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Hugue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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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발생
2.2. 칼뱅파의 영향
2.3. 위그노 전쟁
2.4. 낭트 칙령
2.5. 위그노 반란
2.6. 계속되는 탄압
2.7. 드라고나드
2.8. 퐁텐블로 칙령, 낭트 칙령의 폐지
2.9. 위그노의 엑소더스
2.10. 박해의 끝


1. 개요


프랑스개신교 신자를 가리키는 말. 스위스 사람을 뜻하는 독일어 아이트게놋세(Eidgenosse)[1]프랑스어 식 사투리인 에뇨(Eignot)와 제네바의 동맹당 당수 브장송 위그(Bezanson/Besançon Hugues)의 성을 합친 것으로, 본래는 멸칭이었다. 루터회, 칼뱅파의 경우처럼 개신교그리스도교가 아니며, 개신교 지도자 개인을 추종하는 집단이라고 모욕을 주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거기에 더해 타국인을 가리키는 말을 붙여 자국민 취급을 하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2. 역사



2.1. 발생


1518년 무렵 마르틴 루터의 저작이 프랑스에 전해지면서 소르본 대학의 학자들이 루터에게 공감하였다. 하지만 가톨릭에서 루터를 비난하였기 때문에 1521년 이후로는 개신교 신앙을 가진 자는 화형을 당하든지, 아니면 망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1523년 8월 8일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수도자 장 바리에르가 화형을 당했고, 1546년 10월 7일 피에르 르클레르 목사와 예배 참석자가 화형을 당했다.
1534년 10월 18일에는 파리, 오를레앙 등의 여러 도시에 가톨릭 교리를 비판하는 문서가 내걸리는 격문사건(affaire des placards)이 발생했다. 심지어 프랑수아 1세의 침실 문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때문에 프랑수아 1세는 격노하여 개신교 탄압 조치를 선언했으며, 많은 사람이 처형되고 망명하게 되었다. 개신교도를 밀고한 자에게는 몰수한 재산의 4분의 1을 수여하는 칙령까지 있었다.
이듬해 1월에는 출판금지령이 나와 온건한 인문주의자도 탄압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프랑스를 떠나 이웃나라 스위스로 망명한 종교개혁 운동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장 칼뱅'''이었다.

2.2. 칼뱅파의 영향


사실 1540년대까지는 프랑스에서도 루터회의 영향이 강했지만 점차 장 칼뱅의 영향력이 강해진다. 장 칼뱅이 제네바에서 확고한 정치적 위지를 차지하면서 프랑스 개신교계가 제네바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제네바는 스위스 영토이지만 프랑스에 인접한 프랑스어권 도시이며 칼뱅 역시 프랑스 출신였다.
따라서 독일을 중심으로 자리잡은 루터파보다 같은 프랑스 문화권 동네인 제네바에서 발전한 칼뱅파가 프랑스인들에게는 더 친숙하게 다가올 수 있었던 듯하며, 칼뱅 역시 떠나온 자신의 고향 프랑스를 대상으로 선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546년, 장 칼뱅의 지도 아래 있던 제네바에서 무려 160명의 목사가 파견되어 프랑스 최초의 개혁교회가 만들어지고, 1559년에는 지하에서 신앙고백 대회가 열리며 프랑스 개신교회가 지하에서 자리잡게 된다. 개신교도는 왕권을 옹호하는 가톨릭 교회에 반발하는 대귀족, '청부(淸富)'[2]을 옹호하는 개신교의 가르침에 호감을 받은 부르주아 상공인, 그 외 농민들을 중심으로 상당한 범위에서 퍼져나갔다.

2.3. 위그노 전쟁


위그노의 세력이 커지면서 가톨릭 역시 위기감을 가져 '가톨릭 동맹'을 결성하였고, 이로 인해 발루아 왕조 치세에서 위그노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위그노 전쟁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로 그 정점을 찍었으며 이 시기에 살아남은 위그노들은 스위스와 네덜란드를 비롯한 신교도 우세 국가들로 대거 이주하여 이후의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30년 전쟁에 신교도 편에서 싸우게 된다.[3]

2.4. 낭트 칙령


1598년 앙리 4세가 반포한 낭트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낭트 칙령은 파리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개신교도가 모여서 집회를 할 수 있으며, 라 로셰의 요새에는 병력을 주둔하고 그 비용 18만 에쿠는 해마다 국왕이 지불한다. 그리고 위그노는 긴급 상황에 대비하여 150개의 요새를 건설할 수 있었다. 다만 위그노는 가톨릭 교회에도 십일조를 별도로 바쳐야 했다.
이로인해 구교와 신교의 평화가 찾아오는듯 했으나, 이 평화는 20년을 못간다.

