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빌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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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역대 군주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프리드리히 1세
1. 개요
2. 상세
3. 가족 관계


1. 개요


Friedrich Wilhelm.
생애: 1620년 2월 16일 ~ 1688년 5월 9일
재위: 1640년 12월 1일 ~ 1688년 5월 9일
흔히 "대(大) 선제후(Der Große Kurfürst)"라고 불린다. 1640년 선제후의 자리에 올라 상비군 제도와 중상주의, 절대왕정을 기반으로 하여 프로이센 발전의 기틀을 닦았다

2. 상세


1620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과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시기가 독일 전역을 초토화 시킨 30년 전쟁이 벌어질때라 고향이자 영지인 브란덴부르크 지방도 황폐화 되었다. 베를린 궁정을 떠나 퀴스트린 요새에서 지내야 했고 그곳에서 칼뱅교식 교리에 따라 교육받았다. 참고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종교는 개신교 중 루터파였다가 할아버지대에 개신교 칼뱅파로 개종했고 인구 대다수인 루터파를 달래기 위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야했다. 명목상 프로이센 공작령의 종주권을 가진 폴란드 왕의 압력으로 프로이센에서는 가톨릭도 박해하지 못할 정도.
이후 어머니의 외할아버지가 네덜란드의 침묵공 빌럼이었던 인연으로 14세때부터 18세때까지 네덜란드 유학을 떠나서 레이덴 대학에서 수학했고, 미래의 장인 어른이 되는 '오라녜 공 프레더리크 헨드리크[1]의 도움으로 헤이그 궁정에서 생활했다. 이시기 당연히도 당시 유럽에서 가장 잘나가던 네덜란드의 발전상을 목격했고 해상 무역, 농업, 건축, 군사 분야 등 여러 분야의 신기술을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에 도입하게 된다.
1640년 20세의 나이로 선제후로 즉위하였는데 치세의 전반기에는 독일에서 30년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선제후로 즉위하기 이전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신교도 제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돈이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를 적극 편들지도 않았고[2] 가톨릭의 합스부르크 황제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프리드리히 빌헬름도 역시 즉위 초에는 전쟁 막바지에 각진영의 압력과 러브콜(?)을 사절하려 전쟁으로 박살난 브란덴부르크 지방인 베를린 궁정이 아니라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로 가서 3년동안 신중한 처신을 보였다. 이는 계산된 행동으로 1644년까지 합스부르크 황제에게 기울었던 기존의 군대를 해산하고 독자적으로 새로운 군대를 창설하여 선제후 개인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상비군을 조직하여 절대 군주의 발판을 만든다. 1646년 네덜란드 통치자의 딸 "오라녜의 루이제 헨리에타"와 결혼하였지만 군사적인 면에서는 기대만큼 처가의 지원을 받지는 못했다. 다만 지참금으로 한보따리 싸온 것이 상비군 군자금으로 유용하게 사용했다.
어쨌든 전황이 신교도편으로 기운 전쟁 후기에는 신교도편으로 참여하여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영토를 확보하나 무역을 위해 필수적인 항구는 확보하지 못했는데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가장 원하던 오데르강 하구의 항구 슈테틴은 스웨덴이 차지해버리고 민덴, 마르데부르크, 동부 포메른 정도의 보상으로 끝났다.[3][4]
이후 7년간 황폐화된 영토를 재정비하고 내치에 전념하여 중앙집권화에 착수해 독일 지역 내 드문드문 떨어져 있던 영토를 묶어서 각 지역마다 있던 신분제 의회와 행정 기구를 통폐합하고 세금을 걷었는데 말 안듣는 귀족들은 잡아다가 재판없이 코렁탕을 먹였다.[5] 귀족들의 자제들을 전부 강제로 군대에 편성하고 영지의 거주민들은 병사로 편성하는 프로이센 특유의 방식으로 후에 강력한 군대의 기반이 된다. 이전 프로이센 공국의 전신 튜튼기사단이 원류라지만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의 군국주의 전통은 사실상 프리드리히 빌헬름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주변의 두 강호, 스웨덴폴란드-리투아니아 사이의 교묘한 외교 전략으로 처음엔 명목상 프로이센 공국의 종주권을 가진 폴란드 왕에게 충성을 보내는 척 하다가 폴란드가 봉기를 일으킨 우크라이나 카자크와 이를 지원한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는 사이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프가 폴란드 왕위를 요구하며 폴란드를 침공하자 속국의 의무를 어기고 군사적으로 중립을 지켜버린다. 이후 전황이 스웨덴 측에 기울자 참전하여 바르샤바를 같이 터는데 일조하고, 스웨덴이 힘이 빠지자 폴란드와 협상하여 오스트리아-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베스트팔렌 조약서 스웨덴에 넘어간 서부 포메른을 점령해버린다.
1660년 스웨덴의 동맹국인 프랑스가 개입하여 서부 포메른은 다시 뱉어내긴 하지지만 올리바 조약으로 1466년 튜튼 기사단이 13년 전쟁으로 폴란드에 굴복하여 넘어간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폴란드 왕의 종주권을 완전히 청산한다.'''
한편 프랑스에 뒤통수 맞은 영향으로 한동안 반프랑스 행보를 보였다. 처가인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적국인데다가 루이 14세가 유럽의 깡패질로로 전유럽의 어그로를 끌었기 때문. 1675년 프랑스의 동맹국인 스웨덴이 브란덴부르크로 침입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격파하여 신민들로 부터 '대 선제후' 칭호를 듣게 된다. 이 기세로 서부 포메른도 탈환하나 프랑스의 압력으로 또 다시 돌려준다.
1679년부터는 그동안 발목 잡았던 프랑스와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동맹을 맺게 되는데 프랑스가 서부 포메른과 군대의 자금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자격으로 프랑스가 지지하는 후보를 뽑는 것과 폴란드왕의 선거에서 프랑스측 인사를 민다는 조건. 그러나 루이 14세가 약속을 순순이 지킬 인간은 아니었고 뒤통수를 또 한번 맞게 되자, 1685년 다시 친조카 네덜란드 오라녀 공 빌럼(윌리엄 3세)과 동맹을 맺는다.
1685년 퐁텐블로 칙령으로 신교들이 프랑스에서 탄압을 받자 루이 14세에 코렁탕을 먹고 쫓겨난 위그노들을 받아들여서 베를린의 인구가 6천명에서 2만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위그노중에는 상공업자들이 많았고 프랑스의 선진문물을 전수해서 왔기때문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국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재위 후반까지 중상주의 정책과 절대왕권을 바탕으로 재임중에 상비군을 4만 명까지 늘렸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1세 대에 이르러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프로이센을 왕국으로 격상시켰다. 증손자 프리드리히 2세 때가 되면 북부 독일의 절대 강자가 된다.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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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내 나사우의 헨리에테(1627년 12월 7일 ~ 1667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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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처 조피아 도로테아(1636년 9월 28일 ~ 1689년 8월 6일)

