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후중상설

 

독일어 : Dolchstoßlegende(등 뒤에서 칼 찌르기)
영어 : Stab-in-the-back myth
한국어 : 배후중상(背後中傷)설
[image] [image]

'''Die deutsche Armee ist von hinten erdolcht worden.'''

독일의 군대는 배후의 적에게 당했다.

1. 개요
2. 배경
3. 현실
4. 결과
5. 매체에서
6. 타국의 유사 사례
6.1. 프랑스
6.2. 일본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독일에서 떠돌던 정신승리음모론. 독일은 사실 전투에서 지지 않았으나 유대인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병역기피, 탈영, 파업선동, 간첩질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는 인지부조화적 음모론이다. 비수를 뒤에서 맞았다는 뜻의 '''비수 전설'''이라고도 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잘 되면 내 덕! 망하면 네 탓!"[1]임은 어디서나 있는 말이라 색다를 것도 없지만 이 도시전설은 반유대주의, 나아가 나치당이 정권을 잡아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는 원동력이었다.
구체적인 어원은 1차 대전 전범인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전범 체포를 면하기 위해 해외로 망명해서 가졌던 미국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그는 1차대전 당시 독일 육군 참모 차장이자 군수 총감으로 실질적인 독일군의 최고 지휘관이자, 상관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황제 빌헬름 2세허수아비로 만들고 경제 사회 전 분야에서 전권을 휘두른 독재자였다. 당시 기자가 취재를 마치고 인터뷰 내용을 확인하며 "그렇다면 이것은 '''등 뒤에서 칼에 찔렸다는 뜻입니까?'''"(Sie meinen, Sie seien '''in den Rücken gestochen worden?'''")라고 하자 루덴도르프가 '''"내 말이 바로 그거요!"'''라고 한 대답이 널리 퍼지면서 정착되었다.

