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이토부르크 전투

 


'''토이토부르크 전투'''
Battle of the Teutoburg Forest
[image]
'''시기'''
서기 9년 9월
'''장소'''
독일 니더작센오스나브뤼크
'''원인'''
로마 제국에 대한 아르미니우스의 저항.
'''교전국'''
[image] '''로마 제국'''
[image] '''체루스키'''
'''지휘관'''
[image] '''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
[image]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image] '''아르미니우스'''
'''병력'''
14,000 ~ 22,752명
15,000 ~ 20,000명
'''피해'''
사망: 16,000 ~ 20,000명
불명
'''결과'''
로마 제국의 참패.
'''영향'''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게르마니아 정복 좌절.
1. 소개
2. 명칭
3. 전투 배경
5. 전투의 경과
6. 참패의 결말
7. 뒷이야기
8. 의의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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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서기 9년, 게르마니아의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로마 제국게르만족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이 전투에 투입된 로마군 3개 군단 및 그 보조군이 모두 전멸하는 대참패를 겪었으며, 이는 로마 제국 사상 최악의 패전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이 전투 이후 로마는 게르마니아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게 되었고, 게르만족은 로마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를 유지하게 된다.

2. 명칭


우리말로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라고 한다.[1]
본 명칭은 Teutoburg(토이토부르크), 라틴어로는 Teutoburgiensis saltus(테우토부르그 숲)이라 하며, 로마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바루스의 재앙(Clades Variana)이라고 불렀다. 이원복은 먼나라 이웃 나라 이탈리아 편에서 토이부르거 숲 전투라고 표기했다.
현대 독일어로는 'Varusschlacht'(바루스 전투)라고 부르지만 'Schlacht im Teutoburger Wald(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나 'Hermannsschlacht'(헤르만 전투)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 단, 헤르만 전투라는 명칭은 주로 과거에 통용되는 명칭이라고 한다.

3. 전투 배경


로마 제국의 북쪽 땅인 게르마니아 정벌은 당시 로마에 있어 중요한 화두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갈리아 정복 과정에서 서쪽 접경 지대의 게르만족과 접촉하게 되었다. 갈리아를 평정할 즈음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의 일부까지 진출해 보려고 시도했지만, 이내 게르마니아의 지나칠 정도로 울창한 숲과 게르만족의 호전성 때문에 큰 피해가 날 것을 우려해 포기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에 상응하는 무공을 세우고자 했다. 이에 그는 게르마니아 정벌 계획을 세운다. 그의 게르마니아 정벌 계획은 광활한 게르마니아 전역을 다 차지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당시 라인강이었던 국경을 일단 엘베강까지 확장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9년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 로마의 2대 황제)와 드루수스(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에게 게르마니아를 정벌하라고 명령하여 마침내 로마 제국의 게르마니아 정벌이 시작되었다. 게르마니아 정벌은 로마 군단 11개 이상이 투입된 로마 제국 역사상 최대의 정복 사업이었다. 그러나 게르마니아 정벌은 생각했던 것만큼 쉽지 않았다. 갈리아 정벌보다 훨씬 길어졌고, 엄청난 세금이 지출되었다. 이 때문에 로마 제국 내부에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도중에 드루수스가 죽어 10년간 전쟁은 잠시 중단되었으나 이후 티베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활약으로 서기 5년 즈음 드디어 로마군은 엘베강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게르만 부족들이 로마에 굴복하지 않고 있어 게르마니아는 몹시 불안정한 상황이었다.[2]
이런 상황에서 아우구스투스는 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를 게르마니아 총독으로 임명했다. 바루스는 게르마니아 총독으로 임명되기 이전에도 여러 속주에서 총독을 지내왔다. 바루스는 총독으로서 매우 무자비하고 강경한 속주화 정책을 펼친 인물이었다. 그는 현지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가혹하게 수탈했으며, 한번 반란이 일어났다 하면 그 지역의 주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하여 다시는 반란을 꿈도 꿀 수 없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바루스는 로마에서 매우 유능한 속주 총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바루스의 게르마니아 총독 임명은 아우구스투스의 최악의 인사로 기록되었다.

