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Marcus Vipsanius Agrippa(BC 63~BC 12),
1. 개요
흔히 아그리파라고 하면 보통 이 인물을 말한다. 로마 제국의 정치가이자 군인, 건축가이다.'''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이자 절친한 친구이자 사위였고, 티베리우스의 장인, 게르마니쿠스의 장인, 칼리굴라의 외할아버지, 네로의 외외증조할아버지이다. 살아있는 동안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 아래에서 제2인자였고,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내전기동안 옥타비아누스군의 전투를 지휘해 승리를 이끈 장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2] 또 하드리아누스 시대때 개보수된 판테온을 세웠고,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세워진 수많은 목욕탕, 공공건물 건축을 입안하고 이를 실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생애
기원전 64/62년경생으로 현대 로마사 연구자들의 연구들에 따르면 에트루리아계 로마인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농촌 지방의 평민 출신으로 루키우스 아그리파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루키우스, 누나 빕사니아 폴라가 있었으며, 가족들은 대대로 카이사르 집안의 클리엔테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런 관계에도 아그리파의 친형 루키우스는 기원전 40년대동안 소(小) 카토 밑에서 로마군으로 복무했고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아그라파의 형 루키우스 아그리파는 탑수스 전투 후 포로생활을 하다가 동생 친구 옥타비아누스의 도움으로 일찍 귀향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후 기록은 없고 그 후손들도 공직을 역임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처음으로 군복무를 한 기원전 46~45년부터 카이사르 휘하 로마군에 자원입대해 군복무를 시작했는데, 아그리파는 일반사병으로 기원전 45년 벌어진 문다 전투에 참전해 싸웠다고 한다. 문다 전투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군사적인 재능이 결여된 옥타비아누스를 군사적인 면에서 보완하기 위해 젊고 재능있는 동년배의 군인이었던 아그리파를 붙여줬는데, 당시 카이사르는 아그리파에게 단순히 옥타비아누스를 보좌하는 역할 외에도 아폴로니아에서 공부를 하라고 지시내렸다고 한다.
보좌가 아니라 보완이라고 표현한 것은 워낙 옥타비아누스의 군사적 재능과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전장에서 실제로 군대를 지휘할 대리'''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실제로 옥타비아누스는 전략까지는 제대로 수립했지만, 막상 전장에 나서면 복통[3] 등으로 인해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거나, 직접 지휘봉을 잡으면 패전하거나 고전하는 경향이 있었다. 영어권에서 권위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대놓고 "아그리파가 없었으면 옥타비아누스는 황제가 되지도 못했다"고 평할 정도였다. 특이하게도 아그리파는 이런 중임을 맡기에는 신분상 크게 떨어지는 평범한 평민 출신이었는데, 카이사르가 굳이 평민 출신을 선발해 붙여준 것은 아그리파가 옥타비아누스의 영향력을 뛰어넘으면 곤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가 숙적 안토니우스를 꺾는 것에 자신이 결정적인 공헌을 했음에도 '''평생 옥타비아누스의 그림자에 머물며 조력자 역할을 하면서 충성'''했다.[4]
카이사르 암살 이후,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비무장 상태로 이탈리아 도착한 최측근이었는데 이때부터 옥타비아누스파의 모든 군사업무를 도맡았다고 한다. 따라서 아그리파는 젊은 나이부터 옥타비아누스를 대신해 육군, 해군을 가리지 않고 지휘했는데, 그때마다 자신이 지휘한 모든 전투의 공을 모두 친구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돌렸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의 숙적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는 친구 아그리파가 승리를 가져다 줄때까지 자신의 침대 위에서 뻗어서 기다린다"고 이를 평하기도 했다.
내전이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마무리된 이후, 악티움 해전 승리를 기념해 판테온[5] 으로 알려진 신전을 짓고 이를 헌납했다. 이후에도 아그리파는 친구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를 도와 로마군 감축, 원로원 개편 등을 추진했고, 제국 군대를 재편성하고 도나우 강 방위선을 확립하는 등의 활약을 했다. 이는 갈리아 속주[6] 를 완전히 로마제국의 영향력 하에 두었음을 뜻하고, 게르만족과 발칸반도의 소국들을 군사/외교적으로 압박하여 압도하였음을 뜻한다. 또 아그리파는 내전 이후,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이자 사위 마르켈루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의 군사업무 및 행정업무를 직접 지도한 스승 역할을 했고, 갈리아 지방의 도로, 수로 건설 를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가 장성한 이후부터는 동방 일대의 전권을 가진 속주 총책임자 자격으로 파견돼 로마 제국 동방 일대의 외교, 군사, 행정체계를 정비했다.
