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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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연(後燕)의 제4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휘는 희(熙), 자는 도문(道文), 시호는 소문(昭文)이다.
즉위하기 전에는 웅장하고 영리하여 아버지 모용수의 풍모를 닮았으나 넓은 안목이 모자라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장에서의 모습 한정이었고 어릴 때부터 싹수가 노란 색욕마인이었다. 17세에 과부 형수와 간통하고, 18세에 자매덮밥을 이뤘으며, 23세 때 네크로필리아에 이르렀다. 즉위한 뒤 하는 짓거리는 역대급 막장이었다. 이 사람의 일생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기 드 뤼지냥처럼 즉위해서 수양제처럼 거하게 말아먹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색으로 흥한 자 색으로 망하리라.'''
2. 생애
2.1. 후연의 몰락과 성장
385년, 모용수가 막 연나라를 재건하여 화북 지방에 후연을 성립시킬 때 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후연이 어느 만큼 자리를 잡자, 9세의 나이로 다른 형제들과 나란히 하간왕(河間王)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모용수가 참합피 전투의 참상을 이기지 못하고 분사했고 뒤이어 즉위한 모용보는 북위의 공세를 못 버틴 나머지 수도 중산을 버리고 용성으로 몽진했는데, 이 때 어려서 성을 빠져나가지 못한 모용랑, 모용감, 모용희를 이복형 모용륭이 말에 태워서 가까스로 탈출시켰다. 이 때가 모용희의 나이 13세였다.
이듬해 모용보가 영토 수복을 위해 을연에 주둔하였는데, 군영에서 금위군 장상이던 단속골이 모용륭의 아들 모용숭을 황제로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단속골은 모용수 종실의 여러 왕들을 죽였지만 모용희는 평소 모용숭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무사했다. 뒤에 난한이 단속골을 죽이고, 도망가 있던 모용보를 받드는 모습을 보여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게 한 뒤 죽여버린다. 이후 난한은 모용희를 요동공으로 책봉해서 모용씨의 후손을 대표하도록 남겨두었다.
그러나 얼마 뒤 모용성이 난한을 죽이고 정권을 잡자, 모용희는 다시 하간공을 하게 되었고[3] , 시중·거기장군·중령군·사예교위에 올랐다. 이 때 모용희의 나이는 14세였다. 이듬해에는 도독중외제군사·상서좌복야·영중령군을 했고, 다시 이듬해에는 고구려를 침공하는 선봉으로 신성과 남소성을 무너뜨리는 데 용맹함이 으뜸이었다. 개요 항목에서 "웅장하고 영리하여 모용수의 풍모가 있었다"는 평가도 바로 이 때 모용성이 한 말이다.[4]
2.2. 색으로 흥한 자
401년, 모용성이 단기의 반란을 진압하던 도중 얻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5] 모용성의 장남인 태자 모용정이 너무 어려 신하들은 모용성의 동생 평원공 모용원을 세우길 바랬다. 그러나 당시 황실의 큰어른이던 헌장황태후 정씨는 '''모용희와 간통'''하고 있었기에[6] 모용희를 은밀히 궁으로 불러들였고, 이로써 주도권을 잡자 모용희는 한동안 모용원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모습을 연출하다가 끝내 천왕으로 즉위하여 후연의 4대 군주에 올랐다. 즉위하기 무섭게 당연히 모용원에게 사약을 내렸고, 이어서 모용성의 장례 행렬이 성 밖으로 나간 사이 태자였던 모용정을 추대하려고 한 모의가 드러나면서 마찬가지로 모용정에게도 사약이 갔다(...).
이렇게 모용희는 17세의 어린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모용희의 배후에는 그를 왕좌에 앉혀 준 태후 정씨의 영향력이 있었고, 그 관계의 기저에 있는 부적절한 관계는 이윽고 파국에 이르렀다. 이듬해, 모용희가 전 중산윤 부모의 딸인 부융아와 부훈영을 각기 귀인과 귀빈으로 맞아들이자, 이에 태후 정씨가 분개하여 조카인 칠병상서 정신과 함께 모용희를 폐위시키고 장무공 모용연을 세우려고 모의했다. 모의가 드러나자 모용희는 정태후를 주살한 뒤 시호를 헌유황후(獻幽皇后)라 하였으며, 이어서 모용연과 정신의 목숨도 빼앗고 만다.
