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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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Willem III van Oranje / William III'''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 겸 나사우 백작. 네덜란드 공화국 내 실질 통치자(7개 주 총독) 겸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국왕.
영어 이름은 '''윌리엄'''(William)이지만 이름을 네덜란드어로 적을 때는 '''빌럼'''(Willem)이라고 적는다. 그리고 잉글랜드·아일랜드·네덜란드에서는 '''윌리엄(빌럼) 3세'''이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윌리엄 2세'''이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우연히 그 전에 윌리엄/빌럼인 군주가 두 명 있었기 때문에,[3] 사실상 영토나 마찬가지인 아일랜드에서는 잉글랜드에서의 표기를 그대로 썼기 때문에 세 나라는 3세로 일치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과거에 윌리엄이라는 이름의 국왕이 단 한 명 뿐이었기 때문에 윌리엄 2세가 되었다.[4]
2. 생애
2.1. 유년기
빌럼 3세(윌리엄 3세)는 1650년 11월 14일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오라녜 공 빌럼 2세[5] 와 잉글랜드의 왕 찰스 1세의 장녀 메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 빌렘 2세는 태어나기 직전에 천연두로 사망했고, 그의 어머니 또한 그가 10세가 되던 해에 사망했다. 한편 국가의 실권은 총리 요한 드 비트를 필두로 한 공화파가 쥔 상황이어서 그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총독 직을 그대로 이어받지 못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2.2. 네덜란드 총독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상황은 그의 외가[6] 인 잉글랜드에 의해 바뀌게 된다. 그의 외삼촌인 찰스 2세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도버밀약을 맺으면서 네덜란드를 위협하기 시작했고, 결국 찰스 2세와 루이 14세는 1672년 네덜란드를 침공했다.(제3차 영란전쟁) 네덜란드군이 초전에 프랑스군에게 대패하자 빌럼 3세는 이를 총리 요한 드 비트의 탓으로 몰아붙이는 정치공작을 했고, 결국 1672년 8월 21일 요한 드 비트는 총리직에서 해임되고 빌럼파 시민들에게 린치당해 처참하게 죽었다.이에 네덜란드의 많은 주가 빌럼을 곧바로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22세의 나이에 총독에 취임하게 된다. 1674년 찰스 2세가 본국에서 비밀협정 내용이 드러나고 재정적인 압박을 받게 되면서 곧바로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되었고, 루이 14세도 역시 전쟁을 지속적으로 끌고 가지는 못했다. 1678년 네덜란드의 프랑스는 휴전을 맺었으나 지속적으로 나쁜 관계에 있었다.
한편 1677년 불과 몇년 전 전쟁을 펼쳤던 외삼촌 찰스 2세의 정치적인 고려를 통해 그의 작은 외삼촌[7] 인 요크공 제임스의 딸 메리와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된다. 그러니까 '''메리 2세와 그는 부부지만 동시에 사촌간'''이기도 하다. 사실 이 결혼은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메리는 15살로 매우 어린 상황이었고, 빌럼은 20대이긴 했지만 벌써부터 총사령관으로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메리에 대한 관심이 덜했을 가능성이 높다.
네덜란드 해군의 명장이자 조선의 이순신에 비견할 만한 해군 제독인 미힐 데 로이테르가 바로 윌리엄 3세가 네덜란드의 빌럼 3세로써 통치하던 이 시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데 로이테르는 정치적으로 요한 드 비트 파에 속했기 때문에 결국 빌럼의 눈 밖에 나 무리한 작전을 강요당해 전사한 것까지 이순신과 비슷하다....
2.3. 잉글랜드 국왕 즉위
1685년 빌럼의 장인이자 작은 외삼촌인 요크공 제임스가 찰스 2세에 뒤를 이어 제임스 2세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런데 제임스 2세는 친가톨릭 정책을 펼치면서 국교도와 청교도가 많이 있었던 잉글랜드 의회를 불안하게 했다. 그러던 중 제임스 2세가 뒤늦게 아들을 낳게 되면서 그 아들이 가톨릭 왕자로 키워질게 뻔한 상황에서 다시금 피의 메리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우려한 잉글랜드 의회는 토리파 휘그파 할 것 없이 프로테스탄트였던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빌럼을 주목하게 되었고, 결국 빌럼에게 군대를 요청하게 된다.
빌럼은 1688년 11월 5일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 명예혁명으로 장인인 제임스 2세가 쫓겨나자, 아내인 메리 2세의 공동국왕 윌리엄 3세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치세 땐 네덜란드도 잉글랜드와 동군연합을 이뤘다. 부인인 메리 2세가 1694년에 사망하게 되면서, 윌리엄은 1702년 까지 단독재위를 하게 된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권리장전을 승인한다. 이 권리장전에 의해 잉글랜드 의회가 조세, 군대 조직 등을 관리하는 입헌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또한 1689년 5월 비국교도를 포함한 개신교 교도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는 관용법이 통과되었다. 사실 이것은 가톨릭 교도 국왕의 즉위를 극히 꺼린 잉글랜드 의회와 개신교도였던 윌리엄의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2.4. 잉글랜드 통치
20대의 나이에 총사령관이 되어서 잉글랜드 , 프랑스 연합군과 대적했을 정도로 타고난 무인이었던 그는 잉글랜드 내에 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모두 군사적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우선 스코틀랜드 곳곳에서 제임스 2세를 지지하는 반란들을 진압했으며,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제임스 2세의 군대들이 버티고 있던 아일랜드에 역시 군대를 보내 제임스 2세의 군대를 대파하면서 역시 아일랜드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게 된다.
