] 갑자기 나타나 친밀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자, 전혀 언어가 통하지 않은 앤은 미래의 남편을 알아보기는 했지만 별로 기뻐하지 않고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했다. 무시를 당한 헨리 8세는 엄청나게 화가 났고, 옆의 방으로 가서 왕의 복장으로 갈아 입고 앤을 다시 찾아갔다. 그러자 앤은 그에게 공손하게 대했지만, 헨리는 이미 대단히 자존심이 상한 상태였다. 게다가 헨리의 생각에는, 앤이 자신이 기대했던 것만큼 예쁘지도 않았다.
그날 밤, 헨리 8세는 노발대발하며 결혼을 주선한 신하에게 화를 내고 "저런 여자와 잘 수 없다!!!!"며 방방 뛰었다.[3] 그리고 정말로 같이 자지 않았다(…).
게다가 헨리 8세는 여자를 볼 때 자신과 대등하게 얘기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 수준과 위트를 갖추었는지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불행하게도 앤은 일단 영어나 프랑스어를 잘 하지 못했다. 따라서 부부 간에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는 건 고사하고 의사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또한, 앤이 여자에게는 가사 외의 교육은 거의 시키지 않은 보수적인 개신교 궁정에서 자란 탓에 예술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소양이 없었다. 때문에 로맨틱한 미녀 공주를 원했던 헨리 8세 입장에서 보자면, 앤은 정숙하고 얌전하기만 할 뿐 무척 따분한 성격의 독일인 공녀에 지나지 않았다.
2.3. 알고보니 실패한 정략결혼
여기까지는 여러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잘 알려졌지만, 앤과 결혼하려 한 이유가 처음부터 정치적 이유였던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일단 앤의 친정은 한미한 집안이긴 커녕 오히려 유럽 왕족과 혼인이 잦은 명문가였다. 앤의 친정 조카이자 당시 클레페 공작이였던 빌헬름 5세의 첫 아내는 훗날 프랑스 앙리 4세의 어머니가 되는 나바라 여왕 잔 달브레였고, 카를 5세와 화해하며 잔 달브레와 이혼한(혼인무효) 이후 재혼한 상대는 후임 황제이자 로마왕인 페르디난트 1세의 딸 마리아였다. 또한 독일 개신교 제후의 대표격인 작센선제후의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부인 시빌은 앤의 언니이다. 이러한 가문의 면모와 혼인을 맺었던 상대들을 살펴보면 앤은 흔히 대중매체에 알려진대로 독일 소국의 출신이 아닌, 명실공히 유럽 왕실과 동등한 혼인이 가능한 통치가문의 후손이었다.
따라서 이 혼사는 가톨릭 세력에게 포위당한 영국이 외교적으로 고립을 타파하고자, 독일 개신교 제후들과 연합하여 동맹을 얻으려는 목적에서 추진되었다. 또한 앤의 친정인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국은 영토는 크진 않지만 부유하여 카를 5세가 호시탐탐 노렸기 때문에, 강력한 사돈을 맞이하여 카를 5세의 위협에 맞서려고 노력했다. 즉, 잉글랜드와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국 모두의 이익을 위해 성사된 정략결혼이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 혼인 시도 과정에서 이미 독일 개신교도 제후연합은 헨리 8세를 거부했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루터회 교리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가톨릭에서 교황이 하는 역할만 왕이 대신하는, 한마디로 무늬만 개혁이었다. 정작 복음주의자들은 개혁과정에서 철저히 무시당하거나 배제되었고, 더군다나 골수 가톨릭 교도인 토머스 모어를 중용하여 가톨릭의 교리인 화체설(성변화)[4] 을 부인한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신학자 교수 40여 명을 고문하고 6명을 화형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앤은 당초 영국과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국의 의도와는 달리, 이미 정치외교적인 가치가 매우 현격히 떨어진 상태에서 결혼하게 된 것이다.