이후 모용희는 부씨(苻氏) 자매를 총애했고, 그 가운데서도 동생인 귀빈 부씨를 총애하여 영응황후(榮膺皇后)로 책봉했다. 언니인 귀인 부씨는 소의(昭儀)로 책봉했다(후궁). 그리고 '''그들이 바라면 뭐든지 들어주었고, 이게 나라를 말아먹는 데 거하게 일조하게 된다.''' 민간에 다니며 잔치 벌이기부터, 늦여름에 얼린 생선이나 한겨울에 생 지황을 먹고 싶다는 엽기적인 요청도 모두 들어주고자 신하들을 들볶고 죽이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다.
2.3. 전설의 삽질
이 시기 후연은 서쪽으로 북위, 동쪽으로 고구려와 대립하여 외교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철저히 고립된 상태였다. 더 큰 문제는 북위의 군주는 형 모용보를 철저히 농락하면서 후연을 중원에서 몰아낸 '''도무제 탁발규'''였고, 고구려의 군주는 한국사 최고의 정복 군주으로 숭상받는 '''광개토대왕''''''이었다는 것.'''
즉위한 이듬해인 402년에는 모용발이 영지(令支)를 공격하여 요서군에서 북위를 몰아내는 성과를 거뒀지만, 이내 5월에 동쪽에서 고구려가 요하를 건너왔다(...). 고구려군이 숙군성을 공격하자, 숙군성을 지키던 평주자사 모용귀는 그대로 성을 버리고 튀어야만 했다.[7]
이후 모용희는 당분간 대외적인 확장을 멈추고 대신 용등원이라는 후원을 만들었다. 용등원 안에는 경운산을 쌓고 소요궁과 감로전을 건축하며, 천하거라는 수로를 파서 물을 이곳으로 끌어들이고 곡광해와 청량지라는 연못을 조성하는 등 온갖 롤러코스터 타이쿤을 벌였다. 이 작업은 403년 5월부터 404년 여름이 다 지나도록 이어졌고, 이에 공사를 하던 군사들은 태반이 더위를 먹어서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이 작업은 '''상당 부분 아내인 부씨 자매를 위한 것이었다.'''
이윽고 소의 부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를 치료하던 왕온[8] 의 목숨을 처참히 빼앗는다.[9]
그리고 다시 이해 겨울에 황후 부씨와 함께 백록산, 청령, 창해 인근에 이르러 사냥을 벌이는데, 이 사냥으로 군사 5,000여 명이 맹수에게 물려 죽거나 동사했다는 기록이 자치통감에 남아있다. 또한 거의 같은 시기에 고구려가 연군을 공격한 기록이 등장한다. 연군은 본래 지금의 베이징에 있었지만, 이 당시 북경 지방은 399년 이미 북위의 영역이므로 여기서의 연군은 요서의 대릉하 서쪽, 차오양시 인근으로 옮겨진 행정구역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10]
모용희는 이에 대한 보복을 단행하기 위해 해를 넘겨서 고구려의 요동성을 공격했는데, 이 원정길에 황후 부씨를 데려갔고, 아니나 다를까 여기서도 역시 부씨에 건 지나친 총애가 화를 부르고 말았다. 요동성을 함락하려는 와중에 갑자기 '''"요동성에 짐과 황후가 맨처음 입성할 테니 성을 깎아 평지로 만들어라. 그럼 짐이 황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갈 테니 장군과 사졸은 먼저 오르지 말라"'''는 약이라도 빤 것 같은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 덕분에 고구려군은 시간을 벌었고, 후연군은 비와 눈이 내려 군사들이 동사하자 돌아가야 했다.
이렇게 고구려 원정에서 체면을 구기자 영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이에 모용희는 홍광문을 업성의 봉양문처럼 3층으로 증축하도록 명령을 내리고는 12월에 다시 출정해 거란을 공격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황후 부씨를 데리고 갔다(...).
