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홍

 


'''북연 제3대 황제
昭成帝 | 소성제
'''
'''묘호'''
없음
'''시호'''
소성황제(昭成皇帝)
'''연호'''
태흥(太興, 430년 ~ 436년 5월)
''''''
풍(馮)
''''''
홍(弘)
''''''
문통(文通)
'''생몰 기간'''
? ~ 438년
'''재위 기간'''
430년 ~ 436년 (6년)
1. 소개
2. 생애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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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북연(北燕)의 제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자는 문통(文通). 풍발의 동생.
그의 아들 풍랑의 딸이 후에 북위 문성제의 황후가 되는 문성문명황후 풍씨다.

2. 생애


407년에 풍발이 용성에서 모반을 일으켜 모용희를 제거한 후 고운을 추대해 북연을 세우자 정동대장이 되었으며, 급군공의 작위를 지내다가 409년에 풍발이 즉위하자 우복야가 되었다. 410년에 풍만니, 풍유진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흥과 함께 이들을 진압했으며, 표기대장군에 임명되고 중산공에 봉해졌다.
430년에 풍발이 병으로 눕자 군사를 거느려 풍익과 황위 다툼을 벌여 승리하면서 사신을 보내 풍익의 목숨을 빼앗았으며, 풍발의 100여 명의 아들을 모두 몰살한 뒤 황제로 즉위했다. 436년에는 북위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수도 화룡성이 위기에 놓이자 고구려에 망명을 요청했으며, 고구려에서 갈로에게 군사를 보내 구해주면서 요동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런 구원에도 불구하고 북연은 멸망당하고 말았다.
한편 438년에 장수왕이 풍홍을 '용성왕 풍씨 임금(龍城王 馮君)'이라고 하대하며[1] '들판에서 묵게 되어 병사들과 말이 노고가 많다'고 위로하자 도리어 부끄럽고 화가 나서 무례함을 따졌으며 이에 고구려에서는 풍홍을 평곽에 거처하게 했다가 북풍으로 옮겼다. 풍홍은 고구려를 업신여겨 정치를 하고 형벌을 주면서 포상하는 일을 북연의 황제로 있을 때와 같이 하자 고구려 측에서 시중드는 사람을 빼앗고 태자 풍왕인(馮王仁)을 인질로 삼았다.
이러한 고구려의 대응에 풍홍은 원망의 마음을 품고는 남조 유송에 자신을 받아달라고 하면서 사신을 보냈는데, 이것이 고구려에게 들통나 진노한 장수왕의 명으로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자손 10여 명과 함께 목숨을 잃는 실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2] 풍홍이 죽자 시호를 소성황제(昭成皇帝)라 했다.

3. 기타


천년의 신화라는 게임에서 고구려 미션 7장 이름이 '북연왕의 탈출'인데, 그 북연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1] 용성은 북연의 수도 화룡성을 가리키고, 풍씨는 북연의 왕성이다. 엄연한 황제국의 군주였음에도 연왕도 아니고 용성왕이라 부른 것은 국왕도 아니고 군왕(郡王)급으로 낮춰 부른 것이다. 풍홍 입장에서는 모멸적으로 들릴 수 밖에 없는 호칭이었던 것. [2] 참고로 이때는 막장유송이 3대 황제 유의륭의 치세로 나름 잘 돌아가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