2. 배경


이 음모론이 나온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거시적인 상황'과 민중의 '미시적인 개인의 인식'의 괴리 때문이다. 후대가 아는 전체적인 지식과 당시 개인의 삶 속의 지식은 차이가 있고, 그것 때문에 배후중상설이라는 괴담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당시 동부전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러시아 제국에 개박살이 나면서 붕괴 직전이다가 타넨베르크 전투로 한숨을 돌렸고 이후 1915년부터는 전과를 확대해서 오히려 러시아 제국 깊숙히 진격했다.
또한 서부전선은 독일군의 초기 전과로 알자스-로렌을 제외하면 프랑스, 벨기에 영토 안에서 전선이 형성되었다. 서부전선이 답도 없고, 끝도 없는 지옥같은 참호전으로 변해서 4년을 질질 끌면서 독일의 모든 물자가 바닥나고, 1917년과 1918년 겨울에는 매일마다 아침 점심 저녁 '''순무를 갈아서 순무에 발라먹고 찍어먹는''' 안습한 상황[2]이었다.(...)
독일 제국은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동부전선의 전투를 끝내고, 여기서 빼온 예비부대와 자원으로 1918년 서부전선에서 5번에 걸쳐서 대공세(루덴도르프 공세)를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오히려 미군 병력이 본격적으로 들어오자 압도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한계에 달한 독일군은 1918년 9월 발칸 전선에서 동맹국 불가리아가 붕괴해도 속수무책, 동부전선의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전쟁을 포기했고, 서부전선도 군데군데 숭숭 구멍이 나면서 탈영병이 속출, 최후의 방어선으로 여긴 '힌덴부르크 선'까지 무너지면서 군부는 민간 내각에 협상국에 휴전을 요청해 달라고 통보한다. (사실상 항복)
당시 군부독재 체제였던 독일은 정보가 통제받던 탓에 '''내각총리조차''' 막장테크 탄 9월에 가서야 이런 상황을 보고받았다. 그 전까진 러시아의 항복 덕에 '''전쟁에서 이긴다고 생각했다'''(...). 협상국은 휴전 요청을 사실상 항복으로 받아들이고, 휴전 협상 선결 조건으로 전쟁 이전 독일 국경까지 군대를 자진해서 퇴각하며 전범으로 찍힌 군부빌헬름 2세 대신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은 민간 내각하고만 협상하겠다고 통보했다. 황제는 퇴위하고 공화정이 선포되었으며, 전쟁 전 선거에서 의회 다수당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졸지에 군부가 싸놓은 똥을 치우는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민간과 군부는 정보과 괴리되어 있었고 중요한 점으로서 '''독일 본토'''는 전쟁터가 아니었다. 라디오 방송과 국가의 발표는 독일군이 연전연승을 거두거나 힘든 싸움을 하고 이겼다는 선전들로 가득했다. 허황된 거짓말이었지만 민간, 심지어 고위인사들까지 의심치 않은 말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독일 국민들 중 상황을 안 좋게 보는 이들조차 "독일 안에서 전투가 없네?? 우리가 아직 지지 않았군." 이라고 현실을 오판하고 있었다. 패배를 알만한 이들도 패배를 체감할 시간은 전혀 겪지 않았다.
독일 국민들은 전황이 좀 나빠졌지만 독일 내부상황이 아직 버틸 만하다고 생각했고, 휴전 요청하다가 갑자기 혁명이 일어나면서 정부가 바뀌어 "우리가 졌다. 항복 선언하겠음." 이라고 나오니 국민들은 "아니, 항복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라고 격하게 반발했다. 국민들은 패배를 부정했고 내부의 배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태를 만들었다고 아우성이었다. 사회민주당 안에서도 국민들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리고 민간정부 내각이 이후 어떨지 심각하게 우려했고 사회민주당 당수였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정파의 이익보다는 독일을 위해 고민 끝에 결국 이 역할을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는 협상국의 실수도 한몫했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을 발효하고 나서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군대는 휴전 협상 뒤 평화협정을 하기 전 독일이 딴 마음을 못 품도록 북해 항구를 봉쇄하고 지상군은 라인 강까지 진격했으며 소련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파기했다. 전쟁이 끝났지만 1918~1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사이 독일 국민들은 휴전 이전처럼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고 곳곳에서 바이마르 공화국부르주아 체제라며 거부하고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체제 수립을 주장하는 로자 룩셈부르크 등 공산주의자들의 봉기와, 이를 진압하려는 집권 중도좌파 사회민주당과 우익 민병대[3]들이 내전을 벌이면서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다.