2.5. 위그노 반란


1610년 앙리 4세가 열성 카톨릭신자에게 암살당하고, 메디치가문(마리 드 메디시스)의 섭정 하에서 아직 어린 루이 13세가 즉위하자 위그노의 입장은 약해졌다. 이 때문에 로앙 공작 앙리는 저항 세력을 조직하여 1621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국왕군은 위그노 군대의 본거지인 라 로셸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1622년의 몽펠리에 협정으로 일단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루이 13세는 몽펠리에 협정을 준수하지 않았고, 결국 1625년 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개신교국가 네덜란드의 지원[4]을 받은 프랑스 왕립해군이 라 로셸 근처의 레 섬을 함락하자 1626년에 라 로셸 시와 루이 13세 간에 파리 협정이 맺어졌다. 라 로셸 시는 종교의 자유를 계속 누릴 수는 있었으나 해군 보유를 금지당했다.
1627년 영국-프랑스 전쟁이 일어나면서 다시 라 로셸의 위그노와 국왕군은 싸움을 시작했다. 직접 포위군의 총사령관을 맡은 리슐리외 추기경이 거대한 방파제를 건설하여 봉쇄한 결과, 영국 함대의 구원은 실패로 돌아갔고 14개월 만에 라 로셸 시는 항복했다.
3번에 걸친 반란 이후에도 위그노들은 신앙의 자유만은 지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 위그노 지방이 가졌던 정치적, 군사적 자치권은 모두 사라졌다.

2.6. 계속되는 탄압


반란을 제압한 루이 13세리슐리외 추기경은 외교상의 이유로 낭트 칙령을 존중했다. 30년 전쟁 와중에 독일의 개신교 국가, 스웨덴과 동맹을 맺으려면 프랑스의 위그노들에게 온건한 조치를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5] 1642년 리슐리외 추기경, 1643년 루이 13세가 사망하며 위그노 파는 불안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E. Labrousse에 따르면, 1649년 찰스 1세가 청교도 의회에 참수된 것이 프랑스 위그노들의 입장을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즉, 개신교=왕 살인자 라는 비난에 자기방어를 할 필요가 생겨난 것이다. 이 때문에 위그노들은 장로회를 규탄하고 왕정에 충성을 맹세했다. 프랑스 역시 외교상의 이유로 스페인과 대결하면서 영국에게 중립을 보장하기 위해서 위그노들을 옹호해주었고, 1652년 프롱드의 난에서 위그노는 왕실을 지지[6]하였고 왕은 여기에 감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과이 동맹이 체결되자 왕실은 다시 비타협적인 태도로 돌아서서 양보 정책을 철회했다.
프랑스 개혁교회(Eglise Réformée de France)의 전국 교회회의는 1659년 루단에서 열린 것을 마지막으로 허가를 받지 못하게 되었고, 외국인 목사, 특히 제네바에서 목사 초청이 금지되었다.
1661년에서 1669년 까지 여러 선언과 결정이 위그노파를 압박해갔다. 교회 밖에서 노래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1663년에는 개신교 장례에 대한 규제가 나타나 일몰 이후 장례식이 금지되고 참석자가 30명으로 제한되었다가 1664년에는 10명까지 억압되었다. 1669년에는 잠시 여러 법령이 무효화 되거나 완화되었으며 장례식 참석 인원 제한도 해제되었다.
교회 조직도 제한되어 토론 집회가 금지되거나, 지역 교회 회의가 왕의 고문으로부터 심의를 받게 되거나, 1663년에는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편지로 연락을 주고 받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신교도가 높은 직무를 받지 못하게 하거나 직업 제한을 받게 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특히 개신교 장교들 가운데서 많은 숫자가 나타났다.