[1] 침묵공 빌럼과 그의 네번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빌럼의 마지막 자식이다. 나사우의 마우리츠의 이복동생으로 그의 뒤를 이은 네덜란드의 지도자로서 스페인에 맞서 독립전쟁을 진행했다.[2]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할아버지 요한 지기스문트의 사위이고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버지 게오르크 빌헬름의 손아래 처남이다.[3] 원래 스웨덴이 포메른을 다 집어먹으려했는데 브란덴부르크가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스웨덴군이 포메른에 상륙할 당시 지원을 해주는 조건으로 포메른 공작의 작위 계승권을 내세우자(당시 포메른 공작은 자식이나 후사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스웨덴과 브란덴부르크는 각자 따로 포메른과 사돈 관계를 맺은 상태였다.) 스웨덴이 동부 포메른을 내주겠다고 동의했다.[4] 사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이에 대해 할 말이 없는데 스웨덴은 국왕이 전사할 정도로 죽기살기로 싸우면서 프랑스와 더불어 30년 전쟁의 후반기를 주도한 국가였으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5] 옛날이니 코렁탕이 무슨 대수냐 하겠지만 이 시대에도 귀족들은 반역이 아니면 가혹한 처벌을 받는 일이 드물었다. 현대로 올수록 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계층이 넓어진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