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로 코르시카 왕국
1. 개요
1794년부터 1796년까지 코르시카 섬에 존재했던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영국)의 괴뢰국'''. 공식 국호는 코르시카 왕국이나 흔히 잉글랜드/영국을 의미하는 Anglo-를 붙여 앵글로 코르시카 왕국이라고 지칭한다.
2. 배경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정부의 지방통제력은 급감했고 혁명정부와 왕당파의 충돌이 격심해졌다. 그러던 와중에 왕당파는 혁명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주변국의 힘을 빌렸고 그러던 와중에 영국에 망명해있던 구 코르시카 공화국의 지도자 파스콸레 파올리와 접촉했다.
왕당파는 혁명정부를 타도하는데 도움을 주면 코르시카에 전면적인 자치권을 주겠다고 회유했고, 왕당파와 함께 공화정부와 맞서 싸우던 영국 역시 파올리에게 귀향을 권하여, 파올리는 영국 군함을 타고 약 20여년만에 코르시카로 돌아와 주민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왕당파의 생각과 달리 파올리는 프랑스 혁명전쟁에 개입하려 하지 않고 코르시카의 확실한 장악에 초점을 두었다.
3. 영국과 파올리의 이해관계
영국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획득했던 발레아레스 제도의 미노르카 섬을 7년 전쟁 직후 스페인에게 반환하여 지중해 안쪽에서의 거점이 없던 상태였다.[2] 때문에 초기에는 툴룽 등 프랑스 남부지역의 왕당파를 지원하는 선에서 그쳤던 군사행동의 폭을 넓혀 항구적인 거점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으로 코르시카를 완전히 점령하겠다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여기에는 '''코르시카 독립주의자 파올리'''의 강력한 요청이 뒤따랐다. 코르시카 공화국의 실패를 맛본 파올리는 코르시카가 자력으로 프랑스라는 강대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할 수는 없음을 깨달았고, 자신에게 우호적인 영국을 끌어들여 아일랜드와 같은 형태로 영국에 속하는 자치국가를 건설하는 것으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앵글로 코르시카 왕국이었다. 국가군주로 영국의 국왕을 모시며,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총독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였다. 다만 파올리는 형식상의 총독을 두고 실제 통치는 자치정부가 하거나 혹은 총독 자체를 코르시카인들이 선출하고 그 추인을 영국에게서 받아내는 형태를 생각하고 있었다.
4. 경과
그러나 파올리의 자치국가 모델은 시작부터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코르시카인들 사이에서도 이 기회에 독립하자는 분위기는 존재했지만, 프랑스의 통치는 '''비교적 자비로운 편'''이어서 굳이 독립해야 하나 하는 회의적인 시각도 팽배했다. 그리고 강성 독립주의자들에게 파올리는 '''완전 독립을 포기하고 영국에 빌붙은 더러운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영국군을 등에 업은 파올리의 위세는 강력해서, 혁명 직후 귀향하여 코르시카에서 활동중이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등의 프랑스 잔류파를 맹렬히 탄압, 보나파르트 일가가 프랑스 본국으로 망명하게끔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코르시카 인들은 현 프랑스의 통치 vs 영국의 통치라는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파올리에겐 불행하게도 영국의 전략도 빠르게 수정되었다. 파올리가 귀향하여 앵글로 코르시카 왕국을 건국한 바로 그 해에, 파올리 본인이 추방한 나폴레옹에 의해 영국 및 왕당파 연합군이 툴롱에서 패했다(툴롱 포위전). 이후에도 영국이 지중해 작전은 상당한 제약을 받았고, 영국은 코르시카가 지나치게 해안에 붙어있어 프랑스의 공격에서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도 왕당파 및 대프랑스 동맹군이 연패를 거듭하고 프랑스 혁명정부를 인정하는 국가가 하나둘 늘어나자 영국도 1796년 코르시카 섬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영국군 없는 파올리의 신세는 명백했기에 파올리는 또 다시 영국 군함을 타고 망명길에 올랐다. 같은 해 9월, 프랑스 혁명정부군이 코르시카 섬에 상륙하면서 앵글로 코르시카 왕국은 3년여만에 종식된다.
그리고 이후 코르시카는 프랑스 황제가 된 같은 동네 청년 덕분에 독립을 포기하고 프랑스에 잔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