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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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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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개요
Kaiser Wilhelm I
1797년 3월 22일 ~ 1888년 3월 9일(만 90세 총 33225일.)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
2. 즉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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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년 왕자 시절의 빌헬름 1세.
1797년 3월 22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왕국의 전통에 따라 어린 나이부터 프로이센군의 장교로 복무하며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군과 맞서 싸웠고, 이후 평생을 군인으로 보내다가 2살 위의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아들이 없어서 후계자가 되었다.
1848년 3월 혁명 때는 강경 진압을(대포로 진압을 명령) 주장해서 '총알 왕자(또는 포도탄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혁명군의 살해 위협에 영국으로 망명하기도 하는데 이 당시 역시 강경 진압을 부르짖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눈여겨보게 된다. 당시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즉위 전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고, 군주제 주의자와 반동 복고 세력의 바람과 따로 놀았는데 혁명이 터지자 진압에 주저하고, 혁명군에 사로잡혀 굴복하게 되자 융커들을 비롯한 보수 반동 세력의[1] 많은 인사들이 겁많고 나약한 국왕에 실망하고 왕세제 빌헬름 왕자에 주목하게 된다. 결국 혁명이 나가리되자 다시 프로이센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혁명 이후 외교적으로 오스트리아의 독일권 내 주도권 주장에 굴복하는 등 실망스런 통치 기간을 보냈고 결국 60세가 되는 해(1857년)에 정신병이 발작해서 통치가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빌헬름 왕자는 형을 대신해서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후 1861년 왕위에 올랐다.
3. 통치
즉위하자마자 평소의 지론대로 군대를 강화하려고 했고, 이에 따라 징병제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는 예산 문제로 하원과 충돌하자[2] 퇴위를 불사하며 평소 눈여겨 본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전격 기용하였다. 당시 프로이센의 정치 체제를 보면 "의회는 그저 세금을 내는 부르주아들의 푸념이나 들어주는 역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왕권이 하원과 충돌하니 '''"아랫것들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왕 못 해먹겠다."'''라고 몽니를 부린 것. 이렇게 임명된 비스마르크는 유명한 철과 피 연설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의회의 예산권을 대놓고 침해하고 군대 예산을 늘렸는데, 이것이 가능한 건 역시나 총리는 오로지 국왕에게만 책임을 지지 의회 따위와 수직관계가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외 군주제 전통에 길들여진 의회에서 더이상 강한 충돌을 원치 않아서이기도 했다.[3]
어쨌건 국내외의 반발을 무시하며 강력한 육군을 만들었다. 다만 대외 정책에선 빌헬름 1세와 다른 구상을 하는데 1862년 덴마크 위기 때는 독일 연방 의회에서 민족주의를 자극해서 덴마크를 털었는데, 이는 '''민족주의란 아랫것들의 상스러운 불순사상'''이라 생각하는 빌헬름 1세의 지론과 다른 것이었다. 빌헬름은 18세기 태생으로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며 성장한 데다가, 평생 군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아랫것들이 입헌이고 자유고 민족주의고 뭐고 걍 정치 사상 자체를 가지는 것을 금기시했다. '왕권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이 통치자에 수여한 것이요(왕권신수설) 왕은 하느님에게 수여받은 왕권으로 통치하고 신민은 복종해야 한다' 같은 게 그의 지론이었다.
1866년 오스트리아와 독일 내 주도권을 놓고 갈등이 빚어지자, 프로이센 왕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 황제의 선봉장 역할이나 해야 된다는 지론덕에 비스마르크가 너무 막 나가는 걸 자제시켰으나, 역시 또 현실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격파하고나자 생각이 바뀌었는지(...) 빈까지를 공격하고, 영토 할양을 꼭 받아내야 하며 또한 이겼으니 승자의 권리로서 빈에서 개선 행진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비스마르크가 밥통 싸들고 반대하자 뜻을 꺾는다. 이 결과 북독일 연방을 조직하였으며, 이 정도로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1868년부터 프랑스와의 갈등이 심각해져서 역시 전쟁엔 소극적이었으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나폴레옹 3세를 관광, 결국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올렸다.
