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프로이센 왕국 역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image]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가족

Friedrich Wilhelm III
생애 1770년 8월 3일 ~ 1840년 6월 7일
재위 1797년 11월 16일 ~ 1840년 6월 7일

1. 개요


프로이센 왕국의 제5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아들이자 '''능력은 충분했으나 하필 나폴레옹이랑 같은 시대에 살아서 저평가받는 바로 옆동네의 근성왕에 버금가는 안습왕.'''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전혀 사랑받지 못하고 컸으며, 성격도 매우 우유부단했다고 한다.

2. 생애


프로이센은 이전 1795년 바젤 화약 이후로 프랑스의 패권을 방관하고 프랑스의 오스트리아 견제용으로 마인 강 이북의 독일 지역 영향권을 인정받았는데 역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하노버를 점유한 탓으로 영국과 매우 적대적인 관계였다. 결국 신하들에게 등 떠밀려 선전포고를 하고 1807년 예나-아우어슈타트에서 나란히 박살이 나자 동프로이센 국경 영토 끝 틸지트까지 도망갔다. 여기서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의 중재로 나폴레옹에게 굴복하며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독일·폴란드 원정 참조). 결국 내각이 들어서고 전쟁 배상금 문제로 나폴레옹이 등용을 승인한 프로이센 초대 총리인 카를 폰 하르덴베르크가 재상이 되어 국왕 대신 실권을 갖게 된다. 나폴레옹은 "한심한 국왕, 한심한 군대, 한심한 나라"라며 코앞에서 그를 능욕했는데 패망한 처지라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후에 나폴레옹의 인물평으로는 무능하긴 하지만 인간성은 나쁘지 않다는 평.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때는 출정 전야식에서 독일 내 군주들을 대표하여 '''나폴레옹의 무운을 빌며 건배 선창을 외치는''' 안습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반프랑스 동맹을 지지하는 신하들이 나폴레옹과 전쟁을 하자는 주장을 무시하다가 결국 하르덴베르크가 러시아와 칼리시 동맹을 체결하고 국왕 대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여 프로이센은 반프랑스 동맹에 재참가하게 된다. 클라우제비츠를 비롯한 친내각파 군인을 앞세워 왕의 말을 거역하고 나폴레옹과 전투를 벌였고 이후 러시아 원정을 하고 온 나폴레옹을 역관광시켰다.
전쟁 후 유럽의 실권은 빈 회의에서 결정되었는데, 본인이 직접 빈 회의에 참석하긴 했지만, 역시 재상인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가 사실상 모든 실무를 대표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의 강한 영향력 아래 우왕좌왕했다. 결국 프로이센은 독일에서 상당한 영토 확장을 보장받았고 열강들에게 프랑스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아서 유럽 열강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그외에 슈타인 남작의 개혁과 베를린 대학교 설립, 샤른호르스트의 군제 개혁 등으로 국운이 다시 일어섰고. 후에 프로이센-독일 관세동맹을 성공시키고, 이게 훗날 독일 제국 성립에 영향을 주지만 자기는 관여한 바 없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알고 신하들을 등용하는 것도 군주의 능력이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군주일지도 모른다.
사실 본인이 특별한 능력은 없을지 몰라도 분명히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군주가 맞다. 단적인 예로 매우 호전적이고 교양이 없어서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에는 중용을 받지못한 블뤼허가 나폴레옹과의 싸움을 지속할 수 있도록 밀어주었다.[1]
또한 귀족이 아닌 샤른호르스트를 초빙하고, 육군 개혁안을 제출하며 그가 요구한 귀족 신분과 참모총장 직위라는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요구에도 그걸 받아들였다!
나폴레옹에게 개털린 이후 러시아 원정 전까지는 블뤼허 등의 애국파 및 개혁파들을 프랑스의 압력에 일시적으로 내쳤으나, 이는 당시 프로이센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프랑스군이 건재하고 프로이센군은 궤멸 상태인데 애국을 부르짖으며 러시아의 손을 잡고 싸웠다면 프로이센은 데파르트망이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에 동행한[2] 클라우제비츠가 탈영을 감행 후 러시아로 종군하였으나, 러시아 측 대표로 자국에 협상하러 온 그를 사면하고 사관학교의 교장으로 삼았다.[3] 블뤼허 및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등도 재기용했다.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꽤나 융통성 있고 유능한 인재들에게 관용을 베푼 편이었으니 본인이 무능하다고 해서 폄하될 만한 군주는 아니다. 결국 이렇게 중용한 인재들이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 이후 발전 없이 안주하던 프로이센의 군제를 개편하고 나폴레옹에게 최후를 안겨주는데 일조한 셈.
나폴레옹 전쟁 후 치세 25년은 별 볼일 없었다. 개혁 군주가 될 뻔했지만 개혁의 주체들이 혁명 사상에 영향 받아 자코뱅주의로 변질될까봐 극히 두려워했고 신하들을 불신했다. 자신의 멘토(?) 알렉산드르 1세가 자유주의 성향이었다가 말년에 전제정치로 복귀한 것과 판박이.

