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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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대 (1세기)의 원형 경기장. 2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
Pula / Pola
크로아티아 서북부의 항구 도시. 리예카에서 서남쪽으로 60km, 이탈리아령인 트리에스테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져 있으며 이스트리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인구는 5만 8천여명이다. '''크로아티아의 로마'''로 불릴만큼 시내에 로마 유적이 즐비하며, 온화한 기후와 해변 덕에 관광객이 많다. 20세기 이전까진 트리에스테와 더불어 이스트리아 지방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도시였으므로 로마 유적을 제외하고도 아직도 그 분위기가 짙게 남아있다. 다만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의 혼란을 거친 후, 크로아티아계 주민이 대다수이고 이탈리아 계 주민은 5%에 그친다. 나머지는 세르비아, 보스니아 계 주민들이다.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풀라 공항이 있다.
원래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일리리아 인들의 거주지로 폴라이로 불리다가 기원전 177년, 로마에게 정복되며 현재 위치에 도시가 세워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기에 식민도시 (콜로니아)로 승격되었고 인구 3만이 넘는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된 이후 벌어진 안토니우스 & 옥타비아누스와 브루투스 & 카시우스 간의 내전에서 풀라는 후자의 편을 들었고, 그 대가로 2차 삼두정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룰리아에 의해 재건되며 세르기우스 개선문과 원형 경기장 등 대부분 현존하는 건물들이 세워져 현재에 이른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왕조 시기에 풀라는 황실의 정치범 수용소로 활용되며 악명이 높았다. 326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의 장남 크리스푸스가, 354년에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촌[1] 갈루스가 처형되었다. 둘다 공동황제 (카이사르)였음에도 황제의 일방적인 호출에 가혹한 고문을 당한 후 죽음을 맞았다. 425년, 도시는 주교령이 되었고 476년에는 오도아케르에게 약탈되기도 하였다. 이후 풀라는 동고트 왕국, 동로마 제국[2] 을 거쳤고 788년부터 프랑크 제국, 신성로마제국을 거쳐 1148년부터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12세기부터 베네치아가 피사, 제노바 등과 해상권을 두고 경쟁할 때마다 풀라는 그 적국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도시 내부에서도 로마인 혈통의 귀족들과 신흥 귀족들간의 암투가 벌어져 점점 쇠퇴하였다. 1192년, 풀라는 피사에게 점령되었으나 곧 베네치아가 회복하였다. 그리고 1243년, 풀라는 피사와 동맹하였다가 베네치아에게 점령되기도 하였고 1267년에는 그와 전쟁 중이던 제노바 측에게 함락되었다. 1291년, 트레비소 조약으로 풀라는 아퀼레이아 주교령에 포함되어 잠깐 신성로마제국으로 돌아왔다가 1331년에 베네치아가 되찾안 후로는 그와 4세기간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다.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풀라를 이탈리아의 가장자리로 일컫기도 하였다.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전쟁이 계속 이어지며 풀라는 1397년에 재차 제노바 군에게 함락되었고 그 외에도 헝가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등의 습격을 받았다. 또한 전염병도 찾아오며 1750년에 이르자 풀라는 3천여명이 거주하는 작은 도시로 쇠락하였다. 1797년, 나폴레옹에 의해 베네치아 공화국이 해체되자 풀라는 프랑스 제국령 일리리아주를 거쳐 1813년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내륙 국가였던 오스트리아제국은 풀라를 포함한 이스트리아 반도의 획득으로 유일한 해양 진출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 통일전쟁의 결과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베네치아를 상실하자 이스트라 반도의 풀라는 오스트리아 해군의 핵심기지로써 기능하며 오랜만에 빛을 볼 수 있었다. 1859년에 해군 기지가 지어졌고 합스부르크 황실은 풀라로 여름 휴가를 오기도 하였다.
오스트리아 지배기 동안 도시에는 인근 크로아티아계 이주민들이 노동자로서 유입되었는데, 1910년 통계에 따르면 시민 중 15%가 크로아티아 계였다. 다만 아직까지 과반수는 이탈리아 계였다. 한편,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자 풀라를 포함한 이스트리아 반도는 이탈리아 왕국에게 넘어갔고 도시는 폴리 주의 치소가 되었다. 이후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파시스트 세력은 크로아티아 계 주민들을 박해하였고, 따라서 상당수가 유고슬라바아로 돌아갔다. 1943년부터는 독일군의 U 보트 기지로 쓰이던 풀라는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고, 나치 군대와 파르티잔은 서로 적군의 부역자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집단 매장하는 전쟁 범죄를 일으켰다. 물론 전자가 훨씬 가혹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풀라에는 영국군이 주둔하였고 1947년, 파리 평화 조약과 처칠의 도움으로 유고슬라비아에 소속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계 주민들은 트리에스테 쪽으로 집단 이주하였고 이때부터 이탈리아식 명칭인 폴라 보다 풀라로 불리게 되었다. 1991년, 유고 연방이 해체된 후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속하여 현재에 이른다.