베를린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를 진압한 직후 1919년 1월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중도좌파~좌파)-가톨릭 중앙당(중도우파~우파)- 독일민주당(중도~중도좌파)의 흑적황 좌우 대연정은 76.2%의 지지를 얻으면서 독일에서도 민주 공화 체제가 정착한 것 같았지만[4]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의 조건을 통보하면서 전 국민적인 반발이 터져나왔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프랑스가 독일이 못 갚을 만큼 지나친 배상금을 요구하자 독일에서는 물론 같은 협상국이었던 영국미국에서도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독일 국민들은 휴전이라고 해서 프랑스에 알자스-로렌 정도 떼주고 합리적인 수준의 평화안을 체결하리라는 희망을 품었는데 프랑스벨기에에 대한 영토 할양도 모자라서 전쟁의 당사자도 아니었던 폴란드[5], 체코슬로바키아[6], 덴마크[7] 등에도 영토를 바치는 데다가 모든 전쟁 책임을 독일에 몰아붙이고, 독일을 거덜내며 몇 세대에 걸쳐 갚아도 모자랄 천문학적 수준의 배상금이 나오자 그만 정신줄을 놔버렸다. 그들은 휴전과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인 정치인들을 11월의 범죄자(November­verbrecher)라 부르며 비난했다.
사실 전쟁기간 내내 해상을 봉쇄당해 대다수 국민들이 순무만 먹고 살며, 어린이들은 의약품 부족으로 죽어가고 전선의 병사들은 영양실조로 스페인 독감에 걸려 픽픽 쓰러져 가는 판국에서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들이라면 독일이 이기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장군들조차도 진지하게 이 전설을 믿지 않았지만 휴전 직후 패전 책임을 묻기 위한 법정을 열려는 시도를 의회에서 제기하자 힌덴부르크가 직접 "우리는 전선에서 지지 않았다. 전쟁에서 패한 까닭은 오직 후방의 반란뿐이었다." 고 주장하면서 강경하게 대응하여 법정의 성립을 무산시켰다.
게다가 베르사유 조약에서 전범 800명 인도 조항에 황제와 군부 인사들이 들었는데, 전쟁 책임이 컸던 군부 인사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배후중상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여기에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으로 정신줄을 놔버린 일부 독일인들이 협상국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이 군부 인사들을 영웅으로 띄워준다.
그리고 정치계에선 우익세력이 독일 정치의 큰 축이었던 사회민주당을 공격하려는 수단으로 썼다는 평가가 유력하다.[8] 전쟁 이전 구체제에서 주류였던 우익 세력은 민중봉기로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들어서자 찬전/반전 논쟁 시기 이전에 독일 공산당과 같은 정파였던 사회민주당에게 초록동색이라고 몰아붙였다. 이 때 힌덴부르크 등의 군부 지도부나 보수파들은 헛소문에 휘둘린 쪽이 아니라 소문을 주도한 쪽이다. 실제로 힌덴부르크는 백일 전투 직후 독일군에게 재기의 여력이 없었음을 잘 알았다. 다만, 자신이 군인으로서 항복과 패전의 책임을 지는 것이 싫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각에 사실상 항복인 휴전 요청도 부관이었던 빌헬름 그뢰너 장군에게 위임시켰다.
독일은 1차 대전 이전에도 사회주의가 성행했고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일이 항복하는 계기인 킬 군항의 반란은 농민들과 결합하면서 사회주의적 성향이 셌다. 독일 혁명까지 시도했던 독일 공산당의 전신 스파르타쿠스단의 칼 리프크네히트나 여성 사회주의자로서는 가장 유명한 축인 로자 룩셈부르크 등이 이 시기의 인물이다.[9] 결국 이들에게 전쟁의 원인이자 패전의 주역으로 몰릴 위기였던 보수우익들이 오히려 사회주의 세력에 건 역공이 바로 '등 뒤의 칼에 찔렸다!' 라는 이론이고 이 시기 거대 자본은 초기에는 전통적 보수파인 힌덴부르크를, 이후에는 나치를 지원하면서 좌파사회주의 세력을 제거하러 노력한다. 좌파 세력도 급진파(독립사회민주당, 공산당)와 온건파(사회민주당)로 나뉘어서 온건파가 세력을 쥔 뒤 급진파들을 무력으로 탄압을 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을 저지하던 시점이라 효과는 만점이었다.
그 결과 1920년에 열린 총선에서 흑적금 좌우대연정의 지지율은 반토막 이상이 나 버렸다. 76.2%에서 35%까지 줄었다.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사회민주당은 첫 총선에서 40%에 가까운 지지를 얻었으나 이후 20%대의 정체한 득표율에서 왔다갔다한다.