하지만 정작 해를 넘겨서 국경에 이르니, 거란의 세력이 생각보다 강성한 바람에 모용희는 겁을 집어먹어(...) 원정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황후 부씨가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 한다'''며 바가지를 긁는 바람에(...) 결국 가지고 있던 군수품과 동사하는 사람도 도중에 내버리면서 자그마치 3,000여 리를 달려 고구려의 목저성을 공격했지만, 역시 이것도 못 이기고 돌아왔다(...). 이 와중에 뒷날 쿠데타로 북연의 천왕이 되는 모용운이 화살에 맞아 다치고 패배의 책임을 물까 두려워 관직을 버리기도 했다. 목저성 공격에 참가했었다는 사실에서 모용운 또한 거란까지 갔다 다시 3천여 리를 달려 목저성으로 향한 뻘짓에 동원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고구려군의 연군 공격과 모용희의 반격, 거란과 요동성 및 목저성에서 벌어진 전투 등 언급된 일련의 사건들은 일종의 암시일 가능성도 제시된다.[11][12]
2.4. 색으로 망하리라
이렇게 거란 습격과 고구려 재습격에서 다시 체면을 구기자, 모용희는 애꿎은 모용보의 자식들을 학살하는 한편 (...) 비여, 영지, 숙군에 각기 유목, 모용의, 구니예를 배치해 내정을 안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며 황후 부씨를 위해 승화전을 크게 지어줬고, 이 일로 북문의 흙을 져나르면서 자그마치 '''곡식과 흙의 가격이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승화전을 짓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황후 부씨마저 죽자, 모용희는 슬픔에 빠져 혼절했다가 일어나서는, 관을 열고 이미 염습까지 끝난 부씨의 시신을 '''시간'''했다. 또 관청에 명을 내려 곡하지 않는 사람은 벌을 내리니, 신하들은 모두 매운 것을 입에 물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모용희는 전국민을 동원해 부씨의 무덤을 짓고 휘평릉(徽平陵)[13] 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무덤에 함께 순장하고자 애꿎은 모용륭의 아내 장씨에게 불경죄를 뒤집어씌워 목숨을 잃게 하니, 이에 우복야 위구 등 여러 대신들은 가만히 목을 씻고 죽기를 기다리는 신세(...). 그리고 이런 국가 막장 테크 속에서 모용희의 어미 단씨는 태후 자리를 버리고 궁 밖으로 나가버렸다(...).
마침내 3개월 만에 무덤이 완성되자 모용희는 "잘 되었다. 짐이 장차 이 무덤에 뒤따라 들어가리라."라는 사망 플래그를 남겼다. 이윽고 운구가 시작되어 모용희는 머리를 풀고 맨발로 운구 행렬을 뒤따라갔는데, 이때 상여가 너무 커서 용성의 북문을 무너뜨리고 지나가야 할 정도였다.
이처럼 안 그래도 어수선하던 나라가 황후 부씨의 장례로 더욱 을씨년하자, 이를 틈타 '''용성에서 풍발의 반란이 일어났다.''' 본래 풍발의 가족은 서연 사람으로, 서연이 망하자 후연에 귀순해 중위 장군이 되었는데, 이 당시에는 다시 모용희에게 죄를 지으면서 도망다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풍발, 풍소불, 풍만니 형제가 은밀히 용성으로 돌아왔고, 모용희가 운구 행렬을 따라 나간 사이에 풍발 등 22인이 결맹하여 모용보의 양자 모용운을 추대해 옹립시켰다.[14]
모반 소식을 듣자 모용희는 "이들은 쥐새끼 같은 도적일 뿐이다. 짐이 돌아가 당장 죽이리라!"라 욕하며 급히 돌아와 자신이 무너뜨리며 지나갔던 북문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다음날은 대세가 기욺을 느낀 듯 자신이 조성했던 용등원으로 들어가 꽁꽁 숨어버렸다. 이 때 모용발을 비롯해 모용희를 따르던 병사들은 모용희를 찾아 나섰지만, 모용희는 오히려 스스로 놀라서 더욱 숨어버렸고 모용희를 따르는 병사들은 하루만에 흩어졌다.
모용발은 결국 반란군에게 목숨을 잃었으며, 모용희도 다음날 용등원 안의 숲에서 붙잡혀 모용운의 앞으로 끌려나왔다. 모용운은 그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잘못을 추궁하였고, 끝내 모용희는 자신의 여러 자식들과 함께 모용운에 의해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모용희를 제거한 모용운은 후에 모용희를 소문황제(昭文皇帝)로 추증한 뒤 시신을 황후 부씨와 함께 합장했다. 이와 함께 모용운이 자신의 성을 고씨로 복성하면서 후연의 왕계는 끝나고 북연이 등장하게 된다.