대외적으로도 역시 군사원정을 펼쳤는데 무엇보다도 당시 최강국이었던 루이 14세의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게 된다. 루이 14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아우크스부르크동맹에 잉글랜드-네덜란드가 동시에 참가하게 되었고, 곧바로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물론 이 때 루이 14세의 위세가 대단했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전쟁을 펼치긴 했으나 루이 14세 역시 재정상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1697년 레이스위크 평화조약을 맺게 되고 여기서 루이 14세가 처음으로 윌리엄을 잉글랜드의 왕으로 인정하게 된다.
1700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죽고 그의 후계자로 루이 14세의 손자 펠리페 5세가 후계자가 되자 프랑스-스페인 사이의 통합에 대한 유럽 열강들의 반발이 심각해졌고, 1701년 제임스 2세 사후 루이 14세가 레이스위크 평화조약을 깨고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임명하게 되자 윌리엄은 곧바로 대동맹을 맺고 이른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전쟁을 준비하던 도중인 1702년 3월 우연한 낙마사고로 인해 폐렴에 걸렸고[8] 합병증으로 결국 사망하게 된다.
3. 기타
- 윌리엄과 메리 둘 사이엔 여러 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모두 요절했기에 월리엄 3세 사후 처제이자 사촌동생인 앤 여왕이 즉위한다. 사실 외조부인 찰스 1세를 통해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9] 을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메리 2세가 죽은 후 윌리엄 3세가 재혼해서 자녀를 보았다면 그 자녀가 왕이 될 수 있었겠지만[10] 그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문제로 오라녜 가문은 침묵공의 동생 가문이 대를 잇게 되었고[11] , 네덜란드와의 동군연합도 해체되었다.
- 자신이 죽고 나서 후계자가 될 예정이었던 처제 앤 여왕 또한 자식들이 모두 요절한 상태였기에, 후계 문제를 염려하여 왕위 계승법을 만들었다. 즉 가톨릭 교도는 절대 잉글랜드 왕이 될 수 없음을 못 박아놓아서 앤 여왕 치세 이후에 하노버 공국의 조지 1세가 즉위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 재위중이던 1696년 집에 있는 창문의 개수에 비례하여 세금을 걷는 '창문세'를 시행하기도 했다. 이 창문세는 15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 한편 아일랜드 섬에서는 주황(오렌지)색 = 개신교 상징색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윌리엄 3세 때 확립된 것이다. 주로 북아일랜드 내 강경파 개신교도들이 관여하고 있는 단체인 오렌지 오더(Orange Order)는 오라녜(오렌지) 공이었던 윌리엄 3세와 장인 제임스 2세와의 전쟁[12] 과 관련이 깊다. 그리고 현대 아일랜드의 국기에 들어 있는 주황색도 윌리엄의 추종자를 상징한다.[13]
[1] 홀란트·제일란트는 1672~1702, 위트레흐트는 1674~1702, 겔러·오버레이설은 1675~1702.[2] 1689년 2월 13일에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고, 1689년 4월 11일에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3] 잉글랜드의 경우, 정확히 말하면 더 있었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왕의 이름 뒤에 ~세라는 숫자를 붙이는 관행은 노르만 왕조 때 성립됐다. 따라서 노르만 왕조 성립 시기부터 따지면 이전까지 윌리엄이라는 이름을 쓴 국왕은 딱 두 명 뿐이었다.[4]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공동 국왕이었던 부인 메리의 경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각각 메리라는 이름의 여왕이 한 명씩 있었으므로(메리 튜더, 메리 스튜어트) 우연히 숫자가 '2세'로 일치하게 되었다.[5] 네덜란드의 독립을 이끈 오라녜 공 빌럼 1세의 막내아들인 프레데리크 헨드리크의 아들로 침묵공의 손자가 된다.[6] 나중에는 처가(...)가 되기도 한다. 둘째 외삼촌인 제임스 2세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7] 윌리엄의 모친인 프린세스 로열 메리는 찰스 1세의 장녀로, 찰스 2세의 여동생이자 제임스 2세의 누나이다.[8] 낙마로 늑골이 부러지면서 폐를 다치고, 이것이 폐렴으로 이어졌다고 한다.[9] 처제이자 사촌동생인 앤 여왕 바로 다음 순위였다.[10] 다만 의회와의 합의에 따라 윌리엄이 재혼해서 자식을 낳는다면 계승순위는 처제 앤의 뒤가 되는 걸로 정해졌다.[11] 현재 남아있는 침묵공 빌럼 1세의 직계(정확히는 여계) 후손은 프로이센 왕국 호엔촐레른 왕가 후손들이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의 어머니가 네덜란드 총독 가문 출신이며 침묵공 빌럼 1세의 직계 후손인 루이제 헨리에테 판 나사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엔 네덜란드의 살리카법이 폐지되기 전이었으며 네덜란드에서 살리카법이 폐지된 건 훗날 네덜란드 왕국 때의 일이었기 때문에 살리카법에 따라 침묵공 빌럼 1세의 방계 후손이 네덜란드를 통치하게 된 것이다.[12] 명예혁명이라고 했지만 아일랜드에서는 윌리어마이트 전쟁(또는 자코바이트 전쟁)이 치러졌다. 윌리엄 지지파(윌리어마이트)인 개신교도들과 제임스 지지파(자코바이트) 사이의 전쟁이기 때문에 이름이 이렇게 붙여졌다.[13] 녹색은 게일족 전통을 계승한 집단, 주황색은 윌리엄의 추종자들을 각각 상징하며, 가운데에 위치한 흰색은 이들 사이의 평화를 의미한다. 아일랜드 개신교도들의 일부가 항영독립투쟁진영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대표적인 인물이 울프 톤과 찰스 스튜어트 파넬), 이들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민족 진영이 자신들의 깃발에 주황색을 넣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