2.7. 드라고나드


1681년 5월부터 왕의 직속 용기병(dragonnades)들이 개신교 마을을 점령하고, 시위에서 약탈, 강간, 살인까지 하며 '왕의 희망에 따라서' 개신교도를 강제로 이단을 표기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강압했다.
3년 뒤에 1685년 제2차 드라고나드가 재개되었으며, 1685년 10월에는 많은 개신교도가 개종하거나 망명하여, 실질적으로 프랑스 내 개신교 조직은 붕괴되었다.

2.8. 퐁텐블로 칙령, 낭트 칙령의 폐지


1685년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칙령을 반포하여 낭트 칙령을 폐지한다. 가톨릭 측에서는 "낭트 칙령은 앙리 4세의 오점이었는데, 루이 14세가 이를 수정했다."며 높은 평가를 하며 환영했다.
세계사 과목에서는 이 '낭트 칙령의 폐지'를 중요하게 외우지만, 낭트 칙령의 폐지는 사실 당시 프랑스의 시점에서는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조치였다. 왜냐하면 이미 몇 년 전부터 루이 14세가 가혹한 탄압을 저질렀기 때문에 프랑스 내에서 개신교도는 숫자도 영향력도 크게 감소해서 정치적 존재감을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는 보통 '낭트 칙령의 폐지로 위그노들이 국외로 망명했다'고 가르치고 있으나, 실제로는 낭트 칙령이 폐지되기 전에 이미 대다수의 위그노가 험악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국외 망명을 선택했다. 당시 시점에서 도망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도망치고, 개종할 사람은 개종해서 사라졌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프랑스의 위그노는 '저항'조차도 불가능한 상태로 전락했던 것이다. 따라서 낭트 칙령의 폐지는 개신교 탄압의 시작이 아닌, 오히려 탄압의 결과를 선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어찌되었건 낭트 칙령 폐지 이후부터 1세기동안 위그노들은 더 이상 프랑스 국민의 자격을 누릴 수 없었다. 지금도 프랑스 개신교단에서는 1685년부터 1785년까지의 시기를 '광야'(désert) 시대로 부른다.