로마 시대 (1세기)의 원형 경기장. 2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
1. 개요
Pula / Pola
크로아티아 서북부의 항구 도시. 리예카에서 서남쪽으로 60km, 이탈리아령인 트리에스테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져 있으며 이스트리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인구는 5만 8천여명이다. '''크로아티아의 로마'''로 불릴만큼 시내에 로마 유적이 즐비하며, 온화한 기후와 해변 덕에 관광객이 많다. 20세기 이전까진 트리에스테와 더불어 이스트리아 지방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도시였으므로 로마 유적을 제외하고도 아직도 그 분위기가 짙게 남아있다. 다만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의 혼란을 거친 후, 크로아티아계 주민이 대다수이고 이탈리아 계 주민은 5%에 그친다. 나머지는 세르비아, 보스니아 계 주민들이다.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풀라 공항이 있다.
2. 역사
원래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일리리아 인들의 거주지로 폴라이로 불리다가 기원전 177년, 로마에게 정복되며 현재 위치에 도시가 세워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기에 식민도시 (콜로니아)로 승격되었고 인구 3만이 넘는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된 이후 벌어진 안토니우스 & 옥타비아누스와 브루투스 & 카시우스 간의 내전에서 풀라는 후자의 편을 들었고, 그 대가로 2차 삼두정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룰리아에 의해 재건되며 세르기우스 개선문과 원형 경기장 등 대부분 현존하는 건물들이 세워져 현재에 이른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왕조 시기에 풀라는 황실의 정치범 수용소로 활용되며 악명이 높았다. 326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의 장남 크리스푸스가, 354년에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촌[1] 갈루스가 처형되었다. 둘다 공동황제 (카이사르)였음에도 황제의 일방적인 호출에 가혹한 고문을 당한 후 죽음을 맞았다. 425년, 도시는 주교령이 되었고 476년에는 오도아케르에게 약탈되기도 하였다. 이후 풀라는 동고트 왕국, 동로마 제국[2] 을 거쳤고 788년부터 프랑크 제국, 신성로마제국을 거쳐 1148년부터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2.1. 중세 ~ 근대
12세기부터 베네치아가 피사, 제노바 등과 해상권을 두고 경쟁할 때마다 풀라는 그 적국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도시 내부에서도 로마인 혈통의 귀족들과 신흥 귀족들간의 암투가 벌어져 점점 쇠퇴하였다. 1192년, 풀라는 피사에게 점령되었으나 곧 베네치아가 회복하였다. 그리고 1243년, 풀라는 피사와 동맹하였다가 베네치아에게 점령되기도 하였고 1267년에는 그와 전쟁 중이던 제노바 측에게 함락되었다. 1291년, 트레비소 조약으로 풀라는 아퀼레이아 주교령에 포함되어 잠깐 신성로마제국으로 돌아왔다가 1331년에 베네치아가 되찾안 후로는 그와 4세기간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다.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풀라를 이탈리아의 가장자리로 일컫기도 하였다.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전쟁이 계속 이어지며 풀라는 1397년에 재차 제노바 군에게 함락되었고 그 외에도 헝가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등의 습격을 받았다. 또한 전염병도 찾아오며 1750년에 이르자 풀라는 3천여명이 거주하는 작은 도시로 쇠락하였다. 1797년, 나폴레옹에 의해 베네치아 공화국이 해체되자 풀라는 프랑스 제국령 일리리아주를 거쳐 1813년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내륙 국가였던 오스트리아제국은 풀라를 포함한 이스트리아 반도의 획득으로 유일한 해양 진출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 통일전쟁의 결과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베네치아를 상실하자 이스트라 반도의 풀라는 오스트리아 해군의 핵심기지로써 기능하며 오랜만에 빛을 볼 수 있었다. 1859년에 해군 기지가 지어졌고 합스부르크 황실은 풀라로 여름 휴가를 오기도 하였다.
2.2. 근대 ~ 현대
오스트리아 지배기 동안 도시에는 인근 크로아티아계 이주민들이 노동자로서 유입되었는데, 1910년 통계에 따르면 시민 중 15%가 크로아티아 계였다. 다만 아직까지 과반수는 이탈리아 계였다. 한편,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자 풀라를 포함한 이스트리아 반도는 이탈리아 왕국에게 넘어갔고 도시는 폴리 주의 치소가 되었다. 이후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파시스트 세력은 크로아티아 계 주민들을 박해하였고, 따라서 상당수가 유고슬라바아로 돌아갔다. 1943년부터는 독일군의 U 보트 기지로 쓰이던 풀라는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고, 나치 군대와 파르티잔은 서로 적군의 부역자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집단 매장하는 전쟁 범죄를 일으켰다. 물론 전자가 훨씬 가혹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풀라에는 영국군이 주둔하였고 1947년, 파리 평화 조약과 처칠의 도움으로 유고슬라비아에 소속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계 주민들은 트리에스테 쪽으로 집단 이주하였고 이때부터 이탈리아식 명칭인 폴라 보다 풀라로 불리게 되었다. 1991년, 유고 연방이 해체된 후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속하여 현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