빌헬름 1세는 황제 자리나 독일 민족 통일 따위는 아무 흥미가 없었고, 오로지 프로이센과 군대만이 그의 관심사에 있었다.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도 독일 내 복수 주도권(Dual power) 정도면 충분하다고 만족했지 오스트리아를 아예 배제하려는 것은 그의 구상과 거리가 멀었다. 폭도떼의 나라(?) 프랑스를 쳐바른 건 그도 원하던 바였으나, '''황제 자리는 전혀 원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의 설득이 잘 먹히지도 않아서 비스마르크가 뒷공작으로 독일 제후 중 빌헬름 1세와 친한 바덴 대공이[4] 직접 빌헬름에게 황제 자리에 올라달라고 요청한 데다가 30여개 군주국 군주들이 직접 와 있었기 때문에, 내키지 않았지만 황제 추대에 화답한 것. 사실 황제 자리도 '독일의 황제(Emperor of Germany)'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그런 식이면 구성 제후국들의 군주들이 얄짤없이 신하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수용하지 않을 거라는 비스마르크의 설득 때문에 독일 황제(German Emperor)가 수여된 것.[5]
실제 그는 취임식 아침까지 비스마르크에게 독일 황제(German Emperor) 자리는 타국 군주가 오면 의전상 각국 왕실 근위 연대 소속으로 수여하는 '명예 대령'직에 불과하며(...) 자신의 관심사는 프로이센 왕국, 프로이센 군대 뿐이며 칭제 선언으로 프로이센이 없어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처럼 비스마르크와 항상 뜻이 일치한 것은 아니며 갈등도 있었지만,[6] 빌헬름 1세는 자신보다 비스마르크가 나라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하에게 맡기는 인내심을 보여줘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몇몇 경우에서는 빌헬름 1세의 의견이 더 옳았던 것으로 훗날 판명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사이가 안 좋은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동유럽 외교 정책에서 두 사람은 크게 대립하였는데, 이 외교 정책은 '''비스마르크이기에 할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곧 '''비스마르크가 없으면 유지될 수 없다'''는 소리.
자세히 설명하자면 지금은 상상하지 힘들지만 본래 독일과 러시아는 '''굉장한 우호관계'''였었다. 프로이센을 구원해준 독빠 황제로 유명한 러시아 표트르 3세부터 시작해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둘은 연합군이었으며 황실끼리도 관계가 굉장히 깊었다. 당장 러시아 역사상 손꼽히는 명군주인 예카테리나 여제도 독일에서 시집 온 여자다.
그러던 와중 러시아가 오스만을 격파하고 발칸반도로 세력을 넓히게 되는데 이에 오스트리아와 영국이 반발하여 갈등을 빚게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스마르크가 스스로 중재자를 자처하며 베를린 회의가 열린다. 이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는 당연히 독일이 러시아편을 들어줄 것이라 잔뜩 기대를 했으나 기대와 달리 독일은 앞서 언급한대로 중재자라는 애매한 위치를 고수했고 이는 러시아에게 있어서 곧 배신이라 여겨졌다. 러시아 황실은 엄청나게 분노해 독일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편지까지 보내며 지금까지의 우호적인 대독일 외교관계를 상당부분 수정하여 재정립 하는 수순까지 이르렀으며 비스마르크는 이에 대비해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추진하게 된다.
그래도 비스마르크가 직접 활동하던 시기에는 분노한 러시아를 살살 달래가며 최소한 적대관계로 돌아서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만 이미 위에서 언급 되었듯 이는 시스템이 아니라 비스마르크 개인의 능력에 의존한 것이었고 비스마르크 사후에 작동할 시스템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본인이 사라져도 후대까지 잘 작동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바로 재상으로서의 임무인 만큼 이 점에서 비스마르크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결국 이후 손자 빌헬름 2세가 즉위하고 비스마르크를 내쳤는데, 이때부터 독일과 러시아는 오랜 우호관계가 파탄나고 본격적인 적대관계로 돌변하여 마침내 결과는...게다가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와는 달리 오스트리아를 제 앞가림 못하는 과대 평가된 나라라고 지적하며 과연 러시아 대신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는게 옳은 선택인가 의문을 표시했고 이 점에선 빌헬름 1세가 옳았음이 1차 대전에서 입증되었다. 참고로 빌헬름 1세는 공적 관계에서 신뢰한 것과는 별도로 개인적으로는 비스마르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4. 기타
33세 때 14살 연하인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7] 결혼이 늦은 건 자신의 육촌인 폴란드 귀족 출신엘리자 라자비우과 결혼하고 싶어했는데 신분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반대하여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폴란드는 망해서 나라가 없어졌기는 한데 프로이센은 다름 아닌 그 분할의 당사자이자 그 분할된 영토를 차지한 수혜자인데...(...)[8]
무려 90세까지 장수했다. 이는 서구의 남성 군주 가운데 무슨 공국, 대공국, 자치령 등의 군소국 군주를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 산 것이며[9] 근대 이후 남성 군주 가운데서는 세계에서 가장 장수한 것이다. 하지만 선왕의 아들이 아닌, 동생으로서 즉위했던 만큼 늦게 즉위하여 나무위키의 실제로 장수한 왕들에는 오랫동안 없었다. 소국을 제외하고는 엘리자베스 2세가 만 98세를 넘겨 기록을 경신하여 현재 진행형이고, 동시대를 살았던 프란츠 요제프 1세(87세)가 3등이다. 아시아에선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88세까지 열심히 추격(?)하다가 2016년 10월 13일에 사망했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수명이 매우 연장된 현대에도 이렇게 90세까지 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장수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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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가 한 사진에 담겨있는 모습. 그러니까 빌헬름 1세가 안고 있는 갓난아기가 증손자다. 다시금 말하지만 언제 인물이냐면 나폴레옹 1세 시대의 인물이다. 삼촌과 그 조카와 모두 맞서 싸웠을 정도니...[10] 프랑스의 전성기와 몰락 그리고 신흥 강국인 독일의 부상이라는 산업 혁명과 궤를 같이 한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순환을 모두 살아서 목격한, 말 그대로 역사의 산 증인이다! 98세까지 장수한 고구려의 장수왕을 연상케 하는 수준.