2.9. 위그노의 엑소더스


루이 14세 시기의 박해를 받은 위그노들은 프랑스를 떠나서 대대적으로 각지에 망명했다. 위그노들이 선택한 망명지는 주로 같은 유럽의 네덜란드, 프로이센 등의 개신교 국가들이었다. 위그노의 망명은 각지에 영향을 미쳤다.
  • 프랑스의 위그노는 전성기에는 100만 명 내외로 전체 인구의 5% 정도를 차지했다. 위그노의 세력은 남부에서 컸으며, 대귀족층과 부르주아 계층에 널리 침투했다. 망명한 위그노의 숫자는 20만에서 100여만으로 추정된다.[7]
  • 산업: 대략 이하와 같은 산업들이 위그노 추방으로 타격을 받았으며, 산업기술과 자본은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 등으로 유출하여 그 나라의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 모직물: 상파뉴의 스당은 북독일 지역에 모직물을 수출했는데, 이 지역에서는 위그노 제조자가 직기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었다.
    • 견직물: 17세기 중엽 투르, 리옹에서 현저하게 발전했는데 위그노의 공헌이 컸다. 위그노들은 린넨 산업을 프랑스에 도입했는데 이 제품은 영국으로 주로 수출되었다.
    • 제지 산업: 오베르뉴의 종이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인정받았다.
    • 교역: 라 로셸과 보르도의 해양 교역 발전에 큰 공헌을 했으며, 낭트 칙령 직전까지 라 로셸의 무역은 위그노에게 독점 상태에 있었다.
    • 금융: 금융업에서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리용의 출판업자 유구탄 가문은 1685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여 이후 17세기 최대급 은행으로 성장했다.
    • 시계 제조업: 스위스의 시계공업은 위그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대표적 예시가 바로 브레게다.
  • 위그노를 받아들인 나라들
    • 네덜란드: 독일과 다르게 칼뱅주의 위주로 종교개혁을 받아들였기때문에 때문에 망명온 위그노들이 적응하기 매우 쉬운 편이었고, 이들을 위해 프랑스어로 예배하는 왈롱교회(Waalse kerk)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 덴마크: 이들에 의해 감자와 레물라드 소스가 덴마크 요리에 소개되었다. 또한 19세기 유틀란트 반도녹화사업을 추진했던 엔리코 달가스도 위그노 망명자 출신이다.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훗날의 프로이센 왕국): 30년 전쟁으로 경제가 파탄난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681년 박해 당시 위그노 망명자에게 토지세를 면제했으며, 1685년 '포츠담 칙령'으로 위그노를 보호할 것을 선언했다. 군대까지 동원해서 프로이센 왕국으로 수만명의 위그노가 안전하게 이주하도록 도왔으며, 이들에게는 특권이 보장된 집단 거주지를 마련해주었다. 18세기 초에는 베를린 인구의 1/3이 프랑스인이었을 정도였다 한다. 위그노의 후손인 프랑스계 독일인이 다수 생겨나게 된다. 위그노들은 이전에는 없던 공장들을 새로 만들어서 독일의 경제부흥에 기여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몇몇 지방은 이 때문에 현저하게 인구가 감소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낭트 칙령의 폐지를 후회하고 있다."고 술회했다. 2차 대전 당시 유명한 에이스인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유가 독일로 도망간 위그노의 후손 중 하나다.
    • 남아프리카 공화국: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역으로 이주한 위그노도 존재한다. 유입과 함께 와인 제조업을 들여오게 된다. 다만 이들의 후손은 안타깝게도 네덜란드계 정착민과 같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역사적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 미국: 당시의 북미 식민지. 프랑스의 북미 식민지에는 정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뉴욕뉴저지를 포함하는 당시의 네덜란드 식민지나, 영국 식민지에 정착했다. 라 로셀에서 이주해온 위그노들은 현재의 뉴욕주에 마을을 만들었는데 지금의 뉴 로셀(New Rochelle)이다. 개신교도였기 때문에 프랑스계 혈통임에도 WASP과 통혼이 가능했다.
    • 영국: 왕위에 오른 오렌지공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의 장인과 기술자를 불러모으면서, 프랑스의 위그노들도 적극 영입해온다. 4만~5만명의 위그노들이 이주하며 잉글랜드 중남부에 정착했는데, 이들은 잉글랜드 방직산업과 유리 제조업을 발전시켰다. 런던에는 위그노 교회가 생겼고[8] 지금도 켄터베리 대성당에선 프랑스어 예배가 있다고 한다. 프랑스계 영국인 중에는 위그노 출신이 제법 있다. 통조림을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피터 듀런드 역시 위그노 후손이다.
    • 아일랜드: 윌리엄 3세를 도와 아일랜드에 반란을 진압한 대가로 더블린 일대에 정착했다. 지금도 이곳엔 프랑스어로 된 지명이 많다고 한다.