3. 현실


그러나 경제력 1위였던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거의 끝났다. 미국의 경제력은 2위 독일, 3위 영국[10], 4위 프랑스를 더한 것보다 컸고[11] 1917년 독일 제국의 GDP는 미국의 35.6%에 불과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증원 병력과 물자가 쏟아지고[12], 동부전선에선 러시아를 패배시켰지만 동맹국들이 몽땅 털리면서 독일이 이길 방법은 아예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 특히 프랑스는 인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나라가 거의 거덜이 났지만 미국 덕에 배는 곯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영국도 전비는 바닥이 났어도 미국 참전 전에도 이미 여럿에서 재정적으로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영국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영연방 국가와 인도 등의 해외 식민지에서 병력과 물자를 충원받아[13] 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했고, 프랑스는 경제적 파탄은 피할 수 없었지만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식민지 등에서 물자와 병력을 징발하여 적어도 인력손실은 어느 정도 메꿀 수 있었다. 또한 두 나라 모두 서부전선만, 그것도 각각 절반씩만 맡고 있어서 청년층은 무수히 죽어나갔지만 역설적으로 독일에 비해 전쟁비용은 덜 들어갔다.
반면에 독일은 해외 식민지가 얼마 없었고[14] 그나마도 영국이 제해권을 장악했으니 식민지에서 독일 본토로의 인력과 물자 수송은 도 꾸기 힘들었다. 그나마 있는 식민지도 아프리카의 토고, 카메룬, 나미비아, 탄자니아와 태평양의 섬 몇 개 정도로 뽑아먹는 것보다 유지비가 더 나가는 곳들이었다. 독일의 경제력은 거의 100퍼센트 국내의 공업 생산과 내수 시장으로 발전한 것이지, 식민지 수탈로 얻은 게 아니었다. 역으로 보면 세계의 30퍼센트를 지배한 대영제국과 역시 식민지가 넘치던 프랑스가 연합해서 식민지가 거의 없는 독일 상대로 4년간 겨우 대등하게 싸우고 미국이 개입하고서야 승리했을 정도로 식민지의 효율이 개판이었고 독일의 내수 체급이 강했다는 뜻이지만.[15]
거기에 빌헬름 2세 즉위 이후 안습한 외교는 한때 프랑스를 국제 왕따로 만들던 독일을 오히려 국제 왕따로 전락시켰으며 그나마 친구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은 상태가 나빴고 이탈리아 왕국은 배신까지 때렸다. 사실상 독일은 가진 능력을 전부 발휘해 최선을 다해 싸운 축이다.
하지만 사방이 고립된 상태에서 장기간의 전쟁으로 독일의 식량 사정은 나날이 나빠져 전국민이 굶주렸고, 대전공업 생산은 한계에 달한 데다 극심한 병력 소모와 사기 저하로 군은 붕괴 직전이었다. 1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군은 더이상 군수물자를 생산할 수 없었고 제공권과 재해권은 연합군이 장악했으며 병사들 먹일 식량도 바닥난 상태로 전선이 붕괴되고 있었다. 연합군으로 참천한 미국이 풍부한 물자와 최신 무기로 무장한 미군이 한달 간격으로 25만명을 참전시키면서 병력우위도 깨져 사실상 독일군 궤멸이 확정되었다.
독일 11월 혁명의 도화선인 킬 군항의 반란은 이런 상황에서 승산도 없으면서 상층부에서 내려진 자멸적인 출격 명령에 일선 수병들이 반발하고 여기에 굶주린 노동자들이 결합하여 난 사건이었다. 만일 독일인들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 사건은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그냥 진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지역의 반란이 겨우 이레 만에 전국을 휩쓸고 황제가 도망갔다. 11월 4일에 킬 군항 수병 반란이 있었고 11월 7일에 전국적인 공화국 선언이 있었으며 11월 9일에는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불과 1주일 만에 자연발생적으로 독일 전역이 뒤집혔다.''' 전쟁을 포기한 것은 일반 독일 국민들의 분노가 한계에 다다라서였다. 하지만 패전 후 책임을 피하려는 군부와 우익들의 선동에 베르사유 조약으로 민족감정이 격앙되면서 독일인들은 배후중상설을 믿기 시작했다.
배후중상설에서 내부 배신자로 지목된 것은 좌파 사회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사회주의자(사민주의자 포함)는 대체로 1차대전에 협력했다. 무엇보다도 좌파사회주의 세력의 중심인 사회민주당은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런 행위를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짓고 로자 룩셈부르크 등 강경파들이 뛰쳐나왔으나 대중적인 영향력은 적었으며, 1차대전 당시 일부 강경파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들의 전쟁이라면서 전시 협력을 거부하고 탈영 데모 파업을 했지만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규모가 미미했다.
[image]
배후중상설에 반박하여 대응한 유대인 단체의 포스터.
유대인들도 배신자로 거론되었다. 이 음모론을 해명하기 위해 독일내 유대인 단체에선 독일 국민 평균보다 유대인의 참전율과 전사율이 더 높다고 홍보했다. 당시 독일의 인구 1% 미만인 60만 인구 중 10만명이 참전해 1만 2천명이 전사했고 78%가 전방에 갔다. 더구나 독일 제국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프로이센 왕국에서는 유대인은 장교 입대도 불허했고 병사 입대만 허용했다. 그래서 당시 독일 제국군 내에 있던 유대인 출신 장교는 바이에른 왕국과 같은 다른 제후국 소속이었다. 한 예로 히틀러철십자 훈장을 추천한 유대인 장교로 이름이 알려진 후고 구트만은 바이에른 왕국군 출신이었다. 당시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유대교를 믿는 독일인이라고 생각했지 단 한번도 이방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1차세계대전 당시 조국 독일을 위해서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음모론자들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나치를 포함한 우익들은 밸푸어 선언까지 붙여 "유대인들은 영국이 약속한 유대 국가를 건국하기 위해 독일의 패전을 사주했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도 만들어냈고, 히틀러는 '"히브리인 1만 2천에서 1만 5천을 일찍 목 매달았다면 100만 명의 독일인은 피를 흘리지 않았을 것"이란 선동으로 화답했다.