후임은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아들 프리드리히 3세였으나 99일만에 후두암으로 죽고[11] , 혈기왕성한 손자 빌헬름 2세가 29세의 나이로 뒤를 잇는다. 참고로 빌헬름 2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독일 통일을 빌헬름 1세의 업적이라며 전국 각지에 동상을 세우고 대제(大帝, Der Große) 칭호로 높혔으나, 독일인들은 다 누구의 공적인지 잘 알고 있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여담으로 오늘날 독일에서 프로이센 군주 중에 Der Große(大) 칭호를 사회 전체적으로 인정받은 사람은[12] 대선제후(大選帝侯[13] )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프리드리히 대왕 정도 뿐이다.
[1] 이 당시 보수세력은 경제적 자유 주의(Laissez-faire)와 오히려 반대 입장이다 토지 귀족들은 고관세 국가 개입주의다. 당시 이들에게 입헌 국민주권 민족주의 자유주의 등은 불순 사상이다.[2] 사실 징병 기간도 문제지만 예비군 지휘를 현역 장교에게 맡기는 문제가 더 컸다. 예비군들에게 반동 정치 성향을 강요할 우려가 있다하여서... 군 병력 증강은 오래부터 제기된 문제로 인구가 1815년보다 많이 늘어서 편제를 늘려야 된다는 데는 부르주아들도 공감은 하고 있었다.[3]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이런 독단성은 이후 반대파와 대중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를 떨어뜨리는데 한몫 한다.[4] 1848년 혁명 진압시 바덴 대공의 요청으로 6개월간 바덴 대공국에서 프로이센 군대가 체류한 적이 있는데, 이때 친구가 되었다.[5] 독일 황제 자리는 프로이센 국왕이 세습하지만 소국 제후와 프로이센의 법률적 위치는 제국 내에서 동일했다. 황제, 황후, 황태자, 황태자비는 있지만 나머지 프로이센 왕실 구성원은 프로이센 공 (Prince of Prussia/Prinz von Preußen)이라는 작위를 받았지 독일 공 (Prince of Germany/Prinz von Deutsches)는 아니었다. 여담으로 한국어로는 Emperor of Germany와 Emperor of the Germans, German Emperor 모두 독일 황제를 의미하나 엄밀히 따지자면 Emperor of Germany는 독일 (지역)의 황제, Emperor of the Germans는 독일인의 황제, German Emperor은 그냥(?) 독일 황제(...)를 의미하며 당연히 Emperor of Germany와 Emperor of the Germans가 German Emperor보다 격이 훨씬 높다. 여담으로 독일 황제 (German Emperor) 이전의 유럽의 황제들의 경우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Emperor and Autocrat of the Romans (로마 인의 황제 겸 전제군주), 그런 동로마 황제들을 계승한 러시아의 황제들은 Emperor and Autocrat of All the Russias (러시아 전역의 황제 겸 전제군주), 프랑스 황제들은 Emperor of the French (프랑스 인의 황제), 오스트리아 황제는 Emperor of Austria (오스트리아의 황제)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Holy Romam Emperor 또는 German-Roman Emperor으로 알려진 신성 로마 황제의 공식 명칭 역시 Emperor of the Romans (로마 인의 황제)이었으며 심지어 1848년 혁명 당시 독일 혁명을 주도한 혁명파에서 빌헬름 1세의 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바쳤다가 거절당한 제위도 독일인들의 황제(Emperor of the Germans)였다. 이러니 당연히 빌헬름 1세의 입장에선 자신에게 주어질 독일 황제 (German Emperor)라는 칭호는 별 의미없는 직책이라고 생각할만 했다.[6]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조회 불출석(...) 등 초강수도 서슴지 않았다.[7] 역대 프로이센 국왕 중에서 (첫) 배우자와의 나이 차이가 가장 많다.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는 마지막 부인과 '''28살''' 차이였지만 이건 3번째 결혼이라...참고로 아들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황후는 10살 차이였고, 손자 빌헬름 2세와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황후는 1살(연상연하 커플) 차이.[8] 물론 이는 아무리 엘리자가 귀족이라도 엘리자의 가문이 폴란드의 왕족(통치가문)이 아니라 평범한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독일계, 러시아계의 귀천상혼은 통치가문-일반귀족-평민으로 급이 나뉘어있다.[9] 필리프 에른스트(1663년 ~ 1759년)라고, 호엔로헤발덴부르크실링스퓌르스트의 제후가 96세까지 산 경우가 유일한 예외다.[10] 다만 나폴레옹 1세와 맞서 싸웠을 때에는 10대의 어린 나이였다.[11] 아버지가 워낙 오래 살아서 그렇지, 이미 57세였으니 요절은 아니다.[12] 즉 한국의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 처럼.[13] 황제를 선출하는 제후이므로 諸侯가 아니라 帝侯라고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