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

 


1. 개요
2. 경력
4. 사후


1. 개요


Publius Quinctilius Varus (기원전 46년 ~ 기원후 9년)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정치인이자 군인. 그리고 역사는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로 바루스 본인은 물론이고 무려 '''3개 군단'''을 잃은, 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인 섹스투스 퀸틸리우스 바루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반대하는 정치인이었으며, 카이사르의 암살에도 관여했다는 추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아들인 바루스는 카이사르의 상속자인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하였고 특히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딸인 빕사니아 마르켈라 아그리피나와 결혼하면서 옥타비아누스 세력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2. 경력


바루스는 아프리카와 시리아의 총독을 역임하면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았다. 특히 시리아 총독 시절 헤롯 대왕이 사망하자 예루살렘을 점령해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2000명의 반란군을 십자가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 학살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와 바루스라고 하면 치를 떨었다고 한다.
이후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 형제[1]가 체루스키족을 비롯한 게르만 부족을 정복하자 게르마니아를 통치하기 위해 총독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아우구스투스 최악의 인사로 기록되었다.'''
사실 당시 게르마니아는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 형제가 여러 차례 정복사업을 펼쳐서 대다수의 게르만족 일파들이 복속을 한 상태였지만, 완전히 평정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가 평정된 것으로 간주하고 게르마니아에서 활약하던 티베리우스를 발칸 반도의 반란 진압에 파견하고, 그 후임으로 바루스를 밀어넣었던 것. 문제는 바루스가 군사적 재능이 없는 행정관료라는 점이었다.
유능한 행정관료답게(?) 바루스는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대화와 법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입장에서 게르만족의 로마화 작업에 착수했다. 이 때문에 로마가 기존 게르만 족장들을 모두 내쫓고 직접 다스리려 한다는 오해를 사게 된다. 그 때문에 족장들은 점점 바루스의 통치방식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바루스는 시리아 총독을 역임하던 시절처럼 게르만족에게 '''금과 귀금속으로 세금을 낼 것을 강요'''하였다.
문제는 게르마니아 지역은 금과 귀금속이 나올 만한 건덕지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세금에 큰 부담을 느낀 게르만족의 불만이 한층 더 고조되었다.[2] 결국 이러한 불만이 쌓이고 쌓여서 게르마니아에서 반란이 터지게 되고, 바루스는 게르마니아의 총독으로서 17, 18, 19군단을 이끌고 반란진압에 나선다.

3. 토이토부르크 전투


바루스는 체루스키 족장 아르미니우스에게 길 안내를 맡겼다. 아르미니우스의 친척들과 아르미니우스의 장인이면서도 친로마파였던 세게스테스는 아르미니우스의 반란 징후를 경고하였으나 아르미니우스를 철썩 같이 믿은 바루스는 그 말을 무시한다. 결국 그 유명한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로마군은 참패하고 바루스 본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애초에 로마군은 개활지 전투와 참호 구축을 통한 방어전에 능하였으나 빽빽한 숲과 늪지대로 유인당한 상태에서 밤낮으로 게르만족의 기습에 시달려야 했으므로 제대로 싸울 여력이 없었다.
'''결국 로마는 3개 군단, 2만 명의 병력을 모조리 잃었고, 바루스도 본인도 목숨을 잃었다.'''
로마군을 몰살시킨 게르만족은 한술 더 떠서 로마군 주둔지에 있던 로마인들을 모두 잡아 죽였고 이때 살해당한 여자와 아이들의 시체에서 내장을 꺼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는데 그 내장을 나무에 주렁주렁 걸어 놓고 시체는 나무 밑에 버려두었다고 한다. 사로잡힌 로마군 역시 처참하게 살해당했으며 무수히 많은 머리가 잘려나가 숲 속 이곳 저곳에 매달렸다. 복수를 위해 뒤늦게 달려온 로마 군단도 이 처참한 광경을 보고 나서 전의를 상실했다고 한다.

4. 사후


아우구스투스는 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옷을 찢고 머리도 깎지 않으면서 몇 달간 이따금씩 기둥에 머리를 박으면서 '''"바루스! 내 군단을 돌려다오!(Quintili Vare, legiones redde!)"'''라고 울부짖었다는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책에 기록되어있다.
당시 로마는 28개 군단을 운용하고 있었는데, 그중 3개 군단 상실과 패배의 여파로 라인 강 너머 확장한 영토를 모두 상실했다. 이 손실을 복구하는 데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200년'''가량 걸렸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로마의 국력을 고려해 봤을 때 현실성 없는 주장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와의 내전을 끝낼 당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무려 60개의 군단이 존재했었다. 단지 정치력이 뛰어났던 아우구스투스가 쓸데없이 군단을 늘려 국방비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 28개 군단으로 감축했고 3개 군단의 복원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사실 아우구스투스가 분노한 것은 이 전투 이후 게르만족은 로마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트라우마가 그의 말년까지 남아있었는지, 야사에 따르면 죽는 순간까지도 후계자인 티베리우스와 주변 사람들에게 "그거 내 탓 아니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3]
아우구스투스 사후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토벌에 나서 게르만족에게 큰 타격을 주어 토이토부르크 전투의 패배를 갚아주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국경을 엘베 강으로 확장시키지 않고 라인 강 전선에 고정시킴으로써 향후 300년간의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1] 참고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재혼녀였던 아내 리비아와 그 전 남편의 아들들.[2] 조세량 자체의 부담보다도, 장기간에 걸쳐 상업과 교역이 발달했던 시리아에서는 금속 화폐가 흔하게 유통되었던 것과는 달리 부족 중심의 사회인 게르마니아 지방의 경제는 귀금속 화폐가 아닌 현물을 중심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바루스가 요구하는 대로 금 등의 귀금속으로 세금을 내려면 내부의 생산물을 외부에 내다 팔아서 귀금속 화폐를 구해올 수밖에 없는데... 1) 이 경우, 현물을 내다 팔아 귀금속을 마련하고, 그것을 다시 세금으로 내야 하니 단순히 계산해도 조세 부담이 2배 이상 폭증하게 될 것이고 2) 공업과 상업이 덜 발달했던 게르만족의 입장에서 외부에 내다 팔아 귀금속과 바꿀 수 있는 생산물이 대체 뭐가 있겠는가? 식량이나 미가공 상태의 천연자원 정도밖에 없는데 이런 품목은 현대의 기준으로도 큰 이익을 내기 힘든 교역품이지만 운송/교역기술의 부족으로 원거리 교역의 주축을 주로 사치품이 차지하던 시대에는 더욱 교역하기 어려운 품목이다.[3] 일단 정사라고 할 수 있는 역사책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은 "연극은 끝났으니, 내가 내 역할을 잘 한 것 같다면 박수를 쳐주게" 정도로 기록되어 있긴 하다. 앗! 시리즈의 '혁명이 후끈후끈'에서는 야사와 정사를 적당히 섞었는지, "난 그래도 꽤 잘 한 편이지?"라고 하는데 그 뉘앙스가 '바루스가 토이토부르크 전투를 말아먹긴 했지만, 그래도 난 잘 한 편이지?'라는 느낌이 나게끔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