4. 아르미니우스의 등장


이때 게르만족 출신인 바루스의 부관 아르미니우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아르미니우스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케루스키족 군장 세기메루스의 아들이었다. 세기메루스는 드루수스의 게르마니아 정벌 때 로마군에 항복하고 그의 두 아들을 로마에 인질로 보냈다. 인질로 보내진 아르미니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로마에서 성장했다. 그는 로마군 보조 군단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기사 계급(에퀴타스)까지 올랐고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그는 로마의 정치적 환경과 군사적 역량에 대해서 직접 배웠고 토이토부르크 전투가 있기 전에 아르미니우스는 케루스키 족으로 이루어진 보조병 부대를 이끌면서 로마군에 종군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고, 로마군에 오랫동안 종군한 경력 덕분에 누가 봐도 친로마 게르만 귀족이었다. 게르마니아 총독 바루스는 로마 시민이자, 아르미니우스를 총애했다.
참고로 아르미니우스의 의견에 바루스가 귀를 기울인 것은 사실이지만 바루스의 부관은 레가투스인 누모니우스 발라 - Numonius Vala 라는 인물이었다. 다만 아르미니우스의 의견을 많이 참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겉보기와는 달리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에 대해 저항 의지로 가득했다. 그는 애초에 로마에 굴복할 생각이 없었다. 아직도 왜 그가 로마에 저항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논지가 분분하다. 로마의 군사력이 게르마니아에서 약해진 사이에 케루스키의 왕이 되기 위해서, 또는 로마군에 종군하면서 그들의 압제에 학대받는 피지배인을 보면서 몇십년간 떠나있던 자신의 고향에 연민을 가져서라는 의견 또한 있다. 다만 그가 게르마니아의 여러부족을 통합하겠다는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게르마니아에는 (로마인들의 기록만으로도) 50여개가 넘는 부족이 난립하고 있었고, 아르미니우스 자신은 아버지 세기메루스가 로마군에게 굴복했고 본인은 로마에서 유년기를 보내어서 심각한 페널티를 안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죽는 순간까지 케루스키족 내에서조차 세게스테스 등 다른 귀족들에게 압도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애초에 게르마니아의 수많은 부족들은 서로간의 수많은 알력다툼으로 단결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였고, 아르미니우스가 게르마니아를 통일시켜서 왕이 되겠다는 것은 후세의 독일인들의 민족주의의 바람이자 창작이다.
일설에는 바루스가 아르미니우스를 대단히 신임해주기는 했지만 그를 계속해서 지휘관 같은 중요한 직책이 아닌 겨우 도시 치안관 정도로만 대우해서 거기에 불만과 소외감을 가지고 로마군의 힘을 빌려서 케루스키족의 왕이 되려는 계획을 수정하여 반란을 계획했다는 미확인 정보도 있다.
무슨 이유이건 간에 아르미니우스는 겉으로는 로마제국에 순종하는 현지인으로 행세했지만, 북 게르마니아로 돌아온 AD 7년 또는 AD 8년 부터 꾸준히 자신의 계획을 진행해나갔다. 비록 수많은 부족들은 공동체 의식이 희박해지만 역설적으로 바루스의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통치에 대해 많은 게르만인들이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게르만 부족들은 서로 간의 갈등을 멈추고 아르미니우스의 연합에 동참했다.