아우구스투스와의 우정은 한평생동안 애인 사이라고 할 만큼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황제의 조카이자 사위 마르켈루스가 이를 질투했고, 이 문제로 로마제국 동방 일대를 담당하는 총책임자로 로마를 잠시 떠나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를 굉장히 신뢰했고,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도 그를 매우 믿었다고 한다. 따라서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 시대동안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4명(아그리파, 마이케나스, 옥타비아, 리비아 드루실라)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율리아의 남편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마르켈루스가 죽은 뒤, 황제의 친딸 율리아와 결혼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자손을 늘리기 위한 목적에서 딸 율리아와 아그리파를 정략결혼시킨건데,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왜냐하면 나이차가 크게 나는 결혼이었음에도 아그리파는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식을 보아서 이 점에서도 아우구스투스에게 제대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결혼 전 친구 아우구스투스와의 약속에 따라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두 아들을 양자로 내보냈는데, 그들이 바로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다.
마르켈루스 사후, 아우구스투스만 가지고 있던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으면서 후계자로 내정됐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일찍 죽을 것을 대비하고 어린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위한 포석이었다. 왜냐하면 동년배 친구여도 아우구스투스에 비해 아그리파는 무척 강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체가 강건했던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훨씬 전인 BC 12년에 급사했는데, 죽기 1년 전에 이미 몸이 갑자기 수척해진 모습이 신전에 조각되어 있다. 하지만 암살은 아니었으며, 오랜 전장 생활과 내정으로 인해 아우구스투스보다 몸 관리를 충실히 할 시간이 적었다는 것이 급사의 사유로 짐작된다. 다시 말하면, 아우구스투스가 아그리파보다 무려 26년을 더 살게 된 셈이다.
판테온 외에도 비르고 수도와 율리아 수도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아그리파 목욕탕을 지었으며, 이는 이후 지어지는 대형 목욕탕의 시초가 되었다.[7]
3. 가족관계
아그리파는 총 세번 결혼했다. 이중 첫 아내 폼포니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빕사니아 아티카(Vipsania Attica)는 원로원 의원이자 연설가인 퀸투스 하테리우스 (Quintus Haterius)와 결혼했으며, 빕사니아 아그리피나(Vipsania Agrippina)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티베리우스와 연애결혼 후 결혼해[8]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소(小) 드루수스)를 낳았다. 그리고 두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빕사니아 마르셀라는 바루스와 결혼했다.
세번째 아내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두 번의 결혼에서 얻은 자녀들과 달리 모두 다 최후가 좋지 못했다. 장남, 차남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모두 요절했고, 삼남인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비행을 이유로 외딴 섬에 유폐당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딸 소(小) 율리아는 간통 혐의로 역시 유폐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부적절한 죽음이 많았던 탓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다음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에게는 나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9]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딸 대(大) 아그리피나는 게르마니쿠스와 결혼해 여섯 명의 자식을 낳는데, 게르마니쿠스는 동방에서 의문사를 맞고, 아그리피나는 반역 혐의로 역시 섬에 유폐당한 후 죽음을 맞는다. 3대 황제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의 후처이자 네로의 어머니인 소(小) 아그리피나가 이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4. 석고상
그리고 미대 지망생들이 그리는 석고상인 아그리파가 이 사람이다. 특이한(?) 얼굴 형태로 웬만한 미술학도라면 이 사람 얼굴은 모두 한 번씩 그려봤으리라. 사람에 따라선 이 얼굴에 한이 맺힌 사람도 있고 이 얼굴이 오히려 친숙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일생이나 업적은 잘 알지 못해도 이 사람의 얼굴은 아는 사람도 많다.
데생의 기본기를 닦으면서 그리는 만큼, 얼굴 형태 자체는 간단하고 자세도 정적이여서 크게 어려운 부분은 별로 없다. 다만 그 만큼 특징으로 삼을 만한 부분도 없다보니 제대로 그리려면 섬세한 관찰력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와는 반대로 자세가 역동적이면서도 특징이 두드러지며 아크리파와 비슷한 빈도로 사용되는 석고상으로는 줄리앙이 있으며, 비너스와 함께 석고소묘의 삼총사로 불리운다.
문외한이라도 생김새는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고(비교할 만한 것이 있다면 '생각하는 사람' 정도), 정치가이니만큼 얼굴에도 위엄이 느껴지고 해서 미술이나 조각 관련해서 유머 요소로 등장하기도 하며, 게임에서는 '''몬스터'''로 등장하기까지 한다. '''그것도 만날 머리만.'''