헨리 8세가 여색을 무척 밝힌 것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왕비 자리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최우선 조건으로 보게 된다. 그것도 대륙과의 결혼 동맹을 위해 외국 여성과 결혼하는 것인데, 당연히 외모는 중요한 순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앤이 추녀라는 말을 한 사람이 오직 헨리 8세뿐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사실 헨리 8세는 이때 몸이 비대해진데다가, 고름으로 가득 차 썩어들어가던 다리의 상처 때문에 몸에서 엄청난 악취가 풍겼고, 또한 결혼한 왕비들을 쫓아내거나 죽여버린 터라, 유럽의 여러 왕실 사이에서는 신랑감으로서 평이 매우 나빴다. 참고로 제인 시모어 사후에 새 신붓감 중 하나로 고려됐던 프랑스의 귀공녀 마리 드 기즈는 헨리 8세가 자기에게 청혼하려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냉큼 헨리 8세의 조카이기도 한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해버렸다.[5] 또 다른 유력한 신붓감이었던 밀라노 공작부인 덴마크의 크리스티나는 청혼하러 온 영국대사에게 '''"나에게 목이 2개 있다면 기꺼이 귀국 국왕께 하나를 드리겠지만,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목이 하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놓고 말하며 거절하기도 했다. 이렇듯 헨리 8세가 괜찮은 신붓감 후보들에게 죄다 거절을 당한 처지였기 때문에, 더 이상 이것저것 따지며 고를 수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앤이 그 후 헨리 8세의 왕비가 되었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아름다운 외모라는 기록도 있다. 이 문서 맨 위의 초상화를 봐도 추녀라고 하기는 어렵고, 사람에 따라서는 꽤 선량한 인상이라고 볼 수도 있는 편. 미화된게 아니라 사실에 가까운 초상화란 이야기도 있으며, 그림을 그린 한스 홀바인은 실물과 그렇게 동떨어지게 그리는 화가도 아니었다. 말년 초상화와 인상이 비슷한걸로 봐선 그렇게까지 미화한 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헨리 8세 취향의 절세미녀가 아니었을 뿐이다. 헌데 그렇다고 헨리 8세가 절세미녀만 좋아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그 난리를 친 앤 불린이나 가장 사랑한 제인 시모어나 그닥 미인도 아니었다. 클레페의 앤은 바르델 브루인(Barthel Bruynthe the Elder)이 그린 말년의 초상화를 보아도, 절대 추녀라는 느낌도 들지 않는 수수하고 무난한 외모이다.# 오히려 미인상에 가깝고, 부인들 중 그나마 미인으로 알려진 아라곤의 캐서린이나 캐서린 하워드의 초상화와 비교해 봐도 그보다 못하지 않아 보이는 외모이다. 더군다나 가슴이 크단 이유로 헨리는 그녀가 처녀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초상화나 주변 증언을 보면 오히려 글래머에 차분한 인상의 미인이라 볼 수 있다.
결국 혹은 자존심이 상한 앞의 일화 때문이거나, 이해관계가 안 맞았던 것. 앤이 추녀였던 것은 아니고, 헨리 8세와 앤이 금세 이혼한 결정적 원인이 앤의 외모도 아니다.
[6]
2.4. 불행한 결혼생활
어쨌든간에 헨리 8세는 결혼 기간 내내 앤이 못생겼다는 이유로, 그리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앤의 정략적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에, 앤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침대에서 앤과 카드놀이를 하고, 매일 밤과 아침마다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런가 하면 자기 신하들에게는 "앤의 가슴이 커서 축 쳐져 있으며 배에 살집이 있으니, 처녀가 아닐 거다. 그러니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다."라는, 인격의 바닥이 보이는 폭언을 하기도 했다.[7]
한편 매우 보수적이고 엄격한 신교도 국가의 궁정에서 자란 클레페의 앤은, 성에 대해 순진하다 못해 무지할 정도였다. 심지어 '''성관계를 해야만 아이가 생긴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이런 비화가 전해진다. 결혼하고 반년쯤 지났을 무렵 헨리 8세가 이혼을 고려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앤을 모시던 시녀들이 앤에게 "국왕과 육체 관계를 가졌느냐?"고 물었다. 이에 앤은 "폐하께서 밤과 아침마다 이마에 키스를 해주신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대답했다고 한다. 시녀들은 놀랐고, 질문한 시녀들 중 한 사람이 대담하게 '''"왕비님께서는 아직 처녀이신 것 같다. 모두가 원하는 왕자님을 낳으시려면 그것보다 더 해야 한다."'''라고 말했고, 앤은 "더 알고 싶지 않다."며 정색하고 대화를 끝냈다는 비화가 있다.