아르미니우스의 숙부 중 토이토부르크 전투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잉고메르(Ingomer 또는 Ingiuomer)뿐이었고 그는 아르미니우스를 적대하지도 않았지만 토이토부르크 전투 당시에는 로마군에 맞서지도 않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애초에 세게스테스는 아르미니우스의 장인이지 숙부가 아니다. 세게스테스의 동생인 세기메루스와 아르미니우스의 아버지인 세기메루스를 혼동한 듯.
한편 로마의 게르마니아 정복이 어느 정도 일단락된 직후인 발칸 반도에서 일리리아 대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게르마니아 정벌을 위해 무려 11개의 로마 군단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일리리아 대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8개의 군단이 AD6년-AD9년 사이에 발칸 반도로 이동했고, 바루스의 휘하에는 3개의 군단이 남아있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이것을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5. 전투의 경과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던 바루스는 어느 날 로마에 복속된 한 마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에게 이런 것을 가만히 둬선 안 된다며 바루스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번 반란이 일어나면 다시는 재발하지 못하게 무자비하게 토벌해왔던 바루스는 이번에도 친히 휘하의 모든 군단 병력을 이끌고 출진하기로 결정한다. 3개 군단 외에도 6개의 보조군 대대, 그리고 3개의 기병대 중대 등을 포함한 대병력이었다.
출병 후, 게르마니아 지리에 어두운 바루스는 아르미니우스에게 길 안내를 맡겼고, 아르미니우스는 로마 군단을 게르만족이 잔뜩 매복하고 있던 울창한 토이토부르크 숲속으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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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미니우스는 토이토부르크 숲에 로마군을 안내한 후 자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와서 지원을 오겠다며 로마군을 이탈했고 잠시후 자신의 부하들로 로마군을 공격했다. 20km에 달하는 긴 행군 대열을 이루고 있던 로마군은 갑작스러운 게르만족의 기습에 노출되었다. 게르만족은 우선 투창을 계속 던져 로마군에 피해를 주고 충분히 약해졌다고 생각하자 곧 내려와 로마군과 전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무장과 훈련이 잘 된 로마군은 기습을 당한 상황에서도 게르만족의 공격을 물리친다. 그 뒤 숙영지를 짓고 그날 밤을 보낸다. 그러나 로마군은 이미 적진의 한복판에 들어온 상태였고 앞으로 틀림없이 게르만족이 숨어 우글거리고 있을 빽빽한 숲을 계속해서 뚫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만일 로마군의 지휘관이 뛰어난 장군이거나 혹은 지역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면 이런 난관을 타개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바루스는 쭉 행정 관료로만 일했고, 지리에도 밝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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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로마군이 주둔지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하자 또다시 게르만족이 공격을 시작했다. 로마군은 다시 이 공격을 물리쳤으나 울창한 숲이 로마군이 효과적인 전술을 펼칠 수 없게 만들어 오직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전투를 거듭할 때마다 로마군의 사상자는 점점 늘어갔다. 이 전투에서도 로마군이 입은 피해가 꽤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은 오직 주둔지로 돌아갈 생각밖에 없어 조급해 했다. 이러한 조급함에 로마군은 아르미니우스가 예상한 길로만 행군했고, 덕분에 아르미니우스는 지속적으로 로마군을 괴롭힐 수 있었다. 숲을 빠져나와 탁 트인 언덕으로 오른 로마군이 다시 다른 숲으로 진입할 때를 즈음하여 비가 내렸다. 습기에 취약한 활과 화살이 무력화되었고, 갑옷도 무거워져 병사들의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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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밤이 찾아왔지만 바루스는 이번에는 숙영지를 마련하는 대신 야간 행군을 강행해 빠르게 숲을 돌파하기로 계획한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가 이미 숲에서 빠져나갈 언덕 사이의 외길을 커다란 담벼락을 쌓아 봉쇄하고 양쪽 언덕에 병력을 숨겨두고 있었다. 조급함에 사로잡힌 바루스는 그대로 아르미니우스의 함정에 병력을 밀어넣었고, 그 순간 후방에서 나타난 게르만족 병력이 로마군의 퇴로를 차단하며 언덕 사이에 갇힌 로마군을 향해 돌무더기를 쏟아부었다. 잠도 자지 못한 채 피로에 찌든 로마군은 처절하게 저항하며 담벼락을 뚫어보려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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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에 빠진 로마군 장교들은 혼란을 수습하긴커녕 자신들도 공포에 사로잡혔다. 부사령관인 기병 대장 누모니우스 발라는 기병대를 이끌고 도주하다 붙잡혀 살해당했고, 바루스와 그의 부관들도 땅바닥에 칼을 꽂고 그 위에 엎어지며 자결한다. 지휘부가 붕괴되자 남은 로마군도 모조리 죽거나 생포당했다. 이 전투 끝에 17군단, 18군단, 19군단 병력이 전멸해 버린다.
로마군 주력이 모조리 사라지자 게르만족은 무주공산이 된 로마군 주둔지를 급습하기 시작했다. 로마 군단을 몰살시킨 게르만족은 한술 더 떠서 로마군과 함께 게르만 땅에 발을 들였던 로마인들의 처자식들도 잡아 죽였다. 이때 살해당한 여자와 아이들의 시체에서 내장을 꺼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는데 그 내장을 나무에 주렁주렁 걸어 놓았고 시체는 나무 밑에 버려두었다고도 한다. 사로잡힌 로마 군인들 역시 처참하게 살해당했으며 무수히 많은 머리가 잘려나가 숲속 이곳 저곳에 매달렸다. 복수를 위해 뒤늦게 달려온 로마 군대도 이 처참한 광경을 보고 나서 모조리 전의를 상실해버렸다고 한다.
이에 대응하여 주둔지에 남은 로마군은 급히 집결해 2개 군단 정도의 병력을 편성해 몇 주에 걸쳐 방어전을 벌였으나 결국 주둔지를 버리고 남은 생존자들과 함께 라인 강 근처로 달아나 간신히 한숨을 돌리게 된다.