4. 결과


어찌 보면 배후중상설이 완전 구라만은 아니다. 다만 '''이 말을 떠들어 댄 독일 군부와 극우 선동가 본인들이 통수를 쳤을 뿐이다.''' 무책임하고 팽창주의적 대외정책으로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독재적인 전시 국정으로 모자라 전쟁까지 져 놓은 독일 군부는 사민당과 자유주의 세력에게 전후 협상과 국가 재건을 맡겨놓고는, 전쟁책임 져야 할 것 같으니 배후중상설 운운한 것이다. 자신들이 싼 똥을 치우기 위해 사민당이 등판했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오히려 진짜 등 뒤에 칼을 맞은건 전쟁 일으키고 말아 먹은 군부 세력 때문에 뒷수습에 등판 한 이후 초당파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중도우파에 손을 내밀었음에도 불구하고 극우파들에 휘둘리다 결국 나치로 끝장난 사민당 바이마르 정권이었던 셈이다.
인지부조화도 이만하면 대단하다고 볼 수준.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한 정신승리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해보면 가능성이 있다'''고 여긴 독일 국민들의 믿음으로 발전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수도가 점령당하는 치욕적인 패배를 통해 터무니없는 망상이었음이 증명되었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은 패색이 짙어졌음에도 항복하지 않고 있다가, 히틀러와 나치 고관들은 베를린의 함락을 직접 목도하고서야 자살한다. 결국 항복 시기를 놓쳐서 무수히 많은 연합군과 독일군 및 민간인 명이 사망하고 독일 전토는 완전히 초토화되어 연합군의 지배 하에 놓였다. 배후중상설에 따라 독일을 배신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수용소에 가두고 학살하였지만, 현실은 유대인과 공산주의자가 아닌 연합군의 강력한 국력이 독일을 또 패배시키면서 허황된 음모론이 거짓임이 밝혀지면서 독일인들은 비로소 현실을 깨닫는다.
독일 국민들은 2차 대전에서 자신들의 고향과 국토가 불타 황무지로 돌아가고 가족과 이웃들이 적군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을 눈 앞에서 직접 보고 나서야 자신들이 그동안 정신승리 상태였다는 것을 자각했다. 배후중상설이 가장 심하게 나타난 프로이센은 상당수 영토를 영구적으로 폴란드에 넘겨주는 등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배후중상설의 근원지였던 프로이센-독일 제국 군부는 이로서 완전히 몰락했다.

