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왕조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의 왕조.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를 시조로 삼는 왕조이다. 다만, 이 왕조 이름은 정식명칭이 아니라 학계의 편의상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이 붙여진 로마제국의 지배가문에게 붙여진 학칭일 뿐이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 가족 및 친척들이 모두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네오 플라비우스(신 플라비우스) 왕조로 서술되는 경우도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분열된 제국을 다시금 통일시켰으나 이후 후계문제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서 로마의 혼란상을 제대로 막지 못하게 되고 왕조도 단명하게 된다.
2. 역사
- 자세한 내용은 각 황제의 개별 항목 참조.
2.1.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305~306)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혁혁한 군사공적을 바탕으로 달마티아 총독에 취임한 이후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를 시작하면서 그에게 부제(카이사르)직을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은퇴하게되자 막시미아누스의 자리를 이어 받아 서방 정제(아우구스투스)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1년만에 병사하게 된다. 그의 이른 병사가 사실상 사두정치 붕괴의 서막이 되었다.
2.2. 콘스탄티누스 1세(306~337)
콘스탄티누스 1세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서자였다. 306년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죽자 군대에 의해 황제(아우구스투스)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당시 극심한 내전을 피하고자 했던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에 의해 부제(카이사르)직을 제의받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정에서 자라면서 그의 통치를 지켜봤었기 때문에 사두정치를 인정하고 그 직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서자출신인 그의 부제즉위로 인해 선제 막시미아누스의 적자출신이었던 막센티우스의 불만을 야기하게 되면서 막센티우스의 반란이 일어난다. 당시 서방 정제였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막센티우스의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가 오히려 패배당하며 처형당하게 되면서 혼란은 극심해진다. 308년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막시미아누스 등과 회합을 갖고 자신의 동료였던 리키니우스를 서방정제로 삼는다. 하지만 리키니우스가 무명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서방 부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세와 동방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의 조카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이에 불만을 갖게 된다.
311년 갈레리우스가 죽자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동방 정제를 칭하게 되었고, 이에 리키니우스는 그를 제압하고자 콘스탄티누스 1세와 혼인동맹을 맺고 그를 서방정제로 올린다. 그리고 자신이 동방으로 가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 때부터 서방의 정제가 되었고, 반란자였던 막센티우스를 제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리키니우스와 함께 밀라노 칙령을 발하며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다.
리키니우스가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정복한 이후 둘이 로마를 양분하게 되었으나 대립을 자주 가지게 되었고, 결국 323년 콘스탄티누스가 대군을 동방으로 보내며 리키니우스를 정복하면서 로마를 재통일하게 된다.
로마를 재통일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중심의 정책을 펼치면서 로마제국의 방향성을 바꾸게 된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천도를 통해 동방 중심의 제국 경영 정책을 펼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실수는 유능한 장남이었던 크리스푸스를 처형했다는 점에 있다. 이후 후계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그의 사후 제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
2.3.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혼란 (337~350)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제국은 콘스탄티누스의 세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가 제국을 3분할 하여 다스리게 된다. 원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의 사후 조카들에게도 제국을 넘기려고 했으나 아들들은 그러한 점을 무시하고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남자친족들을 대거 죽이게 된다. 이로 인해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율리아누스 이후 콘스탄티누스 왕조가 이어지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세 아들 중 맏이였던 콘스탄티누스 2세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두 동생들에게 불만을 표하며 콘스탄스를 공격했으나 결국 패배당하면서 제국은 콘스탄티우스 2세와 콘스탄스 두 사람이 나눠 가지게 된다. 서방 대부분에 일리리쿰, 마케도니아까지 받은 콘스탄스는 형 콘스탄티우스 2세를 압박하면서 사실상 선임황제의 역할을 하게 되지만 부하 관리를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암살당한다.
이후 콘스탄스의 영역에서 두 명의 대립황제가 나오게 되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가 모두 제압하면서 결국 제국은 다시금 한 명의 황제 휘하에 놓이게 된다.
2.4. 콘스탄티우스 2세와 율리아누스 (350~363)
콘스탄티우스 2세는 351년 오랜 유폐생활에 있었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카 갈루스[1] 를 카이사르로 삼으면서 동방을 맡긴다. 하지만 354년 갈루스는 처형당했고, 곧바로 그의 이복동생인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삼으면서 서방의 통치를 맡긴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혈혈단신으로 버려진 상황에서 서방통치를 맡은 상황이었고, 거기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에게 상당히 부담되는 병력을 요구하게 된다. 이에 율리아누스가 콘스탄티우스 2세를 공격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게 되었고, 제국은 내전으로 다시금 치닫게 될 위기에 처했으나 콘스탄티우스 2세가 361년에 죽게 되고, 율리아누스를 정식 후계자로 삼음에 따라 율리아누스로 제위가 넘어간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반기독교 정책을 펼치면서 당시 제국의 종교나 다름 없었던 기독교인의 불만을 받게 되었다. 이후 율리아누스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공격을 준비하지만 중간에 전사한다. 그리고 그가 후계자를 못 얻음에 따라 콘스탄티누스 왕조는 끝나게 된다. 다만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생아였던 플라비아 막시미아 콘스탄티아가 후대 황제인 그라티아누스의 첫 번째 황후가 된다. 물론 그라티아누스와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젊은 나이에 죽어서 왕조는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3. 평가
콘스탄티누스 1세는 내전을 종식시키며 제국을 통일시켰고, 또한 밀라노 칙령이나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기독교를 공인시키면서 제국의 종교적 방향도 바꿨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천도를 통해 제국의 정치적인 분위기도 확실하게 바꿔놓았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 선정이 부실했던 관계로 제국은 이후에도 잦은 내전에 빠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남자 친족이 거의 살아남지 않게 되면서 율리아누스의 사후 왕조가 더이상 이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만약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제대로 된 후계자를 선정하고 그가 상당히 똑똑한 인물이었다면 제국은 좀 더 안정적인 지휘 하에 게르만족의 침입 등에도 잘 막아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국은 이후에도 잦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항구적인 동서로마의 분열로 이어지게 된다.
4. 역대 황제
5. 기타
클로루스가 플라비우스의 이름을 칭한 이래 대대로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을 취했기에 1세기의 플라비우스 왕조와 대비되는 '신 플라비우스 왕조(Neo-Flavian dynasty)'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 이 시기쯤 오면 플라비우스를 전통적인 씨족명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전통적인 개인 이름(프라이노멘)에 가깝게 맨 앞에 사용하는 일이 훨씬 많으며 콘스탄티누스 왕조 이후의 왕조 개창자들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는 물론 플라비우스 스틸리코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같은 유력자들까지도 플라비우스를 칭했기에 왕조 구분으로서의 의미는 떨어진다. 황제의 칭호로서의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이후의 '안토니누스' 등과 같이 황제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칭호로 보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깝다.
[1] 뒤에 황제에 오르는 율리아누스의 이복형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막시미아누스의 의붓딸 테오도라와 결혼해서 낳은 아들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첫째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