5. 대중 매체에서
캡콤의 액션 게임인 섀도우 오브 로마에서 액션 파트의 주인공으로 나온다. 사실상 데드 라이징의 프랭크의 프로토 타입이라고 봐도 좋다. 아버지가 갑자기 카이사르의 암살범으로 몰려 아버지를 구하기위해 검투사로 성공하려는 것이 아그리파 파트의 스토리. 게임내에서 아우구스투스 파트가 워낙 재미없기 때문에 액션 파트가 더 빛난다.
ROME 시즌 2부터 출연, 옥타비아누스의 충실한 친구이자 마이케나스[10][11] 와 함께 최측근으로 활약한다. 전쟁터에서는 자신감이 넘치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매우 유순한 순정파에 숙맥처럼 묘사되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친누나 옥타비아에게 한눈에 반해 지속적으로 구애를 하고 결국엔 연인으로 발전한다. 다만 실제 역사대로 정치적 결합을 위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가 결혼을 하게 되나 그 이후에도 밀회를 계속한다.[12] 이후 아그리파가 옥타비안 앞에서 밀회를 고백함으로써 옥타비안의 뜻대로 아티아와 안토니우스를 엿먹이게 된다. 대부분의 전쟁씬을 제작비 문제 때문에 날림으로 처리하는 본 작품 특성상 장군으로서 활약하는 씬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중국 영화 드래곤 블레이드: 천장웅사에서 잠깐 등장한다. 해당 배우는 데이빗 펙(David Peck).
도미네이션즈에서 아크리파의 군화가 유물로 등장한다.
[1] 마르쿠스 키케로의 친우였던 아티쿠스의 딸이다.[2] 그래서 옥타비아누스의 정적들이 옥타비아누스를 비판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뻗어있는 채로 아그리파가 승리를 가져다주길 기다린다고 할 지경이었다.[3] 과민성 대장 증후군으로 여겨진다. 스스로도 군사적인 재능이 없다는 점을 알기에 전장에 나서면 긴장했던 듯 싶다.[4] 물론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생애 내내 토사구팽을 당할 일 없이 제국 2인자를 맡았다.[5] 다만 판테온은 완전히 소실된 후 하드리아누스가 완전히 다시 지었다. 판테온에는 아직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건축했다는 글이 새겨져 있지만 이는 하드리아누스가 원 건설자를 배려한 것에 가깝다. 실제로 하드리아누스가 다시 지은 판테온의 양식은 아그리파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6] 현재 프랑스와 스위스, 스페인 북쪽 산맥 일부[7] 이후 로마에는 네로 목욕탕, 카라칼라 목욕탕,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탕이 지어진다. 목욕탕에 대해서는 "오! 네로보다 나쁜 것이 무엇인가? 오! 네로 목욕탕보다 좋은 것이 무엇인가?"라고 풍자시인 마르티알리스가 비꼬았을 정도이다. 한 마디로 로마인들이 환장을 하고 좋아했던 로마 문명의 상징. [8] 티베리우스와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의 연애 및 결혼은 당시 로마 상류층 사이에서 화제를 얻을 정도로 굉장히 드문 사례였다고 한다.[9] 요컨대 그 배후에 티베리우스가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썰은 썰일 뿐이다. 애시당초 티베리우스는 유능하긴 했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꼽은 황제 후보들 중에서는 사실상 맨 끝에 위치한 거나 다름없었고 원래는 앞에 선 후보들이 다 사라지거나 하지 않았다면 황제 자리는 결코 오지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가 되어 버렸다. 티베리우스 본인은 황제자리 따윈 원하지도 않았다.[10] 풀네임은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이케나스로 유능한 외교관이자 정치가이며 옥타비아누스의 개인 고문이기도 했다.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메세나의 유래가 된 인물.[11] 다만 ROME에서는 뒤에서 책략을 꾸미는 능글맞고 음흉한 책사 포지션으로 나온다. 첫 등장부터 지원군 사령관인 히르티우스, 판사 장군을 모종의 방법으로 난전중에 암살하고 휘하 병력들을 흡수, 그 와중에 '슬프지만, 정말 운이 좋군~ 승리의 영광은 모두 우리 차지니까' 라며 이죽대는건 덤이다.[12] 그래서인지 실제 역사대로라면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와의 딸이어야 할 안토니아는 작중에서는 친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