5. 매체에서


호이4에서는 독일의 국가 정신으로 구현되어 있다.

6. 타국의 유사 사례



6.1. 프랑스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에 6주만에 완패한 프랑스도 '배후 중상'을 믿었다. 즉 독일군의 승리가 군사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의 반란[16] 때문이라 생각했고, 1942년 패전 책임을 묻는 재판정에 선 사람들이 모두 정치인이나 지식인이었다고. 비시 정부를 이끌었던 필리프 페탱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이미 한 세기 이전에 이와 비슷한 인지부조화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까지 터졌다. 자세한 건 '''드레퓌스 사건 참조.'''

6.2. 일본


제2차 세계 대전 뒤의 일본의 상황이 제1차 세계 대전 뒤의 독일과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몰락 작전을 펴기 전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항복하면서 결론적으로 일본 본토에는 연합군이 상륙하지 않았기 때문. 실제 일본 내에서도 1차 대전 이후의 독일과 2차 대전 이후의 일본이 '패전의 실감이 없는 패전'으로 유사하다는 분석이 있다. 거품경제 붕괴 이후 계속되는 장기불황극우화 경향이 1930년대 독일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관련기사[17]
그러나 1차 대전 당시에는 전선이 독일 영토 밖에서 형성되었고, 독일의 열세로 인해 전선이 뚫리기 전에 이미 전쟁이 끝났다. 독일 국경 내로 연합군이 진입하긴 했지만 이는 독일의 사실상 항복 이후의 일이었다. 이 때문에 비록 독일도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인적, 경제적 피해는 입었지만, 정작 독일 본토 자체는 전쟁의 참화를 비켜가는 데에 성공했다. 게다가 당시의 공군은 아직 초창기였기 때문에 후방지역이었던 독일 본토의 폭격 피해도 주목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18]또한 독일 제국은 비록 전쟁에서 열세였지만 어쨌든 독일인 자신들의 혁명으로 멸망했고, 곧이어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가 들어서서 실권을 쥐어 가혹한 패전조약을 맺었으나 일본의 GHQ와 같은 실권을 쥔 외국군의 점령기관이 없었다.
이와 달리 일본은 지상군 상륙만 없었다 뿐이지, 도쿄 대공습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등의 엄청난 공습을 통해 본토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으며, "오늘은 어디어디 도시를 폭격할 것입니다, 민간인들은 대피하세요." 라고 여유로운 폭격 사전예고까지 하면서 그걸 그대로 실행하는 미국의 압도적인 힘에 저항의 의지까지 잃어가며 처절하게 짓눌리고 있었다.[19] 특히 네이팜탄이나 원자폭탄의 무자비한 위력을 직접 겪은 일본인들의 연합군에 대한 공포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연합군에 대한 완패는 일본 내부에서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완전히 인정되어 있었고, 궁성사건과 같이 항복을 거부하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으며, 일본 정부는 연합군 최고 사령부에 별다른 저항없이 실권을 내주었다. 말하자면 워낙 깔끔한 자국 상황에 전쟁의 피해를 실감하지 못해서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진짜 실력으로 진 건 아닌거 같은데?" 라는 잠꼬대가 가능했던 독일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던 것. 게다가 내부의 적에게 책임을 돌리기에는 일본의 패배가 눈앞에 닥쳐왔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2차대전 이후의 일본의 우경화우익사관, 일본의 극우 미디어물 등은 그 자체의 정당성과는 별개로 이 배후중상설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에 대해선 해당 문서들을 참고할 것.