6. 참패의 결말


'''이 토이토부르크 전투는 로마군 최악의 패전이라 부를 만했다.''' 총사령관 바루스가 전사(자살)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3개 군단, 2만의 로마군이 말 그대로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고,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병력 공백으로 인해 20년에 걸쳐서 점령하고 다스리던 라인 강 동쪽의 게르만 영토를 모두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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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부분이 토이토부르크 전투로 상실한 영역.
게르마니아 원정의 최종 목표지였던 엘베 강까지 1/2 정도 이른 영토가 한순간에 다 날아간 것이었다. 사실 군사를 잃은 것보다 이 문제가 더 심각했다. 비슷하게 최악의 참패로 꼽히는 칸나이 전투는 한니발이 군사적으로 대승을 거뒀지만 로마의 동맹을 끊는 데는 실패해서 영토를 잃거나 전선이 무너지진 않았고 로마가 군사를 어떻게든 다시 조달해서 한니발을 구석으로 몰아 물리칠 수 있었지만 토이토부르크 전투는 전투 결과 영토를 잃어버려서 후술할 티베리우스와 명장 게르마니쿠스가 군대를 이끌고 올라가 게르만족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국력이 절정에 도달한 로마가 이때의 게르만족에게 망하진 않았겠지만 속주들이 악영향을 받아서 혼란에 빠져 아직 로마라는 하나의 제국으로 결속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자칫하면 나라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게르만 영토를 상실하며 갈리아 지방은 물론 로마까지도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자 아우구스투스는 급히 티베리우스를 보내 게르만족을 막게 했다.
그리고 6년 후,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티베리우스가 황제에 오른 해에 게르마니쿠스의 로마군이 군사 행동을 개시한다. 로마군은 수많은 전공을 세우나 이미 로마와 게르만족이 공존했던 과거로 돌아가긴 힘들었다. 로마는 게르만족이 3개 군단을 비참하게 전멸시킨 것에 대한 복수심이 있었고 게르만족은 그들대로 게르마니쿠스가 마르시족이 축제를 하며 잠이 든 틈을 타서 그들을 모두 죽이고 수많은 게르만족의 마을을 파괴한 것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다.
게르마니쿠스는 그 뒤 이디스타비소 전투에서 아르미니우스의 게르만 군대를 격파해 어느 정도 설욕하였다. 이 전투는 '''개활지'''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영토 확장은 이미 불가능하여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로마군을 라인강 서쪽으로 모두 철수시킨 뒤 게르마니쿠스를 로마로 소환함으로써 군사 활동을 완전히 중지한다. 이렇게 티베리우스 이후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로마와 게르만의 북방 국경은 라인 강이 되었다.