3. 평가
삽질 하나만 믿고 나라를 말아먹은 좀 다른 뜻에서 꽤나 비범한 인물. 물론 이 '삽질'은 토목 건축 말고도 속어적인 뜻도 들어간다. 예컨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 요동성 전투의 삽질이라든지, 거란까지 갔다가 중간에 쫄아서는 다시 3천 리를 행군해 고구려를 공격한다든지(...).
이 작자가 한 만행들을 보면 아무래도 수양제의 전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비슷한 점을 분야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리즈 시절'''
모용희는 즉위하기 전 모용성의 휘하에서 고구려 침공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양광은 진왕 시절에 5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남조의 진나라를 공격하는 총사령관이었고, 이로써 남조의 진나라는 망하고 전 중국은 수나라로 통일했다.
'''색욕마인'''
모용희는 그나마 처음에 태후 정씨와 사통한 일만 빼면 여성 편력이 심각한 건 아니어서, 좋게 봐주면 순정 비스무리한 거라도 있었다. 다만 지나칠 만큼 두 사람에게 집착이 심해서 문제였지...수양제가 즉위하자마자 아버지의 부인인 선화 부인 진씨를 강간했다는 이야기는 이설이 있지만 널리 알려져 있다.
'''토목공사'''
수 양제가 보여준 대운하와 만리장성 스케일과 비교하면, 모용희가 만든 용등원은 고작 정원 하나니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때 용등원 안에 만든 경운산의 높이가 50m에 달하는데, 지금 진시황릉의 높이가 76m다. 게다가 이 당시 후연이 쪼들릴 대로 쪼들려서 요서 지방에 짱박혀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더구나 전쟁 나가서도 성을 깎아 평지로 만드느니(모용희), 이동식 성을 만드느니(수양제) 하는 것도 막상막하.
'''민폐 순행'''
모용희는 사냥한답시고 아내와 함께 겨울철에 전국을 돌아다니다 5천 군사가 고스란히 갈려나갔다. 여기에 수 양제가 대운하를 타고 강남으로 내려오면서 보여준 민폐를 생각해보자.
'''고구려 전쟁'''
모용희와 수양제가 모두 고구려에 쳐들어왔다가 요동성에서 발목이 잡혔는데, 그 과정도 비슷하다. 군대를 묶어 놓으려고 모용희가 "님들 내가 제일 먼저 요동성에 들어갈꺼임"이라 말하고, 수양제는 "님들 요동성이 항복하려 그러면 결재 받으라" 했으니, 둘의 수준이 아주 비슷하다(...).
'''쿠데타로 몰락함'''
모용희는 죄 짓고 도망다니던 풍발 형제들의 모반으로 망했고, 수양제는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가운데 강남으로 튀었다가 평소에 개처럼 놀려먹던 우문화급 이하 근위병 군단에게 죽었다.
4. 대중매체에서
앞에 언급한 이러한 평가를 반영한 듯,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도 최초 인물 설정은 '포악하고 잔인한 성격을 숨기고 있다'는 식이었고 열폭하는 찌질이 특징의 형 모용보와는 또 다른 냉혹한 악역으로 자리를 잡나 싶었지만 회가 거듭할수록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줄거리 때문에 주적 역할은 고운에게 모두 빼앗기고 낭만이라곤 하나 없는 그냥 찌질이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고구려에 열폭해 날뛰는 모용보를 보다못해 몰아내고 새로운 주적으로 자리잡는다. 가끔씩 카리스마도 있고 가족애 같은 인간성도 있어 보였지만 포악하고 잔인한 성격이라는 설정이 묻힌 건 아닌지 정작 자기도 폭군이 돼서(...) 담덕을 죽이려고 날뛰다 풍발에게 그대로 암살. 모용수를 빼면 후연 쪽 인물들은 이 드라마에서는 도저히 유능한 인재가 보이질 않는다.
한국에서는 광개토대왕과 대립한 덕분에 광개토대왕의 적수로 제법 인지도가 있지만, 어째서인지 나오는 족족 죄다 노화한 모습이다.
심지어 네이버에서 연재했던 웹툰 태왕 광개토에서는 모용희가 60대 노인으로 나온다. 하지만 명심하자, 이 인간은 17세에 즉위해서 23세에 망했다.
게다가 정작 광개토대왕은 375년생이고 모용희는 385년생이므로 모용희가 10살 더 어리다.
이런 막장짓에도 쉽사리 안 망한 후연도 대단하지만, 이 일들을 지켜보면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왠지 깎이는 듯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