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토니우스

 

1. 소개
2. 생애
3. 황제열전(De vita Caesarum)
4. 저서


1. 소개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트란퀼리우스'''
Gaius Suetonius Tranquillus
(69년? - 130년 이후?)
로마 제국 플라비우스 왕조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 로마 제국 초기 12명의 황제를 기록한 《황제열전(De vita Caesarum)》의 저자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책 외에는 대부분의 많은 저서들이 분실됐다고 한다. 본 위키 로마사 관련 항목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자 가장 많이 까이는(...) 인물이며, 로마사 연구자들이 그의 대표적인 저서 《황제열전(De vita Caesarum)》은 많이 참고, 인용함에도 그 기록에 대해서는 로마판 황색언론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2. 생애


북아프리카 히포 레기우스[1] 출신으로 속주 출신의 기사계급 사람이다. 네로가 죽은 지 20년이 지난 뒤에 자신이 청년이 되었다고 하는 주장을 통해 대략 69년 즈음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수에토니우스 라에투스는 북아프리카 출신의 기사계급으로 로마 내전기에는 오토를 따랐고,[2] 69년 비텔리우스와의 전투에도 종군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는 성인이 된 이후, 대햑 90년대즈음부터 고향인 북아프리카 속주를 떠나 로마로 건너가 살았다.
로마로 건너온 이후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로마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였던 소(小)플리니우스[3]와 친분을 맺었다[4]. 원로원 의원인 소 플리니우스를 통해 정계에 입문할 기회를 얻게 되면서 당시의 황제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와도 친해질 수 있었고, 황제의 개인비서 자리를 얻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서기 112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황후 사비나에게 불경을 저질렀다는 이유와 공직 생활 중 부정 혐의 등이 적발돼 해임되었다. 이후 그가 다시 공직을 맡았다는 기록은 없으며, 대략 130년 즈음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3. 황제열전(De vita Caesa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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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토니우스는 로마 제국 초기 12명의 황제를 기록한 《황제열전(De vita Caesarum)》을 저술했다. 수에토니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 때 몇 번이나 비서관(秘書官)과 공문서관(公文書館)의 감독 업무를 맡았고, 덕분에 로마 관보 같은 공문서 기록들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며, 그것을 토대로 《황제열전》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문서, 관보 등을 참고해 일부 사실을 확인해 적었어도, 대부분[5]은 이탈리아와 저자의 고향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떠돌던 야담, 소문 등을 그대로 옮겨 적거나, 본인이 추측해 각색 후 저술했다.
《황제 열전》은 그가 잠시 공직에 몸담았던 하드리아누스의 치세에 대체로 저술된 것으로 보이며, 수에토니우스의 친구에 의해 서기 119년에 정무총감 가이우스 셉티키우스 클라루스(Gaius Septicius Clarus)라는 인물에게 헌정되었다.
《황제 열전》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시작으로 도미티아누스까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플라비우스 왕조 12명의 황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초대 황제로 보고 있으며, 책 제목 역시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이를 통해 당대 로마에서 카이사르를 최초의 황제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근대까지만 해도 대중적으로나 학술적으로나 카이사르가 로마 최초의 황제라는 인식이 절대적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원수정(Principatus)'이라는 개념이 정립되면서 최초의 원수(프린켑스)인 옥타비아누스를 최초의 황제로 서술하게 된 것이다.