사실 당시 일본 국민에게 있어서 우리가 전쟁을 하고 있다는 '체감'을 하게 만들어준건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본격적인 폭격이 시작 되고 나서야 태평양전쟁과 따로 놀던 분위기의 일본 국내의 여론과 민심이 '우리가 전쟁을 하고 있구나'라고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태평양에서의 해전과 전투는 대본영에 의해 대충 여과된 채 일본 국민들에게 머나먼 지역에서의 전투쯤으로 받아들여졌고 전사자들과 희생자들은 마치 중일전쟁 처럼 타국에서 싸우다 온 병사들 만의 무훈 정도로 포장되고 받아 들여졌으나 폭격이 시작되고 나서 일본 국민들은 우리가 곧 전쟁의 당사자가 되었음을 그제서야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해 폭격이 시작되기 전에는 전쟁을 체감하지 못했다는 소리였고 때문에 사실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만약 그러한 깨달음을 주게 된 계기인 대대적인 폭격이 없거나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일본 군부가 패배를 직감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면[20] 1차 대전 이후와 동일한 분위기가 환기 될 가능성도 있다 생각하기도 한다. 실제로 일본 본토 폭격의 영향이 없던 일부 지역은 항복을 인정할 수 없다며 소요사태를 일으키기도 했다. 마츠에 소요 사건 참조. 요는 결국 독일이나 일본을 불문하고 실제 전장의 참혹함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이나 전선과 괴리된 이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을 하기 마련이며, 그런 심리는 배후중상설의 배경이 되는 심리와 맞닿아 있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21세기 일본의 우경화는 지리적 요소와 역사성에 기반하는 것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독일은 다른 국가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대륙국이기에 생존을 위해 주변국과의 관계를 개선해야할 필요가 있었지만, 일본은 국경선을 맞댄 나라가 없는 섬나라인데다 든든한 후원자인 미국까지 있었고, 전후 유럽과 달리 아시아 사회는 대체로 발전을 못하고 혼란의 시기를 겪었던 탓에 독일과는 달리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으며 식민지와 관련된 잔혹행위와 약탈 등의 문제는 독일과 미국을 포함한 열강 전부가 가지는 문제라서 유대인 문제로 독일을 압박한 것처럼 압박하는 것도 곤란했다는 것이 해당 의견의 주장이다. 게다가 전범들과 그에 편승한 세력들이 숙청되지 못하고 일본 정치,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았던것도 큰 차이이다.
또한 일본 정치는 메이지 유신 이래 위계질서가 자연스럽게 뿌리깊이 박혔고, 이것이 정부와 리더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주의로 자리잡혔고, 이게 우생학전체주의[21]가 곁들어져 폭주한게 바로 2차대전 당시의 일본이이다.[22] 그리하여 과거 역사에 대해 알려고 하는 사람도 적고 극우들에 대한 견제도 적다.