2.10. 박해의 끝


1760년대 위그노는 약 70만 명 정도로 줄었으며, 인구의 약 2% 정도를 차지했다. 사회적 위상은 크게 악화되어서 엘리트 층에는 위그노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프랑스에 남은 위그노는 대부분 고립된 지역에 거주하는 농민이었다. 이들 중 프랑스 남부 산골짜기 세벤(Cevennes) 지방에 숨어살던 위그노들은 '''카미자르(Camisards)'''라 불렸고 1702년부터 1710년까지 중앙정부에 저항했다. 비록 저항은 실패로 끝났으나, 세벤 지방의 위그노들은 이후에도 깊은 산 속에 숨어 살며 힘겹게 명맥을 유지했다.
1787년 11월 7일, 루이 16세는 베르사유 칙령(The Edict of Versailles)을 발표한다. 이 칙령은 비 가톨릭 교도에게 가톨릭 교도와 동등한 시민권과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었다. 이 칙령은 '관용의 칙령'(Edict of Tolerance)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법률가이자 정치인인 말제르브(Chrétien Guillaume de Lamoignon de Malesherbes)[9], 칼뱅파 목사이자 프랑스 위그노의 대표자 격이었던 장폴 생테티엔 목사(Jean-Paul Rabaut Saint-Étienne), 정치가이자 경제학자인 안로베르자크 튀고르(Anne-Robert-Jacques Turgot, Baron de Laune), 그리고 미국인 벤자민 프랭클린의 설득으로 제정되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낭트 칙령의 제정, 폐지와는 달리 별다른 관심을 못 받는데 이미 프랑스 혁명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1789년, 혁명 도중에 제정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으로 위그노의 권리는 확실하게 보장받게 되었다. 1790년 12월 15일에는 종교적 이유로 추방된 모든 프랑스 인과 그 후손이 프랑스로 귀국하여 스스로 프랑스 국민임을 선언한다면 프랑스 시민권을 얻을 수 있도록 귀환권을 보장하였다. 1889년 6월 26일에는 국적법으로 이러한 조치가 미래에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제정되었다. 맨 위에 있는 위그노 십자가(Croix Huguenote)도 이때 상징으로 채택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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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레지스탕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도 했었다.
1985년 10월, 낭트 칙령 폐지 3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전 세계의 위그노 교도와 그 후손에 대하여 공식적인 사과를 발표했다.기사
현재에도 프랑스개신교는 소수 종교이다.[10] 2010년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 중 8%만이 개신교도이다. 프랑스의 이슬람 교도의 수치와 거의 비슷하다. 사실 2010년대 기준으로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대부분 박해를 피해 온 흑인들이거나 이슬람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개종한 아랍계 이민자들이며, 백인 위그노의 후예들은 얼마 없다.
위그노가 8%대인 건 초기 위그노 수에 비해 적은 것은 아니다. 종교전쟁 시기에도 위그노 숫자는 10%미만 이었고 루이 14세 때 탄압으로 공식적으론 0% 선언이었고 18세기 루이 16세 시기엔 2%로 측정했다. 탄압을 거치면서도 버티다가 박해가 해제되어 프랑스로 다소 복귀하거나 숨긴 신앙을 선언하는 과정을 거쳐 지금도 비슷한 비율이 유지되고 있는 셈.
2013년 위그노파 교회는 루터파와 합동하여 '프랑스 연합 개신교회'(Église protestante unie de France)가 되었다.

[1] '서약의 동지들'이란 뜻으로 스위스 성립 시기부터 내려오는 스위스인의 별칭이다. 당시 개신교의 메카인 스위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시사하는 명칭이기도 하다.[2]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는 하느님과 돈을 둘 다 섬길 수 없다며 청빈(淸貧)을 강조했는데, 당연히 장사를 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이 중요한 부르주아 상공인 계급들은 깨끗한 가난을 주장하는 청빈교리에 대해서 엄청난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 그런데 '칼뱅은 부지런히 일해서 번 돈은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일 수도 있으며,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여 번 돈으로써 사회에 기여를 해야 한다.'라는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센세이션한 주장, 건강한 자본주의 생각을 주장한 것이다.[3] 네덜란드의 독립 영웅 빌럼 판오라녀의 마지막 부인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때 암살당한 위그노 지도자 가스파르 드 콜리니(Gaspard de Coligny)의 딸인 루이즈 드 콜리니(Louise de Coligny)었다. 당연히 네덜란드 독립 전쟁 때 많은 수의 위그노 신도들이 네덜란드군에 입대하여 싸웠으며, 위그노 문화는 개신교의 일파인 네덜란드 개혁교회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4] 네덜란드는 종교적으로는 확고한 개신교였으나, 골수 가톨릭이었던 스페인-독일 합스부르크 정권의 격심한 박해로부터 벗어나려고 합스부르크의 제1경쟁상대였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도리어 프랑스 개신교도에 대한 탄압을 지원했다. 특이하게도 프랑스는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을 고수해도 외교에 있어서는 상대국의 종교를 가리지 않았고.[5] 프랑스 대원수의 하나였고 30년 전쟁에서 활약한 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같은 사람도 위그노였다. 나중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6] 프롱드의 난은 스페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7] 브리태니커 백과사전[8] 지금의 소호에 있다.[9] 이 사람은 후에 루이 16세의 변호인으로 나서기도 했다.[10] 가톨릭은 50% 정도고 무신론 이신론 등 비종교인이 33%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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