신혼 때부터 앤에게 만족하지 못한 헨리 8세는, 앤의 시녀인 어린 캐서린 하워드에게 푹 빠져들게 되었다. 이제 그는 사랑할 수 없는 앤과는 이혼하고 캐서린과 결혼하기를 원했다.
2.5. 이혼과 무효화
결국 헨리 8세와 앤은 합의하에 결혼을 무효화했다. 그 시절 유럽에서는 부부가 성관계를 갖지 않으면 결혼이 성립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으므로, 결혼 무효화를 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다.
처음에 앤은 이혼하자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다. 그 무렵 앤은 영어도 막 익혀가고 있었고 서서히 사람들 사이에서 신망을 얻는 등, 그녀 나름대로 잉글랜드의 왕비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국의 대사와 변호사를 동원하여 결혼 무효화에 맞서려고 했지만, 곧 마음을 바꾸었다. 이미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를 내쫓고 앤 불린 왕비의 목을 벤 전력이 있는 남편과 대치해봤자 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클레베 공작이 카를 5세에게 맞서다가 영지가 쑥대밭이 되고 제국추방령이 내려진 상태라, 돌아갈 곳도 없었다. 클레베는 영토는 좁지만 매우 부유한 영지인데다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저지대 영지와 연결되어 있어서 눈독 들이다가 뺏은 격. 결국엔 클레베 공작은 카를 5세에게 독일지역 일부 영토를 돌려 받는다. 네덜란드 지역은 완전히 뺏기는 대신 보상으로 카를 5세의 조카이며 차기 황제 로마왕 페르디난트의 딸과 결혼.
한편 앤의 결혼을 주선했던 토머스 크롬웰은 이 이혼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몰락하고, 결국 처형을 당하게 된다.
2.6. 잉글랜드의 귀부인으로 거듭나다
한편 헨리 8세도 그녀가 조용하게 이혼에 동의해 주어야 복잡한 국제 문제를 피할 수 있었으므로, 이혼 조건으로 막대한 보상을 제시했다. "죽어도 이혼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리다가 불행한 삶을 살았던 아라곤의 캐서린과는 달리, 앤은 헨리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사실 아라곤의 캐서린은 자기가 폐위되면 당장 하나뿐인 딸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판이었으므로 쉽게 항복할 수도 없는 처지였으나, 자식이 없었던 앤은 그 정도로 절박한 처지는 아니어서 순순히 이혼에 동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앤은 이혼 후에도 계속 잉글랜드에 남을 수 있게 되었고, 리치몬드 궁을 비롯한 화려한 궁전 5곳과 막대한 연금을 받으며 여생을 풍족하게 보냈다. 앤은 이혼함으로써 막대한 재산과 함께 전 남편 헨리의 여동생으로서의 칭호와 대우를 보장받고, 헨리의 딸이자 한때 자신의 의붓자식이었던 공주들의 친구로서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앤은 곧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고, 와인에 맛을 들였으며, 남자와 여자가 동침한다는 의미조차 몰랐던 순진한 처녀에서 카드놀이와 연회를 즐기는 여유롭고 사교적인 성격의 귀부인으로 거듭났다. 그후로 재혼을 하지 않고 그 대신 어린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애정을 쏟았으며, 엘리자베스도 앤을 잘 따라서 앤의 궁에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앤은 이혼 전에는 자신의 시녀였으나 이혼 후에는 헨리의 다음 왕비가 된 캐서린 하워드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대했다. 비록 왕비 자리에서 물러났어도 다른 나라의 공주나 다름없는 귀한 신분의 앤이 이렇게 나오자, 캐서린 하워드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앤이 자신에게 복종하며 자신의 새 배우자도 인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흡족해했다. 그래서 헨리 8세와 새 왕비와 앤은 화목하게 지냈다.
