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콸레 파올리

 

코르시카어/이탈리아어: Filippo Antonio Pasquale di Paoli(필리포 안토니오 파스콸레 디 파올리)
프랑스어: Pascal Paoli(파스칼 파올리)
1. 개요
2. 생애
3. 보나파르트 가문과의 갈등
4. 평가


1. 개요


코르시카의 정치가. 제노바 공화국프랑스 왕국으로부터 코르시카를 독립시키려 했으며, 코르시카 공화국 통령과 앵글로 코르시카 왕국의 총독을 역임했다.

2. 생애


코르시카 섬 북부 코르시카 수프라나(Corsica suprana)[1] 모로살리아(Morosaglia)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자친토 파올리(Giacinto Paoli)는 제노바 공화국 치하의 코르시카를 독립시키려 했고 아들인 파스콸레 파올리도 그 의지를 이어 독립운동에 힘썼다. 자친토 파올리가 독립운동에 실패해 나폴리로 망명했는데 이 때 파스콸레 파올리도 망명하여 나폴리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시칠리아 왕국의 군인이 되었으나 코르시카가 제노바 공화국을 몰아내고 코르시카 공화국으로써 일시적인 독립에 성공하자 코르시카로 돌아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755년에 그는 코르시카 평의회의 의결에 따라 코르시카 공화국 통령에 취임해 헌법을 지정하는 등 근대 국가 정비에 힘썼다.
그러나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학을 뗀 제노바는 코르시카 섬을 프랑스 왕국에 팔아버렸고, 제노바보다 훨씬 강대한 프랑스에 독립운동 세력은 진압당했다. 파울리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비록 공화국에서 일하기는 했지만 그는 왕정주의자였고 프랑스 혁명과 그로 인한 루이 16세의 처형에는 부정적이었다. 이를 틈타 프랑스 왕당파는 그에게 접근하여 혁명정부를 타도하는데 도움을 주면 코르시카에 전면적인 자치권을 주겠다고 회유했고, 왕당파와 함께 공화정부와 맞서 싸우던 영국 역시 파올리에게 귀향을 권하여, 파올리는 영국 군함을 타고 약 20여 년만에 코르시카로 돌아와 주민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왕당파의 생각과 달리 파올리는 프랑스 혁명전쟁에 개입하려 하지 않고 코르시카의 확실한 장악에 초점을 두었다. 코르시카 공화국의 실패를 맛본 파올리는 코르시카가 자력으로 프랑스라는 강대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할 수는 없음을 깨달았고, 자신에게 우호적인 영국을 끌어들여 아일랜드와 같은 형태로 영국에 속하는 자치국가를 건설하는 것으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앵글로 코르시카 왕국이었다. 국가군주로 영국의 국왕을 모시며,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총독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였다. 다만 파올리는 형식상의 총독을 두고 실제통치는 자치정부가 하거나 혹은 총독 자체를 코르시카인들이 선출하고 그 추인을 영국에게서 받아내는 형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올리의 자치국가 모델은 시작부터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코르시카인들 사이에서도 이 기회에 독립하자는 분위기는 존재했지만, 프랑스의 통치는 '''비교적 자비로운 편'''이어서 굳이 독립해야 하나 하는 회의적인 시각도 팽배했다. 그리고 강성 독립주의자들에게 파올리는 '''완전 독립을 포기하고 영국에 빌붙은 더러운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영국의 전략도 빠르게 수정되었다. 파올리가 귀향하여 앵글로 코르시카 왕국을 건국한 바로 그 해에, 나폴레옹이 영국 및 왕당파 연합군을 툴롱에서 패퇴시켰다(툴롱 포위전). 이로써 영국의 지중해 작전은 상당한 제약을 받았고, 영국은 코르시카가 지나치게 해안에 붙어있어 프랑스의 공격에서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도 왕당파 및 대프랑스 동맹군이 연패를 거듭하고 프랑스 혁명정부를 인정하는 국가가 하나둘 늘어나자 영국도 1796년 코르시카 섬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영국군 없는 파올리의 신세는 명백했기에 파올리는 또 다시 영국 군함을 타고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는 코르시카에 돌아오지 못한채 1807년에 영국에서 죽었다. 그의 유해는 1889년에 비로소 고향인 코르시카 모로살리아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후 코르시카는 프랑스 황제가 된 같은 동네 청년 덕분에 독립을 포기하고 프랑스에 잔류한다(...).

3. 보나파르트 가문과의 갈등


보나파르트 가문의 일원이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버지 샤를 보나파르트(카를로 부오나파르테)는 파올리의 부관으로 일했지만 코르시카 공화국이 프랑스 왕국에 의해 멸망하자 코르시카 독립은 어려움을 깨닫고 코르시카에 파견된 프랑스 총독에 붙어버렸다. 이로 인해 보나파르트 가문과 갈등이 생겼다.
나폴레옹과 그의 형 조제프는 파올리를 굉장히 존경했다. 파올리 역시 어느정도 나폴레옹을 중용하긴 했으나, 프랑스 공화국 전쟁에 코르시카 의용군이 참전해야할지로 갈등을 빚었다. 파올리는 영국과 연대하고 있었고, 결국 프랑스 공의회에서 나폴레옹의 동생 뤼시앵의 주도로 파올리를 탄핵해 나폴레옹과 파올리의 관계는 끝이 났다. 이 와중 파올리의 지지자들이 나폴레옹의 집을 불태우는 일도 있었다.
이 와중에 재밌는 일화가 있다. 파올리의 귀국 당시 나폴레옹은 그의 친위대에 선발되었다. 파올리는 1769년에 그가 프랑스 군대에게 패배했던 퐁트노보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모두들 나이든 독립영웅의 이야기를 존경스럽게 들었지만 나폴레옹은 차갑게 "'''이런 배치였다면, 패배는 당연합니다.'''"라고 내뱉었다고 한다. 그 말에 파올리는 말을 그치고 나폴레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고...

4. 평가


코르시카의 다른 슈퍼스타 나폴레옹과는 갈등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코르시카에서는 파올리를 독립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파올리는 나폴레옹 출생 전부터 자신들을 착취하는 제노바로부터 코르시카를 독립시킨 영웅이며 프랑스는 코르시카가 독립하자마자 제노바와의 거래를 통해 독립국인 코르시카를 침략하여 자국 영토로 삼은 침략자 그 자체였다. 파올리 입장에서도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이념 아래 친영파가 된 것으로 영국의 힘을 빌려서라도 코르시카를 독립시키려는 파올리와 프랑스 안에서 코르시카 권리 확대를 주장하는 나폴레옹 사이에서 이견이 있었을 뿐이다.

[1] 현재 오트코르스(Haute-Cor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