7. 뒷이야기


당시 이미 노년이었던 아우구스투스는 이 전투로 큰 충격을 받아 "바루스, 내 군단을 돌려다오!!!"라고 절규하면서 벽에 스스로의 머리를 찧으며 자해를 할 정도로 자책했고 죽을 때도 '''그거 내 잘못 아니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승리한 아르미니우스는 후에 게르만족 간 권력 다툼으로 반대파의 자객들한테 암살당했다. 히스토리 채널에서는 아르미니우스가 숲길을 가다 숨어있던 반대파 자객의 단검에 찔려 죽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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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만족을 토벌하는 군사 활동 중 토이토부르크 숲에 가서 로마군의 유해를 찾아내어 수습하였다. 로마 역사가인 타키투스가 이 장면을 서술했는데, 타키투스는 '''로마군의 해골이 나무에 수도 없이 박혀있었는데 이는 사로잡은 로마군을 산 채로 나무에 꽂아 죽인 것으로 보인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수많은 제단도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게르만족이 로마군들을 오딘에게 제물로 바치는 제사 의식을 치르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3] 특히 여기서 제물로 쓰인 로마군은 로마군에서도 특히 지위가 높은 장교나 혹은 1대대 출신 병사들뿐이었는데, 이는 아르미니우스가 로마군 장교들과 병사들이 누군지까지 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때 게르마니쿠스는 이 토이토부르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을 대동하고 있었는데[4] 이들은 이 지역을 안내하면서 어디서 바루스와 장교들이 자살했는지, 어디서 그들의 군단기가 쓰러졌는지, 아르미니우스가 어떻게 군단기를 모욕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장교들을 짐승처럼 제물로 바쳤는지를 상세히 묘사했다고 하였다.
이후 로마 17군단, 18군단, 19군단은 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다시는 편성되지 않았다. 로마 제국이 이 패배를 얼마나 수치스럽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아르미니우스는 애초부터 자신이 이 승리의 영광을 독차지하여 게르만족의 왕이 되려는 야심에 불타있었다. 나중에 토이토부르크 전투가 승리로 끝난 뒤에 토이토부르크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군대를 이끌고 원정온 게르마니쿠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배하였고 단순한 전투에서 패배 수준이 아니라 게르마니쿠스의 로마군에게 말그대로 대참패를 당했으며 게르만 부족들의 거주지들까지 공격당하여 초토화되었고 수많은 게르만인들이 학살당하거나 포로가 되어 제대로 보복을 당했다. 자신을 도운 것이 숙부란 것을 지원 세력으로부터 들어서 알았으면서도 게르만족의 왕이 되려는 야심과 더불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고 결국 숙부와 그 일가까지도 친로마파로 몰아세워서 죽이고 만다. 이 모습을 본 그의 반대파는 심각한 위협을 느꼈고 자신들이 당하기 전에 선수를 쳐야 되겠다고 결심하여, 결국 숲길을 가던 아르미니우스는 그들이 보낸 자객들한테 기습을 당해 자객의 단검에 찔려 죽고만다.
아르미니우스의 숙부는 잉고메르였고 그는 토이토부르크 전투때에는 중립을 취하다 이후에는 아르미니우스를 도와서 로마에 맞섰으나 마지막에는 아르미니우스의 적인 마로보두스의 편을 들었던 바가 있다.
그에 비해 세게스테스는 친-로마파가 맞으며 바루스에게 아르미니우스의 계획을 고한것도 타키투스, 벨레이우스, 수에토니우스등의 '''로마''' 역사가들이 기록하는 바이다. 그는 아르미니우스와 케루스키 부족내 권력을 두고 다투는 사이였고 딸인 투스넬다가 아르미니우스와 결혼하자 임신한 그녀를 다시 찾아와서 로마군에게 전리품으로 바친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숙부가 아닌 '''장인'''이었다.

8. 의의


토이토부르크 이전에 발생한 로마의 패배들은 일시적인 좌절로 여겨졌지만 토이토부르크는 그 지역에서 로마의 팽창을 항구적으로 중단시켰다는 점에서 로마에게 있어 실질적인 최초의 군사적인 패배였다.