가십 형식의 내용이 대부분이고, 온갖 뜬소문과 저자 개인의 추측들이 더해져 만들어진 책이지만, 내용이 강렬하고 로마 시대에 저술된 책 중 살아남은 까닭 때문에 대중에 알려진 로마의 이미지 형성에 《황제열전》의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당장 유명한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에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고 외쳤다거나, 암살 당시 죽기 직전 중얼거렸다는 "'''브루투스, 너마저도(Et tu, Brute)...'''"라는 명대사도 《황제열전》에 나온 "'''너도냐, 내 아들아(καὶ σὺ, τέκνον)'''"라는 대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지적이 있다(수에토니우스의 저서를 제외하면 이런 발언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카이사르가 실은 간질을 앓고 있었다는 설도 이 사람의 기록이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 중 칼리굴라가 벌였다고 알려진 수많은 악행들과 그의 근친상간 이야기, 티베리우스가 손자 칼리굴라 손에 질식사했다 등의 뜬소문 이야기들도 수에토니우스 손에서 나왔다.
이런 까닭에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은 연대기 순으로 사건을 나열하면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어떠어떠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에 관해서는 어떤 이야기도 있다” 하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생김새가 어떻게 생겼다던가,[6] 이 사람이 태어날 때 무슨 일이 있었다던가, 계보가 어떻게 된다던가, 자신이 그 내용을 어디서 인용했는지에 대해서 적고, 이후의 어떤 황제들에 대해서든 일관된 순서로 경력과 공적(일화에 가깝기는 하지만)을 적고 있으며,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작정하고 쓴 역사서라기보다는 대중용으로 저술한 역사 이야기집 같은 느낌이 든다.
다만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수에토니우스 본인이 심각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안티였다는 점이다[7]. 따라서 이 책에서 언급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다섯 황제들에 대한 기록들은 상당히 부정적인데, 문제는 그가 적은 내용들이 당대 로마의 기록인 까닭에 한때 후세 학자들에게 그대로 믿어지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수에토니우스 본인이 로마에서 비서관이나 공문서 관련 공직을 맡았고 로마 관보를 조사해 황제들의 행적을 조사했기는 했지만, 애초에 수에토니우스가 살았던 시기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 백 년 쯤은 후대였던 데다 수에토니우스 본인도 자신이 조사한 공문서 기록 외에 세간에 떠도는 소문, 가십거리들을 주워 모아서 실제 사실인 양 같이 기록해 놨다는[8] (심지어 일부는 자기창작을 넣었다고)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런 까닭에 로마사 연구자들에게 타키투스, 디오 카시우스 등의 기록과 달리 로마 시대 저서 중 분실되지 않고 전해짐에도, A급 사료로 평가받기보다는 B급 수준으로 평가받거나 그 이하로 취급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래서 심할 경우에는 당대에 작성된 파테르쿨루스[9], 유대인 필로, 대 플리니우스, 소 플리니우스, 요세푸스 등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제정시대 풍속들을 알아보는 용도로 참고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왜냐하면 다른 책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의 기록들이 상당히 많은데다, 일일이 당대 기록이나 다른 역사가들의 저서들과 대차대조하기 전까지는 사실로 오인되는 주장들과 작가 개인의 상상과 분석이 더해져 완성된 내용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10]. 따라서 위키러들 가운데 극단적인 경우는 《황제열전》과 그 저자 수에토니우스를 두고 '''남자 시오노 나나미''', '''로마판 동인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황제열전》의 한국어 번역은 1998년에 풀빛미디어에서 펴낸 《풍속으로 본 12인의 로마황제》(전2권)와 2009년에 다른세상(출판사 이름이다)에서 펴낸 《열두명의 카이사르 - 고대 로마 역사가가 쓴 황제 이야기》가 있다. 전자는 《갈리아 전기》나 《타키투스 연대기》의 역자(중역)로 알려진 박광순이 번역한 것이고[11] 후자는 로버트 그레이브스[12]의 영역본을 조윤정이 중역한 것.
예수에 관해 언급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예수/역사 항목 참조.

4. 저서


가장 유명한 저서는 라틴어로 쓰여진 《황제열전(De vita Caesarum)》이지만, 그리스어로 작성된 저서도 두 권이나 있다.
《황제열전》 말고도 고대 로마의 명사들에 대한 《명사열전(De Viris Illustribus)》을 남겼는데, 현재는 그중 「문법가열전」 「웅변가열전」 및 「시인열전」의 일부만이 전한다. 한국에는 2013년에 한길사에서 《로마의 문법학자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번역자는 안재원.
분실된 저서들도 꽤 많은데 로마 창녀들의 생애를 다룬 《유명한 창녀들의 삶》, 각 풍속들을 다룬 《로마의 축제》, 《로마의 복식》 등이 있다.