[1] 사회과학에서는 지각(perception, 知覺) 과정에서의 '귀인의 오류'로 자존적 편견(self-serving bias)이라고 한다.[2] 빨리 자라고 가격도 싼 순무로 빵을 포함한 대용식을 만들어 먹거나 그냥 먹거나 했고 더 나아가서 순무로 알코올을 발효시켜 연료로 쓰거나 하는 등 순무를 무궁무진하게 썼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1차 대전기 겨울을 순무의 겨울이라고 부른다.[3] 태반이 제대군인이었고, 이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내내 벌어진 우익 준동의 주역일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주요 지지세력이 된다.[4] 1919년 1월 선거는 남녀 보통선거였다. 제2제국에서 선거권의 제한으로 노동계층의 정치참여가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전혀 근거가 없다. 영국은 이 당시 남녀 차별 선거권(남성 21세, 여성은 30세 이상), 프랑스는 1945년에야 여성투표권을 인정할 만큼 당시 독일의 선거는 선진적이었다.[5] 포젠, 서프로이센, 상부 슐레지엔, 단치히. 그러나 폴란드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참고.[6] 상부 슐레지엔의 일부 지역이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넘어갔다.[7]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북부가 덴마크로 돌아갔다.[8]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 에베르트가 1918년 군수공장 파업에 연루된 의혹을, 반전세력인 공산당은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졌다.[9] 당시 독일 공산당은 찬전/반전 갈등으로 사회민주당(SPD)에서 갈라져 나왔고 소련 코민테른의 지시와 무관한 독자노선이었다.[10] 본토 한정. 세계 각지의 식민지를 다 끌어모으면 대충 미국과 비슷한 수치가 나오긴 한다.[11] 이미 미국은 1890년대에 세계 최대의 공업국가이자 전 유럽의 경제력을 합친 것과 대등한 수준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이 당시에는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으로 인해 미국의 본격적인 국력이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긴 했다. 전 세계는 이때까지는 미국을 영국과 프랑스 같은 열강들 중 하나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12] 이 때를 계기로 미국의 경제력은 정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전쟁 이전부터 이미 미국은 전 유럽과 대등한 수준의 경제력을 보유하고는 있었지만, 세계대전으로 인해 무기수출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미국은 넘사벽급의 공업능력과 경제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13] 다만 인도는 간디가 영국의 자치권 확대를 조건으로 병력지원에 동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영국이 얻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14] 독일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 제국이 형성되고 나서도 한동안 식민지 확보에 나서지 않고 있다가 빌헬름 2세 들어 본격적으로 식민지 확보에 나섰기 때문에, 이미 알짜배기 식민지를 영, 프에게 죄다 뺏긴 채 생산성이 떨어지는 식민지 몇개 정도만 건졌을 뿐이었다. 알짜배기를 가진 영국, 프랑스조차 식민지가 도움이 되지 못했는데 독일은 한마디로 식민지가 없는 게 도와주는 수준이었다.[15] 일찍이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확보의 모순을 깨닫고는 빌헬름 2세에게 식민지 확보보다는 본토 내부의 산업과 경제력 육성에 주목하라고 주장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선발주자들과 같이 광대한 식민지를 확보하고 싶었던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를 해임하고는 3B 정책을 시작으로 식민지 사냥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가치가 있는 땅들은 전부 선발 열강들이 차지한 상황에서 독일은 쭉정이 정도밖에 얻을 수 없었으며, 오히려 전간기에 영, 프가 식민지 관리하느라 본토 역량을 키우지 못하는 동안 독일이 다시 한 번 발달된 공업을 바탕으로 전쟁수행능력을 확보하게 되면서 비스마르크의 말이 사실이었음이 증명되었다.[16] 일부 정신나간 공산주의자들이 스탈린 동무와 동맹 맺은 히틀러 군대를 위해서 후방에서 이적 행위를 펴긴 했다.[17] 오히려 이러한 문제는 패전을 통해 나라가 박살났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10년만에 세계적인 강국으로 빠르게 성장했던 일본의 현대사로 인해 생긴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패전을 통해 오랫동안 전국이 피폐해졌으면 전쟁에 대한 극도의 혐오정서가 생겼을텐데 10년만에 다시 한 번 세계적인 강국으로 성장하다보니 이런 정서가 생기지 못했다는 것이다.[18] 이 당시 독일에 대한 폭격은 거의 전부 철도나 군수공장 등 군사 목표물에 대해서만 행해졌고 일반 시민들이 거주하는 도시에 폭탄이 떨어진건 런던 정도였다.[19] 당시 미국은 일본 열도 전체를 마치 하나의 실험장으로 삼은 것 마냥 마음대로 폭격하고 있었다.[20] 실제 일본의 패전 자체는 전제한 일본의 가공전기 중에선 본토에 영향이 없는 상태에서 패전 협상으로 종결시키는 전개를 쓰기도 한다.[21] 이른바 "이치닌 마에"라 불리는 그것. 이것이 정부와 정부 정책을 비난하는 일을 '반사회적'이고 '반국가적'이라는 논리로 억제시키고 국민들 자신부터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구성원의 임무'를 해야한다는 주의로 이어졌다. 그래서 유럽 왕실과는 다르게 황실에 대한 언급 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일본 사회이다.[22]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를 억압의 이양이란 말로 설명한바가 있다.