- 토이토부르크 대참사와 로마 제국의 대응 전략, 김상엽

토이토부르크 전투로 인하여 로마 제국은 게르마니아 지역의 공략을 포기하게 되고 게르만족들은 로마의 직접 통치에게서 벗어나 게르만 고유의 특색을 보존하게 된다. 만약에 로마의 게르마니아 정복이 성공하여 게르만 통치가 지속되었더라면 히스파니아(스페인, 포르투갈), 갈리아(프랑스)의 사례와 같이 게르만족 역시 로마화되었을 것이고 게르마니아(독일) 역시 라틴어, 그리고 로마 이후 로망스어권이 되는 등 라틴권에 편입되어 서양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었을 것이다.[5]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게르만족이 서로마를 멸망시켜 중세 시대의 중추 세력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비춰본다보면 서구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던 역사적 전투 중의 하나. 다만 이 경우 훈족이 곧바로 로마를 공격하게 된다.
아르미니우스는 독일의 위대한 민족 영웅으로 남았으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편협한 사고, 오만한 야심을 만족시키고자 자기 숙부를 포함한 지지자들까지도 제거해 버리다 파멸해버린 행적은 외면되고 전승의 영광만이 남아서 훗날 게르만족의 신화로서 고착되었다. 나치의 악행중 하나인 역사왜곡이 보이는 모습이다.
그때문에, 현대 독일에선 히틀러가 숭배한 인물이라고 하여 좀 영웅시하는 게 많이 멀어졌다가 간신히 재회복되는 중이다.

9. 기타


The Eagles of Rome라는 이탈리아 만화에서 토이토부르크 전투와 아르미니우스를 다루고 있다. 픽션이 어느 정도 가미되었고, 만화에서 묘사되는 토이토부르크 전투도 매복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아르미니우스가 숲속에 로마군을 몰아놓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수렁이 있는 개활지에서 로마군을 포위공격하는 공개적인 대규모 회전을 벌인다.
이 전투를 모티브로 박카스 스타리그 2008에서 악령의 숲이라는 맵[6]을 공식맵으로 했으나 러쉬 거리가 너무 가까운 데다가 유닛이 끼이는 사태가 벌어져 중간에 퇴출됐다.
토탈 워: 로마2에서 역사적 전투로 재현되었다. 그런데 제작진이 바루스 까인지, 바루스가 군대를 버리고 도주하다가 아르마니우스에게 붙잡혀 애걸하다가 죽은 것으로 묘사된다! 실제로는 자살했는데 안습.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 잘 구현되어 있지만, 목적이 도주인 전투로 역사적 전투 중에선 쉬운 편이다.

이 전투를 주제로 한 Ex Deo의 Teutoburg라는 곡이 있다. 브레이크 부분의 바루스의 복병이다!, 그리고 엔딩 부분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내 군단을 돌려다오!'''라고 절규하는 부분이 있다.
넷플릭스에서 이 전투를 다루는 바바리안이라는 드라마를 제작했다.

[1] 당시 로마는 지중해를 자기 호수로 만들고 남, 서유럽, 북아프리카, 레반트, 아나톨리아 전역의 지배자였다.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성공적인 군제 개혁과 함께 수많은 실전을 치러온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나라 자체가 하나의 중앙 집권 국가였다. 반면 게르만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진 데다 훈련량과 실전 투입량 또한 많이 떨어졌다. 실제로 당시 게르만족들은 기껏해야 자신과 비슷한 세를 가진 부족과 전쟁을 벌이거나 로마 제국의 영토를 약탈하는 정도였던 반면 로마는 지중해에서 한 가닥한다는 나라들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어서 승리하여 지중해 전역을 통치하던 나라였다.[2] 율리우스 카이사르조차 갈리아를 완전히 로마의 영토로 만드는 데 7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게다가 로마군의 영향에 들어간 건 티베리우스가 정복한 하천의 교역 루트지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숲이 아니었다.[3] 당시 서게르만족들 사이에는 오딘이 최고 신이었다.[4] 이들은 전투 당시 포로가 되었다가 게르만족이 몸값을 받고 풀어줘서 돌아온 아주 극소수의 행운아들이었다.[5] 독일 귀족들이 로망스어를 쓰기는 했으나 대다수 민중들은 크게 저지 독일어 아니면 고지 독일어를 썼다. 허나 프랑스는 소수의 귀족만 게르만족이지 프랑스 민중의 대다수인 갈리아족은 켈트식 야매 라틴어, 즉 오늘날 프랑스어의 모체 언어를 사용했다.[6] 원래 이름은 토이토부르크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