[1] 지금의 알제리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인 안나바로 튀니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2] 내전 당시 갈바를 암살하고 황제가 된 오토를 지지해 라인 강 서쪽에서 비텔리우스의 군단을 격파한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와 씨족이 같다.[3] 삼촌인 대(大) 플리니우스와 구분해 소 플리니우스로 불리며, 79년 8월 24일에 벌어진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 삼촌과 함께 '''폼페이 멸망의 순간을 가까이서 직접 목격'''하고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편지로 증언한 인물이다. 그 날 함께 폼페이 최후의 날을 목격했던 삼촌 대 플리니우스는 미세눔 함대의 사령관으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피난민을 구조하다 화산 폭발과 함께 뿜어져 나온 유독성 가스에 질식해 순직했으며, 저서로 《박물지》를 남겼다.[4] 플리니우스는 수에토니우스가 이탈리아의 조그만 부동산을 구입할 때도 '''미혼에 자식이 없던''' 수에토니우스에게 면세 특권(이 특권은 보통 아들을 세 명 둔 아버지에게 인정되었다고)을 인정해주도록 당시의 황제 트라야누스와의 사이에서 주선에 나서주기도 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도 110년부터 112년까지 소 플리니우스가 비티니아 속주와 폰투스 속주의 프로콘술로 부임할 때에 함께 갔다.[5] 특히 카이사르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다섯 황제들[6] 칼리굴라의 외모에 대해서 "칼리굴라는 염소 같다는 소리를 들으면 '너 사형'이라고 외칠 만큼 싫어했다"고 적어 놓기는 했지만 실제 남아 있는 칼리굴라의 조각상을 보면 그렇게까지 기괴하지는 않다는 점에서 수에토니우스의 지나칠 정도의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한 혐오감을 엿볼 수 있다. 칼리굴라 항목 참조.[7] 덤으로 공화정의 옹호자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는 역사가 타키투스와도 동일.[8] 예를 들어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 하렘을 조성해 놓고 온갖 변태적인 성행위를 즐겼다거나 죽을 때 칼리굴라와 관련된 에피소드 등. 이에 대한 비판은 티베리우스 항목 참조. 틴토 브라스 감독의 영화 칼리굴라도 이러한 수에토니우스의 저술을 따라 기본 스토리가 전개된다.[9] 캄파니아 지방의 명문가 출신의 정치가, 군인, 역사가로 <역사>라는 제목의 역사책 저자이다. 8년간 게르마니아에서 군단장을 했고 재무관, 법무관 등을 지낸 오랜 경험과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곁에서 직접 여러 국가문제를 경험한 인물인데, 특유의 날카롭고 간결한 수사학적 기법으로 사건들을 서술한 것으로 유명하다.[10] 티베리우스 황제를 예로 들면, 타키투스는 비슷한 시기의 후세 사람이고 티베리우스를 굉장히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증되지 않은 부분이나 세간에서 많이 믿는 이야기들은 간략히 한 줄로 끝내면서 넘어가거나, ‘길거리에서는 이런 항간의 뜬소문이 있다고 하더라’식으로 언급한 뒤 소문임을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이런 서술 방식은 후대 로마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 역시 비슷하며, 그리스인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경우에는 검증되지 않은 티베리우스의 악행은 아예 언급조차 안 했다. 반면 수에토니우스는 세 사람과 달리 듣거나 들었다고 주장되는 그 소문을 언급식으로 적은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상상과 추측을 덧붙여 책에 적었으며 풍자작가들이 황제들을 희화화하면서 풍자한 우스개소리까지 진짜처럼 적었다. [11] Vindex를 "빈데쿠스"라고 쓰는 등 일본어스러운 고유명사 표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일본어 중역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중역의 대상이 된 번역 자체에 누락이 있었는지, 원문과 비교해 보면 번역이 통째로 누락된 문장이 간간히 보인다(...).[12]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