흥미롭게도, 헨리 8세는 결혼 생활 동안에는 앤을 끔찍하게 싫어했지만, 정작 이혼하고 나서는 앤에게 아낌없는 지원과 호의를 베풀어 앤을 잉글랜드 왕실의 일원으로 대접했다. 헨리 8세의 유별나고 변덕스러운 성격이 잘 나타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앤 본인이 명분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사려 깊게 현실적으로 행동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캐서린 하워드가 처형된 이후 앤의 친정을 중심으로 앤을 왕비에 복위시키려는 움직임, 혹은 그에 대한 소문이 한동안 잉글랜드 정계에 나돌았다. 헨리 8세가 이를 일축하였기에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는데, 당사자인 앤에게 실제로 왕비 자리로 돌아가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헨리 8세가 죽은 후, 그동안 지급되던 연금이 끊기는 바람에 앤은 잠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때문에 새 국왕인 에드워드 6세와 친정에 금전적인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때 앤이 "결국 우리는 외국인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쓴 것이 남아 있다. 다행히도 몇 년 뒤 잉글랜드 왕실의 지원을 다시 받게 되어서, 예전처럼 다시 넉넉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앤은 1557년에 42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사인이 명백하게 밝혀지진 않았으나, 역사가들은 암이 원인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그녀는 헨리 8세의 왕비들 6명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살았던 사람[8] 이다. 다른 왕비들의 삶이 너무나 파란만장했던 반면에, 그녀는 불행했던 잠깐의 결혼 생활과 잠깐동안 연금이 끊기던 시절을 제외하면 행복하고 따뜻한 삶을 살았다.
앤은 왕실의 어른으로 국가행사에서 언제나 대우받았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늘 한결같이 관대하고 상냥했던 그녀의 성품 덕분에 한때의 의붓자식들인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 모두 그녀를 진실된 친구로 여겼고, 잉글랜드 백성들 역시 그녀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유언에서조차 그녀는 자신을 돌봐준 사람들과 자신을 오랜 기간 모셨던 시종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유산을 남겨주었다. 그렇게 가장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삶을 만끽했던 앤 왕비는, 마지막까지도 우아한 성품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선의 숙종의 3번째 왕비인 인원왕후와 비슷하다. 궁중의 법도와 예의범절를 철저히 지키고 남편의 사랑을 못 받았지만 의붓아들인 영조를 지지하고 나중에 왕실에 큰 어른으로 대접받는 등 의붓자식인 엘리자베스 1세와 사이가 각별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다.
3. 매체에서
3.1. 튜더스에서의 클레페의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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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스 스톤[9] 이 연기한 클레페의 앤. 원래는 제인 시모어 역의 오디션을 봤었다고 한다.
잉글랜드의 보통 여인들과 달리 카드나 유흥거리를 전혀 즐기지 않는 딱딱한 생활을 하고 있던 외국인인데다가, 성공회를 믿는 잉글랜드와 달리 루터회 신자였기 때문에, 여러모로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잉글랜드으로 출항하기 전 칼레에 도착했을 때, 자신을 방문한 찰스 브랜던에게 잉글랜드식 예법이나 카드를 배우는 등 영국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아무래도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에 서투른 듯 소심한 태도를 보인다. 헨리 8세가 자신을 보고 실망해서 무례하게도 냅다 가버렸음에도 '영국식 예절에 익숙치 않았다'며 자신을 탓했고, 자신과 거의 동년배이며 미혼인 큰 의붓딸 메리에게 신랑감으로 자기 사촌을 소개시켜주는 등 고운 심성을 보인다.
하지만 앤이 저렇게 노력하는 것과는 별개로, 헨리 8세는 앤과의 결혼을 무척 후회하고 "앤은 고집이 세다"며 앤을 탓하고 있었다. 앤 역시 이 상황에 조바심을 느끼면서도 헨리 8세와의 생활을 괴롭게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가톨릭 신자인 메리 역시, 앤이 개신교 신자라는 사실 때문에 내심 탐탁지 않아했다. 그나마 그녀를 챙기는 것은 혼인을 주선했던 토마스 크롬웰이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10]
끝내 헨리 8세와 이혼한 뒤로는 왕의 누이로써 지내며, 재혼하지 않고 의붓딸인 엘리자베스를 자기 딸처럼 돌보면서 산다. 또한 이전과 같은 소심한 태도는 온데간데 없이,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대하고 웃음이 많아졌다.