3. 여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밀덕이다. 나폴레옹에 쳐발리고 항복한 다음 프랑스과 프로이센 높으신 분들끼리 식사를 하다가 나폴레옹 옆자리에 앉았는데 대화 중에 군대 장비 얘기가 나왔다. 군국주의 국가의 국왕으로 군용장비 스펙에 대해 좔좔 설명을 하면서 나폴레옹보다 더한 지식을 뽐내서 나폴레옹이 깜놀했다고 한다. 물론 군사학이나 전술에 대한 지식은 커녕 지휘 자체를 해본 적이 평생 없었다.[4]

4. 가족


[image]
재위 중에는 국민들에게 얼짱으로 알려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출신의 루이제 왕비[6]가 더 인기가 많았다. 1793년 결혼하여 루이제 왕비의 명성(?) 때문에 프로이센이 탈탈 털리고 나서 평화협상 중에 프로이센은 영토의 절반 이상과 과중한 배상금을 물게 되었는데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남자인 자신보다 여러 차례 여자들에게 베갯머리 송사로 호구를 잡힌 경험이 있는 나폴레옹이라 남자보단 여자가 협상 상대로 유리하다 생각하고 루이제 왕비를 보내 간청하려 보냈다.[7] 나폴레옹도 호기심으로 왕비를 만나 보았지만, 협상에선 칼같이 요구사항은 다 관철시켜서 미인계는 통하지 않았다는 후일담이 있다.
이후 루이제 왕비 사후 Auguste von Harrach라는 백작영애와 재혼하였는데 귀천상혼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프로이센의 왕비가 아니라 호헨촐레른 여백작에 봉해졌다.

[1] 쿠투조프가 개고생할 동안 황제가 훼방만 열심히 놓은 옆 나라랑 심히 비교된다.[2] 나폴레옹의 강제 차출이지만...[3] 결과가 좋았다고 한들 엄연히 왕의 말을 씹고 한 행동이므로, 당시 기준으로 보면 이건 명백한 탈영 및 적국에 대한 종군이다.[4] 마틴 판 크레펠트 <전쟁 본능>에서[5] 스웨덴, 노르웨이로비사 왕비의 어머니다.[6] 참고로 고모가 조지 3세의 왕비인데 이로 인해 루이제와 루이제의 여동생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아내로 고려되었지만 떨어진다. 조지 4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조지 4세의 막장성(...)을 고려하면 잘된 일.[7] 이미 나이도 서른이 넘고 '''10차례''' 출산한 상태라 꼭 그 의도(?)로 간 건 아니다. 남편보단 이쪽이 인간적 매력이 좀 더 있어서 이미 강화 조건은 정해진 후에 이벤트성으로 보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