앤이 개신교도라는 이유로 탐탁찮게 여겼던 메리도 아버지가 앤과 기어이 이혼하고 철딱서니 없고 경박하고 문란한 캐서린 하워드에게 빠진 것을 보고 한탄하며, "앤이야말로 정말 좋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앤과 이혼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한다. 찰스 브랜던 또한 그녀를 존중하며 따뜻하게 대한다. 앤은 찰스를 다시 만났을 때 "당신에게 배웠던 카드놀이 덕분에 돈을 많이 벌었다"고 농담도 한다.
캐서린 하워드도 처음엔 헨리 8세의 전 왕비인 그녀를 경계했다. 하지만 앤이 자신을 왕비로 인정하며 예의를 갖추고 다정히 대하자, 나중에는 자신이 받은 선물을 앤과 나누어 갖겠다고 할 정도로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이후 헨리 8세가 찾아와 같이 식사를 하면서 자신의 결혼 반지를 돌려주며 헨리에게 아무런 유감이 없음을 암시한다. 또한 자신이 결혼 전 클레페에 있을 때의 답답했던 생활에 비해 음악을 듣거나 와인을 마시는 등, 영국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행복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캐서린 하워드에게 슬슬 질려가던 헨리 8세는 자신이 모르던 앤의 면모에 낯설어하고 당혹해함과 동시에, 앤의 성숙함에 끌리게 되고 결국에는 그녀에게 잠자리를 요구한다. 정작 부부일 때에는 한 번도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극도의 아이러니.
[1] 말년엔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 일했는데, 제인 시모어와 캐서린 하워드의 초상화 역시 그의 작품이다.[2] 헨리와 앤이 결혼하던 당시에 헨리 8세는 49세, 앤은 25세였기에, 헨리가 앤보다 무려 두 띠 동갑이었다.(…) 또 헨리는 몇 해 전에 다리에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거동이 불편해졌는데도 엄청나게 먹는 습관을 유지했던지라, 허리 둘레가 40인치를 넘어서서 50인치에 육박할 정도로 몸이 엄청 비대해져 있었다.[3] 이 때 그가 한 말도 가관이다. '''"바다 건너에서 암말이 왔구나!!!!"''' 이 대사는 드라마 튜더스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약간 바뀌어서 '''"생긴 게 완전히 말과 같아! 털 없는 암말이라고!"(She looks like a horse! A furless mare!)'''[4] 개신교에선 가톨릭과 정교회처럼 성찬식에서 빵이 직접 예수의 육신으로 변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당시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존 위클리프의 전통을 되살려 화체설을 부인하고 가톨릭 교리는 빵을 우상으로 섬긴다고 비난했다.[5] 그리고 제임스 5세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는데 그 딸이 후일의 메리 1세(스코틀랜드)이다.[6] 헨리가 가장 사랑한 제인 시모어나, 그 난리를 떨었던 천일의 앤도 그렇게까지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다. 앤 불린은 검은 머리, 검은 눈에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져서 '금발, 파란 눈, 하얀 피부'를 제일로 치던 당시 미의 기준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았고, 제인 시모어는 금발에 파란 눈에 피부도 희었으나 특별히 예쁘지는 않은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였다.[7] 헨리 8세는 자신이 여자 경험이 매우 많아서 처녀와 처녀가 아닌 여자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고 자부했지만, 헨리가 앤과 이혼한 다음 맞아들인 새 아내인 캐서린 하워드의 경우를 보면 헨리 8세의 이런 자부심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 수 있다. 헨리 8세는 캐서린 하워드가 체구가 가냘프고 가슴이 작다는 이유만으로 처녀라고 믿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캐서린 하워드는 처녀는커녕 결혼 전인 14살 때부터 이미 몇 명의 남자와 성경험을 했고, 결혼 후에도 남편 이외의 남자와 간통을 저지르는 등 상당히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즐기던 여자로 밝혀졌다.(...)[8] 단, 아라곤의 캐서린이 50세에 세상을 떠났기에 (나이로 따지자면) 가장 오래 살지는 못했다.[9] 사실 조스 스톤은 가수로 더 유명하다.[10] 앤은 "폐하가 나와 잠자리도 하지 않을뿐더러, 폐하의 다리 상처에서 악취가 나는 것이 괴롭다"고 토마스 크롬웰에게 토로한다. 그러나 크롬웰은 앤에게 "폐하에게 나긋나긋하게 굴라"고 다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